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3월 31, 2005

선으로 악을 이기라

2005년 3월 3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2:1-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善)과 악(惡), 이 주제에 대하여서는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히 많이 논의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식상해지는 가운데서 외면되어지는 경우로 봉착되어지면서도 그 사회에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어질 때마다 다시 거론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도덕 자체가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른 인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성에 따라서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로소 언급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써의 스스로 그 계시적 실존의 정당함을 취하게 되어지는 말씀으로서 말씀하심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물론 도덕이라고 함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형태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함과 인간을 창조하신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그 도덕도 언급하게 되어지지만 먼저 자증(自證, Autopistia)의 계시로서의 말씀인 성경에서, 특히 본문의 말씀에서 증거하시는 그 선과 악이라고 함을 주목하며 그것의 말씀하심에 대한 증거와 순종함의 기쁨과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들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 즉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심으로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분량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개인적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을 말함에 그 달란트적인 것을 나열함에 비하여서, 마음에 두어야 할 중심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심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을 비롯해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심과 같은 것, 결론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되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재창조적 섭리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축복의 말씀하심을 받음에 있어서 분별하여야 함의 지혜로써 선과 악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이라고 함은 마땅히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심과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말라고 하심을 지적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하심에 관련되어진 것을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것에 결론적인 측면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여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음을 또한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문맥에서 읽게 되어지는 선과 악함 중에서 먼저 악함, 마땅히 그 이상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이라고 함이 무엇인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교회에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의 율법과 믿음에 따른 신앙윤리의 문제라고 함에서 식상하며 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이상의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지 말라고 하심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의적인 임의적인 지혜의 형상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함이라고 함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인하여서 협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함이라고 함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협력하게 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함에 이르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선함이라고 함의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하심을 스스로 취하심이라는 절대 성실하심에서 주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의롭다 칭하심을 받은 성도들과 그들이 믿음 안에서 분별하는 것에 재가를 주시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믿음의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사실이 되어지며 그것이 상대적인 현실적인 실제의 삶 속에서 도덕적인 선함의 형식을 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언급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의(義)로 여기심(창 15:6)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의 사실을 믿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 부정으로 표현하게 되어지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매여 있을 수 없으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심을 나타내심인데 이를 믿는 성도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주 안에서 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실’이라고 함의 실제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善)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른 예정하심의 신실하심과 그 절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질 수 없음을 기억하고 그 믿음 안에서, 어쩌면 죽음의 공회와 같이 협력의 사실을 말할 수없어 보이는 듯한 자리에서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인내하며 주의 뜻하심을 상대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내는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선(善)이고 악(惡)인가 할 때에 도덕적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실리적 유익이라는 개념에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선과 악이라고 함의 사실이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어지고 분별되어진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 신앙의 윤리 인생의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향방이 없는 생각과 판단으로 식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게으른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를 받고 실행하지 않은 악한 종의 모습으로써의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서의 선(善)이며, 마땅히 품어야할 이상의 생각과 같은 것에서 벗어남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선(善)이며 이와 같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영적 예배로 경배드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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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3월 28, 2005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2005년 3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2:16-23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judges

그렇게 오래 되어진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는 목양적인 개념에서 또는 주의 성도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함에 있어서 관계성에 대한 노력을 하여왔습니다. 그러한 것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멘토’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멘토’라는 말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쿠스의 보호자요 가정교사였던 ‘멘토(Mentor)’에게서 유래되어졌는데 그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아들을 아버지 못지않는 훌륭한 인물로 키워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정교사와 같은 존재를 성경의 인물관계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보다도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은 사사들(judges)이라고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 이면서도 오히려 철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는 유명한 스승에게서 배운다는 측면에서 ‘사사(師事)’(making a person one’s teacher; become a person’s pupil)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 두 ‘멘토’와 ‘사사’라는 말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사의 의미와 실제로 받음이 좋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로 인함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신 가운데서 그 사사와 함께 하셨음과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으로 구원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 이스라엘들이 부르짖음에 대한 이유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더욱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음과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청종치 않음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남겨두셨음에 대한 것을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으로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예표적 실제로서 그 당시의 실제적인 존재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주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고 그 가운데서 그들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여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전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 이방인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으로 