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1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4:1-2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상투적인 의미와 표현으로 인해서 식상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새롭고 좀더 자극적인 것이 요구되어지는 가운데서 진부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고려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판단이 있는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는 것은 어쩜 그리 현명하지 못함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새롭다는 것은 좀더 다른 것으로써의 납득 당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에 납득 당위성의 실제를 말한다면 그 진부하다고 여겨졌던 태제들은 다시 재고되어져야 함에 있어서는 역시 합당한 당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은 오래되어진 기본적인 전제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간과하는 경향 속에서 그 진부함 속에 사실의 실제가 담겨진 것을 찾지 못하는 경향도 있게 되는데 이는 다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그 중심은 의미 없는 진부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성도들의 기본적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느뇨’라는 반문과 함께 증거되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며 그 사실의 실제로써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겠느냐 언급과 함께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음을 말하고 있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는 질문과 함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저에게 이것이 의로 여기신 바가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는 것과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서 다윗의 글을 인용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행복이 할례자에게 있는 것이나 무할례자에게 있는 것이냐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할례보다도 믿음의 앞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경에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고 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 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진술적 증거와 그 내용으로써 구체적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이라고 함을 함께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이 얻은 의라고 함이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미는 자, 예수님이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음을 나셨음을 믿는 자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 언급한 헬라어본문에서도 글자 그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는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데(롬 4:3),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그 실제적인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판단하고 있고 그 의의 실체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독특한 언급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저에게 이것이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해석’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주목할 때에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게 됨의 은혜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심을 입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오늘 본문은 전반적인 측면에서 이 말씀의 실제론적 기반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과 그 정당함을 상대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으로서의 신실하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그 불확실성의 사실들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에서 불합리성의 타당성이 강요되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 그러한 것에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 주의 말씀의 실제성이 참된 실제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즉 그 자존의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중심의 인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일반적인 정당함의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실재관을 주목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셈족의 기본적인 인식관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가운데서의 언약적 실제가 있을 것을 이후에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독특한 말씀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분별하게 됩니다.
즉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라고 함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이라는 것의 정체성과 타당성이라고 함을 사람 자체에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행한다고 하여도 그 행함의 사실이라고 함의 정당함과 정체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행한 일이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일의 행함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로 독특하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해석’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개연적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신실성의 재가를 기다리는 가운데서 그 재가 되어진 행동으로써의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증거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참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아름다운 행위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일반적인 주의 정당함을 드러내는 일반 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로써 그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윤리적 개념은 형태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개념의 동일한 표현이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믿음의 행함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반적인 윤리적 개념은 주의 구속하심 안에서 재가를 받은 윤리적 개념을 판단할 수 있으나 그 정당함은 주께로부터 본질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신앙의 형태를 갖춘 것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이라는 증표로써 구약적 증거가 할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구약적 행함의 총체적인 표상으로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전제하는 가운데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의 실제성을 자체적으로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 행함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그 안에서 의의 실제가 없음은 하나님 앞에서와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부인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
사도 바울은 주의 살아나심을 말씀하심은 그 예수님을 살리신 이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하고 있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구속자로 살아나심이라고 할 때에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그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바로 성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로 인(印)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그 증거로 인하여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자신의 부활과 구원하심의 실제성과 그를 믿는 자들이 여호와를 믿는 자들로써의 후손적인 동일성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얻은 구원의 의라고 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단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 상대적이라는 그러한 판단을 숭상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주님의 자존적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고 자기 기만하는 자들이 판단 받을 것이나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실제를 현실 속에서도 주목하게 되어지는 자들은 비록 하나님께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받으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며 그 구원의 행복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가운데 현실적인 실제의 삶 속에서 주의 뜻하심의 구원의 실제를 이루어나가시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주의 구원의 자녀들로의 기쁨의 사실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4:1-25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상투적인 의미와 표현으로 인해서 식상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새롭고 좀더 자극적인 것이 요구되어지는 가운데서 진부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고려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판단이 있는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는 것은 어쩜 그리 현명하지 못함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새롭다는 것은 좀더 다른 것으로써의 납득 당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에 납득 당위성의 실제를 말한다면 그 진부하다고 여겨졌던 태제들은 다시 재고되어져야 함에 있어서는 역시 합당한 당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은 오래되어진 기본적인 전제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간과하는 경향 속에서 그 진부함 속에 사실의 실제가 담겨진 것을 찾지 못하는 경향도 있게 되는데 이는 다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그 중심은 의미 없는 진부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성도들의 기본적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느뇨’라는 반문과 함께 증거되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며 그 사실의 실제로써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겠느냐 언급과 함께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음을 말하고 있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는 질문과 함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저에게 이것이 의로 여기신 바가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는 것과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서 다윗의 글을 인용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행복이 할례자에게 있는 것이나 무할례자에게 있는 것이냐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할례보다도 믿음의 앞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경에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고 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 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진술적 증거와 그 내용으로써 구체적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이라고 함을 함께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이 얻은 의라고 함이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미는 자, 예수님이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음을 나셨음을 믿는 자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 언급한 헬라어본문에서도 글자 그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는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데(롬 4:3),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그 실제적인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판단하고 있고 그 의의 실체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독특한 언급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저에게 이것이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해석’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주목할 때에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게 됨의 은혜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심을 입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오늘 본문은 전반적인 측면에서 이 말씀의 실제론적 기반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과 그 정당함을 상대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으로서의 신실하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대아 우르 지방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할 때에 그 불확실성의 사실들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에서 불합리성의 타당성이 강요되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 그러한 것에 판단되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 주의 말씀의 실제성이 참된 실제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즉 그 자존의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중심의 인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정당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일반적인 정당함의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실재관을 주목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셈족의 기본적인 인식관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가운데서의 언약적 실제가 있을 것을 이후에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독특한 말씀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분별하게 됩니다.
즉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라고 함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이라는 것의 정체성과 타당성이라고 함을 사람 자체에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행한다고 하여도 그 행함의 사실이라고 함의 정당함과 정체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행한 일이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일의 행함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로 독특하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해석’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개연적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신실성의 재가를 기다리는 가운데서 그 재가 되어진 행동으로써의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증거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참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아름다운 행위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일반적인 주의 정당함을 드러내는 일반 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로써 그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윤리적 개념은 형태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개념의 동일한 표현이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믿음의 행함의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반적인 윤리적 개념은 주의 구속하심 안에서 재가를 받은 윤리적 개념을 판단할 수 있으나 그 정당함은 주께로부터 본질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신앙의 형태를 갖춘 것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이라는 증표로써 구약적 증거가 할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구약적 행함의 총체적인 표상으로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전제하는 가운데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의 실제성을 자체적으로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 행함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그 안에서 의의 실제가 없음은 하나님 앞에서와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부인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
사도 바울은 주의 살아나심을 말씀하심은 그 예수님을 살리신 이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하고 있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구속자로 살아나심이라고 할 때에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그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바로 성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로 인(印)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그 증거로 인하여서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자신의 부활과 구원하심의 실제성과 그를 믿는 자들이 여호와를 믿는 자들로써의 후손적인 동일성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얻은 구원의 의라고 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단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 상대적이라는 그러한 판단을 숭상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개념으로 주님의 자존적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고 자기 기만하는 자들이 판단 받을 것이나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실제를 현실 속에서도 주목하게 되어지는 자들은 비록 하나님께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받으심의 은혜를 입게 되어지며 그 구원의 행복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가운데 현실적인 실제의 삶 속에서 주의 뜻하심의 구원의 실제를 이루어나가시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주의 구원의 자녀들로의 기쁨의 사실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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