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4월2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29-36
표적(表迹)수사
표적이라는 말은 한자적인 언어로써 다의적 언어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빠른 도적’이라는 뜻도 있고 ‘과녁’이라는 뜻도 있을 수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흔적’으로써 ‘증거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표현의 인식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언급한 뜻들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고 더 축소시켜서 말한다면 세 번째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본문에서는 증거적인 측면 특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유대인들이 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주의 답변하심의 내용적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이 질문 즉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같이 질문하는 것이 귀신을 나가게 함이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 아니냐는 동일 문맥에서 질문되어진 것입니다. 역시 동일한 문맥에서 다르게 증거되어지는 내용적 증거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9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함을 말씀하시면서 남방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것에 대한 언급을 하시고 있고 심판 때에는 요나의 표적을 받은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계속되어지는 주의 말씀으로써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둠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예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몸의 등불은 눈인데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또 사람들의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고 하시며 온전히 밝을 것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과녁삼은 듯한 그러한 표적 수사를 행하고 있고 그 내용적인 것도 그 증거를 찾는 가운데서 표적 수사를 행하고 있다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표적을 말하기 앞서 그 표적의 실제를 말할 수 있지 않다면 그 납득되어지는 표적들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표적은 하나님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증거적 실제를 받게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제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언급하고 있는 요나의 증거와 니느웨 사람들의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는 것과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왕의 모습을 말씀하심은 우리가 지혜의 실존을 어떻게 이야기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고기뱃속에서 스올의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욘 2:1~10)과 같은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합리적 사실들로써 해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증거도 합리성의 상대적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질 수 있는 실제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남방 여왕은 스바 여왕으로 솔로몬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지혜를 시험하려고 왔던 것입니다.(왕상 10:1~13)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인 측면을 말하는 지혜로써 예수께서는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께 있다는 그 말씀하심에서의 정당함을 찾고 있는 솔로몬의 중심을 읽으려고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진정 바라보았다면 주의 가르침의 실제를 알았을 것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님과 상관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찾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책망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진정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심에 대한 것은 예수님의 아기 때에 있었던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른 이미 증거된 것임은 표적을 정말로 찾는 사람이라고 하면 인정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2)
이러한 천사의 구주 나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는 가운데 우리의 진정한 실제의 표적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과 이러한 것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시므온의 증거(눅 2:34)과 안나의 증거(눅 2:38) 즉 이스라엘의 구속함을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아기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음을 통해 아기 예수님이 구주로서 동시에 자체로서의 표적임에 대한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러한 주의 종들의 증거라고 함이 솔로몬의 경우와 같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인(印)쳐진 것으로 솔로몬의 지혜의 실존과 동일한 것이 되어진다는 점에서 스바 여왕의 만나본 지혜와 그것이 상대적 충족성이라고 함으로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점까지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비난을 위해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함은 이미 상대적 합리적 충족성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요나의 실제적인 판단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한 솔로몬의 지혜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에 증거라고 하는 것과 같이 상대적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是非)를 바꾸는 무익함을 말하는 악한 세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욥 33:27~28)
이것은 주의 구속하심에서 옳고 그름의 시비를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실제의 기준이 언약적으로 실제적으로 주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바로 빛이라고 하는 것 생명의 빛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7)
이러한 예언하심이 천사들의 표적이라고 한 예수님의 나심이 그 예언의 표적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러한 것은 진정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의 예수그리스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자들의 지혜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실제의 지혜이거늘 사람들은 다른 범신적 개념의 표적의 실제가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옳고 그름의 시비를 바꾸는 무익한 자들로서 그 악함과 교만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 실제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빛을 등경위에 두지 못하고 있는 자들로서 등불을 켜지 못하는 잠자는 졸고 있는 미련한 여인들의 모습임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행 4:12) 하심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표적을 구하며 시비를 바꾸는 그러한 자들의 무익함과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판단되어지는 것임과 그것이 이미 요나와 그 전도함을 받은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심판하고 있음을 지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외에는 참된 길이 없으며 분별력의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예수님이 진정한 생명의 빛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참된 구속을 바라는 자들로서의 예수님 생명의 길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써 빛된 자리에 항상 서시며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잘 받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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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6, 2004
시비(是非)를 바꾸는 세대
2004년4월2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3:1-33
시비(是非)를 바꾸는 세대
시비(是非)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일반적으로 와전되어진 가운데서 사용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괴롭게 하거나 또는 선하지 못한 의도로 접근하는 것을 시비(是非)건다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표현을 한다면 ‘시비를 건다’는 말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시비를 가린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말이 그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 없는 가운데서는 의도성이 있는 가운데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으로 악한 표현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가치관의 혼탁으로 이러한 선한 뜻이 와전되어지고 있는데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는 실제의 증거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그것의 분명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분명치 못하면 전쟁에 임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 그래서 시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바꾼다면 그것의 책망은 마땅히 받게 되어지며 성도로서는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고난의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세대에 대하여서 엘리후를 통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심에 따른 증거임에 대한 것을 표현하면서 상대적으로는 엘리후가 자신의 위엄으로는 욥을 두렵게 못하며 자기의 권세로는 욥을 누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진술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은 깨끗하여도 하나님이 그에게서 불의를 찾으심이라고 하는 것의 편벽되어짐을 나타내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계속해서 엘리후가 욥에 대한 잘못을 합당하게 책망하고 있는데 욥이 하나님과 변쟁하겠다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꿈이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심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치는 즉 정당한 실제의 교훈으로 말씀하심에 대하여 합리성의 상대적인 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의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불순종과 교만함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병상의 고통과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징계에 대하여서 천사들의 해석자로서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 것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속물과 그 당사자의 의의 회복과 시비를 바꿈에 대한 무익함을 고백하며 자기의 생명이 빛을 볼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재삼 보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상대적 변쟁이 성립된다면 답변하라고 하심과 지혜로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엘리후를 통한 주의 말씀하심은 상대적 합리성의 충족성을 따른 그러한 변론적 개념의 범주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인 합리성의 무한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절대의 무한을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절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면서 욥의 상대적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인정되어지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상대적 측면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함에 따른 정당함으로 시비(是非)를 바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보다 크심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완전의 충족성을 말 못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자의 절대의 지혜의 충족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상대적으로도 용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은 것과 같이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공감되어진다고 하여도 그러한 의로움과 절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상대적 비교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상대적으로 지적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셋째 본문에서는 욥의 고난이라고 함이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천사의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 정당히 행할 것을 보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서 죽는 것이 두려워 종노릇하는 자들(히 2:15)에게 천사의 전한 복음, 주의 나심에 대한 천사의 복음(눅 2:15)과 대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주의 대속하심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진정한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 따라서 그 사람들이 옳고 그름 그 시비를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대한 무익함에 대하여서 회개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복음의 시대를 욥의 고난과 주의 욥의 교만을 고쳐주심에서 지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네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의 인치는 듯한 말씀으로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네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고 함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직면한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의 실존적 정당함을 위해 자기 본위적 당위성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범위를 생각하지 않고 규정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을 주관적으로 편협하게 말하는 경향이 많고 그것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때에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계시로써의 말씀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읽어 내기 보다는 그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규정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상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인동형적인 표현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표현한 것을 보고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그러한 근거를 말함으로 주재권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는 악함을 봅니다.
