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24:13-35
무슨 일이뇨
우리가 사는 지역에 따라서 동일한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욕(bath)하다는 말이 어느 지역에서는 '파산하다, 큰 손해를 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말이 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면서도 어떤 실제적인 기준에서 어느 하나가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기준이란 그가 영국에 사느냐 또는 미국에서의 사는가 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국의 목욕하다는 뜻이고 후자는 미국의 목욕이라는 말이 속어로 나타날 때에 사용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같이 인식의 발상이라고 함의 여러 가지 속에서 실제적인 근거를 통한 인식의 확실성을 가지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이 모든 된 일에 대하여서 서로 이야기함에 주님께서 동행하셔서 무슨 일이냐는 말씀하심과 함께 그들의 진술을 들으시고 책망하시면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세히 설명하심과 그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강권하여 유하게 함에 음식 잡수실 때에 축사하심과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주님은 저희에게 보이지 않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을 들은 자들의 중심이 뜨거워짐을 논하고 곧 일어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니 열한 사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나 타나셨다고 함과 두 사람도 길에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엠마오라는 촌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 인데 그 내용인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실제적 기준을 찾는 사람들의 슬픔과 그 실제적 기준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음이 그것입니다.
‘엠마오’라는 말은 ‘따뜻한 우물’이라는 뜻과 ‘따뜻한 목욕’(warm bath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지역에 그 당시 현실적인 실제적으로 따뜻한 우물이 있어 목욕하는 곳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곳을 향하는 사람들의 인식적인 측면이 주의 말씀하신 바에 대한 실제적 계시의 증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함에 대한 격렬한 논쟁 및 논의가 있었고 정신나간 사람들까지 있는 곳같은 그러한 삭막한 곳에서 가슴으로 받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는 곳을 찾는 자들의 모습으로써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격렬한 논쟁이라고 함과 논의가 있으며 그러한 것이 더구나 사실 여부의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진정한 실제가 없는 공허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로마 당국에서는 돈을 많이 주어 주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마 28:12)이며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인들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그러한 말을 들을 때에 얼마나 상심이 커서 주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못할까하는 그러한 상식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가운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적인 대단한 파장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더욱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음과 그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인하여 슬퍼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주님의 말씀의 합리성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 납득 정당함을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일에 능하다는 상대적인 정당함이라고 함을 주목하며 그러한 가운데 상대적인 존재로써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자로서의 예수님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합리성만 생각하면 그 돈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자들의 말들도 합리적인 타당성이 있어보이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개연적으로나마 타당성이 있다고 할 때에 이것 저것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식상해하는 가운데서 냉하여진 가슴에 슬픔만 가지고 그 따뜻함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표현으로 말한다면 ‘잔뜩 찌푸린 얼굴의 모양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써 우거지상을 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뇨’라는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더디 믿음에 대한 것을 책망하시고 성경에 예수님 자신에 대한 자세히 가르쳐주신 것을 인하여서 그 가슴이 마음이 뜨거워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눅 24:32)
세상에 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정당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심에 있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들인데,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하는 마음을 주셔서 인도하신다는 것’(빌 2:13)을 기억할 때에 주의 말씀 안에서 그 마음이 따뜻한 가슴 벅찬 기쁨과 소명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주관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참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합당한 당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언급하면 오늘날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인 타당성만 생각하는 가운데 실제를 말하지 참되게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의 실제의 기준이 되어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인식의 확실성이 마치 없는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어지는 세상의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성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실제적 기준을 찾는 사람들의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 확실성과 복음의 사실성에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셔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며 그러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라 주의 부활의 자존적 사실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자기의 정당함을 따르는 주의 말씀해석에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진짜 사실이냐는 합리성의 논재와 그 확실성을 알지 못하여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엠마오의 제자들 처럼 주의 말씀안에서의 복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서 주 예수님의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되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사역을 위한 소명으로 말씀안에서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도덕적 선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도덕적 선함이라는 인식적인 사실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일반적 정당함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이며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오시며 진정으로 합당함의 통치하심에서 진정한 구원의 사실과 현실적인 사실을 분별하며 그 주신 은사로서 구원과 삶의 실제를 사랑하게 되며 그러한 소명으로 가슴 벅차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죄악으로 인해서 슬픔이 잠시 기숙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 우거지상을 하는 즉 잔뜩 찌푸린 얼굴의 모양을 강요하는 가운데에 있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고 하셨던 말씀(시 30:5)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슬픔으로 세상의 따뜻함을 찾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뇨 라는 반문과 함께 사랑어린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그 일시적인 기숙한 울음이라는 슬픔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합리성이 많이 있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을 의지하여서 그 안에 있어야 하며 죄악을 씻는 샘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 예언된 죄악을 씻는 샘을 찾는 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었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부활하심의 사실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받을 만한 사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안에서의 합리성과 그 사실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인(印)져진 것을 기억하고 그 구체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서 주의 말씀 안에서 인도하심을 받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눅24:13-35
무슨 일이뇨
우리가 사는 지역에 따라서 동일한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욕(bath)하다는 말이 어느 지역에서는 '파산하다, 큰 손해를 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말이 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면서도 어떤 실제적인 기준에서 어느 하나가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기준이란 그가 영국에 사느냐 또는 미국에서의 사는가 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국의 목욕하다는 뜻이고 후자는 미국의 목욕이라는 말이 속어로 나타날 때에 사용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같이 인식의 발상이라고 함의 여러 가지 속에서 실제적인 근거를 통한 인식의 확실성을 가지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이 모든 된 일에 대하여서 서로 이야기함에 주님께서 동행하셔서 무슨 일이냐는 말씀하심과 함께 그들의 진술을 들으시고 책망하시면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세히 설명하심과 그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강권하여 유하게 함에 음식 잡수실 때에 축사하심과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주님은 저희에게 보이지 않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말씀하심을 들은 자들의 중심이 뜨거워짐을 논하고 곧 일어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니 열한 사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나 타나셨다고 함과 두 사람도 길에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엠마오라는 촌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 인데 그 내용인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실제적 기준을 찾는 사람들의 슬픔과 그 실제적 기준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음이 그것입니다.
