2004년 6월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23:1-19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묘사되어질 수 있다고 함에 열려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 묘사적인 표현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정보화 시대'라는 것입니다. 정보가 수집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곤욕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언급한다면 그러한 정보라고 함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그 정보가 사실인지 여부와 그것을 취하여서 합목적적인 용도로써 사용함에 타당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의 부실화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도모하여야 할 필요한 많은 것을 잃게 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사실로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냐는 것도 또한 고려해야 할 문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나 그것을 사용하거나 말하는 자도 허망한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허망한 풍설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비롯하여서 허망한 풍설이라고 함을 만들 수 있는 그러한 여건들이라고 함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파종을 비롯하여서 땅을 쉬게 하는 것과 같은 칠일과 칠년과 같은 언급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일을 삼가고 지킬 것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교절을 의미하는 것과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심과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심과 같이 세 절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일년에 세차례 여호와 앞에 보일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말씀에서는 긍휼에 대한 것임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이 덧붙여지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허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의 문맥적인 것을 먼저 살펴보면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백성들에게 세우는 율례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에 대한 것이 그들의 현실적인 실제적 삶에 적용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하여서 그 구체적인 언급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과 우리 인생이 범죄하여서 땅을 갈아야 하는 것과 그 고통이라고 함이 종노릇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을 말씀하시는 그러한 율례들을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는 그 소유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도 말씀하심을 읽게 하는 그러한 율례를 주셔서 마음에 새기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허망한 것이라고 함을 전하지 않도록 하심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허망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객관적이라고 하는 사실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정하고 그러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되어지는 것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라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서 합목적적으로 사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죄인이 흙으로 만든 인생의 등을 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유익적 관점일 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써의 사실로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하게 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허망한 풍설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과 또한 다수를 따라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것과 부정당한 증거를 말아야 할 것과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함을 통해 공의를 굽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 된 자들에게 긍휼함이라고 함을 베풂에 있어서는 우리가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마음에 둘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이름으로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이 없기 때문이며 다른 신들을 말한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대한 신뢰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십계명의 첫 계명과 셋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모든 것을 어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절기에서 보게 되어지는 무교절이라고 하는 개념도 인위적인 누룩과 같은 것으로 빵을 만들게 되어지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함을 고백하며 증거하도록 하셨던 것이며 맥추절과 같은 것은 처음 보리를 수확함에 대한 것과 같이 은혜로 하나님의 첫 열매 안에서의 정체성을 가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세번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세번이라는 완전을 의미하는 실제의 사실적 구주께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적 증거로서 세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제 예언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시고 난 다음에 이러한 예표적 행함이라고함을 말하여서 일년에 세번 교회 출석의 입장을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더욱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들이라고 함을 말한다면 사실이라는 것의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임의적인 개념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써의 인륜적 있을 수 없는 것을 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함을 따른 사실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 그는 그의 삶에서 임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풍설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참된 증거자로서 하나님 여호와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자리에 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거짓이라고 함 허망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보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객관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나게 되어지며 이것은 신적인 것 알지 못하는 신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따라서 그 사실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공평을 말하므로 사실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사람들로서의 합당한 증인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귀한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서 참되게 그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하심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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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28, 2004
채전(菜田)에 심은 겨자씨
2004년6월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3:10-21
채전(菜田)에 심은 겨자씨
여러 가지 상대적인 생각에서 어떤 한 생각에 집착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삶에서 있게 되어집니다. 그것이 집착이라는 개념의 비난적 의미로 성립되어지는가 하면 합당하게 바른 견해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지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적 입장에서 집착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는 분별없는 권위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에서 있게 되어질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든다고 하면, 지금도 그렇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지만 지난날 더 어려울 때에 앞선 세대의 부모님들은 좀더 좋은 것을 주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녀들과 식사를 하면서 자녀에게 자신은 생선의 머리와 뼈가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드시면 자녀들도 그 마음을 알아서 나중에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 좋아하신다고 생선머리와 뼈만을 가지고 부모님을 찾아 뵙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평소에 부모님이 늘 말씀하신 권위라고 함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적 판단을 해야 함이 옳거늘 그렇지 않고 임의적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그들의 외식이라고 함은 앞서 말한 웃지 못할 것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들을 귀없는 자들의 외식이라고 함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주의 뜻하심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열 여덟 해나 된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심과 안수하시매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고침을 분내어 엿새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예수께서 책망하심의 말씀하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1절에서는 주님의 천국,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하심이 두 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채전(菜田)에 갖다 심은 겨자씨 비유와 또 다른 하나는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라고 함의 개념을 행함의 여부로만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의 행하심과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러한 거짓된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리에 서게 됨에 대한 것을 책망하시고 하나님나라 천국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한다는 말은 쉰다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임의적으로 상식적으로 그들이 행할 필요성에 따른 것은 열어놓으면서도 그들의 판단에서만 국한되어진 가운데서 판단함에는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이라고 함에서 보아도 열 여덟 해나 병든 자가 며칠 더 기다린다는 것이 뭐가 대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그 몇 시간도 참기가 더 어려운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계시적 성격을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비유 채전에 심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에서, 먼저 채전에 심은 한 알의 겨자씨라고 함을 주목하면 그 '채전' (케포스(kh'po"))은 나물 밭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것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덕을 지칭할 때 쓰인 동일한 헬라 원어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이 진정한 한 알이라는 유일한 복음과 사실을 말하는 것임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에서 우리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거룩하게 규정하고 분별하여 실제적으로 받음에는 하나님의 재가적 사실로써의 인준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개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루 서말에 넣은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의 가르침이 진정한 득세함과 주의 구원하심을 인하여 생명의 떡으로써 증거되어질 것임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겨자씨와 같이 독특한 한 개체적 형식을 띰으로 한정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보편을 말하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이라고 함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에서 비로소 그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단지 행함의 여부로써 안식을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와 같이 한 여인 아브라함의 여인을 고치심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음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인데 전에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지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을 찾게 되어지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받은 자들로서의 합당한 존재와 행함의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가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심겨진 하나님나라 그 가르침을 받아서 그 여인의 행함과 같이 주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성도들로써 하나님나라를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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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3:10-21
채전(菜田)에 심은 겨자씨
여러 가지 상대적인 생각에서 어떤 한 생각에 집착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삶에서 있게 되어집니다. 그것이 집착이라는 개념의 비난적 의미로 성립되어지는가 하면 합당하게 바른 견해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지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적 입장에서 집착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는 분별없는 권위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에서 있게 되어질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든다고 하면, 지금도 그렇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지만 지난날 더 어려울 때에 앞선 세대의 부모님들은 좀더 좋은 것을 주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녀들과 식사를 하면서 자녀에게 자신은 생선의 머리와 뼈가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드시면 자녀들도 그 마음을 알아서 나중에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 좋아하신다고 생선머리와 뼈만을 가지고 부모님을 찾아 뵙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평소에 부모님이 늘 말씀하신 권위라고 함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적 판단을 해야 함이 옳거늘 그렇지 않고 임의적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그들의 외식이라고 함은 앞서 말한 웃지 못할 것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들을 귀없는 자들의 외식이라고 함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주의 뜻하심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열 여덟 해나 된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심과 안수하시매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고침을 분내어 엿새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예수께서 책망하심의 말씀하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1절에서는 주님의 천국,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하심이 두 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채전(菜田)에 갖다 심은 겨자씨 비유와 또 다른 하나는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라고 함의 개념을 행함의 여부로만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의 행하심과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러한 거짓된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리에 서게 됨에 대한 것을 책망하시고 하나님나라 천국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한다는 말은 쉰다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임의적으로 상식적으로 그들이 행할 필요성에 따른 것은 열어놓으면서도 그들의 판단에서만 국한되어진 가운데서 판단함에는 하나님의 재가적 정당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이라고 함에서 보아도 열 여덟 해나 병든 자가 며칠 더 기다린다는 것이 뭐가 대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그 몇 시간도 참기가 더 어려운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계시적 성격을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비유 채전에 심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에서, 먼저 채전에 심은 한 알의 겨자씨라고 함을 주목하면 그 '채전' (케포스(kh'po"))은 나물 밭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것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덕을 지칭할 때 쓰인 동일한 헬라 원어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이 진정한 한 알이라는 유일한 복음과 사실을 말하는 것임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에서 우리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거룩하게 규정하고 분별하여 실제적으로 받음에는 하나님의 재가적 사실로써의 인준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개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루 서말에 넣은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의 가르침이 진정한 득세함과 주의 구원하심을 인하여 생명의 떡으로써 증거되어질 것임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겨자씨와 같이 독특한 한 개체적 형식을 띰으로 한정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보편을 말하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이라고 함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에서 비로소 그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단지 행함의 여부로써 안식을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와 같이 한 여인 아브라함의 여인을 고치심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음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인데 전에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지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을 찾게 되어지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받은 자들로서의 합당한 존재와 행함의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가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심겨진 하나님나라 그 가르침을 받아서 그 여인의 행함과 같이 주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성도들로써 하나님나라를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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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루터기