그래서 신을 버릴 수 있는 주재권도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는 인본적인 상대적인 인식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변쟁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합리성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절대의 판단하심과 표현하심의 실제가 본질적 실제적 차원에서는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이제는 언약적인 측면의 실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중심의 실제적 판단으로 그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인간 중심의 합리성의 시비를 말하는 것이 무익함에 대한 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게 되어지며 이것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지혜임을 본문에서는 욥을 가르치는 지혜로써 말씀하심에 내포적인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하며 신앙과 신학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종교학이라고 말하는 자리에 서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변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 한 증거적 실제를 부인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시비를 바꾼 세대의 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의 계시적 증거의 옳고 그름을 바꾸는 세대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혜로 가르치시고 회개케 하시며 세우시며 여전히 하나님의 자랑으로 세우실 것을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신실하심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바꾸는 그러한 세대에서 주의 은혜로 주의 주시는 지혜로 회개하는 자리에 서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성도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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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3:1-33
시비(是非)를 바꾸는 세대
시비(是非)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일반적으로 와전되어진 가운데서 사용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괴롭게 하거나 또는 선하지 못한 의도로 접근하는 것을 시비(是非)건다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표현을 한다면 ‘시비를 건다’는 말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시비를 가린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말이 그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 없는 가운데서는 의도성이 있는 가운데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으로 악한 표현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가치관의 혼탁으로 이러한 선한 뜻이 와전되어지고 있는데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는 실제의 증거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그것의 분명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분명치 못하면 전쟁에 임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면 그래서 시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바꾼다면 그것의 책망은 마땅히 받게 되어지며 성도로서는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고난의 자리에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세대에 대하여서 엘리후를 통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심에 따른 증거임에 대한 것을 표현하면서 상대적으로는 엘리후가 자신의 위엄으로는 욥을 두렵게 못하며 자기의 권세로는 욥을 누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진술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은 깨끗하여도 하나님이 그에게서 불의를 찾으심이라고 하는 것의 편벽되어짐을 나타내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계속해서 엘리후가 욥에 대한 잘못을 합당하게 책망하고 있는데 욥이 하나님과 변쟁하겠다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꿈이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심으로 그러한 것으로 인치는 즉 정당한 실제의 교훈으로 말씀하심에 대하여 합리성의 상대적인 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의 무익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불순종과 교만함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병상의 고통과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징계에 대하여서 천사들의 해석자로서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 것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속물과 그 당사자의 의의 회복과 시비를 바꿈에 대한 무익함을 고백하며 자기의 생명이 빛을 볼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재삼 보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상대적 변쟁이 성립된다면 답변하라고 하심과 지혜로 가르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엘리후를 통한 주의 말씀하심은 상대적 합리성의 충족성을 따른 그러한 변론적 개념의 범주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인 합리성의 무한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절대의 무한을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절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면서 욥의 상대적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인정되어지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상대적 측면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함에 따른 정당함으로 시비(是非)를 바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보다 크심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완전의 충족성을 말 못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자의 절대의 지혜의 충족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상대적으로도 용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은 것과 같이 상대적인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공감되어진다고 하여도 그러한 의로움과 절대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상대적 비교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상대적으로 지적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셋째 본문에서는 욥의 고난이라고 함이 죽음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천사의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 정당히 행할 것을 보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서 죽는 것이 두려워 종노릇하는 자들(히 2:15)에게 천사의 전한 복음, 주의 나심에 대한 천사의 복음(눅 2:15)과 대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주의 대속하심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진정한 실제를 말할 수 있음에 따라서 그 사람들이 옳고 그름 그 시비를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대한 무익함에 대하여서 회개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복음의 시대를 욥의 고난과 주의 욥의 교만을 고쳐주심에서 지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네 번째 본문의 말씀에서의 인치는 듯한 말씀으로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네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고 함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직면한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의 실존적 정당함을 위해 자기 본위적 당위성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범위를 생각하지 않고 규정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을 주관적으로 편협하게 말하는 경향이 많고 그것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때에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계시로써의 말씀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읽어 내기 보다는 그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규정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상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인동형적인 표현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표현한 것을 보고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그러한 근거를 말함으로 주재권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는 악함을 봅니다.
그래서 신을 버릴 수 있는 주재권도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는 인본적인 상대적인 인식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변쟁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합리성의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절대의 판단하심과 표현하심의 실제가 본질적 실제적 차원에서는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이제는 언약적인 측면의 실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중심의 실제적 판단으로 그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인간 중심의 합리성의 시비를 말하는 것이 무익함에 대한 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게 되어지며 이것이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지혜임을 본문에서는 욥을 가르치는 지혜로써 말씀하심에 내포적인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하며 신앙과 신학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종교학이라고 말하는 자리에 서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변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 한 증거적 실제를 부인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시비를 바꾼 세대의 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의 계시적 증거의 옳고 그름을 바꾸는 세대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지혜로 가르치시고 회개케 하시며 세우시며 여전히 하나님의 자랑으로 세우실 것을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신실하심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바꾸는 그러한 세대에서 주의 은혜로 주의 주시는 지혜로 회개하는 자리에 서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성도로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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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22, 2004
주님의 그릇이라
2004년4월2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9:1-22
주님의 그릇이라
요즘에는 그릇 세척기도 있어서 그릇을 씻는 어려움이 덜어지고 여유를 찾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아직 서민층으로 보급 확대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어쩜 그냥 그렇구나하는 그러한 생각뿐 그렇게 와 닿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그릇을 닦고 세척하는 그러한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씻기를 원하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죄라는 것과 또한 아픈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가 받은 은혜라고 함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섭리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데반집사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함의 입장을 취하였던 사도 바울이 주의 제자들, 특히 빌립과 같은 자들의 복음 전함과 같은 그러한 정황적인 것을 분석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가지고 진멸하려고 다메섹까지 가는 자신의 사역의 정당함을 위한 또한 그곳에 가서의 권세라고 하는 것의 객관적인 물증을 가지고 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도중에서 음성으로 그에게 만나주시고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서 그가 금식하며 회개하는 자리에 이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님께서는 그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자에게 사울이 주의 이름을 위한 택한 그릇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라는 말씀과 그 말씀을 의지하여서 아나니아의 안수함으로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짐과 보게 되어짐을 기록하고 있고 이제는 주의 종으로써 힘을 다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주께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기르실 주의 그릇들을 어떻게 다루시고 있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두 부분은 주님의 택한 백성으로써 그의 이름을 위한 종을 세우시는 섭리를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이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가르칠 겸손으로 주의 그릇을 닦으시고 계시는 주님으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사도 바울은 학문적 깊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합리성만의 어떤 인식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른 종들의 입장을 비판하고 받지 못하였던 자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은혜로서 그의 인간적으로 지울 수 없는 그러한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지워주시고 주님의 광야식탁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이미 택하신 바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모래바람으로 일관되어지는 황사바람이 그리고 그 추위라고 하는 것이 모든 만물을 부서뜨리던 그러한 사막에서 주께서 주시는 만나를 의지하여서 주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걸어갔던 광야교회의 모습을 주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며 또한 그러한 회개하는 가운데서 주의 보편교회의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의 한 지역교회의 한 성도인 아나니야의 말씀에 따른 섬김으로 주의 뜻하심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광야교회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셨을 때에 그 뜻하심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소명감을 알도록 하나님이 겸손으로 그의 중심을 닦아 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 주의 이름을 위하여 택한 그릇으로 주의 몸된 보편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식탁에 올려놓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합니다.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메인바 되었던 박수 시몬이나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바울도 불의에 메인바 되어지고 가득한 자이지만 주께서 성도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성도들의 교제들 속에서 주의 피로 깨끗하게 닦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출애굽하여서 약속의 가나안 땅을 향하던 그 백성들과 같이 이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실제를 알지 못하는 시대를 걸어가며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서 주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서 주께서는 주의 피로 주의 겸손으로 우리를 닦으신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를 닦아서 주의 성도들을 위한 광야식탁에 올려놓으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순종하여서 주의 뜻하신 바를 담아내는 종들의 전인격적인 증거자들로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하는 그러한 사도바울의 중심과 같은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주의 그릇들이 다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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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9:1-22
주님의 그릇이라
