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11, 2007

손 마른 인생

2007년 12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6:1-11
네 손을 내밀라

어떤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그 손으로 집어주며 먹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받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는 있어서 그 받는 사람의 절실한 입장이라고 할 때에 받아 먹을 수도 있고 또 굴욕적 강요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적 여지를 감안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신앙적 실제의식에 따른 판단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절대'라는 획일적 고립적 성립되지 않는 그 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성은 자존의 자기 정당함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상대적면서도 절대적인 실제의식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절대자 하나님 자신의 받으심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며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목해 볼 때에, '손'이라는 표현이 증거로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과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내용의 기술적(記述的) 전반적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적 증거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에 따라 어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적 위반을 말하면서 시비(是非)를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임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아 송사할 빙거를 찾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심에 따라 그 손이 회복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송사할 빙거를 찾던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동일본문과 문맥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되어진 복음서 기자의 의식이 또한 주의 말씀에 따른 증거를 위해 특별 영적인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되어지는 해석적 당위성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안식일이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 성례적 기호적 표적으로서의 손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행하신 성찬이 그 전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증거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시적 표적적인 거룩한 예표로서 읽을 수 있는 성례로서 각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고쳐진 '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쉼이라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 안에서 그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을 나타내는 부활하신 날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시간적 개념의 전통적 안식의 규정적 입장보다 바른 안식의 실제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으로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하심과 섭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거짓을 범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읽지 않고 그가 쓴 책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과 같이, 그것을 주장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우기는 것이요 잘못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의 실존이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 자기 속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자신이 그와 같은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셨고 그 안식에서 주권적 정당함을 취하심에 따라 상대적 관점의 시비라는 것에 실존적 정당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제자들의 인식과 행보라는 것에 있어서의 판단도 주의 뜻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경우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첫 안식일에 있는 주의 답변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바로 '세상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나는 지팡이가 뱀과 같이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읽게 하시는 것이며, 또한 무슨 상대적인 말들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시려는 것으로 연결되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손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하여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일로서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손 마르다는 개념이 위생적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럽다는 개념으로 바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정상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몸의 질병적 개념으로만 볼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정당함에서 판단되는 행위들로서 정체성을 잃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개념이 이입되어짐의 당위성을 설정함의 정당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가인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벨보다 가인이 더 수고하고 노력해서 밭의 소산들을 드렸다고 하는 측면에서 더 받음직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서의 성례전적인 양을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보와 그려한 행함의 손은 하나님께 드림과 섬김으로서의 정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그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청함받은 자들의 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로서의 손길과 다른 것으로서 마른 손에 비교되어지는 진실로 고침을 받아야 할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성례전적 증거로 받을 수 있음의 타당성과 일관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습임을 받게 될 때에 본문과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난 두 번째 기적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6~7)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신 18:15; 행 7:37)을 예언했던 모세의 증거를 마음에 둘 때에 예수께서 모세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체험을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자존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의 증거와 같이 예언되어진 메시아 구주이심에 대한 것과 구약이 증거하는바 예수님을 믿음이 옳으며 믿게될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손을 고쳐주심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주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낼 모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어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상대적인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황적 실존일진대 절대와 상관하겠다는 것 절대에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당위성을 비로소 얻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고 할 때에 과연 인생의 손은 마른 손입니다.

즉 속된 표현이지만,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같이 아무리 고귀한 척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 앞에서 무엇인가 받을 만한 행보를 나타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시는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적 기준에서 마련한 그 방법, 절대의 정당함을 얻는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게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받으신 바를 행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손 인생..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나의 중심과 삶에 기준으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마른손으로서의 인생의 모습이 치유함을 받아,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 바되는 그 섬김으로서 잘했다 칭찬함을 받게 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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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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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04, 2007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2007년 11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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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9월 11, 2007

요한의 탄생

2007년 9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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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7월 10, 2007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유와 증거

2007년 7월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8:12-26
성전봉헌의 축복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 따라 그 누리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일관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호화로운 주택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착민에게 있어서는 그와 달리 좀더 안정적인 측면에서 의식주를 생각할 때에 거할 곳으로서 그 주택의 의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현대의 재태크적인 측면으로 의미가 변화되어진 모습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재태크라는 개념이 어떤 부동산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적 개념에도 변형되어진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대형 사업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상식적 입장에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우와 같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해석되어진다는 것과 납득당위성을 비로소 갖는다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즉 합당한 예배당에 대한 인식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의 인식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교회의 예배당의 건물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그러한 신학적 입장의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의 그러한 측면으로 접근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인식의 연약함을 이해한다는 것과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음에 대한 현실태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복음전도의 준거점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그러한 준거점적 실재에 대하여서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상대적 현실성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선히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또한 선히 받을 수 있기를 마음에 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 성도들이 성전으로서의 예배당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 증거적 입장을 마음에 둘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에서 그 중심을 배워 익히며 증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주께서 계실 영원히 계실 처소'로서의 성전을 선포하고 이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고자 했으나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지을 것이라고 하심의 정당함에 따라서 그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라는 중심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는데 하나님뜻대로 이루게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한 가운데서 그 약속하심이 그 백성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솔로몬 성전봉축이라는 개념이 계시적 실제적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과 봉헌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솔로몬성전 건축을 마치고 그 성전건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증거와 그러한 합당한 봉헌식을 가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의지하여서 그러한 신실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주의 말씀에 따른 정당함에 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백성들에게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신실하심의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임의적 강요에 따른 간구가 아닌 합당한 종들의 증거와 섬김과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정당함에 따른 성전봉헌을 말할 때에 다윗이 건축하지 않고 자신이 짓도록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정당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이 아니면 상식적으로 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권세를 합당하게 취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시고 솔로몬을 통한 건축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상식적인 측면의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그 뜻하심을 살펴서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천사들의 증거를 통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증거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에 따라 구속받은 자들과 그의 지으신 백성들에게 있게되어지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주어지는 차이가 있는 평화이면서도 실제적인 그들의 평화가 있게되어짐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기뻐하심이라는 것은 '(기쁨과 의지와 선택Will, Choice)'을 의미하는 말인 유도키아스(ευδοκιας )라는 말입니다. 주의 주권적 기뻐하심과 그 의도하심에 따른 택하심에, 구약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의 증거적 복됨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 중에 평화는 살롬적 성전의 성례전적인 증거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성의 이름이면서도 동일한 '살롬'이라는 기원적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즉 '살롬' '평안' 그 평안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성이며, 평화로서 주어진 성전으로서의 솔로몬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을 때에 이 모든 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의 실존적 자신을 주의 소유된 자로서 주님께 드리게되는 헌신의 실재를 예표하는 성례전적인 성소였던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솔로몬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도 있지만 성례전적인 개념이 주의 정하심의 뜻하심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제 그 계시의 시간이 지난 가운데서는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이 비로소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고난과 고통속에서 무너짐을 주목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지상의 성전적 개념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님'(요 2:21)이 오셨고 다시 오실 언약이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는 계시의 시대가 이미 완성되어진 가운데서 성례전적인 개념에서 성소라는 개념을 비로소 취하는 성전의 개념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배처소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한정되어지면서도 실제적인 성전의 의미를 마음에 둠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받으신 바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받으셨음에 대하여서 우리 자신을 드림이라는 헌신에서의 성전봉헌의 실제적인 모습과 증거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εν Χριστος)을 예수님 몸 안에 존재적 흡수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세를 지나 존재의 유출적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롬 5:1; 갈 3:11)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은 실존적 존재로서 주 앞에 거하게 되는 것'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서 가장 아름답고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창세기28장의 말씀입니다. 즉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노숙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을 꾸게 되어 그곳에서 돌배게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함의 '벧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한 구별적 장소에서 그는 아버지집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으며 자존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8장 10~22절 )