주셨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올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아예 두지 않으셨음이 좋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으로서의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는 형식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의 모습임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선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아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것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삶의 모습에서 주의 형상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 보편적인 타당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심에 의문의 당위성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기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인 판단으로써의 삶의 모습을 지도하는 사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지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서 이의라는 것이 제기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여지가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서 사사가 없을 때에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행하고 사사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서 생활한다는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합당하게 세우셨다는 것과 그것의 합목적적인 것이 하나님께 경배함의 진정한 사실과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목적적인 신앙의 모습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교제와 그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한 관계라는 것을 그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관계로 생각함에는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관계성이라는 것에서 행하는 가운데서 멘토라든지 아니면 사사와 같은 관계성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성장하도록 행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최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멘토라는 개념은 이방의 개념으로써 취할 수 있으면서도 주의하여야 할 것은 대인관계라는 개념과 그 대인관계에서의 도의적 정적인 인상을 받도록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의도하는 합목적적인 교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는 개념입니다.

물론 임의적으로 불어넣을 수 있지만 그 교제에서의 멘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중보적 역할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주님에 대한 것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경우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측면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우상적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는 그 우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오히려 학습적인 것으로 유용하다는 것으로 받는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에서의 사사라는 개념은 역시 지식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학문이나 지성적인 것을 기준으로 더 나아가서 그의 가르치는 자의 인격의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데 역시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에 기독교적인 측면에서의 사사를 말할 수 있지만 본래 학문의 기본적인 입장으로써의 철학을 말한다면 그러한 전제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는 수련을 말하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사들(judges)에 대한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 존재와 사역적인 정당함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전제를 하는 것은 그만큼의 한정적 의미로써 보편을 말하지 못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의 보편적인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사사적 역할을 하는 그 종들의 입장을 속히 떠나며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삶과 학문에 대하여서 떠나는 모습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자체 즉(‘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모순적인 입장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전제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는 것이 좀더 솔직한 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전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읽게 되어질 때에는 가장 보편적인 것을 전제하여야함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보편이 전제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생각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핑계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사들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의 그 축복에 섰지만 그 사사들이 죽음이 있게 되어지면 그 때를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 이방인들과의 언약의 실제를 전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그들의 삶의 평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반 처세술적인 개념에서는 이러한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무 이상이 없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유익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 중에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서 답변할 수 없다는 개념에서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개념으로 일관하거나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대충 상식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최선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고 유일신을 믿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다른 종교도 포용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현상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모두 넘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주 하나님 앞에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민족적인 영웅 신앙의 영웅적 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서 그리고 그 소명의 정도를 따라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향성에서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사사로서의 모습과 사역적 정당함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그 증거는 오히려 독이 되어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이 옳은데로 행하는 악한 쓴 뿌리를 낳게 되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 안에서 분별하여 받는다고 할 때에 멘토의 입장은 주 하나님 안에서 그 관계의 설정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가운데서든 인간관계라는 개념의 실리적 개념과 태두리가 그를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사사라는 개념은 주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이라고 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다를 건너 자신보다도 더 악한 독사의 자식들을 길러내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이방종교도 포용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사사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함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점에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멘토나 사사라는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이라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그 분별되어진 가운데서 실제적인 섬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개념을 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현 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때에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지난날 사사들을 통하여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서 그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가운데서의 섬김을 통하여서 이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그 때를 말하는 이사야와 같이 이시대의 주의 사사들로써 쓰임을 받게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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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3월 24, 2005

이방인의 충만한 수

2005년 3월 2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25-36
이방인의 충만한 수

어떤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에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그 옳고 그름이라고 함을 분별해야 하는 당위성의 여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는 것 즉 시비(是非)를 가린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기업(基業) 논쟁, 누리게 되어지는 분복으로써의 영토라고 하는 것이 논쟁이 되었을 때에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논쟁이라고 하는 것, 시비를 가리는 것이 당위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것의 거짓됨과 잘못됨이라고 함의 당위성적인 판단으로 시비를 제기했던 자들은 책임성 있는 비판과 비난과 그에 대한 보상적 입장에 처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앞선 당위성의 문제는 바로 취득시효(取得時效)라는 것입니다.