2004년6월25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6:1-13
이 땅의 그루터기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에 '마블링'이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에 대리암 무늬를 만드는 기법인데, 물 위에 유성 물감을 떨어뜨려 저은 다음 종이를 물 위에 덮어 물감이 묻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에 어떤 사고로 인해서 기름이 유출되어지면 여러 가지 피해를 보게 되어지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기름종이를 사용하여 제거작업에 나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의 현상적 입장에서만 본다면 마블링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위해 미적인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시각에 따라서는 상당히 귀찮고 괴로운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가치관의 혼선까지 줄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주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당하게 그 시각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가치관의 혼선을 넘어서 바르게 판단하며 우리 존재의 바른 모습을 말할 수 있고 경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이 가치관의 거룩함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거룩한 씨로써의 성도들의 모습을 주목하도록 하심을 보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본즉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을 주목하며 하나님의 그 영광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사야는 그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것을 놓고 자신의 화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때에 천사 즉 그 스랍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입에 대며 죄가 사하여졌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자신을 보내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가서 전할 것을 말씀하시고 어느 때까지 인가를 물음에 있어서도 답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사야의 자원하게 되어짐과 그 정한 때와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그 때에 거룩한 씨로서 이 땅에 있게 되어지는 그루터기라고 하심의 뜻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사야 5장까지의 서론적 증거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웃시야 왕의 죽던 때라고 함을 말함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웃시야 왕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능력'이라는 뜻과 '나의 힘은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의지함이 없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무기의 내탕고를 다 보여주며 마치 그것을 의지한 것을 자랑하는 죄악으로써 앞으로 있게 되어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라고 함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의 소명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사야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시며 구원이시라고 함을 증거함에 대한 소명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의 무능함이라고 하는 것은 죄된 자로서의 모습이 되어지며 그 죄악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같은 죄인으로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가 거룩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있으며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로서의 모습을 보게 하심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역시 은혜로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한 스랍 곧 천사가 화저로 이사야의 입에 대며 거룩하게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적 재가에서 거룩하심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존재와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종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존재적으로 증거하여야 할 소명을 마음에 가지게 되어지며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즉 임의적 개념에서 나오는 자원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의 재가적 차원의 사람이 되어지는 자로서 그 형상과 그 능력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소명적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를 베풀며 그 증거를 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사하심을 입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적 능력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하심을 따라서 행하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액면적으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금기적 개념보다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고 그 뜻하심을 따라서 자원하는 중심으로 일하도록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마지막 때는 1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패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고 하심을 볼 때까지입니다.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구원의 확신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존재의 정당함과 사역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들이 많고, 우격다짐으로 행하는 자들로서, 바벨론 즉 혼돈 상대적 혼돈이라고 하는 가치관 속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과 그 증거를 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격다짐으로 주의 복음을 배척하는 때에 그곳을 떠나라고 하심은 주의 뜻하심이 그 증거적 시간의 때가 다 되었음을 말씀하심으로 이사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의식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것과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실리적인 개념에서 배척되어지는 그루터기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실리적 판단을 받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상대적인 보편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보편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의지하기를 부끄러워하는 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들이 남아 있어 상대적이면서도 거룩함을 드러낼 자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다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을 맹신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상대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까지도 상대적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여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앞선 것의 보편적인 것을 판단하며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은 또한 상대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루터기처럼 실리적 판단이라고 함에서 주장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현실적인 판단의 실제를 넘어서 진정한 보편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거룩하게 하시며 그 뜻하심을 받들게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 성도들은 주의 뜻하심과 자라게 하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주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고자 하는 합당한 이 땅에 그루터기와 같은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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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1-13
이 땅의 그루터기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에 '마블링'이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에 대리암 무늬를 만드는 기법인데, 물 위에 유성 물감을 떨어뜨려 저은 다음 종이를 물 위에 덮어 물감이 묻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에 어떤 사고로 인해서 기름이 유출되어지면 여러 가지 피해를 보게 되어지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기름종이를 사용하여 제거작업에 나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의 현상적 입장에서만 본다면 마블링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위해 미적인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시각에 따라서는 상당히 귀찮고 괴로운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가치관의 혼선까지 줄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주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당하게 그 시각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가치관의 혼선을 넘어서 바르게 판단하며 우리 존재의 바른 모습을 말할 수 있고 경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이 가치관의 거룩함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거룩한 씨로써의 성도들의 모습을 주목하도록 하심을 보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본즉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을 주목하며 하나님의 그 영광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사야는 그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것을 놓고 자신의 화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때에 천사 즉 그 스랍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입에 대며 죄가 사하여졌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자신을 보내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가서 전할 것을 말씀하시고 어느 때까지 인가를 물음에 있어서도 답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사야의 자원하게 되어짐과 그 정한 때와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그 때에 거룩한 씨로서 이 땅에 있게 되어지는 그루터기라고 하심의 뜻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사야 5장까지의 서론적 증거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웃시야 왕의 죽던 때라고 함을 말함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웃시야 왕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능력'이라는 뜻과 '나의 힘은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의지함이 없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무기의 내탕고를 다 보여주며 마치 그것을 의지한 것을 자랑하는 죄악으로써 앞으로 있게 되어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라고 함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사야의 소명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사야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시며 구원이시라고 함을 증거함에 대한 소명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의 무능함이라고 하는 것은 죄된 자로서의 모습이 되어지며 그 죄악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같은 죄인으로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가 거룩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부정한 사람들 중에 있으며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로서의 모습을 보게 하심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역시 은혜로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한 스랍 곧 천사가 화저로 이사야의 입에 대며 거룩하게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적 재가에서 거룩하심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존재와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종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존재적으로 증거하여야 할 소명을 마음에 가지게 되어지며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즉 임의적 개념에서 나오는 자원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의 재가적 차원의 사람이 되어지는 자로서 그 형상과 그 능력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소명적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를 베풀며 그 증거를 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사하심을 입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적 능력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하심을 따라서 행하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액면적으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금기적 개념보다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고 그 뜻하심을 따라서 자원하는 중심으로 일하도록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마지막 때는 1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패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고 하심을 볼 때까지입니다.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구원의 확신과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존재의 정당함과 사역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들이 많고, 우격다짐으로 행하는 자들로서, 바벨론 즉 혼돈 상대적 혼돈이라고 하는 가치관 속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주의 구원하심의 사실과 그 증거를 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격다짐으로 주의 복음을 배척하는 때에 그곳을 떠나라고 하심은 주의 뜻하심이 그 증거적 시간의 때가 다 되었음을 말씀하심으로 이사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의식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것과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실리적인 개념에서 배척되어지는 그루터기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실리적 판단을 받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상대적인 보편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보편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의지하기를 부끄러워하는 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들이 남아 있어 상대적이면서도 거룩함을 드러낼 자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다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을 맹신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상대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러한 판단까지도 상대적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여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앞선 것의 보편적인 것을 판단하며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은 또한 상대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루터기처럼 실리적 판단이라고 함에서 주장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현실적인 판단의 실제를 넘어서 진정한 보편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거룩하게 하시며 그 뜻하심을 받들게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 성도들은 주의 뜻하심과 자라게 하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주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고자 하는 합당한 이 땅에 그루터기와 같은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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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6월 24, 2004
거짓 경건을 지나서
2004년6월2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14:1-18