우리 성도들도 이미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롬 5:1), 앞으로 구원받아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이미 실제적으로 구원받은 자들로서 현실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한 예배처소를 구별하고 그곳에 나와서 야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나의 하나님이심을, 주의 구원하심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의 기본이며 예배당 출석의 실제적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간접인격적 의미부여로서의 인터넷이나 예배의 인도자의 직접인격적 인도를 배제한 어떤 화상적 예배는 그 의미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측면에서 도우미로서의 실제적 의미를 가질 뿐 교회 예배당 출석을 통한 신앙고백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인격적 예배라고 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과 증거로서 한 처소를 주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의 질서에 따라 구별하여 그곳에 출석하며 예배하여 자신을 드림의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솔로몬 성전봉헌식은 예수그리스도의 참성전이심을 근거로한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자들로서,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장소를 구별하여서 예배하며 주의 말씀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 이루이지기를 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세상의 복음의 접촉점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구별되어질 수 있으나, 이러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는 그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하심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함에 있어서는 그 구하는 자의 신실함이 주의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되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바르게 주일성수 및 예배생활을 통해서 성전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롬 5:1) 주의 말씀과 같이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함을 받으며(마 5:9) 그러한 면류관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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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8, 2007

겟세마네의 고통 이해

2007년 6월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4:32-42
머물러 깨어 있으라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매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에서 있게 되어지는 '입시전쟁' '삶을 위한 투쟁', 시간을 비롯한 적당한 또는 최소한의 물적 심적 노력 투자에 따른 최대의 기대효과와 그것의 내용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경쟁에 대한 것은 삶을 위한 변명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작금의 삶에 대한 인식일 수 있고, 또 시대의 변천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진일보할 것이라는 것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을 것같다는 인식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인식 그 삶의 여정의 배경으로서의 시간투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이라고 할 때에 입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에 각성제도 먹어보는 입시생들의 심정은 분야가 다를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시대에 민감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깨어있다'는 '분별력을 위한 또한 분별력이 있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질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신앙적으로 또는 그 가운데서 해석되어지는 삶에 있어서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합당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들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로서의 사리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32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서 구성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번 기도하심과 제자들의 깨어 있지 못함에 대한 모습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인데, 내용은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는 실제적 증거로서 말씀하심을 읽게하는 것과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시며 그들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심과 예수님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하심은 그 내용적 계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제자들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서의 그들의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연약성이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 내용적 계시그들의 연약성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역을 묘사하고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감람산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가셨는데, 그 때에 주의 성자로서의 성부께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용적 계시에 대하여서

본문 32절과 34절 말씀에서는 제자들에게 그 한 곳에 '앉아 있으라' 그리고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고민하시며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고뇌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 도망치기 위한 개념으로 상식선에서 규정함은 옳지 않습니다. 정당성 시비에서 이미 죄악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개념적 정리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규정적 인식은 가능하나 정당한 규정적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로 나타나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흩어짐의 사실이 없을 것이나, 결코 구원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일시적이라고 해도,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 그들의 받을 현상적 실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덜어줄 수 없음에 대한 것으로서의 실존적 비참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적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이 메시아로서의 인식적 차원에서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히 4:15 참고 사 53: 질고를 아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아)