취득시효라는 것은 ‘물건이나 권리를 일정한 기간 계속하여서 사실상 점유하는 사람에게 그 물건이나 권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는 제도’를 말하는 법률적 언어입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취득하여서 발생하게 되어지는 앞선 정의적인 입장에 기득권적인 당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먼저 있다’는 측면에서 이 ‘취득시효’라는 말을 한 교부가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과 그 전제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함이 비판적 여지가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기업으로서의 성도들을 표현하고 있는 즈음에서 하나님이 알기 원하시는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0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특별영감 속에서 비밀을 알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함을 언급하며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과 택하심에 대한 언급을 기억하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순종치 아니함과 긍휼을 베푸심에 상관관계에 대한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일깨워주시고 있는 말씀과 주 하나님께 모사가 없음에 대한 것을 인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이라는 것을 또한 인식하도록 하며 그것이 진리임에 대한 인치는 아멘이라는 말씀으로 인(印)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 알기를 바라시고 있는 비밀로써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라는 말이 유대인을 제외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포함한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개별적인 부르심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배경적인 문맥적인 말씀하심의 전반적인 것을 주목해보면, 로마에 있는 유대인으로서 성도들과 헬라인으로서의 성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유대인들과 헬라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율법이해에 따른 신앙의 윤리문제로 다툼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까지의 내용은, 그러한 가운데서의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고 이것은 ‘스가랴의 두 감람나무에 대한 질문’(슥 4:11~5:4)을 사도 바울이 마음에 두고 해석한 내용으로서의 말씀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알기 원하는 그러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고 하는 비밀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의 해석은 이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이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유대인도 포함되어진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라는 긍휼이 되었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관성을 이해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 유대인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민족적인 유대인의 회개가 있게 되어질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직도 계시의 성례전적인 측면의 때를 분별하는 그러한 기준임을 말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까지의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예표적 실제로서의 완성된 그들의 사역을 받지 않는 것으로 잘못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충만함’을 말할 때에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이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서 동일하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리에 서야 함과 그러한 형태라고 함이 언약의 예정된 뜻하심을 이루심에 더욱 충만함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8절과 29절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복음으로 인하여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적 개념에서 그것을 지나 절대의 영역에 이르는 것의 아름다움과 그것으로 인한 의로움을 말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그들이 원수되어진 유대인들의 원수되어진 바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있고 사랑하심이 있었던 자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써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택하심이라고 함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예정하심은 청함과 택함이라고 함이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역을 위한 택함과 사역과 아들로서의 택함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도 충분히 가려지는 것입니다. 특히 사울이나 예후와 같은 존재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분별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자들을 먼저 선택하셨음에 대한 기득권적인 측면에서 복주심의 신실성이 있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 민족 모두를 즉, 민족의 개개인으로서의 구성원 모두를 택하심의 은혜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한명도 빠짐없이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속되어진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를 선택했지 이스라엘이 언약을 선택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면 꺾이운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그것에 대하여서 가두어졌음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역할을 성경이 기록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문에서와 같이 완악한 실체들로서 섬김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례전적인 측면의 실체로서의 이스라엘과 그 가운데서의 진실로 언약을 받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신실하심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여지에 국한되어지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과 그에 따른 절대 신실하심에 반기를 들어서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고 가르칠 모사가 존재하겠느냐는 말씀을 ‘그가 주의 모사가 되겠느냐’(34절)는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셨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언약이신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주의 부르심에서 청함과 택함이라고 함을 통한 구별적인 입장을 말씀하셨음을 기억할 때에 취득시효적인 개념의 복됨이라고 함이 전적인 구원이라고 함의 실제를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적인 대대적인 유대인의 회개라고 하는 것은 충만의 뜻하심이 누구에게나 열린 형태로써의 부르심이라고 함의 형식과 사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것입니다. 즉 온전한 이스라엘이란 주께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은 자들로서 지칭하심을 말씀하심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충만’이라는 개념을 주의 택한 백성들의 상대적 완전성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입은 자의 성격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고 민족적 회개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례전적인 증거자들로서 계시적 실존으로 판단 받는 것이, 주 앞에서 심판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충만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원가지라도 순종치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심과 같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민족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하심의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그 충만함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함을 또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윤리라는 것, 신앙생활이라고 함의 경건이 어떤 상대적인 경지를 지나 절대의 어떤 임의적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과 같이 가르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이 주의 판단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은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경건의 사실이 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써 