거짓 경건을 지나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인생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개연적인 가능성에 의미를 걸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선전문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선전이라는 말은 '주의나 주장, 사물의 존재, 효능 따위를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하도록 잘 설명하여 널리 알리는 일.'로써 납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납득적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널리 알린다는 개념은 선동으로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여기(勵起)되어진 상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어떤 일을 위한 고무적인 상태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어떤 일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나 실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여기되어진 상태와 그 상관성을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이 신앙적 열정이라고 함이 있어 행함이 있지만 분별적 실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선동적 개념만 있으므로 결국 거짓 경건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는 거짓된 경건의 자리에 이르는 위험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의하도록 하시며 말씀하시는 경건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고니온이라는 즉 작은 형상이라는 이름의 가진 지역에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함에 많은 이들이 믿음과 그를 시기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함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에 따라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행함으로 인해 두 사도가 도망을 치게 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았는데 사도 바울이 믿음이 있음을 주목하고 고쳐주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그곳에서 바나바를 '쓰스' 바울을 '허메'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받아야 할 그 영광과 칭송을 그 거짓된 신들에게 돌리고 그 제사적 행위를 하려고 함에 있어서 사도들은 그것을 말려 말하여 그와 같은 것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열정이라고 함이 사실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바르게 증거하도록 권면하며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의 객관적 납득할 수 있는 근거적인 입장이 됨을 말하는데 사람들의 합리적 개념의 납득만을 가지고 신적인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그 열정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거짓된 경건의 기본적인 실체가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좀더 주목해보면 유대인들이 선동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두 사도 바나바와 사울이 증거한 내용을 이성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우격다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만 가지고 하나님의 가르침의 권위라고 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이 선동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도들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구체성 있는 거짓된 경건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라는 개념만 말하고 그러한 것이 지향하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선동일 뿐이요 신앙윤리로써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거짓된 경건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두 번째는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공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으로써 우상숭배적 정당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거짓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철학자들은 창조주 조물주를 여러 신들 중에 하위에 한 신에 불과한 것과 같이 말하고 있으며 그를 믿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은 자기 정당함을 그러한 것, 상대적인 판단에서 입증되어지는 당위성에 메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 그를 믿는 자들, 그 피조물들도 그의 형상을 따라서 자존심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의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존심 그것이 진정한 자존심의 실체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이방의 많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자기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객관이라는 실체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따라서 그것을 의식해서 대용적 개념이나 그것에 눈을 감고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勵起)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도 참된 경건을 말할 수 없는 거짓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해두겠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경건을 지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증거적 사실을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안에서 존재와 존재의식을 찾으며 기동하시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의 영접함을 받은 자로서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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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4:1-18
거짓 경건을 지나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인생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개연적인 가능성에 의미를 걸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선전문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선전이라는 말은 '주의나 주장, 사물의 존재, 효능 따위를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하도록 잘 설명하여 널리 알리는 일.'로써 납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납득적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널리 알린다는 개념은 선동으로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여기(勵起)되어진 상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어떤 일을 위한 고무적인 상태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어떤 일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나 실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여기되어진 상태와 그 상관성을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이 신앙적 열정이라고 함이 있어 행함이 있지만 분별적 실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선동적 개념만 있으므로 결국 거짓 경건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는 거짓된 경건의 자리에 이르는 위험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의하도록 하시며 말씀하시는 경건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고니온이라는 즉 작은 형상이라는 이름의 가진 지역에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함에 많은 이들이 믿음과 그를 시기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함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에 따라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행함으로 인해 두 사도가 도망을 치게 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았는데 사도 바울이 믿음이 있음을 주목하고 고쳐주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그곳에서 바나바를 '쓰스' 바울을 '허메'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받아야 할 그 영광과 칭송을 그 거짓된 신들에게 돌리고 그 제사적 행위를 하려고 함에 있어서 사도들은 그것을 말려 말하여 그와 같은 것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열정이라고 함이 사실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바르게 증거하도록 권면하며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의 객관적 납득할 수 있는 근거적인 입장이 됨을 말하는데 사람들의 합리적 개념의 납득만을 가지고 신적인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그 열정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거짓된 경건의 기본적인 실체가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좀더 주목해보면 유대인들이 선동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두 사도 바나바와 사울이 증거한 내용을 이성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우격다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만 가지고 하나님의 가르침의 권위라고 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이 선동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도들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구체성 있는 거짓된 경건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라는 개념만 말하고 그러한 것이 지향하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선동일 뿐이요 신앙윤리로써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거짓된 경건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두 번째는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공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으로써 우상숭배적 정당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거짓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철학자들은 창조주 조물주를 여러 신들 중에 하위에 한 신에 불과한 것과 같이 말하고 있으며 그를 믿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은 자기 정당함을 그러한 것, 상대적인 판단에서 입증되어지는 당위성에 메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 그를 믿는 자들, 그 피조물들도 그의 형상을 따라서 자존심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의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존심 그것이 진정한 자존심의 실체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이방의 많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자기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객관이라는 실체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따라서 그것을 의식해서 대용적 개념이나 그것에 눈을 감고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勵起)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도 참된 경건을 말할 수 없는 거짓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해두겠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경건을 지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증거적 사실을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안에서 존재와 존재의식을 찾으며 기동하시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의 영접함을 받은 자로서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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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21, 2004
소유와 자기이해
2004년6월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22:1-31
소유와 자기이해
인생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것을 말함에 있어서도 어떤 작은 것으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그러한 중심의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이 그러한 경우의 것이며 하나와 여럿이라고 하는 문제는 오래된 철학자들의 풀려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풀려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실제적인 기준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고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는 가운데 오판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기준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라는 것은 전체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이라고 함을 판단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백성 앞에 세우신 것으로써 소유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율법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 팔 계명을 중심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즉 도적되어진 소유와 관계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했을 경우 배상할 것에 대하여서, 과실치사로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포도원에 해를 입히게 되어지는 경우, 물품의 맡겨짐에 있어서 없어지는 경우에 있어서의 손해배상의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유에 따른 발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에서의 그 유의해야 할 점들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물질적 개념이해라고 하는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칠 계명에 대한 언급에서의 율법적 개념과 무당을 살려두지 말 것과 다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지 말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볼 것 그리고 그들의 소유를 전당 잡게 되거든 채주와 같이 하지 말고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사된 자들을 욕하지 말라고 함과 처음 난 아들들과 그리고 소와 양들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것과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이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이해하시게 하심을 주목합니다.
특히 그 물질의 손해배상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공정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그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적 개념의 반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히 증인들의 경우에서 그 사실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도록 하고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칠 계명을 어긴 가운데서도 그 악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 아내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을 안다는 개념 '야다'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게 되어지는 것과 유비적인 것이므로 그 쾌락적 정의로서의 그냥 지나가는 것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을 죽일 것에 대한 것은 무당이라고 하는 자들의 거짓된 신비라는 개념은 본능적 악함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영역에서의 판단으로 음란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 거짓된 욕망이라고 함을 거짓된 신적 권위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된 신을 말하는 자로서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로서 묘사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적 개념의 교제라고 함까지도 부인하는 자들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사악한 것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적 질서를 따른 대인관계를 해석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것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를 편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하면서도 그들을 돌아보는 것을 나타내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냄을 도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전혀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심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채주와 같이 이익이라고 함이 모든 것이 기준이라고 함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까지 가능한 악한 자리에 서는 것으로써의 변리추구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질서라고 하는 개념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를 것과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처음 것들을 드리는 유월절적인 출애굽의 개념에서 우리가 그 정체성과 소유와 대인관계의 것을 판단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28절 이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유월적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정체성과 그것을 위한 소유에 대한 이해와 대인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공의와 긍휼이라고 함을 삶에 나타내는 가운데서 윤리와 소유와 우리의 정체성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자들로서의 소유와 대인관계의 윤리적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작은 삶의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공의를 나타내는 증인들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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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2:1-31
소유와 자기이해
인생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것을 말함에 있어서도 어떤 작은 것으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그러한 중심의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이 그러한 경우의 것이며 하나와 여럿이라고 하는 문제는 오래된 철학자들의 풀려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풀려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실제적인 기준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고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는 가운데 오판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기준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라는 것은 전체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이라고 함을 판단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백성 앞에 세우신 것으로써 소유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율법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 팔 계명을 중심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즉 도적되어진 소유와 관계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했을 경우 배상할 것에 대하여서, 과실치사로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포도원에 해를 입히게 되어지는 경우, 물품의 맡겨짐에 있어서 없어지는 경우에 있어서의 손해배상의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유에 따른 발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에서의 그 유의해야 할 점들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어지는 물질적 개념이해라고 하는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칠 계명에 대한 언급에서의 율법적 개념과 무당을 살려두지 말 것과 다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지 말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볼 것 그리고 그들의 소유를 전당 잡게 되거든 채주와 같이 하지 말고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사된 자들을 욕하지 말라고 함과 처음 난 아들들과 그리고 소와 양들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것과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이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이해하시게 하심을 주목합니다.