그러한 연민은 상식적인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는 모든 것을 구별하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부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께 구해서 그 제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의 현상적 개념을 구별하여서 사실화 시키는 즉 십자가를 지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있어주는 가운데서도 그 뜻하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인성적 뜻하심 보다도 성부하나님의 신성적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얻는 것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16)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없이 상식적인 개념에서 시간적 보편성에 따라서 볼 때에는 상황에 따른 예수님의 인식의 변화와 고뇌 메시아로서의 자기 인식의 변화 즉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비로소 자기 신뢰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그 때에 비로소 있었다는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자로서의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죽고 사는 문제'(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이 자존적 합당함에 따라 전제되어 있다고 할 때에, 시간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서 메시아적 자기 인식의 변화와 자기 쇄뇌라는 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옳은 본문 해석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의 정당성 시비에서 옳다 하는 그러한 사실적 판단을 내리고 진리로서의 실존적 정당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상식적인 해석 가능성에 의한 실존적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서 본문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11:12)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의 이름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기 계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들이 질서를 찾아 실존하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해하고 되어질 일들에 있어서 그 연민의 정과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자이지만 성부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인식과 행함의 사실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실체, 삶의 전 방향과 실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낸다는 것이 합당한 기도임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가장 중요한 시간에 그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 더욱 깊이 잠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게되어지며 앞으로 되어지는 그들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로서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상황적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상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되어지는 현실적 조짐들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곳에서 평안을 취하려고 하는데 깨어 있어야하는 그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을 바르게 마음에 두었더라면 그것이 합당하게 가능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적인 이해가 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연약성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제자들은 바리세인들과 서기관과 그 당시 성전과 관련되어진 자들의 인식과 그 행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합목적적인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과 언약을 맺고 동행하고 있는 가운데서 인식적으로 또는 몸으로도 상당히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계시니 별 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긴장이 풀려질 수 있고 아주 좋은 휴식시간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시간에 눈이 감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상황적 그들의 인식의 추이를 이해하는 것이고,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함이 죄악으로 나아가는 즉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게되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계시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4,4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시고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계시에 따른 '예수님의 별세'(막 9:31)를 말씀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을 볼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다는 말씀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음'(요 20:9)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달리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 부활의 해석적 근거를 말씀하심이 이렇게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6,27)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서 자주 언급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소리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것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잘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에서 사두개인들과 대화속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부활이라는 것의 사실적 근거는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마음에 두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즉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성경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적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사도개인과 같이 부활의 실존을 믿을 수 없으며 믿는다는 중심을 가져도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여서 부활신앙에서 잠들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으면 많은 가능성의 성경해석이 오해의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제자들이 지칠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함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졸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하여도 깨어있을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을 따라서, 깨어있기를 실제적으로 주 하나님께 예수님처럼 주 하나님의 마음에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더라면, 깨어 있었을 수 있는 사실적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 모두 졸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로서의 다섯처녀의 실존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25:5, 1~10)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해 사실 규정을 함이라는 왕같은 제사장적 입장의 행보로서의 순종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반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두는 것에서 멀리하여지는 당위성에서 속수무책의 고통의 현실을 맞보아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슬프고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 같이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택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에서 비롯되어지는 부활의 개념이 비록 확실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주의 자존적 택하심이 있을 때에, 그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은혜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적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같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은 이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사실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여러 시험이 있고 결국 예수님을 돈벌이식으로 이용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을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확실하지 않다, 또는 예수님의 실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부활의 상대적 증거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이다, 예수외에 다른 예수가 가능하다. 즉 '예수 후 예수' 또는 '예수로 예수를 뛰어 넘기' 등, 성립되지도 않는 말들이 그 합리적 당위성을 가지고 말할 때에 답변하지 못하고 자기기 가진 신앙에 확신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고통의 밤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름을 짜는 듯한 개인적인 고통이 되어질 것입니다. 즉 갯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비로소 왔던 곳이 아니고 그곳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고 또 왔을 수 있는 곳으로서 세상의 사람들의 고통의 장소로서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서 성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으로써 구별되어진 그 기름짜는 곳으로서의 이름을 가진 겟세마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 쉼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깨어있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주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로서의 겟세마네의 증거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제적 평안과 사실은 예수님안에 있으며'(마 11:28~30) 예수님의 증거로서 가르쳐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 참 주의 말씀과 같이 '갈수록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진다고 하신 것'(단 12:4)과 같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생존의 발을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그 흐름으로써의 신경씀이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오면 되지' 뭐 또 '성경공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옳고 그르고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강요받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말못할 고민이 되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사실화하고 기뻐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합당한 필요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뜻하심과 섭리를 따라 순종하기 위한 노력들의 기본으로서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며 그 자체가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기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과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자존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시기 때문에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내 실존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워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성도들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의 삶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주일 내내 신경쓸일 많고 쉬지 못하고 예배드리고 출석하는 것까지 했는데 좀 쉬고 싶은데, 성경공부와 섬김이라는 것에 메인다는 것은 어쩜 '기름을 짜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송이꿀 같아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의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위로의 말씀은 그 위로의 쉼으로서의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현상적 일률적 단정적인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느낌의 판단과 달리 실제적으로 주어짐에 있어서는 동일한 은혜의 사실로 기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임의적 개연적 당위성만 갖추어서 사실시비를 가리는 고통의 밤에 답변할 것을 온유함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강조되어지는 증거들이 일시적인 각성제 역활을 해서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 속쓰림으로 나타나 이제는 더 죽도 못먹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각성제도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비판의 목소리들 속쓰린 소리들을 내밷고 있는 것은 임의적 각성제만으로 부흥만을 말하려고 하는 모습에 식상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우리 성도의 존재적 정당함과 개연적 모습의 상대적 증거라도 주의 말씀의 재가에 따라 사실화시키고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한 진리임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하여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제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며 성장하며 진정으로 이 세상에 머물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 있어, 사실을 분별하고 세상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여지에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온유함으로 내세의 소망을 증거해 그들을 주예수께서로, 옳은데로, 인도하시는 자들로서 하늘의 별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그 영광으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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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5월 15, 2007

죽음의 지혜를 벗어나

2007년 5월1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2:13-25
죽음을 자초한 악한 종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구별하여주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생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한다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은총에서 있게되어지는 사람들의 의식적 지혜의 발상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적 개념이나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특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면서도 일반은총적 개념의 사실 속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가능하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러한 입장에서 재고되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구성적 경향의 '많음'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정당한 인식의 개체적 소수로서의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깨닫게 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작은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실제적인 정당함을 고려하지 않은 많은 말들보다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인 개념은 기만적 요소로서 그 판단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만나서 수넴여인 아비삭 여인을 아도니아 자신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밧세바는 좋다며 솔로몬에게 말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일로 말하려고 솔로몬에게 나아가니 솔로몬이 어미에게 예를 갖추고 그를 우편에 앉히는 가운데서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청을 솔로몬에게 말하자 솔로몬은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하고 아도니아를 죽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아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악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그것과 다른 선한 종들로서의 지혜를 구함과 그로 인한 충성으로 수종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아의 구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솔로몬이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이 왕위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의 왕위 계승권의 실재를 위해 그 왕국의 질서적 당위성을 따라서 말하는 아주 간교함이 배여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의 인식의 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그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과 거짓을 주목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전반적인 측면을 상식에서만 본다면 별로 흠이 없는 겸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진정한 상식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재적인 당위성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아는 그러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것입니다.

