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예배설교
눅 2:1-21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거룩한 이의 탄생,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기쁨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이 상대적인 모순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합당한 진리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 보여지는 화면에서 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이 있음을 주목하면서 상생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도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라고 하는 그 뜻하심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오셨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음을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임을 인하여서 유대를 항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을 인함이라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나신 그 지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것을 증거하고, 이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진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빨리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함으로 인해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게 되는 것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돌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주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는 가운데 분별되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기 예수님을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모습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간략하게 주목하게 된다면, 가아사 아구스도 때에 나타난 호적하도록 명한 시대적 상황과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와 마리아의 사태에 대한 이해와 중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호적하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이것은 통치자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잘못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써의 세상적 모습이면서도 주 안에서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며 헤아리심의 일반적인 자기계시로서의 구별되어진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민수기를 중심으로 보면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그 광야교회로서의 출발하기 전에 그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의 백성들을 계수한다는 것이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로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자기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마음에 두도록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의 증거를 그 인구조사에서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발락의 저주를 위한 발람을 통한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으로 염병이 있어 죽게 되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비느하스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가운데서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분별하여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들도록하시는 것으로써의 인구조사가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주의 백성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도록 그의 백성을 헤아림으로써의 본질적 성격에 따른 인구조사와 악을 선으로 이기게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위한 가운데서 그 백성을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의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러한 인구조사에서는 그러한 성격의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유익적 개념으로써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 인구조사를 행하는 가운데 그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적인 입장인데 그와 같은 세상적 입장으로써의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이 통치자의 안목과 필요에 따른 것을 위한 호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관리되어지고 헤아리게 되는 의도와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시행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나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러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여서 자신의 백성들을 헤아리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있고 그 백성들과 같이 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자기 계시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을 그 시대적 악함에서도 그것에 국한되어지지 않고 그들을 헤아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인데,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음에 대한 증거와 그 찬송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그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다는 것의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의 증거적 사실에 앞서 그것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언이 그 당시 이후에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정황적 사태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함까지도 예언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5장에서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 5:2~6)
본문의 예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의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아기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을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시기 전부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양무리를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에 가르쳐주신 주기도(마 6:9~13)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주장하시는 가운데서 사실규정을 절대 정당하게 말씀하심에 따라 구주 예수님 안에서 정당한 사실을 비로소 말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의 중심에 주의 탄생하심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오심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교에서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수 있는 한 예로써, 모 방송사 오늘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초월하여서..'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월' 또는 '초월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보편 자체나, 보편으로의 행보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신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는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도 동일한 기술적표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적인 보편 상대적인 무한개념의 임의적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불교도들과의 연합도 취하고 있는 것이 구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의 '다르마'라는 것은 역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규정을 넘어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 비로소 합당한 정당함을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편을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를 규정하는 그러한 사상적 보편의 개체적 특성을 넘어선다는 것이 구 가톨릭교와 불교의 연합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으로 같이 활동하고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스처로써, 열린다는, 틀을 깬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상식적인 보편적 입장의 인식에서는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원적으로 종교라는 어떤 실재자와 연결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규정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이 그 실재자라고 하는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다 신을 의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미가서 5장에 나타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보편의 재가를 통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항상 예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적 보편이라는 개념과 그 틀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써의 보편을 의지하는 구교 즉 가톨릭교의 입장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의 뜻하심을 비로소 받들지 못한다는 실제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 그 열림이라는 개념의 틀을 넘어서 다르마라는 보편을 상정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인 보편이요 절대의 보편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마리아의 사태인식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변경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의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위성을 비로소 받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온 백성에게 증거되어지는 기쁜 소식과 땅위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적 예언이 되어지는 것은 미가서 5장에서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8)
주의 택한 백성들이 열국중과 여러 백성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들을 권면하시는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며, 그것은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의 '호적'이라는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증거를 구별하셔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주 예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고후 1:19)을 읽게 되는 종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함의 사실로서의 존재적 무리가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화한 사람들의 보편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통용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관계들과는 달리, 주의 헤아리심의 사실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들에게 온 백성에서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의 증인적 증거를 몸소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류와 또한 실제적인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를 받게되는 종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미가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미 5:4 中)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함'(마 6:9)의 중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어서'(고후 1:19) 그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 규명을 합당하게 받으며 행하는 사람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적 인식과 그 표현은 보편이라고 함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임의적인 상대적 보편의 개념의 변종인 틀을 해체시킨다는 개념에서의 열림이라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과 그 재가 있는 상대적인 보편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개념의 보편성이라고 함을 위해서 상대방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관용의 재스처를 취함으로 사람들의 인식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구걸하는 개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1~9)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온세상의 구주이시면서 주의 택한 백성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이해의 결핍과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서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임의적인 것이요 절대적이지 못할 때에 그러한 주장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주 앞에서 부끄러움의 사실의 판단을 비로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그러한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러한 표현과 사실로서 절대적 사실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이미 예언되어진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미 5:4)