특히 그 물질의 손해배상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공정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그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적 개념의 반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히 증인들의 경우에서 그 사실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도록 하고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칠 계명을 어긴 가운데서도 그 악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 아내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을 안다는 개념 '야다'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게 되어지는 것과 유비적인 것이므로 그 쾌락적 정의로서의 그냥 지나가는 것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을 죽일 것에 대한 것은 무당이라고 하는 자들의 거짓된 신비라는 개념은 본능적 악함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영역에서의 판단으로 음란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 거짓된 욕망이라고 함을 거짓된 신적 권위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짓된 신을 말하는 자로서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로서 묘사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적 개념의 교제라고 함까지도 부인하는 자들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사악한 것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적 질서를 따른 대인관계를 해석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것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를 편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하면서도 그들을 돌아보는 것을 나타내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냄을 도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전혀 변리를 받지 말라고 하심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채주와 같이 이익이라고 함이 모든 것이 기준이라고 함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까지 가능한 악한 자리에 서는 것으로써의 변리추구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질서라고 하는 개념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를 것과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처음 것들을 드리는 유월절적인 출애굽의 개념에서 우리가 그 정체성과 소유와 대인관계의 것을 판단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28절 이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유월적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정체성과 그것을 위한 소유에 대한 이해와 대인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공의와 긍휼이라고 함을 삶에 나타내는 가운데서 윤리와 소유와 우리의 정체성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자들로서의 소유와 대인관계의 윤리적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작은 삶의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공의를 나타내는 증인들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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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2004년6월2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3:1-9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일반적으로 '모든'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정도면에서 한정되어지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기준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면 역시 모든 이라는 말도 임의적일 뿐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범위에서 어떤 한정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도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하는데,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그 정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질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식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마침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답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한 해를 받음에 빌라도가 더 죄가 있는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더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과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써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그 열매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음과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버림에 대한 것을 말함과 그 과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구하고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리지 않으면 찍어버리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죄의 정도라는 것의 인식의 문제와 그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문맥적인 차원에서는 시대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과 또한 더 나아가서 옳은 것을 어찌 스스로 판단치 않는가 라는 책망하심에 이어서 죄의 문제가 먼저 이어지고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2장 58장과 59장에서의 말씀에서는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를 말씀하시면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결단코 나오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 상대적인 충족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면 율법적 판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두어 사람이 그 때 마침 와서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으로 정도면에서 납득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판단하며 자신들의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함이 상대적으로도 그렇게 판단의 사실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상대적 죄에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죄가 많아서 종교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간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주의 전파하시는 것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시는 메시아의 증거라고 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죄도 죄 나름이지 회개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과 메시아의 증거적 권위라고 함도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즉 정도면에서도 간과할 수 있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진 자도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시대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악함의 시대 그리고 어둠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의 존재는 부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이사야서 5장의 말씀하심 즉 포도원의 노래에 관한 말씀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하심으로 받게 됩니다. 즉 정도의 기준을 임의적인 스스로의 판단에서 말하고 있고 특히 '죄라고 하는 것을 절대의 재가와 상관없는 임의적 스스로 판단하고 있음에 있어서 그 화가 있음'(사 5:21)에 대한 것을 의식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의 손으로 행하심에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임의적인 기준에서 한정시키고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그 불확실성의 세대 그 실제를 모르는 세대의 어두움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로부터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불순종이 바로 죄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죄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나타내시게 하시는 은혜를 입은 정도의 차이로 상대적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도 같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써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라고 함을 정당함을 세울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죄악인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에서 피조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지 않는 자는 그 상대적 선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상대적 선함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상실하는 가운데서 죄인이라고 함의 실재와 실제적 판단은 정당한 것이라고 함을 합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구별이 전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회개할 죄인이며 또한 각자가 범하게 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들도 죄악의 개체적인 실제가 되어진다는 사실은 전혀 합당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실들도 역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사실로써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함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써 인해서 그 회개하라는 말에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비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윤리적 잘못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전혀 실제적인 것을 말하면서 오히려 정죄하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것은 그 규범적 정도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자존하시는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 두지 못하고 상대적인 자기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악함이며 그것이 눈을 멀개하며 귀를 막으며 강팍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우리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음으로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은 자기 기만으로써의 심판의 실제의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구주이심을 증거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증거자들이 됨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포도원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받드는 가운데서 주의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들로써 주의 칭찬의 자리에 서게 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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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3:1-9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일반적으로 '모든'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정도면에서 한정되어지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기준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면 역시 모든 이라는 말도 임의적일 뿐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범위에서 어떤 한정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도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하는데,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그 정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질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식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마침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답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한 해를 받음에 빌라도가 더 죄가 있는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더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과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써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그 열매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음과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버림에 대한 것을 말함과 그 과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구하고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리지 않으면 찍어버리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죄의 정도라는 것의 인식의 문제와 그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문맥적인 차원에서는 시대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과 또한 더 나아가서 옳은 것을 어찌 스스로 판단치 않는가 라는 책망하심에 이어서 죄의 문제가 먼저 이어지고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2장 58장과 59장에서의 말씀에서는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를 말씀하시면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결단코 나오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 상대적인 충족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면 율법적 판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두어 사람이 그 때 마침 와서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으로 정도면에서 납득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판단하며 자신들의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함이 상대적으로도 그렇게 판단의 사실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상대적 죄에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죄가 많아서 종교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간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주의 전파하시는 것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시는 메시아의 증거라고 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죄도 죄 나름이지 회개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과 메시아의 증거적 권위라고 함도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즉 정도면에서도 간과할 수 있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진 자도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시대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악함의 시대 그리고 어둠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의 존재는 부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이사야서 5장의 말씀하심 즉 포도원의 노래에 관한 말씀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하심으로 받게 됩니다. 즉 정도의 기준을 임의적인 스스로의 판단에서 말하고 있고 특히 '죄라고 하는 것을 절대의 재가와 상관없는 임의적 스스로 판단하고 있음에 있어서 그 화가 있음'(사 5:21)에 대한 것을 의식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의 손으로 행하심에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임의적인 기준에서 한정시키고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그 불확실성의 세대 그 실제를 모르는 세대의 어두움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로부터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불순종이 바로 죄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죄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나타내시게 하시는 은혜를 입은 정도의 차이로 상대적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도 같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써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라고 함을 정당함을 세울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죄악인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에서 피조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지 않는 자는 그 상대적 선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상대적 선함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상실하는 가운데서 죄인이라고 함의 실재와 실제적 판단은 정당한 것이라고 함을 합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구별이 전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회개할 죄인이며 또한 각자가 범하게 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들도 죄악의 개체적인 실제가 되어진다는 사실은 전혀 합당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실들도 역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사실로써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함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써 인해서 그 회개하라는 말에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비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윤리적 잘못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전혀 실제적인 것을 말하면서 오히려 정죄하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것은 그 규범적 정도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자존하시는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 두지 못하고 상대적인 자기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악함이며 그것이 눈을 멀개하며 귀를 막으며 강팍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우리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음으로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은 자기 기만으로써의 심판의 실제의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구주이심을 증거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증거자들이 됨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포도원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받드는 가운데서 주의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들로써 주의 칭찬의 자리에 서게 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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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4, 2004
시대를 분별하라
2004년6월1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49-59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제목을 선정하면서 많이 고민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시대를 분별하라 또는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사실 지난날 분별없는 극단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적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형태적 차이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들과 전혀 다른 측면의 말을 하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언급해야 함의 당위성으로 다시 시대를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이 주님의 증거적 내용임을 놓고 종으로서의 증거를 하게 됩니다.