진정한 경건의 자리에 나가시는 가운데 주께서 구원하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속하는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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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3월 17, 2005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2005년 3월 1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1-24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세계 농수산물 수입 자유화에 따른 우리나라의 농업과 같은 업종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책 중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과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고 또한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내는 것과 품종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경쟁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예로써, 이웃나라의 개발된 딸기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딸기품종으로 선택하는 그러한 사례를 소개함을 보았는데, 적극적인 권유적인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일상적인 용어가 어떤 특수한 용어로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옛 농촌문화가 일상적인 경우에서는 어떤 품앗이 또는 농촌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로써 자리매김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예농업을 하시거나 또는 화초를 가꾸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알려진 것이지만 그렇게 일상적인 용어로 오늘날 언급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현상적인 현실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돌감나무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며 이처럼 접붙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10장에 내용을 의식하면서 이끌어내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비리셨느냐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고 함에 대한 언급과 함께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언급하며 엘리야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즉 혼자만 남았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상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음을 다윗의 언급을 인용하여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실족에 대한 의미를 재고할 수 있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읽을 수 있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한 언급과 비유되어질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자긍하지 말 것과 원 가지의 접붙임이라고 함이 더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접붙임이라고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유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주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임을 나타내며 교회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접붙임이라고 하는 성격을 알게 될 때에 그 교회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은 로마서 10장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 즉 10장에서는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책망과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음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열심이라고 함을 규정받을 때에, 그러면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열심이라고 함과 믿음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논하는 판국에 모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인식적인 판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연약함을 받아서 분명하게 먼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어서 결코 남은 자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엘리야의 현상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 즉, 자기 외에 아무도 믿는 자가 없다는 것과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정황의 인식판단의 강요를 받는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두신 뜻하심에서 받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 섭리의 사실이 지금의 판단 강요보다도 더 실제적이며 분명한 사실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제 두 부류로서 히브리파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파 성도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당위성으로 진행되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 성도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도의 변함없는 신실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의 표현적 증거로써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거룩함으로 먼저 전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이제 현상적인 두 민족적 형태로서의 현상적 충돌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서의 그 성도됨의 모습이라고 함을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구약의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두도록 하는 중심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슥 4:11~5:4)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슥 4:11~5:4)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가 본 예언에서 하나님께 질문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나타나는 두 시대의 한 국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소속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서 선지자에게 이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 4:14)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하게 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게 되어지는 이상 중에서는 두루마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두 가지 저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라는 것과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라고 함인데 이것은 구약의 십계명에 대한 것과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심과 이에서 지나 악에 치우칠 것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도적의 집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들에게도 들어가 저주가 머물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십계명에 대한 것과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성도의 삶에 총체적인 기도가 되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하심과 같이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신구약의 성도들의 모습과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죽음의 공회라고 할 수도 있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는 현상적 실제의 판단으로써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받게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출신의 크리스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접붙임의 능력이라고 함이 하나님께 있다고함을 말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과 예수그리스도 성부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에서 있게 되어짐에서 그 권위적,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파생되는 권위에서, 상대적인 판단의 이의로 말미암은 현상적 판단에 실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심과 그러한 것이 겸손함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떤 경지에 이른다고 함에서 어떤 경건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꺾이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면 