온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그들에게 주신 바된 것들이 모두 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실존적 구원과 일반적인 잘됨의 구원으로서 그들의 모든 영향력의 실존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사실도 어디까지냐는 정도적인 규범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실제적 주의 심판하실 때까지 내버려두도록 말씀하심과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데로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치 실존적인 신이라고 하는 전제로 상관할 사실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불의한 청지기들로서의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제스처로 에큐메니칼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나와서 오히려 들녁에 머문다고 하여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고 하심의 소리를 전해들은 이들 목자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주의 나심의 뜻하심과 증거하심을 찬양하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 믿음대로 이 땅에서와 주의 나라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눅 2:1-21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거룩한 이의 탄생,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기쁨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이 상대적인 모순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합당한 진리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 보여지는 화면에서 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이 있음을 주목하면서 상생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도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라고 하는 그 뜻하심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오셨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음을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임을 인하여서 유대를 항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을 인함이라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나신 그 지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것을 증거하고, 이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진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빨리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함으로 인해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게 되는 것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돌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주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는 가운데 분별되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기 예수님을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모습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간략하게 주목하게 된다면, 가아사 아구스도 때에 나타난 호적하도록 명한 시대적 상황과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와 마리아의 사태에 대한 이해와 중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호적하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이것은 통치자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잘못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써의 세상적 모습이면서도 주 안에서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며 헤아리심의 일반적인 자기계시로서의 구별되어진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민수기를 중심으로 보면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그 광야교회로서의 출발하기 전에 그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의 백성들을 계수한다는 것이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로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자기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마음에 두도록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의 증거를 그 인구조사에서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발락의 저주를 위한 발람을 통한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으로 염병이 있어 죽게 되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비느하스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가운데서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분별하여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들도록하시는 것으로써의 인구조사가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주의 백성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도록 그의 백성을 헤아림으로써의 본질적 성격에 따른 인구조사와 악을 선으로 이기게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위한 가운데서 그 백성을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의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러한 인구조사에서는 그러한 성격의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유익적 개념으로써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 인구조사를 행하는 가운데 그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적인 입장인데 그와 같은 세상적 입장으로써의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이 통치자의 안목과 필요에 따른 것을 위한 호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관리되어지고 헤아리게 되는 의도와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시행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나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러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여서 자신의 백성들을 헤아리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있고 그 백성들과 같이 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자기 계시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을 그 시대적 악함에서도 그것에 국한되어지지 않고 그들을 헤아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인데,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음에 대한 증거와 그 찬송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그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다는 것의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의 증거적 사실에 앞서 그것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언이 그 당시 이후에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정황적 사태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함까지도 예언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5장에서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 5:2~6)
본문의 예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의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아기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을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시기 전부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양무리를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에 가르쳐주신 주기도(마 6:9~13)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주장하시는 가운데서 사실규정을 절대 정당하게 말씀하심에 따라 구주 예수님 안에서 정당한 사실을 비로소 말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의 중심에 주의 탄생하심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오심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교에서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수 있는 한 예로써, 모 방송사 오늘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초월하여서..'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월' 또는 '초월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보편 자체나, 보편으로의 행보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신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는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도 동일한 기술적표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적인 보편 상대적인 무한개념의 임의적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불교도들과의 연합도 취하고 있는 것이 구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의 '다르마'라는 것은 역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규정을 넘어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 비로소 합당한 정당함을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편을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를 규정하는 그러한 사상적 보편의 개체적 특성을 넘어선다는 것이 구 가톨릭교와 불교의 연합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으로 같이 활동하고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스처로써, 열린다는, 틀을 깬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상식적인 보편적 입장의 인식에서는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원적으로 종교라는 어떤 실재자와 연결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규정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이 그 실재자라고 하는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다 신을 의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미가서 5장에 나타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보편의 재가를 통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항상 예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적 보편이라는 개념과 그 틀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써의 보편을 의지하는 구교 즉 가톨릭교의 입장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의 뜻하심을 비로소 받들지 못한다는 실제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 그 열림이라는 개념의 틀을 넘어서 다르마라는 보편을 상정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인 보편이요 절대의 보편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마리아의 사태인식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변경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의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위성을 비로소 받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온 백성에게 증거되어지는 기쁜 소식과 땅위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적 예언이 되어지는 것은 미가서 5장에서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8)
주의 택한 백성들이 열국중과 여러 백성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들을 권면하시는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며, 그것은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의 '호적'이라는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증거를 구별하셔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주 예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고후 1:19)을 읽게 되는 종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함의 사실로서의 존재적 무리가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화한 사람들의 보편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통용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관계들과는 달리, 주의 헤아리심의 사실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들에게 온 백성에서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의 증인적 증거를 몸소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류와 또한 실제적인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를 받게되는 종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미가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미 5:4 中)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함'(마 6:9)의 중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어서'(고후 1:19) 그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 규명을 합당하게 받으며 행하는 사람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적 인식과 그 표현은 보편이라고 함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임의적인 상대적 보편의 개념의 변종인 틀을 해체시킨다는 개념에서의 열림이라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과 그 재가 있는 상대적인 보편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개념의 보편성이라고 함을 위해서 상대방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관용의 재스처를 취함으로 사람들의 인식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구걸하는 개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1~9)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온세상의 구주이시면서 주의 택한 백성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이해의 결핍과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서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임의적인 것이요 절대적이지 못할 때에 그러한 주장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주 앞에서 부끄러움의 사실의 판단을 비로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그러한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러한 표현과 사실로서 절대적 사실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이미 예언되어진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미 5:4)
온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그들에게 주신 바된 것들이 모두 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실존적 구원과 일반적인 잘됨의 구원으로서 그들의 모든 영향력의 실존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사실도 어디까지냐는 정도적인 규범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실제적 주의 심판하실 때까지 내버려두도록 말씀하심과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데로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치 실존적인 신이라고 하는 전제로 상관할 사실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불의한 청지기들로서의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제스처로 에큐메니칼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나와서 오히려 들녁에 머문다고 하여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고 하심의 소리를 전해들은 이들 목자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주의 나심의 뜻하심과 증거하심을 찬양하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 믿음대로 이 땅에서와 주의 나라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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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