(상식이 스스로 실존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상대적인 존재인 한 그 자체적 정당함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납득당위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적 당위성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실존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아의 진술 속에서 '내 것이었고'라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기존사실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외적인 상황의 반전으로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당위성에 상대적으로 밀렸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황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형식적인 도의적으로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예를 갖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적 반전 정도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정한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짓을 전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 또는 '모든', 이라는 말들은 상황적 차원에서 특정한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개체적인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판단하에 있는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정황하에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서 상황논리적 판단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앞에서의 실재의식과 그 실제적 판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이 참되지 못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악함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아의 이러한 개념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의 근거인 것과같이 자신을 기만한 가운데서 밧세바에게 그 자신의 왕위를 위한 당위성을 위하여서 인식의 상황적 변화를 위하여서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함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의 왕위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으로서 자신을 세울 때에 결정적으로 솔로몬에게 지게 된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타던 노새에 앉았기 때문이며, 다윗의 재가를 말하는 정당함이 아도니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작은 하나가 모든 민심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 인식을 솔로몬에게 두는 것이 옳다는 당위성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여전히 남았고 또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비 다윗의 시종을 들었던 아내와도 같은 수넴여인 아비삭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아비삭'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잘못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삭 : 빗나간..'이라는 뜻과 '아비: 아버지'라는 말들이 합성되어진 이름으로서의 아비삭의 이름을 보는데 그것은 그 이름의 존재적 증거가 아도니아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왕위로 세운 아버지는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아도니아와 결혼해도 상대적 윤리성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바른 아버지 다윗의 영광은 아도니아에게 있는 것이라는 그러한 자기 정당함을 세상에 알려 결국 아도니아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함을 나타내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솔로몬은 왕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도니아의 악함에 대하여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아도니아도 넷째 아들로서 앞선 세 명의 형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왕위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왕이 되려는 노력과 그것을 위한 질서를 따른 가운데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윤리적 잘못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상황적 개념에서만 임의적으로 보편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더욱 하나님의 실제적 재가라는 특수상황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는 그러한 생각 일변도라는 것은 오히려 보편을 가장한 개체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의 절대성의 부여와 그에 따른 사실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진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불특정 시기와 장소와 사람들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의 한 형태적이라는 개체적 동의의 당위성을 얻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당위성으로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강변하기에는 편견으로서의 실존적 판단하에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재가 있는 하나님의 뜻하심의 사실을 반전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삭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윗과 동침하지 않은 가운데서 윤리적 입장의 법적인 측면으로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있도록 천거되어진 자로서 자신의 아비의 영광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를 상관하겠다는 것은 부모의 하체를 취하겠다는 것,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롱하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모습과 동일한 자리에 서는 죄'(창 9:21~25)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같이 종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왕상 2: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한 바로 직후에 있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사면이라든지 어떤 그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아도니아에게 그렇게까지 행하지 않는 것이 솔로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아도니아도 그러한 점을 마음에 두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모를리도 없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강경책을 두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왕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합당한 당위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시비하겠다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용서할 권한이 솔로몬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으로서 죄없다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하에 솔로몬 자신이 임의적으로 무죄를 선포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도나이의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가만히 주의 양무리에 들어온 자'를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측면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양들을 약탈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인 자신의 질서적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1:4)

'아도니아'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하신 말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아도니아처럼 상대적인 정당함만 생각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구별을 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들어와 자신의 입장을 위한 색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그리고 주의 양들을 잘못 먹이고 있는 자신의 양들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상식도 없는 것이 신앙이다'고 함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와 사실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인식함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솔로몬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모습이 되어짐을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아도니아와 같은 잘못된 거짓되고 악한 죽음을 부르는 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서 때를 따라서 주의 영혼들과 굶주린 영혼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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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1, 2007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2007년 5월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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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7, 2007

직임과 명령이해

2007년 5월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11:1-7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

다원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세상 사는 하나의 지혜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앞서 언급한 이 말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 그리고 상대적 여지로서의 개선을 말한다고 할 때에 기존사회에 대한 대화하다는 것으로서의 '데모'(demo)적 개념은 과격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대화라는 개념이 그것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대화를 위한 협력과 상황에 적응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추이에 있어서 유독히, 교회의 질서이해에 대하여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그러한 입장에서 개혁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판단에 따른 상대적 여지를 통한 통렬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로서의 입장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들이 알지 못하지만 앞선 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광야에서의 자녀세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셨던 재앙들과 모세의 홍해의 기적 그리고 광야생활에서의 있었던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목도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고 하심에 있어서 진정으로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은 어떤 것이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것을 당시, 지금 시점에서 말씀하심은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주로 모압지방에서 주어지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모압지방이라고 함의 특색은 참으로 오늘날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압지방이란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음란한 세대를 지칭할 수 있는 구별된 지역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취한 가운데서 그 딸들과 동침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민족의 이름으로 지칭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음란한 곳으로서 황량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발람과 발락의 저주하려고 했던 곳이며 실제적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 이어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에 들게했던 것이 그 지역의 특성인 것입니다.(민 22장 25장참고)

음란한 세대는 어떤 윤리적 통념적인 것보다도 자신들의 임의적 개념의 윤리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간섭받기 싫고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어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타락한 본능적 개념에 충실히 행하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솔직하고 사실인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하는데 익숙해진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정황과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할 때에, 표면적으로는 순종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임의적으로라도 순종하겠지만 내면적인 공허함에서 결국 순종의 사실이라는 개념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광야세대에서 자라난 자녀들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로서 세상 물정이라고 하는 것에 아주 눈이 뜨여진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직임과 그 직임을 맡은 자로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은 상황적으로 당연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며 그들이 순종의 사실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중심이 읽혀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모세는 단도직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임과 그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 지난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앞서 언급되어지고 읽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안으로서의 답변이 되어짐을 또한 읽을 수 있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는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신 11:6)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직임에 대한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한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했던 자는 고라와 심지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위지파인 고로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여야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더욱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음을 인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러한 여론적 입장이 있는 때에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세의 손을 들어주시고 반역한 자들은 땅에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상황만 본다면 미리암 덕분에 모세도 목숨을 건졌고 그러한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었으면 누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도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장에 따라 백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실 때에 달리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음과 모세를 통하여서 인도하심에서 다른 말씀하심이 없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적 당위성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자존적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 당위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직임에 대한 상대적 여지만으로써 그 직임의 실존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자녀된 세대들의 순종하여야 할 직임을 맡은 자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반목일 경우, 그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망과 징벌이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을 판단함에 있어서, 교회의 질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 차이라는 개념만으로 개혁을 말한다는 명분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잘못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실제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개연적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의 진리가 아닌 의견(opinion)으로 교회개혁의 사실을 말하려는 진정 어리석음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 역사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황이라는 개념으로만 주목하는 가운데서,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목으로만 비로소 생각하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기존 교회의 질서에 반목하는 것이 어떤 마냥 의로운 투사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자 신교가 탄생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의 사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적 존재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질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 것이 합당하며 그것이 또한 신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구교에서의 '성직매매'가 있었는데, 이것은 실수에 따른 윤리적 잘못이라는 개념과 다시는 그런 행위가 없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봉합되어질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직임에 대하여서 바르게 기억하지 않은 자들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에 대한 불순종으로서 죄악인 것입니다.