요즘에는 그릇 세척기도 있어서 그릇을 씻는 어려움이 덜어지고 여유를 찾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아직 서민층으로 보급 확대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어쩜 그냥 그렇구나하는 그러한 생각뿐 그렇게 와 닿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그릇을 닦고 세척하는 그러한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씻기를 원하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죄라는 것과 또한 아픈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가 받은 은혜라고 함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섭리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데반집사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함의 입장을 취하였던 사도 바울이 주의 제자들, 특히 빌립과 같은 자들의 복음 전함과 같은 그러한 정황적인 것을 분석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가지고 진멸하려고 다메섹까지 가는 자신의 사역의 정당함을 위한 또한 그곳에 가서의 권세라고 하는 것의 객관적인 물증을 가지고 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도중에서 음성으로 그에게 만나주시고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서 그가 금식하며 회개하는 자리에 이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사울을 만나주신 예수님께서는 그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자에게 사울이 주의 이름을 위한 택한 그릇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라는 말씀과 그 말씀을 의지하여서 아나니아의 안수함으로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짐과 보게 되어짐을 기록하고 있고 이제는 주의 종으로써 힘을 다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주께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기르실 주의 그릇들을 어떻게 다루시고 있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두 부분은 주님의 택한 백성으로써 그의 이름을 위한 종을 세우시는 섭리를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이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가르칠 겸손으로 주의 그릇을 닦으시고 계시는 주님으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사도 바울은 학문적 깊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합리성만의 어떤 인식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른 종들의 입장을 비판하고 받지 못하였던 자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은혜로서 그의 인간적으로 지울 수 없는 그러한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지워주시고 주님의 광야식탁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이미 택하신 바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모래바람으로 일관되어지는 황사바람이 그리고 그 추위라고 하는 것이 모든 만물을 부서뜨리던 그러한 사막에서 주께서 주시는 만나를 의지하여서 주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걸어갔던 광야교회의 모습을 주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며 또한 그러한 회개하는 가운데서 주의 보편교회의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의 한 지역교회의 한 성도인 아나니야의 말씀에 따른 섬김으로 주의 뜻하심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광야교회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자기 교회를 세우셨을 때에 그 뜻하심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소명감을 알도록 하나님이 겸손으로 그의 중심을 닦아 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 주의 이름을 위하여 택한 그릇으로 주의 몸된 보편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식탁에 올려놓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합니다.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메인바 되었던 박수 시몬이나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바울도 불의에 메인바 되어지고 가득한 자이지만 주께서 성도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성도들의 교제들 속에서 주의 피로 깨끗하게 닦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출애굽하여서 약속의 가나안 땅을 향하던 그 백성들과 같이 이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실제를 알지 못하는 시대를 걸어가며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서 주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서 주께서는 주의 피로 주의 겸손으로 우리를 닦으신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를 닦아서 주의 성도들을 위한 광야식탁에 올려놓으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순종하여서 주의 뜻하신 바를 담아내는 종들의 전인격적인 증거자들로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하는 그러한 사도바울의 중심과 같은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주의 그릇들이 다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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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19, 2004
주의 기업의 산
2004년4월1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5:1-21
주의 기업의 산
우리 인생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고 특히 개인적인 표현의 방법까지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노래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로써의 기쁨의 표현이 한 인생으로써 앞서 언급한 그러한 다양함의 판단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현상적인 사실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과 그 삶의 중심의 표현으로서의 실제를 말함의 합당함을 말할 때에 그것은 기쁨의 노래로써의 찬송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함과 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를 통한 출애굽하게 되어지는 특히 홍해를 걸어서 건너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하여서 그들이 기뻐하며 찬송하며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 중에 그 증거 중에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는 주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를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된 것을 내용으로하는 그 찬송의 내용으로써 증거적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미리암을 비롯한 여인들을 찬송과 그 내용인즉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하는 것으로써 애굽의 말과 그 탄 자들을 바다에 던지심에 대한 그 찬송의 내용을 단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 예수께서 자신의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에 대한 것을 출애굽에 대한 것과 상관성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어지며, 또한 예수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써 기묘자라고 하는 이사야의 증거라고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도 역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읽도록 하시고 있음과, 그의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또한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좀더 주목하며 출애굽의 노래가 구원의 노래임과 그러한 구원의 노래를 우리 성도들이 또한 부르게 된다는 그 기쁨과 증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님의 탄생이라고 함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의 증거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 기묘자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이가 누구이니이까 라는 말로 시작해서 기이한 일을 행하신 자로서의 찬양을 받으심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증거되어지는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과 예수님께서 그러한 부활의 첫 열매로써의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형제라 부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아버지께서 심으시는 자들은 결코 뽑히지 않으실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우리가 묘목을 심을 때에 좋은 것으로 골라서 심는 것과 같이 천부의 택한 자들로서의 심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천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자들이 심겨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우시는 교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거룩하게 하시고 구별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합당함을 말하는 그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그러한 주 하나님의 성 주의 기업의 산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이 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심을 받을 때에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를 믿는 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기업의 산에 심겨지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을 하는 가운데 그 구원의 기쁨을 부르는 구약의 성도들의 구원의 노래는 오늘날 예수님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과 증거를 하는 자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애굽이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자손 미즈라임의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써의 악한 종들로 표현되어지는 자들이 셈과 야벳의 족속의 하나님 셈의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도 주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인 증거를 믿는 가운데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심을 읽으며 증거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계시하신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다른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시지 않고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상대적 편협함을 넘어 합당하고 절대의 보편의 승인된 보편성과 합당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절대의 신실함으로 천부로서의 우리의 존재를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는 은혜를 베푸심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러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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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5:1-21
주의 기업의 산
우리 인생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고 특히 개인적인 표현의 방법까지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노래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로써의 기쁨의 표현이 한 인생으로써 앞서 언급한 그러한 다양함의 판단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현상적인 사실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과 그 삶의 중심의 표현으로서의 실제를 말함의 합당함을 말할 때에 그것은 기쁨의 노래로써의 찬송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함과 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를 통한 출애굽하게 되어지는 특히 홍해를 걸어서 건너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하여서 그들이 기뻐하며 찬송하며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 중에 그 증거 중에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는 주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를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된 것을 내용으로하는 그 찬송의 내용으로써 증거적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미리암을 비롯한 여인들을 찬송과 그 내용인즉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하는 것으로써 애굽의 말과 그 탄 자들을 바다에 던지심에 대한 그 찬송의 내용을 단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 예수께서 자신의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에 대한 것을 출애굽에 대한 것과 상관성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어지며, 또한 예수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써 기묘자라고 하는 이사야의 증거라고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도 역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읽도록 하시고 있음과, 그의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또한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좀더 주목하며 출애굽의 노래가 구원의 노래임과 그러한 구원의 노래를 우리 성도들이 또한 부르게 된다는 그 기쁨과 증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님의 탄생이라고 함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의 증거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 기묘자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이가 누구이니이까 라는 말로 시작해서 기이한 일을 행하신 자로서의 찬양을 받으심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증거되어지는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과 예수님께서 그러한 부활의 첫 열매로써의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형제라 부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아버지께서 심으시는 자들은 결코 뽑히지 않으실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우리가 묘목을 심을 때에 좋은 것으로 골라서 심는 것과 같이 천부의 택한 자들로서의 심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천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자들이 심겨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우시는 교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거룩하게 하시고 구별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합당함을 말하는 그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그러한 주 하나님의 성 주의 기업의 산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이 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심을 받을 때에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를 믿는 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기업의 산에 심겨지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을 하는 가운데 그 구원의 기쁨을 부르는 구약의 성도들의 구원의 노래는 오늘날 예수님 안에서의 구원의 기쁨과 증거를 하는 자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애굽이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자손 미즈라임의 이름에서 비롯되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써의 악한 종들로 표현되어지는 자들이 셈과 야벳의 족속의 하나님 셈의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도 주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인 증거를 믿는 가운데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심을 읽으며 증거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계시하신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다른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시지 않고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상대적 편협함을 넘어 합당하고 절대의 보편의 승인된 보편성과 합당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절대의 신실함으로 천부로서의 우리의 존재를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는 은혜를 베푸심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러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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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함께 모으는 자
2004년4월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14-28
주와 함께 모으는 자
조금은 오래된 영화 중에 어떤 한 아이가 혼자서 집을 지키는 가운데 도적들을 물리치는 코믹(comic)한 내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상적 각색되어진 것과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달리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통제하고 성숙시키며 경영해 나가는 것으로 자신을 세우는 일로써 분명히 해야 할 것과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삶에 아름답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 사람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실제의 통제적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한 삶의 경영에 대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그러한 측면의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는 가운데서 열려진 가능성에 의미를 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지만 그것의 소중함이 일반적으로 장려되어지고 그러한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만, 한정되어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무한히 열려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경험한 가운데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지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실제를 그러한 상대적 의미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임의적으로 실제의식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그 절대의 보편적 승인으로써의 상대적인 무한이라는 것에 본질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며 그러한 혼돈을 벗어나 실제의식을 가질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실재의 사실들을 통해 주의 자녀들로서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을 세울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내용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니 사람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방하고 있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특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에 대하여서 실상은 그렇지 않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과 주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를 반대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임에 대하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바를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5절과 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벙어리귀신을 내쫓으심에 대한 비방으로써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표적에 대한 질문을 다 같이 주목하도록 하는 본문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 가지 중에 한가지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먼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강하다’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언어로서 상대적인 측면의 의미와 실재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지고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항상 그 강함의 실재가 합당하게 존재하는 그러한 말은 아닌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한 자’라는 뜻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 ‘엘로힘’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이 말은 애굽의 신들이라고 하는 말에도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강한 자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힘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운데서 신격화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출애굽기에서 읽게 되어지는 ‘여호와’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써 스스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적 정당함과 절대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서의 엘로힘, 즉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강한자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의 강한자라는 존재로써의 신들이라고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심이 정당한 것입니다.