천국갈 수 있다는 식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전제는 이미 잘못인 것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꺾이움,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이방인의 충만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두 부류의 성도들의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이방인의 부요함과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언급에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같이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넘어져 실족하지 않을 것에 대한 언급(롬 11:8)을 마음에 두고,이방인들이 나중에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집단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 자체의 대대적인 회개라고 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어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의 부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의 완전성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의 넘어짐에서 은혜의 실제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스가랴의 증거와 같이 등대잔 좌우에 위치한 것으로써 중보자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들로서의 수를 말씀하심으로 그 온전케 되어짐의 종들이 돌아옴이 바로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의 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사도 바울은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그 정당함에 재가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롬 11:23)

말씀을 맺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라는 그 선지자 스가랴의 질문은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로써 표현하고 있고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동일한 성도들이며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믿음과 행함에’, ‘신앙과 윤리에’ 대한 연속성이라고 함을 바르게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면, 그 충만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지금도 ‘계시를 담지한’ 이스라엘이 있을 것을 상정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한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개념의 분별없는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협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예정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들, 즉 신앙의 고백들이 다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협력하여 이룰 선이 없다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냐 행함이냐는 그러한 불연속성의 상대적 완전성을 지나 절대에 영역에 이르러야 한다는 경건의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의 굴레에서 자유하면서도 더욱 신실한 경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말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가운데서 참으로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이라고 함의 판단으로 협력의 선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경건이라고 함의 완전함을 들어서 정죄하는 것과 또한 개연적인 신비적 개념의 믿음으로 성도들의 인식의 사실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참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 앞에서, 인식의 불연속적인 생각들로 나타날 수 이러한 감람나무들의 모습들로써 접붙임의 은혜가 나타날 때에 못하겠다는 개념으로 충성치 못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참되게 믿음으로 충성하시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은혜의 돌감람나무들로써 주께서 받으실 열매를 맺는 귀한 은혜의 성도들로써 종들이 되시는 은혜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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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토요일, 3월 12, 2005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005년 3월 1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욜2:1-32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젊은 사람이 꿈과 야망이라고 하는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서 어쩌면 질타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성에 대한 판단으로 좌절되거나 또는 평가되어질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면서도 이상의 방향성만큼은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상을 말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젊은이의 이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말에 있어서 정황적 배경이라고 함에 따라서 동일한 표현도 다른 뜻한 바의 내용적 실제를 담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젊은이의 이상에 대한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엘서는 이상이라고 함을 어떤 주술적인 신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거나 또는 잘못된 접신적 개념의 성령론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언어학적인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것보다 달리 본문이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하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은 날임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것을 대면하는 자들의 얼굴이 하얘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큰 군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여호와의 말씀에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고 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백성들을 모아서 그 회를 거룩하게 하고 소아와 젖먹이는 자들과 신랑과 신부가 그 방에서 골방에서 나오도록 제사장들을 낭실에서 회개할 것과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땅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며 그로 인한 풍성함과 기이히 대접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며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심으로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푸심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해가 어두워지고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과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1절,15절)는 표현이 두 번 언급되어지며 ‘그후에’(28절)라는 측면에서의 동일한 내용의 전반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가운데서 그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들과 우리 성도들의 주의 뜻하심을 받음에 대한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호세아 선지자가 북쪽 이스라엘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과 달리, 남쪽 유다족속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는 대 전제적 말씀 안에서 총체적인 계시적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두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뜻이고 ‘요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셈족 계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이름적 내용이라고 함이 삶의 존재적 증거의 형태라는 것으로 나타내실 때도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이 선지자의 존재적 증거로서 읽게 되어진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즉 해석하면 ‘하나님의 보여주심에 있어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과 같은 신앙’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부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계시적 총체적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과 동일한 내용적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본문에서는 종말에 때에 대하여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언근하고 