한 때, 정치적 언어로써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과 같이 논쟁적인 측면에서의 '화두'라는 말과 같이 종말에 대한 것에 대한 논쟁은 종말에 때에 사실이냐 아니냐 라는 그 문제로 믿음의 선한 싸움의 정체성을 놓고 또한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다툼을 하게 되어지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본문의 내용적 증거로서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화평이라고 함의 개념적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형태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말한다고 할 때에는 불을 던지러 온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또한 분쟁케 되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기상의 날씨적인 것은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과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함에 대한 책망하심과 그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고소하는 자와 동행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완전함에 대한 충족성을 말하지 못함에 결박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문맥적 흐름과 그 가운데서의 오늘 본문의 증거라고 함의 분별이 요구되어지는 합당함이 그것입니다. 즉 그 분쟁의 사실적 근거 즉 실제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이라고 함의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여부에 대하여서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다고 말하는 주관들을 승인시키는 가운데서 사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그러한 소득을 자신을 위하여 채우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사회의 가치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승인되어진 것은 보편적인 그 때의 상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것에서 어떻게 절대에 대하여서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할 수도 없고 또한 증거할 수도 없으며 또한 반론할 수도 없는 불가지적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 느껴지는 사실로서의 것을 공론적으로 실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주님의 당시에서도 마찬가지 인식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자기를 상대적으로 말씀하시며 알게 하신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세상의 존재의 실재에 사실화시키실 때에는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존재의 실재를 말할 수 있게 하심에 있어서 그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구원자이시며 그 실재의 사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실재를 분별하는 빛에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재가가 없는 가운데서는 형태적인 측면의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 실재를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의 받아들이기 나름대로 가치관의 성립이 되어지기 때문에 전달적 의미와 방법적 의미와 그것의 기득권적인 입장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주의 가르침의 실재도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를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다툼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선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선한 다툼은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써 합당함의 실제를 또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함의 증거자들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입장의 증거자로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합당한 증인의 모습과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나 상대적인 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온전함을 바라는 도덕주의자들 경건주의자들의 받을 고통과 심판하심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덕주의자들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경건이 도덕적 일반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동일시되어지거나 또는 인위적이라는 실재적 기반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은 도덕주의적 개념의 이상적 구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것에서 그 신실함에서 그의 상대적 표현의 실재와 실제성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별을 통해서 가능해지는데 그러한 것이 무엇인 실재인가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마치 어두움이라고 함에서 분별하게 해주는 빛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의 실재를 말씀하시며 존재의 정당함과 그러한 실재들의 사실 즉 실제성을 분별하게 하시는 구주이시며 빛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불가지적 입장의 혼돈이라는 어둠에서, 참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예수께서 진정한 구주이시며 인생의,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증거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선한 증거자들로서의 다툼과 증거로써 주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잘 받드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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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49-59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제목을 선정하면서 많이 고민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시대를 분별하라 또는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사실 지난날 분별없는 극단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적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형태적 차이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들과 전혀 다른 측면의 말을 하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언급해야 함의 당위성으로 다시 시대를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이 주님의 증거적 내용임을 놓고 종으로서의 증거를 하게 됩니다.
한 때, 정치적 언어로써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과 같이 논쟁적인 측면에서의 '화두'라는 말과 같이 종말에 대한 것에 대한 논쟁은 종말에 때에 사실이냐 아니냐 라는 그 문제로 믿음의 선한 싸움의 정체성을 놓고 또한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다툼을 하게 되어지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본문의 내용적 증거로서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화평이라고 함의 개념적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형태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말한다고 할 때에는 불을 던지러 온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또한 분쟁케 되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기상의 날씨적인 것은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과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함에 대한 책망하심과 그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고소하는 자와 동행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완전함에 대한 충족성을 말하지 못함에 결박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문맥적 흐름과 그 가운데서의 오늘 본문의 증거라고 함의 분별이 요구되어지는 합당함이 그것입니다. 즉 그 분쟁의 사실적 근거 즉 실제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이라고 함의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여부에 대하여서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다고 말하는 주관들을 승인시키는 가운데서 사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그러한 소득을 자신을 위하여 채우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사회의 가치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승인되어진 것은 보편적인 그 때의 상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것에서 어떻게 절대에 대하여서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할 수도 없고 또한 증거할 수도 없으며 또한 반론할 수도 없는 불가지적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 느껴지는 사실로서의 것을 공론적으로 실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주님의 당시에서도 마찬가지 인식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자기를 상대적으로 말씀하시며 알게 하신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세상의 존재의 실재에 사실화시키실 때에는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존재의 실재를 말할 수 있게 하심에 있어서 그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구원자이시며 그 실재의 사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실재를 분별하는 빛에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재가가 없는 가운데서는 형태적인 측면의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 실재를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의 받아들이기 나름대로 가치관의 성립이 되어지기 때문에 전달적 의미와 방법적 의미와 그것의 기득권적인 입장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주의 가르침의 실재도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를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다툼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선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선한 다툼은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써 합당함의 실제를 또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함의 증거자들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입장의 증거자로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합당한 증인의 모습과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나 상대적인 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온전함을 바라는 도덕주의자들 경건주의자들의 받을 고통과 심판하심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덕주의자들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경건이 도덕적 일반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동일시되어지거나 또는 인위적이라는 실재적 기반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은 도덕주의적 개념의 이상적 구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것에서 그 신실함에서 그의 상대적 표현의 실재와 실제성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별을 통해서 가능해지는데 그러한 것이 무엇인 실재인가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마치 어두움이라고 함에서 분별하게 해주는 빛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의 실재를 말씀하시며 존재의 정당함과 그러한 실재들의 사실 즉 실제성을 분별하게 하시는 구주이시며 빛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불가지적 입장의 혼돈이라는 어둠에서, 참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예수께서 진정한 구주이시며 인생의,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증거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선한 증거자들로서의 다툼과 증거로써 주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잘 받드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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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황무함
2004년6월1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3:1-26
시온의 황무함
어떤 일에 있어든지 상식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 가지 학문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상식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이 없을 때에는 치우치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수준에서 있어야만 된다는 식이나 또는 그러한 것이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은 극단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식상을 불러올 수 있고 또한 이것은 그 실제를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기들의 의도하는 바 좋은 대로 즉 소견에 좋은 데로 행하는 경향의 악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함'에 대한 것이 강조되어지며 책망되었던 것이 성경 '사사기'의 지적이며 책망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식들의 반란이라고 함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시온이 황무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좀더 본문을 주목하면서 그 사라질 그들의 방백들의 잘못되어짐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중심을 가지는 자리에 서기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버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양식과 의뢰하는 물과 그리고 모사와 공교한 장인들과 능란한 요술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의 아기들 그들의 방백들과 적자들로 다스리게 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의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외면당하는 자의 모습이 될 것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변론하려고 일어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가난한 자에게 탈취한 물건들이 그 백성의 장로와 방백들에게 있어 책망하시고 있는데 그 표현은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온의 딸들의 음란함에 따른 교태적 아름다움의 영광의 정체성을 정당화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음란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거짓된 영광이라고 함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여인의 치부를 드러냄에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장정은 칼에 죽고 용사는 전란에 망하게 되어질 것과 시온은 황무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을 주목하면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온의 황무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체라고 함은 어떤 것인지 주목함이 세대의 분별을 말하게 되어지는 성도의 안목이 되어지며 깨어있는 종들로서의 바른 모습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의 처음부분은 서론에 해당되어지는 것으로써 구약의 복음서라고 함을 말하는 것과 같이 신약의 사마리아인의 모습과 또한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서론과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짐을 주목합니다. 특히 2장에서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보이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시온이 황무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과 함께하는 거짓된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함을 교묘히 말하며 상대적으로 그럴듯하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함에 대하여서 그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질 것에 대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상대적 자기 정당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리적 문제 즉 그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산적 개념 때문에 그 거짓된 그들의 줏대 없는 말들을 신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방백들은 자신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함을 말하는 아이러니칼 한 입장을 취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그 백성들의 허탈함과 그들의 몽매함의 실제를 드러내야 하는 비참함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본문에서는 시온의 딸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되어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전무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황페함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뛰노는 그들의 방백들은 요술자와 같이 자기 정당함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실제적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있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의 삶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함으로 혼돈함이 되어지며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삶을 말할 율법의 합당한 증거를 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이 합리적으로 답변하지 못함을 맷돌질하는 것과 같이 업수이 여기며 자신들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세우려고 하는 자들을 책망하심과 그들에게 교태적 정당함으로 자신들의 음란함을 생활화한 자들의 합당하지 못한 증인으로써의 증거적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로서 책망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주 예수님 안에서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때가 이 교회의 시대가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실재의 사실을 말하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그럴듯한 말만하고 있는 자들이 있어 그것에 휘둘리고 있는 모습들을 주목할 수 있을 때에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복음의 증거자로서 설수 있도록 힘써야 하며 그 앞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이 확실한 것이냐는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업수이 여기는 자들의 현란함에 무색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다윗과 같이 그 장벽들을 뛰어넘는 자들로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증인으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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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3:1-26