윤리적 또한 연약함에서 있을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으나, 주께 불순종으로서의 성직매매라는 행위는 분명 죄악이며 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고 그것은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에 대한 직임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인 개념과 임의적 절대성을 가질 뿐 진정한 성직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 믿었더라면 성직을 가지고 그 특권을 가지고 재정을 채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번참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직을 사고 파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직임에 대한 개념이 욕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질서와 그 가운데서의 직임은 구별되어진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고 그 교회질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구별하여 주의 몸된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실제적 중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교의 교회의 질서로서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있게되어지는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상대성에 절대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그 질서적 차원에서 그것을 시행하도록 질서가운데 있게되어지는 종들의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그것을 통해서도 바르게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과 그 기도의 사실을 믿는 것이 옳은 모습인 것입니다.

명령을 지킴에 대하여서

주의 명령을 지키도록 말씀하시는 그 배경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외에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알라'고 하심(신 4:39)하에서 십계명이 주어졌음을 모세가 증거하고 있는데(신 5:5~22),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인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들의 잘못까지도 구별하셔서 증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기록된 말씀하심을 통해서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말씀을 받는 가운데 그 주의 말씀으로 듣고 명령을 지키는 순종의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전하는 자가 절대 실수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납득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전하는 자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실수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까지도 성도들이 주의 말씀 하심 안에서 선하게 달리 받을 수 있다는 측면과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심안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제사장적 권세가 주의 말씀하심을 구별하여 받음의 사실적 정당함을 가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적 영광으로서 그 직임적 권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인데 왕적, 선지자적, 제사장적 권세가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나타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대적 보편상식의 판단하에서 자유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비판이 정당한 것과 같이 기만되어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설교 말씀을 비롯한 주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을 따라야만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 여지가 있음에 대하여서 앞서 언급한 중심과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순종의 사실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해제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임의적 당위성에 따라서 순종함의 부당함을 잘못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사태파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함을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상식보편이나 거기서 거기인 철학적 당위성은 오히려 주의 질서적 개념에서의 직임과 그 명령의 순종의 사실에 동의하고 다른 당위성을 말하는 핑계를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나 주의 가르침으로서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안에서 실제화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순종함에 합당한 것입니다. 상황적 정황적 보편상식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오히려 그것들을 판단함의 근거적 사실로 자리매김되어짐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의 정하신 직임과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께서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받지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셨고, '항상 예수님께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상대적인 것을 사실화 시키는 가운데서, 상식적인 보편적 철학적 당위성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별하고 사실화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적 권세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인식과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서 교회에 개혁이라는 임의적 입장을 통해서 형제들을 라가라하는 가운데 주의 판단을 받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왕같은 제사장들로서의 성도임을 기억하여 그 사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때에도 주의 질서와 그에 따른 직임을 존중하고 바르게 이해하여 그러한 직임을 맡은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회중 가운데서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직임과 명령을 지키는 종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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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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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4월 20, 2007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2007년 4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1:1-14
아름다운 명령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허물이 안보인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콩깍지가 씌였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안 보인다기보다는 보고싶지 않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또는 그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디어져가는 가운데서 더 예민한 관찰자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더 그 특정인의 허물이 크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아는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혐호하게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의식함의 여부에 비례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규칙과 삶의 방식에서 어떤 특정한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관계정리를 위한 그 잘 아는 사람에게 비난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또는 그렇게 해야하는 당위성에 놓일 때가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시대를 막론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로는 '너하고 안놀아, 너는 못생겼어, 너하고 나하고 수준이 달라, 수준이 다르다니깐, 나는 너하고 달라, 너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단말야 나는 너 모른다, 저리 가'와 같은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다 획일적인 것이 아니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선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현상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 선함의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악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 앞에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뉘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디모데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는데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짓없는 믿음이 디모데의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디모데에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받음으로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임을 말하며 그러므로 주의 증거와 주를 위해 갇힌자된 사도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나타나심을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를 인해서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기가 의뢰한 자를 안다고 말하고 있고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도로서 성도된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진다는 잘못된 인식의 강요가 주어질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와 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것과 같이 인식되도록하는 경향의 세상의 정체성 없고 잘못된 인식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죄악 가운데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바르게 볼 수 있고 받지 않는다면 주의 형제를 '라가'라하는, '바보'라하는 자로서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마 5:22)을 받을 수 있는 자로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낳은 자로서 아들처럼 부르고 있는 사도 바울의 평강이 먼저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그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사랑받는','honouring God'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을 표현하는 자로서의 증거적 존재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편지하는 그것도 후서라는 특징을 읽게 된다면 재차 강조하는 내용적 증거임을 더욱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재차 누누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으로서 평강으로 축복하며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 주의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즉 디모데전서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라'(딤전 1:4)고 했던 것입니다.