이방의 신들이 강한 자로 묘사된다고 하여도 자기 존재하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신일 수밖에 없다고 함에 그들의 존재는 절대의 존재자 앞에서 자기 존재의 부인을 당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서 벙어리 귀신 들린 자가 나간 이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교회의 권세의 모습에서 이미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자신을 세우고 그 존재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그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말함에 결국은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통한 분쟁과 나누어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함께하는 자가 아니라면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위해서 결국은 나누어지게 되어지는 자리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지며 이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정당함에 따른 실제의 의식을 가지는 것이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구별적인 차이와 그에 따른 분리적 모습으로 교파와 교단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적인 통일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견적인 눈으로 보이는 형태적인 것만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예수님 안에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전히 주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로서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써 규정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마리아가 복이 있으며 그를 숭배의 자리에 서게 하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외식으로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함께 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이며 이는 자존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와 삶과 인식으로써의 믿음의 정당함을 찾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근거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은혜로 주의 말씀의 실재를 인정하고 따르지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 어떤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고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면 이는 귀신이 나왔던 그 집이 소제되어진 것으로 귀신들이 인식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강함이라고 함만 생각하고 상대적인 강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와 같이 넘어짐이 심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여러 가지 사실로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그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으로써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나타내실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는 것과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그러한 중심에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주와 함께 모으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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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1:14-28
주와 함께 모으는 자
조금은 오래된 영화 중에 어떤 한 아이가 혼자서 집을 지키는 가운데 도적들을 물리치는 코믹(comic)한 내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상적 각색되어진 것과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달리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통제하고 성숙시키며 경영해 나가는 것으로 자신을 세우는 일로써 분명히 해야 할 것과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삶에 아름답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 사람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실제의 통제적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한 삶의 경영에 대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그러한 측면의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는 가운데서 열려진 가능성에 의미를 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지만 그것의 소중함이 일반적으로 장려되어지고 그러한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만, 한정되어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무한히 열려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경험한 가운데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지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실제를 그러한 상대적 의미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임의적으로 실제의식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그 절대의 보편적 승인으로써의 상대적인 무한이라는 것에 본질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며 그러한 혼돈을 벗어나 실제의식을 가질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실재의 사실들을 통해 주의 자녀들로서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을 세울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내용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니 사람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방하고 있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특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에 대하여서 실상은 그렇지 않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과 주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를 반대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임에 대하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바를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5절과 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벙어리귀신을 내쫓으심에 대한 비방으로써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표적에 대한 질문을 다 같이 주목하도록 하는 본문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 가지 중에 한가지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먼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강하다’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언어로서 상대적인 측면의 의미와 실재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지고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항상 그 강함의 실재가 합당하게 존재하는 그러한 말은 아닌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한 자’라는 뜻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 ‘엘로힘’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이 말은 애굽의 신들이라고 하는 말에도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강한 자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힘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운데서 신격화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출애굽기에서 읽게 되어지는 ‘여호와’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써 스스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적 정당함과 절대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서의 엘로힘, 즉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강한자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의 강한자라는 존재로써의 신들이라고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심이 정당한 것입니다.
이방의 신들이 강한 자로 묘사된다고 하여도 자기 존재하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신일 수밖에 없다고 함에 그들의 존재는 절대의 존재자 앞에서 자기 존재의 부인을 당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서 벙어리 귀신 들린 자가 나간 이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교회의 권세의 모습에서 이미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자신을 세우고 그 존재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그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말함에 결국은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통한 분쟁과 나누어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함께하는 자가 아니라면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위해서 결국은 나누어지게 되어지는 자리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지며 이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정당함에 따른 실제의 의식을 가지는 것이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구별적인 차이와 그에 따른 분리적 모습으로 교파와 교단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적인 통일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견적인 눈으로 보이는 형태적인 것만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예수님 안에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전히 주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로서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써 규정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마리아가 복이 있으며 그를 숭배의 자리에 서게 하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외식으로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함께 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이며 이는 자존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와 삶과 인식으로써의 믿음의 정당함을 찾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근거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은혜로 주의 말씀의 실재를 인정하고 따르지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 어떤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고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면 이는 귀신이 나왔던 그 집이 소제되어진 것으로 귀신들이 인식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강함이라고 함만 생각하고 상대적인 강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와 같이 넘어짐이 심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여러 가지 사실로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그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으로써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나타내실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는 것과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그러한 중심에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주와 함께 모으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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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004년4월1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2:1-22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 때 그 시대에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로서 인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를 구할 수 있고 합의된 사실로써 어떤 일을 마무리 하게 되어지는 것도 있게 되어지는 것이 다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어떤 특정인들의 쌍방간의 어떤 합의가 되어진 가운데서 사실을 말한다고 하여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 그들이 처해있는 공동체에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그러한 합의되어진,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써 전체의 납득 사유가 되어질 수 없다고 판단을 받게 되어진다 하겠습니다.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 합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인데 어떤 상대적 합의의 개념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은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모습이 시험 들어 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그 조문객들의 욥의 입장을 이해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서 주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그의 곤고함 속에서 고통하는 가운데 그의 조문객으로 왔던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공의만을 내세우며 범신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 욥이 자신의 연민에 따른 흐려진 판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이 아닌 가운데, 임의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의 우위를 말함으로써, 더욱 자신을 스스로 허용되어지지 않는 영역으로서의 스스로의 입장을 정함으로써, 불순종의 죄악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문객으로 온 세 사람이 그러한 것에 대답함이 없는 가운데서 그 죄를 용인하는 모습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보다도 연소한 까닭에 그 질서적 권위라고 함을 합당히 여겼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인해 노를 발한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후의 그러한 말에 그들이 답변 없음에 대하여서 말을 잇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자신이 말하여야 하는 소명감으로써의 믿음에 대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 봉한 포도주 새 가죽부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은혜의 강권하심이라는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고 순종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나 일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은 동의적인 합의적 개념에서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수습되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객관성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적인 측면의 상관성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판단하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 책망을 받아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였던 다윗도 합리적으로 죄와 타협하려고 하였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를 이미 취하고 아내로써 취하려고 그의 남편된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전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기 정당화라는 합리적인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함에 있어서 다윗은 시편 51편에 눈물로써 침상을 띄우는 회개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이 욥이 자신을 스스로 연민(憐憫)하며 허용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스스로 의롭게 판단하고 있는 주권행사와 그 합리성을 말하고 있을 때에 그의 증거적 사태는 사실로서 나타나면서도 실제로는 욥의 모습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합리성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조문객으로 온 세 친구들은 책망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리성만 생각하느라고 그 정당함의 시비(是非)를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증거적인 대답을 하지 못함은 또한 책망을 받아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시고 우리에게 행하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냥 어떤 분별력도 없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그의 연소함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연장자의 권위라고 함과 그 질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여야 함의 믿음의 권고를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한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행하며 우리의 존재와 삶의 기준과 합당함을 찾는 삶을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정당함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뜻하심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또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주의 말씀하심의 권면하심의 소원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주어질 때에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는 부인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억측을 부리며 하나님을 잘못되게 증거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경건의 유익으로 대하고 있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이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와 같이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서 세상에 증거하는 종들의 모습으로 세우심을 받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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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2:1-22