시온의 황무함
어떤 일에 있어든지 상식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 가지 학문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상식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함이 없을 때에는 치우치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수준에서 있어야만 된다는 식이나 또는 그러한 것이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은 극단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식상을 불러올 수 있고 또한 이것은 그 실제를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기들의 의도하는 바 좋은 대로 즉 소견에 좋은 데로 행하는 경향의 악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함'에 대한 것이 강조되어지며 책망되었던 것이 성경 '사사기'의 지적이며 책망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식들의 반란이라고 함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시온이 황무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좀더 본문을 주목하면서 그 사라질 그들의 방백들의 잘못되어짐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중심을 가지는 자리에 서기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버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양식과 의뢰하는 물과 그리고 모사와 공교한 장인들과 능란한 요술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의 아기들 그들의 방백들과 적자들로 다스리게 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의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외면당하는 자의 모습이 될 것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변론하려고 일어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가난한 자에게 탈취한 물건들이 그 백성의 장로와 방백들에게 있어 책망하시고 있는데 그 표현은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온의 딸들의 음란함에 따른 교태적 아름다움의 영광의 정체성을 정당화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음란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거짓된 영광이라고 함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여인의 치부를 드러냄에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장정은 칼에 죽고 용사는 전란에 망하게 되어질 것과 시온은 황무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을 주목하면서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온의 황무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체라고 함은 어떤 것인지 주목함이 세대의 분별을 말하게 되어지는 성도의 안목이 되어지며 깨어있는 종들로서의 바른 모습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의 처음부분은 서론에 해당되어지는 것으로써 구약의 복음서라고 함을 말하는 것과 같이 신약의 사마리아인의 모습과 또한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서론과 그 상관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짐을 주목합니다. 특히 2장에서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보이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시온이 황무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과 함께하는 거짓된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함을 교묘히 말하며 상대적으로 그럴듯하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함에 대하여서 그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질 것에 대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상대적 자기 정당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리적 문제 즉 그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산적 개념 때문에 그 거짓된 그들의 줏대 없는 말들을 신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방백들은 자신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함을 말하는 아이러니칼 한 입장을 취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그 백성들의 허탈함과 그들의 몽매함의 실제를 드러내야 하는 비참함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본문에서는 시온의 딸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되어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전무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황페함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뛰노는 그들의 방백들은 요술자와 같이 자기 정당함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실제적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있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의 삶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함으로 혼돈함이 되어지며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삶을 말할 율법의 합당한 증거를 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이 합리적으로 답변하지 못함을 맷돌질하는 것과 같이 업수이 여기며 자신들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세우려고 하는 자들을 책망하심과 그들에게 교태적 정당함으로 자신들의 음란함을 생활화한 자들의 합당하지 못한 증인으로써의 증거적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로서 책망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도 주 예수님 안에서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때가 이 교회의 시대가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실재의 사실을 말하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그럴듯한 말만하고 있는 자들이 있어 그것에 휘둘리고 있는 모습들을 주목할 수 있을 때에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복음의 증거자로서 설수 있도록 힘써야 하며 그 앞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이 확실한 것이냐는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업수이 여기는 자들의 현란함에 무색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다윗과 같이 그 장벽들을 뛰어넘는 자들로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증인으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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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07, 2004
십계명
2004년6월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20:1-26
십계명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라는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서점에서나 어떤 간단한 브리핑 또는 강요적 규칙들을 말할 때에 한 열 가지의 조항들을 나열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십계명’이라든지 아니면 꼭 십계명이라고 하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실제의 예를 들어서 우리의 후대를 위한 조언을 나타내는 경우에 있어서 20세에 또는 30세에 해야 할 것 20가지 등의 처세술적인 언급을 하는 것들이 전혀 무관하게만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칙(申飭)이라는 말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즉 여자(如字)적 그대로 본다면 ‘아홉째 지지하는 것으로써의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계하고 주의를 준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주의와 경계해야 할 유익을 위한 구체적 실제를 말해준다는 측면에서 기독교 문화적 개념의 상관성과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본질적 동등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십계명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신칙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말씀하심의 구체적인 것으로써 십계명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출 19:21)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십계명의 전반적이면서도 총체적인 그 실제적 의미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고 기반을 하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계명에 해당되어지는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계명을 주심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영광이라고 함을 주목하고 있는 자들이 모세에게 대신하여 자신들에게 말하여 주기를 구하고 있고 모세가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함과 이러한 십계명을 주시는 가운데의 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내용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부터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았으니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과 또한 토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에 대한 것과 돌로 단을 쌓을 때에는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단을 계단으로 만들지 말도록 하심의 언급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경계하는 말씀으로써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실제적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과 실제적 증거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24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심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에서 돌 판에 기록해주신 십계명이라고 함이 축복이라고 함과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적인 실재와 실제적 증거로서 우리의 구원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출애굽과 주님의 탄생하셔서 애굽에서 피신하셨던 것을 말씀하심에서 그 상관성을 말씀하셨던 것과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첫 번째의 내용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은 또한 죄 없다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심이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명찰에 자기 아버지 이름을 써 다니는 자들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뜻하심이신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기본적인 절대적 정당함에 따른 분별함이 없이 자신들이 자칭 ‘여호와의 증인’으로써 말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분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중심에 담는 자로서의 신실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흙으로 지은 인생이 주 앞에 단을 쌓게 될 때에 인위적인 균형이라는 개념으로 행하지 않고 주 앞에서의 실제적인 사실을 드릴 수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거룩함을 나타내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토단을 쌓을 때에 쪼아서 부정하게 하지 말라고 하심의 말씀을 받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그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의 백성 된 자들의 존재와 삶의 정당한 경영을 위하여서 거듭 신칙하시는 말씀하심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해야 하는 당위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림하심에서의 비롯되어지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 하나님 여호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새기면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실제의 판단을 통해서 십계명을 오늘날도 합당하게 실제적으로 지키며, 복음의 진정한 사실임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을 잘 감당해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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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20:1-26
십계명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라는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서점에서나 어떤 간단한 브리핑 또는 강요적 규칙들을 말할 때에 한 열 가지의 조항들을 나열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십계명’이라든지 아니면 꼭 십계명이라고 하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실제의 예를 들어서 우리의 후대를 위한 조언을 나타내는 경우에 있어서 20세에 또는 30세에 해야 할 것 20가지 등의 처세술적인 언급을 하는 것들이 전혀 무관하게만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칙(申飭)이라는 말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즉 여자(如字)적 그대로 본다면 ‘아홉째 지지하는 것으로써의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계하고 주의를 준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주의와 경계해야 할 유익을 위한 구체적 실제를 말해준다는 측면에서 기독교 문화적 개념의 상관성과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본질적 동등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십계명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신칙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말씀하심의 구체적인 것으로써 십계명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출 19:21)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십계명의 전반적이면서도 총체적인 그 실제적 의미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고 기반을 하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계명에 해당되어지는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계명을 주심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영광이라고 함을 주목하고 있는 자들이 모세에게 대신하여 자신들에게 말하여 주기를 구하고 있고 모세가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함과 이러한 십계명을 주시는 가운데의 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내용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부터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았으니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과 또한 토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에 대한 것과 돌로 단을 쌓을 때에는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단을 계단으로 만들지 말도록 하심의 언급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경계하는 말씀으로써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실제적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과 