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월 08, 2005

이제 어디 계시뇨

2005년 1월 7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사63:1-19
이제 어디 계시뇨

우리 성도들은 사도신경을 낭송하는 예배순서를 가지는 것이 기본적인 예배모범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낭송이라고 함보다도 신앙고백으로써 우리가 어떤 주문을 외우는 듯한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며 그 내용적인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고백과 증거적 차원에서 식순에 따라 고백함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도들의 고백적인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의미적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7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에돔에서 오시며 홍의를 입으신 분으로서 오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옷의 붉음이라고 함은 포도즙을 밟는 자 같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원수 갚는 날 구속할 해가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주께서 친히 심판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사야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 친히 대적이 되사 그들을 치심과 백성들이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그들 속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과 함께 여호와의 신이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쉬게 하셨음의 증거와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음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의 날을 추억하기를 마치고 이어서, 주께서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고 하셨음을 기억하며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음에 돌아오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의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음을 돌아보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일컫게 되어지는 그러한 증거와 같이,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고난 받으심과 구원하심을 구약적인 모세의 출애굽에 비교되어 성례전적으로 증거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신앙고백을 주목하며 은총을 구하는 자리에 서는 것의 실제적 주목을 하며 또한 증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라는 그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심에 대하여서 그들의 배척과 조롱이라는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붉은 옷을 입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롱적인 희롱적인 것의 행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마 27:28, 마 27:31)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의 수동적 입장의 모습이라는 그러한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오심의 능동적 실제의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여인들의 예수님의 실패적인 연민의 울음’(눅 23:27)이 얼마나 가증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읽게 하시는 오늘 본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을 안으셨으나 주의성신을 근심케 하였음에 그들을 친히 치셨음을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메시야가 자기 땅에 오심에 영접하지 않음에 대한 책망으로 백성들의 회개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백성들의 주의 성소가 된 자들로서 유린당한 것에 대한 신원을 구하는 가운데서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그 영광의 자리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10)

이러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바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실제의 상황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의 모습들이 있게 되어지며 강요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신 그가 어디 계시는지 회의적 강요에 노출되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상대적인 형태를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시며 말씀하시는 신실하심이 상대적인 세상의 판단의 실제를 받지 않으시는 그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말씀의 신실성을 기억하며, 진정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그러한 현실적인 실제의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회의적 강요에 노출되어지고 근심케 되는 자리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 은혜는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음에 대한 증거’(사 63:16)가 있는 것과 같이 나시기 전에 지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죽음에서 다시 사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분, 즉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하심을 받으며 주의 다스리심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어진 자리에서 주의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된 곳에서 회개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과의 사이를 내게 된 죄를 자복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주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서 믿음으로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케 하시는(시 107:9) 좋으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라는 반문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기억들과 함께하심에 대한 사실에 의문을 청구하는 또한 강요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진정 신판하시며 구속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주님께 은혜를 구할 때에 참으로 바다를 저으시는 하나님 세상을 저으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그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과 그 열매를 가지고 주 앞에 서게 하심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괴롭게 하여도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응답이 없으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따라 기뻐하시는 자리에 회개하며 서시는 가운데 진정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하심의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어서 진정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는 즉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그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복된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