내가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 때 그 시대에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로서 인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를 구할 수 있고 합의된 사실로써 어떤 일을 마무리 하게 되어지는 것도 있게 되어지는 것이 다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어떤 특정인들의 쌍방간의 어떤 합의가 되어진 가운데서 사실을 말한다고 하여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것, 그들이 처해있는 공동체에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그러한 합의되어진,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써 전체의 납득 사유가 되어질 수 없다고 판단을 받게 되어진다 하겠습니다.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 합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것인데 어떤 상대적 합의의 개념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은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모습이 시험 들어 넘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그 조문객들의 욥의 입장을 이해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서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서 주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그의 곤고함 속에서 고통하는 가운데 그의 조문객으로 왔던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공의만을 내세우며 범신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 욥이 자신의 연민에 따른 흐려진 판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이 아닌 가운데, 임의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의 우위를 말함으로써, 더욱 자신을 스스로 허용되어지지 않는 영역으로서의 스스로의 입장을 정함으로써, 불순종의 죄악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문객으로 온 세 사람이 그러한 것에 대답함이 없는 가운데서 그 죄를 용인하는 모습에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욥의 조문객으로 온 자보다도 연소한 까닭에 그 질서적 권위라고 함을 합당히 여겼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인해 노를 발한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후의 그러한 말에 그들이 답변 없음에 대하여서 말을 잇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자신이 말하여야 하는 소명감으로써의 믿음에 대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 봉한 포도주 새 가죽부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은혜의 강권하심이라는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고 순종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나 일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은 동의적인 합의적 개념에서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수습되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객관성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적인 측면의 상관성에서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판단하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 책망을 받아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였던 다윗도 합리적으로 죄와 타협하려고 하였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를 이미 취하고 아내로써 취하려고 그의 남편된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전사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기 정당화라는 합리적인 사태수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함에 있어서 다윗은 시편 51편에 눈물로써 침상을 띄우는 회개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이 욥이 자신을 스스로 연민(憐憫)하며 허용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스스로 의롭게 판단하고 있는 주권행사와 그 합리성을 말하고 있을 때에 그의 증거적 사태는 사실로서 나타나면서도 실제로는 욥의 모습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합리성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조문객으로 온 세 친구들은 책망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리성만 생각하느라고 그 정당함의 시비(是非)를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증거적인 대답을 하지 못함은 또한 책망을 받아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시고 우리에게 행하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그냥 어떤 분별력도 없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그의 연소함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연장자의 권위라고 함과 그 질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여야 함의 믿음의 권고를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한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행하며 우리의 존재와 삶의 기준과 합당함을 찾는 삶을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정당함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뜻하심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또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주의 말씀하심의 권면하심의 소원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주어질 때에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는 부인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억측을 부리며 하나님을 잘못되게 증거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경건의 유익으로 대하고 있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이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와 같이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서 세상에 증거하는 종들의 모습으로 세우심을 받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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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15, 2004
그 길은 광야라
2004년4월1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8:26-40
그 길은 광야라
해마다 이맘때면, 중국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 바람에 따른 피해를 직접적으로 보게 되어지는데, 이처럼 주기적인 발생이라고 하는 것이 지구의 자전에 따른 공기의 이동이라고 함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지구의 태양주위를 돌게 되어지는 공전의 영향력인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도되어지는 자료에서 그러한 사막에서의 모래바람이라고 하는 것의 형성과 그 인근의 사람들의 피해라고 하는 것을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것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판단으로는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바람으로 앞의 시계(視界)라고 하는 것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시계의 불투명과 각종 예상되어지는 어려움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보면서 구약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40년을 지나게 하심과 그 광야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증거의 말씀으로 그 말씀의 식탁으로 인도하심을 주목하며 기뻐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이 주의 사자의 말씀하심에 따라서 광야 가사로 가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가운데서 이사야 말씀에 대하여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빌립을 보내셔서 그 말씀에서 예수를 가르치심에 빌립이 그 지나던 곳에 물이 있음에 그가 세례를 받기 원하고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주의 사자가 홀연히 빌립을 데려가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빌립의 행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소도에서 나타나고 여러 성읍에 복음을 전하며 가이사랴에 돌아왔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과 그러한 보편교회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서 주의 길이 예비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마음에 담는 것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의 분별과 실제의 신앙생활을 따라 행하게 되어지는 기독인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사모하고 있는 간다게의 내시는 광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광야라는 곳에 소속적의미를 둔 자였습니다. 그러한 자는 그 광야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는데 이는 광야식탁이 어떤 것인지 그 기쁨을 노래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짐과 그러한 가운데서 교제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광야라고 하는 곳 등을 기댈 곳이 없는 그러한 곳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 그 원수의 표적되어지기 쉬운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설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은혜를 받은 다윗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내시에게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함의 기독교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의 그 성도된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의 마차에 성령께서 타고오심에 대한 은혜와 같으며,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요한과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증거가 바로 에디오피아의 간다게 여왕의 내시와 주의 사자의 인도함을 받은 집사 빌립, 두 증인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만 설정할 뿐 진정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여러 가능성들만이 무성히 열려진 광야와 같은 그러한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주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는 주께서 베푸시는 광야에서의 식탁이 주어진다는 사실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러한 광야의 식탁을 마음에 두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날 때에 주께서 베푸실 상이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써의 광야의 식탁을 믿음으로 구하고 주시는 은혜를 입어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쁨이 항상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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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8:26-40
그 길은 광야라
해마다 이맘때면, 중국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 바람에 따른 피해를 직접적으로 보게 되어지는데, 이처럼 주기적인 발생이라고 하는 것이 지구의 자전에 따른 공기의 이동이라고 함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지구의 태양주위를 돌게 되어지는 공전의 영향력인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도되어지는 자료에서 그러한 사막에서의 모래바람이라고 하는 것의 형성과 그 인근의 사람들의 피해라고 하는 것을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것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판단으로는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바람으로 앞의 시계(視界)라고 하는 것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시계의 불투명과 각종 예상되어지는 어려움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보면서 구약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40년을 지나게 하심과 그 광야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증거의 말씀으로 그 말씀의 식탁으로 인도하심을 주목하며 기뻐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이 주의 사자의 말씀하심에 따라서 광야 가사로 가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가운데서 이사야 말씀에 대하여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빌립을 보내셔서 그 말씀에서 예수를 가르치심에 빌립이 그 지나던 곳에 물이 있음에 그가 세례를 받기 원하고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주의 사자가 홀연히 빌립을 데려가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빌립의 행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소도에서 나타나고 여러 성읍에 복음을 전하며 가이사랴에 돌아왔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과 그러한 보편교회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서 주의 길이 예비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마음에 담는 것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의 분별과 실제의 신앙생활을 따라 행하게 되어지는 기독인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사모하고 있는 간다게의 내시는 광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광야라는 곳에 소속적의미를 둔 자였습니다. 그러한 자는 그 광야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는데 이는 광야식탁이 어떤 것인지 그 기쁨을 노래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짐과 그러한 가운데서 교제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광야라고 하는 곳 등을 기댈 곳이 없는 그러한 곳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 그 원수의 표적되어지기 쉬운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설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은혜를 받은 다윗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내시에게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함의 기독교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의 그 성도된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말씀의 마차에 성령께서 타고오심에 대한 은혜와 같으며,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요한과 같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증거가 바로 에디오피아의 간다게 여왕의 내시와 주의 사자의 인도함을 받은 집사 빌립, 두 증인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만 설정할 뿐 진정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여러 가능성들만이 무성히 열려진 광야와 같은 그러한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주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는 주께서 베푸시는 광야에서의 식탁이 주어진다는 사실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러한 광야의 식탁을 마음에 두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육신의 양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날 때에 주께서 베푸실 상이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써의 광야의 식탁을 믿음으로 구하고 주시는 은혜를 입어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쁨이 항상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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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12, 2004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실제
2004년4월11일 소망교회 부활주일낮예배설교