실제적 증거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24절에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심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에서 돌 판에 기록해주신 십계명이라고 함이 축복이라고 함과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적인 실재와 실제적 증거로서 우리의 구원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출애굽과 주님의 탄생하셔서 애굽에서 피신하셨던 것을 말씀하심에서 그 상관성을 말씀하셨던 것과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첫 번째의 내용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은 또한 죄 없다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심이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명찰에 자기 아버지 이름을 써 다니는 자들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뜻하심이신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기본적인 절대적 정당함에 따른 분별함이 없이 자신들이 자칭 ‘여호와의 증인’으로써 말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를 분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중심에 담는 자로서의 신실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흙으로 지은 인생이 주 앞에 단을 쌓게 될 때에 인위적인 균형이라는 개념으로 행하지 않고 주 앞에서의 실제적인 사실을 드릴 수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거룩함을 나타내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토단을 쌓을 때에 쪼아서 부정하게 하지 말라고 하심의 말씀을 받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그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의 백성 된 자들의 존재와 삶의 정당한 경영을 위하여서 거듭 신칙하시는 말씀하심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해야 하는 당위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림하심에서의 비롯되어지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 하나님 여호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새기면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실제의 판단을 통해서 십계명을 오늘날도 합당하게 실제적으로 지키며, 복음의 진정한 사실임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을 잘 감당해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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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
2004년6월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35-48
인자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
항구 부둣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또는 어떤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또는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여심(女心)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참 아름다울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한 말과 판단에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는 다르면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의 기원적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주의 증거라고 함을 주목하며 특히 주의 종들의 모습 주의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과 그것을 향한 종들의 마음이 어떠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이에 따라서 주의 성도들로서 종 된 자의 모습에 대한 주의 증거를 나타내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혼인집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열어줄 수 있도록 깨어 있으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하심의 말씀인데 이러한 깨어있는 종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은 베드로의 질문과 같이 주님과 함께한 그 때 당시에 제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과 주님의 부르신 자의 중심이 그러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심의 말씀하심의 내용은 생각지 않은 날 주인이 이르심에 따라 신실치 않은 종들이 엄히 맞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으시고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를 기다리는 성도된 자들의 종 된 자로써 깨어있음과 근신함에 대한 그 중심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하심의 재해석적인 측면, 또는 그 담겨진 주의 뜻하심에 대한 기술적 표현과 증거이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문맥을 주목해 볼 때에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하심과 같이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물질에 의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는 생활양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본질적인 실제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으로 물질적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부요하지 못하는 그러한 시험의 때를 지나는 인생이라고 하는 모습의 정황 속에서 받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허리를 다치면 어떤 힘을 사용하기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허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그 신앙적인 생활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세삼 새롭게 하려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로 띠를 띠라’(엡 6:14)고 하신 에베소서의 말씀하심이 이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하나님자신의 재차적인 동일한 말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진리로 띠를 띠라고 하심’은 등불을 켜고 서 있게 되어지는 근신함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의식을 위한 분별과 그 실제의 주의 말씀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켠다는 것은 사물의 실제상황을 말하고 알려주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같이 생각하고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것에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암흑과 같이 나타나고 있고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도 진정한 하나님 자신인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그러한 말로 주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표현 즉, 우리들의 인식의 범위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 ‘예수님이 바로 실제의 진리가 되어지며 하나님 자신이심’이 절대자 자신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이 구원이심을 말씀하심이 현실에서 진정한 사실이며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임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밝혀 비추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확실하냐는 것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는 등불을 켜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며 등불을 주 예수 안에서 켤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은 진정 그 신앙의 동기가 진리로써 부여되어진 실제의 사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신실한 종의 모습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다는 말은 무엇이 실제인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그 실제의 그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논리 정연한 표현을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참된 신이심을 믿고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로서 받는 자는 깨여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을 또한 살면서 주님을 증거하였다면 그도 역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며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질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는 자신의 특정한 모임만이 주의 말씀을 맏을 수 있는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이라고 한정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양식을 때를 따라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양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 비록 주관적이면서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재가적인 차원의 실재적인 믿음의 소명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에서 주의 성도들 주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받을 바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있는 믿음은 자기 스스로 행함이라고 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임의적인 순전히 그 믿음을 가진 자의 주관이라고 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주관적 형식이면서도 그 정당함을 찾는 자들은 그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신앙적인 힘의 허리를 동이게 되어지는 제한받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신앙에서 행함만 생각하고 그것의 강조만 생각하고 있는 자의 모습은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라는 그 허리에 띠를 묶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행함의 여지를 남겨두고 정도껏 충성하고 때를 따라서는 자기의 소유를 위해 자기의 것을 챙기는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에 소욕이라고 함의 띠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윤리의 동기라고 하는 것이 자기 편의로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에서 실제적인 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이라고 함에서 주님의 오시지 않음에 따라 종들을 때리고 주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수입적인 개념에 착념하며 그것을 위해 반대하는 종들에게 실제적인 자신의 현실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핍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의 심판이 있게 되어짐을 증거함에 많은 선지자들은 너에게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느냐는 뺨을 쳤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라는 자신들의 예루살렘에서의 기득권이라고 함에서 해석되어진 그들의 행동이었음을 볼 때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하나님 자신으로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면서 만인이 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신부되어진 교회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을 맞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이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는 여심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이며 이러한 의식들이 바로 주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의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지고 잇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은혜로 일을 하게 되어지는 종들의 모습이면서도 주 앞에서 상대적인 분별력이 허락되어질 때에 한 일이 너무 없어서 종아리를 걷는 자의 모습으로 좀더 잘하려고 노력하여야 함에 당위성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마저도 주님의 주권적 판단에 있으니 우리 성도들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를 벗어나서 주의 말씀이 진리이며 진정한 사실임에 대한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우리와 늘 동행하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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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
항구 부둣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또는 어떤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또는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여심(女心)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참 아름다울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한 말과 판단에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는 다르면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의 기원적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주의 증거라고 함을 주목하며 특히 주의 종들의 모습 주의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과 그것을 향한 종들의 마음이 어떠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이에 따라서 주의 성도들로서 종 된 자의 모습에 대한 주의 증거를 나타내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혼인집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열어줄 수 있도록 깨어 있으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하심의 말씀인데 이러한 깨어있는 종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은 베드로의 질문과 같이 주님과 함께한 그 때 당시에 제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과 주님의 부르신 자의 중심이 그러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심의 말씀하심의 내용은 생각지 않은 날 주인이 이르심에 따라 신실치 않은 종들이 엄히 맞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으시고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를 기다리는 성도된 자들의 종 된 자로써 깨어있음과 근신함에 대한 그 중심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하심의 재해석적인 측면, 또는 그 담겨진 주의 뜻하심에 대한 기술적 표현과 증거이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문맥을 주목해 볼 때에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하심과 같이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물질에 의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는 생활양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본질적인 실제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으로 물질적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부요하지 못하는 그러한 시험의 때를 지나는 인생이라고 하는 모습의 정황 속에서 받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허리를 다치면 어떤 힘을 사용하기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허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그 신앙적인 생활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세삼 새롭게 하려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로 띠를 띠라’(엡 6:14)고 하신 에베소서의 말씀하심이 이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하나님자신의 재차적인 동일한 말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진리로 띠를 띠라고 하심’은 등불을 켜고 서 있게 되어지는 근신함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의식을 위한 분별과 그 실제의 주의 말씀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켠다는 것은 사물의 실제상황을 말하고 알려주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같이 생각하고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것에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암흑과 같이 나타나고 있고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도 진정한 하나님 자신인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그러한 말로 주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표현 즉, 우리들의 인식의 범위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 ‘예수님이 바로 실제의 진리가 되어지며 하나님 자신이심’이 절대자 자신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이 구원이심을 말씀하심이 현실에서 진정한 사실이며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임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밝혀 비추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확실하냐는 것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는 등불을 