‘엠마오’라는 말은 ‘따뜻한 우물’이라는 뜻과 ‘따뜻한 목욕’(warm bath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지역에 그 당시 현실적인 실제적으로 따뜻한 우물이 있어 목욕하는 곳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곳을 향하는 사람들의 인식적인 측면이 주의 말씀하신 바에 대한 실제적 계시의 증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함에 대한 격렬한 논쟁 및 논의가 있었고 정신나간 사람들까지 있는 곳같은 그러한 삭막한 곳에서 가슴으로 받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는 곳을 찾는 자들의 모습으로써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격렬한 논쟁이라고 함과 논의가 있으며 그러한 것이 더구나 사실 여부의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진정한 실제가 없는 공허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로마 당국에서는 돈을 많이 주어 주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마 28:12)이며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인들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그러한 말을 들을 때에 얼마나 상심이 커서 주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못할까하는 그러한 상식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가운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적인 대단한 파장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더욱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음과 그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인하여 슬퍼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주님의 말씀의 합리성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 납득 정당함을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일에 능하다는 상대적인 정당함이라고 함을 주목하며 그러한 가운데 상대적인 존재로써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자로서의 예수님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합리성만 생각하면 그 돈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자들의 말들도 합리적인 타당성이 있어보이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개연적으로나마 타당성이 있다고 할 때에 이것 저것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식상해하는 가운데서 냉하여진 가슴에 슬픔만 가지고 그 따뜻함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표현으로 말한다면 ‘잔뜩 찌푸린 얼굴의 모양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써 우거지상을 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뇨’라는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더디 믿음에 대한 것을 책망하시고 성경에 예수님 자신에 대한 자세히 가르쳐주신 것을 인하여서 그 가슴이 마음이 뜨거워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눅 24:32)
세상에 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정당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심에 있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들인데,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하는 마음을 주셔서 인도하신다는 것’(빌 2:13)을 기억할 때에 주의 말씀 안에서 그 마음이 따뜻한 가슴 벅찬 기쁨과 소명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주관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참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합당한 당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언급하면 오늘날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인 타당성만 생각하는 가운데 실제를 말하지 참되게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의 실제의 기준이 되어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인식의 확실성이 마치 없는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어지는 세상의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성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실제적 기준을 찾는 사람들의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그 확실성과 복음의 사실성에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셔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며 그러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라 주의 부활의 자존적 사실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자기의 정당함을 따르는 주의 말씀해석에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진짜 사실이냐는 합리성의 논재와 그 확실성을 알지 못하여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엠마오의 제자들 처럼 주의 말씀안에서의 복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서 주 예수님의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되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사역을 위한 소명으로 말씀안에서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따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도덕적 선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도덕적 선함이라는 인식적인 사실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일반적 정당함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이며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오시며 진정으로 합당함의 통치하심에서 진정한 구원의 사실과 현실적인 사실을 분별하며 그 주신 은사로서 구원과 삶의 실제를 사랑하게 되며 그러한 소명으로 가슴 벅차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죄악으로 인해서 슬픔이 잠시 기숙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 우거지상을 하는 즉 잔뜩 찌푸린 얼굴의 모양을 강요하는 가운데에 있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고 하셨던 말씀(시 30:5)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슬픔으로 세상의 따뜻함을 찾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뇨 라는 반문과 함께 사랑어린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그 일시적인 기숙한 울음이라는 슬픔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합리성이 많이 있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가운데서의 그 정당함을 의지하여서 그 안에 있어야 하며 죄악을 씻는 샘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 예언된 죄악을 씻는 샘을 찾는 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었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부활하심의 사실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받을 만한 사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안에서의 합리성과 그 사실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에서 인(印)져진 것을 기억하고 그 구체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서 주의 말씀 안에서 인도하심을 받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