롬4:1-25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실제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19:1).. 우리가 하나님의 만들어주신 세상을 바라보면 비록 죄로 인해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무한의 모습으로 의식되어지는 것도 그러한 영광의 하나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적인 무한이 절대의 무한을 반영하고 의식하도록 증거하고 있다는 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각계 각층의 계층이 존재하고 여러 분야가 존재하고 그러한 분야에서도 내재적 탐구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문의 분야라고 하는 것 그 어떤 특정 학문의 분야라고 함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무한히 열려진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다원화 된 세상의 모습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함이 옳은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실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머물러버리고 마는 옳지 못한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여러 세계를 주목하는 가운데서 식상한 영혼들이라고 함의 피곤함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함을 알지 못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계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 핵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함이 피곤한 인생들의 다원화 되어진 가운데서의 방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이 세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의 실체와 그 실체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의로 여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이제 다윗의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그 할례에 대한 것을 말하며 할례보다도 무할례시에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을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입은 것과 그러한 것의 행함의 한 증표요 확증적인 완성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할례를 이해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으로써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함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 말이 맺어지고 있고 그것의 종국적인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지도록하심에 따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신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첫 부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라고 하심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첫 부분은 아브라함에 대하여서 둘째 부분은 다윗을 말하고 있고 동시에 그 육신적 언약의 표현으로써의 할례로서 말하고 있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의 온전한 완성이라고 함을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이 공식적인 이름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의 메시아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며 그가 우리의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가운데서의 우리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즉 우리의 존재가 합당하다고 함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의 의로우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사람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우리 성도가 그러한 정체성을 입는 존재적 정당함을 하나님께 얻게 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관적인 차원에서도 실제적인 의식을 부여하여 받을 수 있는 권한도 이미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짐은 하나님의 구별하심의 주권적 행함이라고 함의 영광과 권세가 교회에게 주어진 것에서 기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라고 하신 주의 세우시는 교회의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그 믿음으로 어떤 것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분별하여서 실제로 받음에 만물을 회복시키는 자들로서의 일반적인 사역적인 삶의 권세를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주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다원화 되어지는 것들의 실재를 바라볼 수 있고 결코 넘어지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정당함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심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주시는 권세 안에서의 실제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의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 주권적 권세까지도 한정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세상의 진정한 실재들을 분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따라 우리의 허물이 사함을 받게 되어지고 우리의 존재와 삶에 진정한 정당함과 그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기독교적인 삶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세계를 알게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를 마음속에 담을 때에 알게 되어지며 세상을 알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마음속에 담는 자들로써 참된 주의 성도들로써의 기쁨과 행복이 평생에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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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4:1-25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실제
오늘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19:1).. 우리가 하나님의 만들어주신 세상을 바라보면 비록 죄로 인해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무한의 모습으로 의식되어지는 것도 그러한 영광의 하나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적인 무한이 절대의 무한을 반영하고 의식하도록 증거하고 있다는 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각계 각층의 계층이 존재하고 여러 분야가 존재하고 그러한 분야에서도 내재적 탐구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문의 분야라고 하는 것 그 어떤 특정 학문의 분야라고 함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무한히 열려진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다원화 된 세상의 모습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함이 옳은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실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머물러버리고 마는 옳지 못한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여러 세계를 주목하는 가운데서 식상한 영혼들이라고 함의 피곤함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함을 알지 못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계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 핵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함이 피곤한 인생들의 다원화 되어진 가운데서의 방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이 세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마 1:1)의 실체와 그 실체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의로 여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이제 다윗의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그 할례에 대한 것을 말하며 할례보다도 무할례시에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을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입은 것과 그러한 것의 행함의 한 증표요 확증적인 완성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할례를 이해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으로써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함의 언약을 기반으로 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 말이 맺어지고 있고 그것의 종국적인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지도록하심에 따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신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첫 부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라고 하심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첫 부분은 아브라함에 대하여서 둘째 부분은 다윗을 말하고 있고 동시에 그 육신적 언약의 표현으로써의 할례로서 말하고 있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의 온전한 완성이라고 함을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이 공식적인 이름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의 메시아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며 그가 우리의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가운데서의 우리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즉 우리의 존재가 합당하다고 함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의 의로우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사람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우리 성도가 그러한 정체성을 입는 존재적 정당함을 하나님께 얻게 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관적인 차원에서도 실제적인 의식을 부여하여 받을 수 있는 권한도 이미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짐은 하나님의 구별하심의 주권적 행함이라고 함의 영광과 권세가 교회에게 주어진 것에서 기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라고 하신 주의 세우시는 교회의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그 믿음으로 어떤 것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분별하여서 실제로 받음에 만물을 회복시키는 자들로서의 일반적인 사역적인 삶의 권세를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주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다원화 되어지는 것들의 실재를 바라볼 수 있고 결코 넘어지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정당함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심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주시는 권세 안에서의 실제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의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 주권적 권세까지도 한정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세상의 진정한 실재들을 분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따라 우리의 허물이 사함을 받게 되어지고 우리의 존재와 삶에 진정한 정당함과 그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기독교적인 삶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세계를 알게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를 마음속에 담을 때에 알게 되어지며 세상을 알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마음속에 담는 자들로써 참된 주의 성도들로써의 기쁨과 행복이 평생에 함께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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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서명(mark)
2004년4월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1:1-40
욥의 서명(mark)
사람들의 건강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보약이나 보양식과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음식문화에 곁들여지는 그러한 것들로써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잘 익은 호박에 속을 긁어내고 그곳에 여러 가지 고기나 또는 다른 약재를 넣어서 달이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호박 자체의 영양가보다는 호박의 좋은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보조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의 호박은 그 음식에서 필수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한 가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욥의 표현이 되어지는 자신의 서명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뜻하심이 자신을 포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하게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판단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음과 그것이 그의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처녀에게 상관성이 있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두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강조적 의미로써 경건에 있어서 음란적인 측면의 판단을 받지 않는 자였음에 대한 것을 역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16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음에 대한 것과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지 않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이 금으로 소망을 삼지 않았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또한 재판을 굽게 한 것이 없었음에 대한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자신이 사인하여 내놓은 서명하여 내놓은 것이 이러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소송장을 내놓아 보라는 것과 그렇지 못함에 대한 조소적 표현도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행함과 그의 언급의 상대적 진실성이라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합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또한 상대적으로 치우치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의 절제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모습으로 여전히 시험에 넘어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의 고난 받음과 핍박받음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이미 기억하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장과 2장 중반 앞까지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욥의 상대적인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 하나님의 자랑이었으며 그러한 것의 시비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단의 의도성이라고 하는 실제의 표현을 허용하심에서 하나님의 자랑으로서의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하는 욥의 모습과 서명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찾다가 그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 주권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그러한 자기 연민에서 기도하고 있는 욥은 그 기도의 내용적 연속성으로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자신의 경건의 열매를 내놓으며 자신의 서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들에게는 주인을 위한 변론과 주인의 뜻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종이 종 자신의 것을 위해 주인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도용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의 종들 주의 종들이며 주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금기(禁忌)라기보다는 절제가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좀더 분별하고 한정된 가운데서의 자유의 실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서 변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합당한 합목적적인 정당성의 한정적 허용에 따른 자신에 대한 언급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욥은 전혀 그러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변명으로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요소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참된 경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행실이면서도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절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가운데서 실제로는 자신에게 적용되어질 수 있는 실제의 증거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나타내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절제가 필요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의 기본적인 근원의 문제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절제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서 종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함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금기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별적인 실제를 따른 판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한정적 의미에서의 자신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는 종들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야 함을 주의하도록 권고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주 안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혜가 있어서 넘어지는 욥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시는 욥의 모습과 같은 정체성으로 세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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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1:1-40
욥의 서명(mark)