신화라고 할 때에,'역사 이전에 기원을 둔 이야기. 사람의 지혜가 아직 열리지 못하여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활동으로 상상한 데 기인한다.','지혜가 미개한 상고(上古) 시대의 신을 중심으로 한 전승적 설화'이런 이야기나 또는 '신화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설화나 전설 또는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등 너무나도 다양하게 쓰여질 뿐만 아니라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용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고전학자 G.S. 커크도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무리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도리어 신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라는 백과사전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 기준이 없는 임의적 상상적 보편적 인식추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사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 의미부여에 따라서 사실화 또는 사태파악에 있어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학문이라는 개념에서는 원동력으로 임의적으로나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특성을 기억할 때에 시대정신 또는 상황적 여론의 통념화등을 들 수 있는 것으로도 현대적 신화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정 개인적으로도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인사에게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고통과 같은 루머의 통념적 비판과 같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참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적 비교에 따라서 형성되어진 잘못된 실제적이지 못한 통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진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임'에 대한 것을 강조해야 했고 그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었고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볼 때에 그런 죄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여론적 통념은 디모데에게 너무나 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죄수로 복역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말한다고 하면 상식적인 개념에서만 본다면 납득의 당위성은 이미 상실되어진 것이라는 판단이 있고 그러한 납득당위성이 상실되어진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고 하면서 감옥에 가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한다면 그를 풀어서 더 크게 일해야 할 것인데 그럴 기미는 그당시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사도라는 자가 그렇게 매이는데 '우리도 그 죄인의 사슬에 매이라고 가르치고 있냐'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말하는 하나의 재구성된 신화적 통념과 생각의 기준들이라고 하는 것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디모데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단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그러한 연약함에 사도 바울은 어릴적부터 디모데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과 사도바울이 비로소 복음을 전해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전통에서 있는 자이었음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하게 증거하는 자로서 생각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어떤 부족이라는 상대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상대적인 입장에서 복음의 납득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정되어질 수 있다는 임의적 판단의 통념화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당위성이 없는 것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설득하려고하는 어리석음과 그에 따른 상대적 판단되어질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다는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비로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두렵다는 개념의 근거적 판단이 이미 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지만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실 때는 실재적인 실제적으로 합당하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예가 '다윗의 작은 물매돌'(삼상 17:41~50)이며 '주님께서 받으신 아이의 '오병이어'의 능력'(요 6:9,5~13)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 판단을 받는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비로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도 구별하여서 좋은 것을 선히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의 낮아짐, 주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의 사역의 실패나 또는 그의 가르침으로써 나타나는 주의 복음의 실존을 부인가능의 당위성을 실제화할 수 없는 것이 되며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럽다는 인식의 실재와 실제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전부터 주신 은혜대로 한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서 종들의 사역의 비교적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폄하되거나 그로인하여 부끄러워하여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복음의 실존가운데서 그 예정하신 은혜를 따라서 직분과 그 행함의 당위성을 마음에 둘 때에 '옥에 갇힌다는 것'과 같은 현상적 인식적 납득당위성이 없다는 실제성이 없는 규범적 신화에 착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앙의 중심적 증거를 하고 있는데, 12절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자신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뢰하는 자를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하심은 선하심은 상대적인 판단과 그 능력이라고 함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주관하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즉 예수그리스도의 자신을 계시하심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의 실존의 판단 여부를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도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께서 기쁘게 아릅답게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6~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뢰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라고 말하며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인생은 서로 평가하고 냄새나고 그것이 본래성인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선히 지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하신 하나님의 뜻하심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기억할 때에 교회에서 있게되어지는 여러가지 선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그 충돌이라고 함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악함과 또 부끄러움과 그로인한 배척으로 인해서 마음상하는 것과 같은 모습들의 모습들이 실제적인 본래성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은 본래적인 것을 비판해야 그 당위성이 비로소 성립되어질 수 있는데, 자존의 절대자와 그의 재가를 받게 되는 인식과 판단 외에는 그 성립을 말할 수 있는 실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그로 인한 믿음, 그 분량에 따른 믿음의 선함과 그 선함의 충돌로 있게 되어지는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부끄러움을 인하여서 형제를 부인또는 배척하는 가운데서 또는 복음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과 행함의 정당함을 찾는 일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죄악가운데서 선의 결핍이라는 가운데서의 악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악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기쁘시고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심과 그 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의 낮아짐과 상충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모습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까지도 기쁘고 아름답게 보며 위에서 언급한 시편과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그 명령에 순종하시는 자리에 서심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교회의 직분이 있는 분이 '안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신앙의 당위성을 놓는 것과 같이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의식도 결여되었으면서 자신의 합리성에 기반해서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난하는 어리석음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을 강변하다가 입장이 바뀌면 '나는 열심히 달렸는데 돌부리하나 때문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잘달렸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모습들 그리고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이 교권을 휘두르고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도 않았으면서도 판단하고 여론화시키고 부끄럽게 만들고 부끄러워하고 이런 모습들, 희망의 사실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들을 회개시키시고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그의 행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과 상관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능히 이루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대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비록 현실적으로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합당하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도 선히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항상 뵙기 때문에 기뻐하고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배척하여서 당위성을 찾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그런 행위가 정당한 것은 아니며 그런 일이 없어야하고 없도록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고 복음과 복음을 인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을 받은 디모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하심을 깨달아, 비록 우리의 연약함에서 있게되어지는 선함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악함과 형제를 부끄러워하여 배척적 당위성을 찾고 싶어지는 유혹이라고 함이 강변하고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복음전함을 아름답게 보시고 그것을 본 사도의 증거로서의 말씀인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 일어나, 형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제 사랑을 이루어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큰 칭찬'(계 3:7~13)이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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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4월 08, 2007