켜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며 등불을 주 예수 안에서 켤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은 진정 그 신앙의 동기가 진리로써 부여되어진 실제의 사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신실한 종의 모습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다는 말은 무엇이 실제인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그 실제의 그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논리 정연한 표현을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참된 신이심을 믿고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로서 받는 자는 깨여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을 또한 살면서 주님을 증거하였다면 그도 역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며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질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는 자신의 특정한 모임만이 주의 말씀을 맏을 수 있는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이라고 한정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양식을 때를 따라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양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 비록 주관적이면서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재가적인 차원의 실재적인 믿음의 소명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에서 주의 성도들 주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받을 바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있는 믿음은 자기 스스로 행함이라고 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임의적인 순전히 그 믿음을 가진 자의 주관이라고 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주관적 형식이면서도 그 정당함을 찾는 자들은 그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신앙적인 힘의 허리를 동이게 되어지는 제한받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신앙에서 행함만 생각하고 그것의 강조만 생각하고 있는 자의 모습은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라는 그 허리에 띠를 묶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행함의 여지를 남겨두고 정도껏 충성하고 때를 따라서는 자기의 소유를 위해 자기의 것을 챙기는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에 소욕이라고 함의 띠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윤리의 동기라고 하는 것이 자기 편의로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에서 실제적인 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이라고 함에서 주님의 오시지 않음에 따라 종들을 때리고 주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수입적인 개념에 착념하며 그것을 위해 반대하는 종들에게 실제적인 자신의 현실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핍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의 심판이 있게 되어짐을 증거함에 많은 선지자들은 너에게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느냐는 뺨을 쳤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라는 자신들의 예루살렘에서의 기득권이라고 함에서 해석되어진 그들의 행동이었음을 볼 때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하나님 자신으로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면서 만인이 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신부되어진 교회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을 맞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이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는 여심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이며 이러한 의식들이 바로 주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의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지고 잇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은혜로 일을 하게 되어지는 종들의 모습이면서도 주 앞에서 상대적인 분별력이 허락되어질 때에 한 일이 너무 없어서 종아리를 걷는 자의 모습으로 좀더 잘하려고 노력하여야 함에 당위성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마저도 주님의 주권적 판단에 있으니 우리 성도들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를 벗어나서 주의 말씀이 진리이며 진정한 사실임에 대한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우리와 늘 동행하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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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2004년6월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2:1-22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얼마 전 시내 쪽으로 걸어가면서 잠간 스쳐지나간 대장간이 생각이 납니다. 시내에 무슨 대장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에 일축되어질 수 있지만 작은 고철수집상인데 한 곳에서는 담금질 할 수 있는 것과 모루와 같은 장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철공소라고 함이 어울리지만 쇠를 달구어서 칠 수 있는 것을 볼 때에 작은 대장간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옛날 약 30년에는 대장간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논둑길로 해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와 낫을 보기도 하고 며칠 만에 열리는 장터에서는 그 만든 호미와 낫, 괭이, 쟁기와 같은 것들을 사서 가시는 분들도 본 기억이 아련하게 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에 대한 예언하심의 말씀하심을 주목하면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 1장에서와 같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내용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말일에 있게 되어질 것으로 그때에 여호와의 전이 굳게 세워지고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이르자할 것에 대한 증거가 있을 것과 그 증거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판결하심에 그들이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과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야곱족속에게 그 동일한 청함이 있음에 대한 단적인 것으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처하여 있는 곳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은 12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실 것과 그 악한 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암혈에서 숨어서 그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피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한마디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 2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일이라고 하는 말과 여호와의 한 날이라고 함과 같이 이러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또한 이사야서 1장 1절과 2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이상과 그것에 관한 말씀이심을 나타내고 있음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것은 또한 주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그러한 그 때를 분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표적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위에 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되어지는 주의 성도들의 모임이 지역교회의 한 형태를 띨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탁월성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 말씀을 따라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가르침이 상대적 힘의 우위라는 개념으로 나타나는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써 상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신다면 상대적인 행함의 판단을 상대적 힘의 우위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질 실제적 판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힘의 상징들이 곡식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동네 유대 땅에 아기가 나셨으니 그리스도 주이심이 그 표적임을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예수 탄생은 세상의 마지막의 실제적 시작이며 또한 다시오심의 종말의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상대적 우위에서 실존을 말하던 우상들이라고 하는 존재들은 상대적으로 판단하여서 의미가 없음에 대한 것은 성도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제는 허락되어지지 않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숨게 되어지는데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그러한 악함이라고 하는 것의 상대적 변명을 허락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였을 때에 이드로의 방문과 같이 하나님의 탁월케 하심은 구약의 광야교회에서부터 신약의 주의 교회의 동질성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의 새로운 법적 질서에서 가능해지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성령의 전(고전 6:19)이 되어진 자신의 존재로서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쳐서 낫을 만들 듯이’ 더 이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 즉 실리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전쟁과 같은 그러한 실제적 사실에 모든 존재와 삶의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하는 곳에서 벗어나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 자라게 되어지는 것에 중심을 둘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낫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계 14:14~19)과 같이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믿어 주께로 돌아옴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버림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심판도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한 날, 그 종말의 때, 교회의 시대에 주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인위적인 합리적인 개념 자체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가운데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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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1-22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얼마 전 시내 쪽으로 걸어가면서 잠간 스쳐지나간 대장간이 생각이 납니다. 시내에 무슨 대장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에 일축되어질 수 있지만 작은 고철수집상인데 한 곳에서는 담금질 할 수 있는 것과 모루와 같은 장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철공소라고 함이 어울리지만 쇠를 달구어서 칠 수 있는 것을 볼 때에 작은 대장간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옛날 약 30년에는 대장간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논둑길로 해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와 낫을 보기도 하고 며칠 만에 열리는 장터에서는 그 만든 호미와 낫, 괭이, 쟁기와 같은 것들을 사서 가시는 분들도 본 기억이 아련하게 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에 대한 예언하심의 말씀하심을 주목하면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 1장에서와 같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내용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말일에 있게 되어질 것으로 그때에 여호와의 전이 굳게 세워지고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이르자할 것에 대한 증거가 있을 것과 그 증거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판결하심에 그들이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과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야곱족속에게 그 동일한 청함이 있음에 대한 단적인 것으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처하여 있는 곳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은 12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실 것과 그 악한 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암혈에서 숨어서 그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피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한마디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 2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일이라고 하는 말과 여호와의 한 날이라고 함과 같이 이러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또한 이사야서 1장 1절과 2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이상과 그것에 관한 말씀이심을 나타내고 있음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것은 또한 주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그러한 그 때를 분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표적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위에 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되어지는 주의 성도들의 모임이 지역교회의 한 형태를 띨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탁월성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의 말씀을 따라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가르침이 상대적 힘의 우위라는 개념으로 나타나는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써 상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신다면 상대적인 행함의 판단을 상대적 힘의 우위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질 실제적 판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힘의 상징들이 곡식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동네 유대 땅에 아기가 나셨으니 그리스도 주이심이 그 표적임을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예수 탄생은 세상의 마지막의 실제적 시작이며 또한 다시오심의 종말의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상대적 우위에서 실존을 말하던 우상들이라고 하는 존재들은 상대적으로 판단하여서 의미가 없음에 대한 것은 성도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제는 허락되어지지 않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숨게 되어지는데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그러한 악함이라고 하는 것의 상대적 변명을 허락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였을 때에 이드로의 방문과 같이 하나님의 탁월케 하심은 구약의 광야교회에서부터 신약의 주의 교회의 동질성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의 새로운 법적 질서에서 가능해지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성령의 전(고전 6:19)이 되어진 자신의 존재로서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쳐서 낫을 만들 듯이’ 더 이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 즉 실리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전쟁과 같은 그러한 실제적 사실에 모든 존재와 삶의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하는 곳에서 벗어나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 자라게 되어지는 것에 중심을 둘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낫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계 14:14~19)과 같이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믿어 주께로 돌아옴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버림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심판도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한 날, 그 종말의 때, 교회의 시대에 주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인위적인 합리적인 개념 자체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가운데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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