사람들의 건강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의 한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보약이나 보양식과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음식문화에 곁들여지는 그러한 것들로써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잘 익은 호박에 속을 긁어내고 그곳에 여러 가지 고기나 또는 다른 약재를 넣어서 달이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호박 자체의 영양가보다는 호박의 좋은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보조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의 호박은 그 음식에서 필수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한 가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욥의 표현이 되어지는 자신의 서명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뜻하심이 자신을 포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하게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판단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음과 그것이 그의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처녀에게 상관성이 있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두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강조적 의미로써 경건에 있어서 음란적인 측면의 판단을 받지 않는 자였음에 대한 것을 역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16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음에 대한 것과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지 않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이 금으로 소망을 삼지 않았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또한 재판을 굽게 한 것이 없었음에 대한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욥은 자신이 사인하여 내놓은 서명하여 내놓은 것이 이러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소송장을 내놓아 보라는 것과 그렇지 못함에 대한 조소적 표현도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의 행함과 그의 언급의 상대적 진실성이라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합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또한 상대적으로 치우치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의 절제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모습으로 여전히 시험에 넘어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의 고난 받음과 핍박받음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이미 기억하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장과 2장 중반 앞까지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욥의 상대적인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 하나님의 자랑이었으며 그러한 것의 시비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단의 의도성이라고 하는 실제의 표현을 허용하심에서 하나님의 자랑으로서의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하는 욥의 모습과 서명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찾다가 그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 주권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그러한 자기 연민에서 기도하고 있는 욥은 그 기도의 내용적 연속성으로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자신의 경건의 열매를 내놓으며 자신의 서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들에게는 주인을 위한 변론과 주인의 뜻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종이 종 자신의 것을 위해 주인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도용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주의 종들 주의 종들이며 주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금기(禁忌)라기보다는 절제가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좀더 분별하고 한정된 가운데서의 자유의 실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서 변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합당한 합목적적인 정당성의 한정적 허용에 따른 자신에 대한 언급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욥은 전혀 그러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변명으로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요소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참된 경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행실이면서도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절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가운데서 실제로는 자신에게 적용되어질 수 있는 실제의 증거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나타내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절제가 필요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의 기본적인 근원의 문제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절제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서 종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함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금기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별적인 실제를 따른 판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한정적 의미에서의 자신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는 종들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야 함을 주의하도록 권고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주 안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혜가 있어서 넘어지는 욥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시는 욥의 모습과 같은 정체성으로 세움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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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08, 2004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2004년4월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8:1-25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기쁨으로써 사람들이 그 자신의 존재를 경영하는 가운데서의 주어지는 분복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쟁취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며 또한 본래적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인식이 확산되어진 것도 옳지 못하면서도 현상적인 사실로써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옳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 그 전제가 되어지는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고민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기쁨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증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가운데서 그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크게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빌립의 전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들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인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성에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믿고 세례를 받음에 따라서 큰 능력도 나타남을 보고 놀라고 있음과 이후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시몬은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베드로의 책망을 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고 그러한 말에 대한 것의 철회와 두 사도들의 증거가 계속되어짐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의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언급한 두 가지 중에 먼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과 그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이라는 바울을 가르치는 말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있는 성에 있었던 시몬도 자칭 큰 자라는 입장과 백성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 인생의 존재적 경영과 그에 따른 주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행하는 자의 모습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소신 있게 배척하고 있는 지혜롭지 못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비록 잘못된 가운데서의 소신 있는 학문적 기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정황적 차원에서 동의해줄 수도 있는 여지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자들의 입장은 주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책망이 있게 되어지는데 정작 시몬은 그 책망자체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기를 구하라고 함으로써 그 중심을 드러낸 것의 평가를 의식하는 정도에 이르렀고 사울은 그러한 판단의 책망을 받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나중에 그러한 회개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입었던 것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열두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가다가 누가 큰가 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모에게 찾는 것과 같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임을 가르쳐주셨던 것과 같은 문맥적 정황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큰 자의 논쟁에 의미적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는 주의 구원의 기쁨이라고 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가 없어 단지 청함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일관할 뿐 주의 택한 백성으로써의 실제적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주목하겠습니다.
참으로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때에는 삶의 경영이라고 함과 그에 따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그러한 슬픔을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짐으로 그 전파되어지는 그 곳에 주의 구원을 인한 큰 기쁨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사울로서 칭하는 자리에 섰을 때에 마땅하게 생각한 것에 대하여서 의식하며 주의 증거를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을 회심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덧없음과 평가절하 되어진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라는 것은 그 결실이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성에 큰 기쁨의 근원이 되어지는 주의 택한 백성들의 그리스도를 좇음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현실적인 실제와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와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는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세상이 인식하지 못하는 주 안에서의 기쁨의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구원받은 자들로써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기쁨을 낚는 자들로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듯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말씀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위성으로써 주께서 주신 내 마음에 소원하는 마음에 주신 은혜로써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더욱 항상 기쁨과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잊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라고 함을 경영하는 것을 접으려고 하는 일들이 있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는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님을 말하게 됩니다.
진정한 실제의 의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회의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경영에서 기쁨을 빼앗기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든지 아니면 기쁨이 상실되어진 가운데서 노예적인 개념으로 일관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과 우리의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른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 기쁨을 상실해야 한다는 강요적 정황을 만날 때에도 기도할 수 있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삶의 실제를 분별하며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 주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고통 속에서도 참된 기쁨을 길러내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리에 들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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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8:1-25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기쁨으로써 사람들이 그 자신의 존재를 경영하는 가운데서의 주어지는 분복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쟁취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며 또한 본래적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인식이 확산되어진 것도 옳지 못하면서도 현상적인 사실로써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옳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 그 전제가 되어지는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고민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기쁨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증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가운데서 그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크게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빌립의 전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들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인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성에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믿고 세례를 받음에 따라서 큰 능력도 나타남을 보고 놀라고 있음과 이후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시몬은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베드로의 책망을 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고 그러한 말에 대한 것의 철회와 두 사도들의 증거가 계속되어짐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의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언급한 두 가지 중에 먼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과 그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이라는 바울을 가르치는 말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있는 성에 있었던 시몬도 자칭 큰 자라는 입장과 백성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 인생의 존재적 경영과 그에 따른 주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행하는 자의 모습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소신 있게 배척하고 있는 지혜롭지 못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비록 잘못된 가운데서의 소신 있는 학문적 기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정황적 차원에서 동의해줄 수도 있는 여지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자들의 입장은 주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책망이 있게 되어지는데 정작 시몬은 그 책망자체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기를 구하라고 함으로써 그 중심을 드러낸 것의 평가를 의식하는 정도에 이르렀고 사울은 그러한 판단의 책망을 받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나중에 그러한 회개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입었던 것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열두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가다가 누가 큰가 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모에게 찾는 것과 같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임을 가르쳐주셨던 것과 같은 문맥적 정황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큰 자의 논쟁에 의미적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는 주의 구원의 기쁨이라고 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가 없어 단지 청함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일관할 뿐 주의 택한 백성으로써의 실제적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주목하겠습니다.
