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월 01, 2005

호심경(護心鏡)

2004년 12월 31일 소망교회 송구영신예배설교
사59:9-21
호심경(護心鏡)

한 해를 돌아보면서, 그리고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시점에서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은 중심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진 피해로 인한 인명피해가 세계적인 재앙으로 언급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렇게 쉽게 다사다난이라는 옛 추억이라는 의미에서 쉽게 묻어버릴 수 있는, 쉽게 털어버릴 수 있는 것같이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시린 해로서 기억되어질 것 같습니다. 슬픔의 표현으로 가슴이 아프고 다시 어떤 일에 대한 의욕적 희망을 담을 가슴이 상처를 받았는데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을 가슴으로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으로 와 닿습니다.

이 시점에서 말씀하시는 위로의 말씀이 호심경(護心鏡)의 말씀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호심경이라고 함은 ‘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을 말하는데, 상처 난 가슴에 정녕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 오심을 이미 말씀하심에 그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살아계시는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공평이 멀고 의가 미치지 못하고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소경같이 더듬으며 곰같이 부르짖으며 구원을 바라나 구원이 멀다는 사실인식과 우리의 허물이,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함을 말하고 있고 그 죄악을 알고 있음을 언급하며 그로 인한 정직과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한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며 스스로 자기 의를 의지하사 의를 호심경 삼으시며 구원의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하심으로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을 말씀하시며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언약이 죄과를 떠나는 자들의 후손에 입에서 떠나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호심경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라고 함과 그것의 실체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가슴시린 앞으로의 삶의 정황에서도 소망이 되어지며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심임을 마음속에 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이라고 하는 것 일반적으로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인식되어지는 것을 따르는 것이 기본적인 정당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죄악 가운데서 그러한 기본적인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그야말로 공론(空論)이라는, 실체의 사실이 부정되어진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후손으로써, 즉 그의 직계적 혈통이라는 개념을 포함한 영적으로 ,히스기야의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자리에서의 함께 판단을 받는 자들의 모습과 정체성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13절) 그것이 죄임을 그들도 인정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심은 ‘여호와를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실제의 의식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을 실제의 기준으로 믿었기에 현실적인 부정되어진 기본적인 상식적 정당함을 아브라함은 받지 아니하였던 것인데 그것을 의로 여기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표현을 하는 이단종파에서는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믿는다는 자의적 입장을 취하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심을 믿지 못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속칭 ‘여호와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실제라고 함의 인식적 강요를 받게 되어지는 그러한 때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분별되어지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제를 받으며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제를 받아들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아픔으로 상처받게 되어지며 쓰러지게 만드는 현실적 강요의 실제를 막아내는 호심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호심경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가 되어지며 그 의는 자존의 절대자로 자신의 부활에서 증거하신 예수님의 의롭게 하심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의로우심이며 우리의 의의 흉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와 참사의 세상과 개인적인 현실적인 사실에서도 앞으로의 곤고함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의 앞에 놓여 있을 때에 새로운 시간들을 받아들일 가슴시린 고통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을 때에 전장에 나가는 장군의 가슴 보호대와 같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믿는 모든 사람들의 흉배가 되어 믿음의 선한 싸움에 힘써 행하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이와 같이 주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가슴시린 가운데 지난해를 보내며 새롭게 새해를 맞이하시는 가운데서도 감사로 시작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