총체적인 언급을 같이하고 있는데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으로 두 부류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라는 언급과는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는 곳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임을 이사야와 미가서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2:3; 미 4:2)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그 율법이라고 함을 준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행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윤리라는 것과 인생의 윤리의식을 모두 칭하는 곳으로서의 시온을 말하며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 그리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주신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알려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의 중심과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참된 구원이 있게 되어질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받을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그 심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행함에서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회개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돌이키심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주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따른 기이한 대접을 인하여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심에 따라서 주의 몸된 교회에 성령의 부어주심의 외적 공식적 표현에서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자가 되어지는데 ‘보라 하나님의 큰일이로다’(행 2:11)라고 외침이 본문의 말씀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속의 때 말세의 때에 그 믿음이 없음에 대한 탄식을 하셨던 주님의 마음이라고 함과 판단이라고 함이 요엘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부류에게 불게 되어지는 시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되어질 일들이 하나님의 신으로 인하여서 자녀들이 장래를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불확실한 실제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장래를 말한다는 것은 구속하심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시온이라는 주의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자녀들 주의 말씀으로 낳은 종들이 주의 말씀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앞으로 주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라고 하심은 역시 동일한 표현으로써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그의 힘의 기력이 다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으로써 직접적인 행함의 사실로써 증거하는 증거인들이 될 수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그 소망의 실제를 기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달란트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하며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가르쳐주심에 따른 예비함이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이 있게 되어지는 때를 의미하는데 그 앞서 있게 되어지는 징조들은 해가 어두워질 것에 대한 것과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는 때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시는 예수님(말 4:2, 눅 1:78)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마음에 두지 못하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주의 복음의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는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는 성도의 모든 권세가 깨어지는 때(단 12:7)를 말씀하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달빛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신 예수님(말 4:2, 눅 1:78)과 상반되어진 자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전혀 상관없는 자들과 같은 자들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기만적으로 행함이 생명을 앗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함이 부인할 수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주장하여 악을 범하게 되어지는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그들의 자위적 정당함은 시간이라고 함 때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해와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의무를 행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해와 달의 기준으로 보게 되어지는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과 달리 임의적 시간관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일반적인 역사 가운데 주의계시가 나타남에 대하여서 부정할 수 있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역사적인 실존인물인가? 하나님에 대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문학적 인식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 아닌가 그러한 것도 모두 이러한 잘못된 시간관을 가지고 역사를 말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복음을 비평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태양신을 심기는 것과 같은 악한 현대사상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들 그러한 것과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행하는 삶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온으로서의 구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즉 첫 번째 시온에서 부는 나팔 소리에서 주의 심판하심과 회개하심의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온에 부는 나팔에 대한 증거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함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 참되게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리에 서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지닌 자들로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자들로서의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심에 대하여서 많은 이의를 재기하며 반대하여 왔고 그것이 역사 비평학의 기본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서 그 곳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알 수 없는 빽빽한 구름과 캄캄함이 있는 곳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 사단의 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재가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그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복음의 자녀들로서 장래를 말하게 되어질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소망의 부요함을 그 특별하게 증거적 소명을 맞지 않는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도 즐거워할 것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이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며 그 실천을 준비하며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엑스타시와 같은 경우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정신 차린 말을 함을 주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행 26:24)

참으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에 두면서, 참되게 주의 구원에 합당한 종들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가운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이상을 보는 주 안에서의 젊은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목요일, 3월 10, 2005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2005년 3월 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0:1-21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not in..