참으로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때에는 삶의 경영이라고 함과 그에 따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그러한 슬픔을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짐으로 그 전파되어지는 그 곳에 주의 구원을 인한 큰 기쁨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사울로서 칭하는 자리에 섰을 때에 마땅하게 생각한 것에 대하여서 의식하며 주의 증거를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을 회심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덧없음과 평가절하 되어진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라는 것은 그 결실이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성에 큰 기쁨의 근원이 되어지는 주의 택한 백성들의 그리스도를 좇음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현실적인 실제와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와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는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세상이 인식하지 못하는 주 안에서의 기쁨의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구원받은 자들로써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기쁨을 낚는 자들로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듯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말씀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위성으로써 주께서 주신 내 마음에 소원하는 마음에 주신 은혜로써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더욱 항상 기쁨과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잊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라고 함을 경영하는 것을 접으려고 하는 일들이 있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는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님을 말하게 됩니다.
진정한 실제의 의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회의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경영에서 기쁨을 빼앗기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든지 아니면 기쁨이 상실되어진 가운데서 노예적인 개념으로 일관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과 우리의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른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 기쁨을 상실해야 한다는 강요적 정황을 만날 때에도 기도할 수 있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삶의 실제를 분별하며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 주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고통 속에서도 참된 기쁨을 길러내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리에 들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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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4월 06, 2004
욥이 넘어진 시험
2004년4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0:1-31
욥이 넘어진 시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든지 아니면 피해를 당했다든지 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경우는 그 사람은 그럴만한 소질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받아 마땅하다고 함을 말하는가 하면 또 한 경우는 그 당사자가 그럴 만한 소질과 경향이라고 함이 의심되어질 때에는 상당히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기서 전체에 있어서도 상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으로써 욥이 시험에 든 모습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존재적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성례전적인 입장이 되어질 수 있다는 증거적 인물이라고 함을 유념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자랑하심에 있어서 그러한 모습을 잃고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때에 욥의 넘어짐은 상당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성도들이 유념하여 둘 만한 것이라고 함도 마음에 가지게 하시는 말씀으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29장에 이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던 날에 있었던 은혜와는 달리 느껴지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욥 자신보다 젊은 자들이 자신을 기롱하고 있음에 그들이 자기 의 양떼를 지키는 개중에도 둘만한 자가 못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러한 행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으로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규정한 그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서 비판적 입장으로 하나님이 욥 그 자신의 줄을 늘어나게 하심으로 그들이 벗어남에 대한 것으로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에서 그들의 주제권이라고 함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말함으로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되어진 자들로 인해서 부당하게 자신의 영광이 바람같이 몰리고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구름같이 지나간 자신의 영광이라고 함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 연민의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자신의 연민에서 하나님께 인지상정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분별함에 그 한계와 바른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당한 시험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 속에서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이러한 류의 시험에 대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는 권고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또한 더욱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29장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날이 따로 있다는 그러한 생각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는 상대적인 그러한 공백기가 있다는 차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날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그렇지 않은 날에 있어서 자기 연민에 대한 판단으로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의 순전한 자리에서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차이에서 욥의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그 순전함을 이해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그의 시험에 들게 한 그러한 정황적 모습까지도 이해하지만 시험에 들고 있는 그 중심을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는 이 자신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자신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들은 개중에 둘 수 없는 자들이며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짐승과 같이 쫓겨나서 이슬을 맞으며 그의 지혜가 하늘로서 그에게 돌아오는 때까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였음과 같은 것을 마음에 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이 조문객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세상의 시험하는 자들의 모습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욥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라고 함을 의지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과 신실함을 의지하지 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인식하고 있는 조문객들의 실체는 죄악 가운데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실체가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을 욥이 지적하고 있는 것 또한 그를 통하여 읽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시험적인 정체성을 볼 때에 그것이 성도들을 잡았을 때에 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시험에 들고 있는 가운데서의 그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 대한 실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소유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위반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적인 측면의 예를 든다면 나르시즘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체성을 알고 세상에서 더욱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없이 자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의 판단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갖춘다고 하여도 시험에 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주님이 이러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하며 보호하며 잘 경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주어진 형태만으로써 자신의 소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객관성을 잃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어진 나의 삶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 주권은 부여되어진 주권이지 자신의 임의적으로 취하는 판단적인 주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위험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정적인 판단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실존을 잊어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잃게 되어지는 시험으로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그러한 객관적인 사고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실제의식을 가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은혜를 입는 가운데서 악으로 좇아 나는 시험이라고 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는 온전한 은혜의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Preacher's main we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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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0:1-31
욥이 넘어진 시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든지 아니면 피해를 당했다든지 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경우는 그 사람은 그럴만한 소질과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받아 마땅하다고 함을 말하는가 하면 또 한 경우는 그 당사자가 그럴 만한 소질과 경향이라고 함이 의심되어질 때에는 상당히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욥기서 전체에 있어서도 상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으로써 욥이 시험에 든 모습에 대한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존재적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성례전적인 입장이 되어질 수 있다는 증거적 인물이라고 함을 유념하게 되어지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그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자랑하심에 있어서 그러한 모습을 잃고 시험에 들게 되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때에 욥의 넘어짐은 상당한 주목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성도들이 유념하여 둘 만한 것이라고 함도 마음에 가지게 하시는 말씀으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29장에 이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던 날에 있었던 은혜와는 달리 느껴지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욥 자신보다 젊은 자들이 자신을 기롱하고 있음에 그들이 자기 의 양떼를 지키는 개중에도 둘만한 자가 못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러한 행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으로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규정한 그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서 비판적 입장으로 하나님이 욥 그 자신의 줄을 늘어나게 하심으로 그들이 벗어남에 대한 것으로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에서 그들의 주제권이라고 함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말함으로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되어진 자들로 인해서 부당하게 자신의 영광이 바람같이 몰리고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구름같이 지나간 자신의 영광이라고 함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 연민의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자신의 연민에서 하나님께 인지상정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서 분별함에 그 한계와 바른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당한 시험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 속에서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이러한 류의 시험에 대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는 권고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또한 더욱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29장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날이 따로 있다는 그러한 생각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는 상대적인 그러한 공백기가 있다는 차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날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그렇지 않은 날에 있어서 자기 연민에 대한 판단으로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의 순전한 자리에서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차이에서 욥의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그 순전함을 이해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그의 시험에 들게 한 그러한 정황적 모습까지도 이해하지만 시험에 들고 있는 그 중심을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는 이 자신의 조문객으로 온 자들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자신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들은 개중에 둘 수 없는 자들이며 고토에서 쫓겨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짐승과 같이 쫓겨나서 이슬을 맞으며 그의 지혜가 하늘로서 그에게 돌아오는 때까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였음과 같은 것을 마음에 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이 조문객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의 실존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세상의 시험하는 자들의 모습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욥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라고 함을 의지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과 신실함을 의지하지 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인식하고 있는 조문객들의 실체는 죄악 가운데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실체가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을 욥이 지적하고 있는 것 또한 그를 통하여 읽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시험적인 정체성을 볼 때에 그것이 성도들을 잡았을 때에 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이 시험에 들고 있는 가운데서의 그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 대한 실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소유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위반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적인 측면의 예를 든다면 나르시즘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체성을 알고 세상에서 더욱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없이 자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의 판단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갖춘다고 하여도 시험에 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주님이 이러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하며 보호하며 잘 경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주어진 형태만으로써 자신의 소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객관성을 잃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어진 나의 삶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 주권은 부여되어진 주권이지 자신의 임의적으로 취하는 판단적인 주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위험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정적인 판단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실존을 잊어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이라고 함을 잃게 되어지는 시험으로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그러한 객관적인 사고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실제의식을 가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은혜를 입는 가운데서 악으로 좇아 나는 시험이라고 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는 온전한 은혜의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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