순종의 기초석

2007년 4월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8:11-20
순종의 기초석

어떤 아이들을 보면, 소위 영악하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나이에 비해 조숙해 있는 아이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개 일반적인 안정된 가정이라는 조건보다는 참으로 어렵게 자라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좀더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어른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가운데 현실관이 뚜렷할 수 있고 그것은 잘 준비되어지고 교정되어지지 않은 경향이 있을 수 있어서 극단적일 수도 있는 특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주 잘 균형잡힌 판단으로서 생각하는 아이들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가정환경이라는 것과 여러가지 여건에서 그런 생각과 판단으로 생활해온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앞선 자들로서 사랑과 그 사랑의 중심으로써 그들의 인식의 평안과 균형잡힌 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광야시대를 지나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있는 하나님 앞에 선 모세의 설교는 그와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오히려 원천적인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하였던 세대들은 모두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죽고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자손들과 갈렙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세대와 신세대들로서, 모압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소위 속된 표현으로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 고생이라고 하는 것과 함께 자라온 세대, 입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막 유목민인데 이제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갔을 때에 생활방식이 달라지는 가운데서의 문화적 충격과 그것을 현상적으로 읽어낼 이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모세는 걱정이 되었고 그것에 대하여서 이제 순종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으려고 설교하고 있는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은,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순종의 기초석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말씀이 나타나고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모세가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가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그들의 우양이 번성하며 그들의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것 같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땅에서 이끌어 내심과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자신들의 능과 자신들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 수 있음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답변으로써,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 그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임을 말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생활양식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라는 개념에서 약삭빠른 판단을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합당하게 증거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함을 '아편'에 비교하여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잘된 것인지에 대한 것과 그것의 합당한 사실와 진리로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지만 현상적 개연적 입장에서 강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세상의 입장일 수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다 적용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정한 참된 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인생의 고통을 위안해주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돈을 받게 되는 자들로서 진정한 신앙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만적 요소로 돈까지 강탈하는 이른바 강도의 굴혈로 말할 수 있고 그런 것은 사람을 망치는 종교로서 아편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자신의 성전을 깨끗게 하심을 말씀하시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함의 사실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막 11:15~18)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와 신앙과 달리, 합당하지 못한 것이 세상에 상대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 허용되어진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과 거룩함을 구별하여서 받게 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거친 광야에서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서 그 고통의 거친 곳에서 소망의 문을 준비하며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편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고통이 없어지는 상황적 논리와 환경이 조성되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힘든 사람들이 비록 그 사람을 시들게 하는 것이라도 힘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가운데서 유익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개연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상황논리적 당위성을 열어놓고 하나님을 필요적 개념에서의 요청적 입장과 실용적 개념의 판단하에서 인식적 신앙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현상적 인식으로서 당위성을 상대적으로 가질 수도 있는 개념입니다. 물론 가질 수 있다는 것과 합당하다는 것은 달리 나타날 수 있음은 그들로써는 기억해야 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어릴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광야에 있는 신세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존 여호수와와 갈렙의 족속들은 어릴때부터 그 고통의 생활을 지내온 까닭에 그들의 현상적 인식에서 본다면 위에서 말한 그런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사막 유목민의 생활, 모래바람과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어져서 생물이 살기 어렵고 물이 없고 그 가운데서 출산의 고통과 사랑받아야 할 유년시기에 그러한 안정된 조건적 입장이 전혀 허용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성장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나온 앞선 세대 그 고통을 잊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고통을 위한 치료제라고 하는 '몰핀'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상대적인 것으로만 볼 때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 정착생활을 하게 되어지고 그러한 정착한 자들과의 상관성이라는 보편적 이해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 상황적 판단인식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보다 안정되어지는 생활 형태에서 이제는 고통을 이기기 위한 몰핀과 같은 효과로도 인식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이제 필요없다는 것도 상황적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강요되어질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상황 논리와 관계라는 보편성에서 이교적인 사람들과의 상관성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재고해야 하는 가운데서 자기 의식이 주권적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임의적으로 정초되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신 8: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는 말씀을 마음에 받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심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대적인 정황적 논리라고 하는 것과 인식의 상대적 변화추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상황이 안좋을 때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든가 상황이 좋아지고 안정되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유익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아도 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본래성인 것같이 착각하는 것은 진리로서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은 그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 절대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상대적 표현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유익이라는, 상황적 논리라는 상대적 정당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멀리하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일반 타종교들에 대한 현상적 판단이 가능한 몰핀적 개념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은혜와 섭리라고 하는 것과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계시의 상황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경험해왔고 그들의 소위 그 고통속에서 잔뼈가 굵어오면서 체험했는데 그것을 또 이렇게 인식적으로 강요하는가 하는 그러한 간과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이들이 아빠와 생활해오면서 아빠와 같이한 시간은 분명 있는데, 아빠와 좋은 기억들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좋은 기억들 속에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아빠들도 다 똑같은데 아빠만의 좋은 모습, 그리고 아빠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좋은 기억들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하나님만의 계시적 특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율법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는 측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신의 행함의 상대적인 증거를 취함에 있어서 비로소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넘어가며 그들의 관계성의 보편성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그 강요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율법을 이미 지킨 자들로서의 신앙고백으로서 또 지켜나가는 것으로써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음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만의 특수성, 남들과 구별되는 그 특징, 그것은 그 좋은 기억과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자존적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인 여러 정황적 보편성과 비교되어지 않으시는 자존적 절대 보편성과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구별되어지는 상대적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는 권세를 성도들에게 마치 아비가 아들에게 주심과 같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며 부활주일을 기대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는 그 죽는다 산다(to be or not to be)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고 하심'(고후 1:19)을 마음에 두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이며 순종의 기초석임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와 죽으심의 의미는 바로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죄를 사하시며 구원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인생의 존재와 행보에 대한 사실을 구별하여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동의어가 되어지며, 예수님이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고 하심'(마 6:9)을 마음 속에 둘 때에,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임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그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구별하여 판단하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서 말씀하신다는 것, 즉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 정당한 말씀과 사실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고 또한 받으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는다'는 그 말은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대적인 여지가 있을 수도 있고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심을 기억할 때에 그 말씀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정한 사실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식적인 선에서 시무룩하게 지내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으며 자존의 절대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의기소침이 아니라 더욱 주의 말씀하심이 나의 모든 것이며 진정으로 합당한 것임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할 수 있는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7)의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내가 교회에 나왔고 교회가 어려울 때에 내가 그래도 일이 되도록 힘을 썼다는 생각을 할 때에 오늘날도 그와 같은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을 마음에 둘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래도 하나님께 그런 말은 못하고 또는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할 수 있고 겸손이라고 판단하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임의적 주권이라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의 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는 중심에서 판단한다면, 내가 결정한다는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의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신 것임을 기억할 때에 현상적인 인식과 판단으로써 나의 모습의 주권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본래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합당한 자리세우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무엇인가 상대적인 여지라고 하는 것에서 어떤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인 존재인 '나'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나 또는 스스로 했다는 것의 기정사실이 비로소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마음에 잊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눅 17:10)은 도덕적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비로소 말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고백을 하게되는 자리에 세우심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순종의 기초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는, 무엇이 진정한 실제냐는 세상의 인식들로서의 임의적인 인간의 주관적 주권이 필요에 따라서 요청할 수 있는 고통을 위한 몰핀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며 합당하게 우리의 존재를 구원하시며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자이심을 분명히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때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심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존재와 사실을 규정하는 사실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고난과 죽으심을 마음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함을 말할 때에, 무엇인가 어려움을 당해야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참 모습은 그런 고난이라고 하는 경험에서 어쩔수없이 붙드는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삶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야 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대해 말을 많이 하면서도 그 섭리라는 것의 일상성이라는 것에 식상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아바 아버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아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속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잊지 않는 종들로서 순종의 기초석을 좀더 바르게 놓은 가운데서,'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뜻하심'(잠 16:7)을 나타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함'(마 5:9)을 받으시는 그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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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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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29, 2007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the fruits in His times)

2007년 3월2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1:15-33
마른 무화과 나무를 보며