한 때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인해서 소비자측과 보험회사측 그리고 해당 회사들 간에 분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리콜제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가운데서의 조치와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요즘에는 그러한 논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쩜 엔진의 결함이냐 변속기의 결함이냐 소비자측의 부주의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한 언급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형태적인 측면만 고려해볼 때에 일반적으로 고급차량들이 사고난 것을 볼 때에 차가 잘 나가게 된다는 그러한 예민함을 말하기 전에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과 대처요령이라고 함이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에 비교하여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떤 일이나 행함에 있어서, 그 열심을 말하게 될 때에 분별없이 단정적으로 정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 열심이라고 함의 정체성이 재고되어져야함이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인 것과 같이 그 충성이라는 말은 열심이라는 요소적 개념에서 정체성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열심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열심에 대한 묘사를 바다를 지나는 것에 비교하시고 있습니다.(마 23:15)

그래서 그러한 열심이라는 것의 현상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실제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기에는 상당히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앞서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이 사실임을 말하게 될 때에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현상적 개념에서 비로소 이해하기 보다는 주의 복음의 말씀에서 사실 규정을 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에게 중요성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부딪혀 넘어짐에 대한 것을 로마서 9장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원하고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고 함을 말하며 저희의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함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함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는 불복종을 하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서 율법의 마침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더 나아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2절에 언급되어진 말씀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러나 다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주의 말씀은 온 땅에 증거가 되어짐에 대한 언급과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에게 주의 손이 펴졌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잘못된 열심이라는 정체성은 성도들의 연합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아드라뭇데노’(행 27:2)와 같이 죽음의 공회와 같이 파선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으며 참으로 바리새인들의 열심이라고 함과 구별되어지면서도 지식에 따른, 합당한 신앙윤리의 힘의 정체성으로써의, 하나님의 열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필요에 따라서 구비되어지는 것이나 판단되어지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을뿐 전반적인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분복으로 주시는 지식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와 구분되어진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역시 스스로 존재하시고 자신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경험에 따라서 또는 시간적 개념의 차이나 여타 그러한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존재와 지식이 아니고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존재가 그로부터의 정당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동연적으로 우리의 몸의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는 달리 죄를 지은 이후의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사람들은 죄로 그 인식의 변화가 왜곡되어지는 가운데서 존재와 지식이라고 함의 구분적 실체와 또한 존재를 위한 필요충분으로써의 지식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어떤 설(說)이라는 하나의 개연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참된 보편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겸손이라는 사실을 받기 주저하는 가운데서 서로의 공방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수록 죽음의 공회적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어지며 믿음의 선한 싸움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에 있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직도 주님 안에서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그러한 옥에서 나오도록 함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감옥의 문을 열게 되어지는 것은 행함이라는 신앙윤리라고 함에 대하여서 그 열쇠가 바로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윤리라고 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적인 것은 하나님께 인도하게 되어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미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되어진 자는 자존의 하나님 안에 있게 되어지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에서 이미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의 실제라는 것이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과 타당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성도들이 함께 되어진 자들로써 행함의 상대적 완전성과 그것을 지나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판단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 마침이 되어짐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의 실제를 율법의 완성적 개념의 여지를 놓고 다투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다 이루지 못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있다고 생각하여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올라오셔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에게 그 모습이 되어짐을 자각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어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의 신실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행함이라고 함의 당위성으로 묶으려는 사단의 결박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유하시며 하시게 하셨고, 특히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스스로 주장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고 할 때에 그가 말씀하심은 상대적인 형태를 통하여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그것의 형태적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말씀이심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연합에 대하여서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사실을 믿고 행할 수 있어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 그 의의 사실을 받게 되는데 이르며 그러한 존재적인 고백과 입술의 고백으로 주님을 시인하게 되어지는 전인격적인 신앙고백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른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형태적인 측면의 비판적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협력의 사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살아가는 것의 열매를 주께로 인증받게되어짐을 믿고 행하는 그 열심이 바리새인의 의에 따른 지식 없는 열심이 아니라 참된 열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그것의 형태적 불완전함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참된 실존을 말하며 참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보편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체적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 성도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와 같이 있게 되어지며 부단히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당위성도 참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형태적인 정황에서 요구되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하는 실증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고 할 때에는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에 이르는 그러한 바리새적인 경향의 바다를 지나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에 받아 형태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재가가 있으면 참된 섬김과 참된 열정으로써의 열심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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