요즘에 우리가 먹는 식단을 살펴보면 상당히 풍성하고 또 미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과일이나 채소에 있는 비타민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적게 섭취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것도 우리 몸과 정신에 좋은 것인데, 그러한 선호도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일이나 채소 등을 말할 때에, 아무렴 제철에 나는 과일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주목되어질 수 있는 '제철' 즉 '일반적으로 특정 과일이 나는 때'를 말하는데, 이 제철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기간적인 조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나 또는 속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까지 생각하면 시간의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은 의미없어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날씨라는 것이 변화되어지는 계절의 변화 추이를 보이는 가운데서는 '제철'이라는 말이 또한 변경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적 개념에서도 우리는 열매맺게 하는 수확적 입장의 기간조정과 때를 분별함에 있어서 임의적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그 때라고 하는 즉 수확의 시기라는 것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일상적 개념보다도 수확적 개념에서 시기조정이 있게 되고 또한 그 선함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과일은 어떤 한 때에 먹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적인 측면으로 더이상 주장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일이라고 함의 열매를 수확함의 시기에 대한 시기조정이라고 하는 것으로써의 때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주님의 뜻하심의 때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때에 부요할 줄 아는 그러한 분별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말할 수 있고 주께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자리에 서는 은혜의 자리에 섬이 옳은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심과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심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 것인가 꾀하고 있고 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함은 무리를 의식하여 예수님을 두려워함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성밖으로 나가시는데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비유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의 하늘로부터의 증거적 정당성을 묻자 그들은 답변을 상황에 따른 판단으로 회피함이 기록되어 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권한의 정당함을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마름'이라고 하는 것과 '대제사장들의 모습'이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의 중요성과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순서적 입장에서 또는 맥락적 입장에서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과 그 판단이 기록되어짐이 그것인데 그것은 비교되어지는 두 개념으로써의 성전을 표현함에 있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개념과 '강도의 굴혈'이라는 개념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중심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예배당과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성전의 거룩함의 실제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는 '강도의 굴혈'의 실제적 판단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의 개념은 '야곱의 모습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고백이 되어지는 것'(창 28:16~22)으로서 이해하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 그 앞서 성전이라는 개념이 예배처소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바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 '내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구원받아 이미 아버지집에 왔습니다는 그 신앙고백을 한 예배처소를 정하고 나와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구원을 이루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에서부터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한 정당한 사실을 구별하여 받고 그 분복을 이루어나가는 자들로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써 노력하는 삶자체로서의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처소로서의 성전을 기억할 때에 과연 교회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심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만민이라는 개념을 또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한다면 임의적인 만민제사장적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주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말씀하심 바의 뜻하심에서 역사하심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만민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는 자기 자신과 또한 예배처소라는 개념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서 거룩한 처소이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한다면 그것은 결국 돈벌이 하기 위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는 식으로 말하고 그럼 없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에 있다는 것에 상황적 유익이라는 개념이나 여러가지 조건적 합리성을 말하는 도박의 원리적 개념으로만 의식한다면 여전히 확실성의 의문은 제기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고 결국 '하나님이 계신가에 대한 시험이 실존할 수밖에 없는 시험'(출 17:7)에 넘어질 수 있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같으면 레오 10세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마음껏 즐기자라는 그러한 입장은 언제든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1번참고). 즉 돈을 벌기위한 강도의 굴혈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냐 강도의 굴혈이냐는 그 인식의 기저에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의 실제적 사실이 좌우하게 된다는 것으로써 주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심으로 증거하신 계시적 증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눈을 여셔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말랐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서의 성례전적인 존재로서의 마른 무화과나무를 의식하도록 하심의 시점을 생각하도록 하시면서 본문 22절에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는 우리 성도들 보다도 사태파악에 대한 인식이 예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분별력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른 모습을 취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의 의미를 현상적인 개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늘 본문 산을 옮기는 것으로써의 믿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있어 기도하면 산을 옮긴다면서 하는 조롱과 함께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나타남이 없으면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기도응답의 실제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개념으로 사태파악이 가능하다고 강변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요 그리고 그 사태파악도 그 역사속에 있게 되어지는 관계로 그 시간이라는 개념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판단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적 의미에서 비로소 실제적인 판단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할 때에 그러한 것이 있게 실제적인 것이지, 임의적으로 '믿습니다'라는 자의적 믿음의 현실사태판단 요구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믿지 않는 자들의 비판적 판단도 빗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실존과 행함과 그것의 정당함의 주관적 사실로서의 기정 재가있는 믿음이 되어지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과는 다른 가운데서도 실제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담아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기를 기만하는가 하는 것의 판단이 요구되어지고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분별 못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자칫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판단은 우리 성도들에게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하심 즉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종들로서 세워지도록 말씀하심에 그 증거하심의 정당함을 말하는 권위는 무엇이냐는 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예수님은 죽음 즉 존재의 유무라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되어지는 것'(고후 1:19)으로서 그가 그렇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심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자로서의 권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에도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것을 이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심이 무엇인지 그들은 의아해했던 것입니다.(막 9:31~32) 하지만 이미 주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를 받은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러한 고백이 또한 씨앗으로나마 그들에게도 있었다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하면서도 상식보편적 개념의 자리에서 비로소 신앙의 실제를 마음에 두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여 예수님을 잡지 않았고 무리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식을 의지하였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들의 열매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읽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라진 버리운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말씀을 맺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말하는 앞선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였는데(요 4:32~35) 그것은 우물가에 물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생수라고 하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함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비유 된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뜻하심을 생각지 않고 제철을 따라 열매맺을 때가 아님을 따르는 무화과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하심으로써 자라게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했던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샘물을 먹지 않은 가운데 다시 목말랐던 것(요 4:13~14)이며 그것은 마른 무화과나무의 자체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심'(빌 2:13)을 기억할 때에 일상적인 뜻하심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는 주님의 때를 보아야 하는데 그것에 민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규정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고 가인과 같이 임의적인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의 받으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반문하는 것에서 주목하게 되는 그들의 인식의 보편은 결국 상식보편적인 개념에서의 신앙의 윤리의 실제적 의미를 생각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 그들이 무화과나무와 동일시되어짐을 기억할 때에, 열매맺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신앙을 규정하려는 자였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의 기본은 하나님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상식을 비로소 의지하여서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으로서, 그런 것과 비롯된 인식들도 역시 주의 뜻하심의 때를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자기자신들과 함께한 자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돈을 위한 그들의 지위를 위한 가운데서 시비를 구하는 자들로써 마른 성내를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이나 또한 철학적 입장의 사람들의 요구와 판단에서는 현실적인 극단적 생각이나 이상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에 신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더 나아가서 인식의 강요를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과는 달리 우리 성도들은 상식이라는 개념을 비로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도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중요한 실재로서의 규범적 역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식도 구별하여서 편견되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상식있는 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마음에 두는 것은 그 상식의 실존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진다는 것과 그 개체적인 판단도 역시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로소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스코틀랜드 상식보편철학이 영향을 끼친다는 상황을 볼 때에는 그것을 분별하고 또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한 것이면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전통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매너리즘에 입각해서 단순한 신앙행위의 반복과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주님의 뜻하심과 그 때에 부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전통을 해석하고 지난 전통과 차이가 있거나 다른 실제적 입장이면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가운데서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생수와도 같은 말씀에 입각해서 사실을 분별하고 부르심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이 있는 자들이 진정 수가성 여인의 모습과 같이(요 4:9~30),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의 시장하심의 때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즉, 주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 양식을 드릴 수 있는, 제 때에 과일을 맺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며 그 과일과 같은 것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또한 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 자신을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깨달아,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뜻하심을 깨달아서, 주의 인도하심과 뜻하심에, 주님의 뜻하심의 때에 열매를 드리는 가운데,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오는 종들로서, 주 앞에서 잘했다 칭찬함을 입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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