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월 20, 2005

사랑의 확증

2005년 1월 1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5:1-11
사랑의 확증

‘우리가 왜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어떤 당위성을 느끼는 생활이 기본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를 위한 변명, 살아가기 위한 노력들은 그 합목적성의 의미에서 볼 때 좋은 영향을 기대한다고 할 때에 그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일반적인 상식적 선함에는 판단을 받지만 그 행위자의 주체적 의도적인 당위성에서 만큼은 임의적 선함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주관적 선함이 악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함의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많은 논의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것은 인지상정적인 개념의 보편적인 당위성과 그 당위성의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 직관되어지는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동의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므로,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는데 그 소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음을 인함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므로 더욱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 근거라고 함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확증인데 그 사랑의 확증이 우리 주님의 대속하심에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신앙생활 그 행위에 대한 동기’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구약적인 언약의 주님 안에 교제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실제적으로 구체화되어짐을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을 때에 그는 구약의 언약안에서의 교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언급되어지는 헬라어 ‘프로스(pros)’라는 전치사는 영역본에서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써(with) 언급되어지고 있고 그것은 한국어로 더불어라는 말로 번역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더불어’라는 말인 헬라어 ‘프로스’라는 말은 도착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써의 말(to)로 인식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 가게 되어지는 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장소라는 개념의 설정이 상대적으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말의 의미를 사도 바울이 의식하여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출애굽기 24장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모세 자신과 장로 칠십인을 올라오게 하셔서 먹고 마시게하셨던 것을 의미함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더 나아가서 출애굽기 34장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 중에 모세더러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하시며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출 34:10)을 기억하고 있고 이것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부활하심에서 언약적인 사실의 예표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의 어떤 현자(賢者)들은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엔 크리스토스)라는 말을 하나님의 존재에 흡수되어지는 듯한 말을 하거나 막연한 신적인 존재에 다가가고 있는 듯한 그러한 차원에서의 지혜를 말하고 있고 또한 도중에 있다는 개념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한다는 말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있는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인식의 사실을 말하는 당위성을 상대적인 임의적인 것으로써 말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의 상대성에서 비슷하게 인식할뿐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와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말은 출애굽기에 나타나고 있는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자기 정당함에서 증거하시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적 해석의 당위성에서 그 합당한 뜻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는 말 ‘더불어’라는 전치사 ‘프로스’가 출애굽기의 배경에서 실존적인 합당한 뜻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적 자기 계시의 정당함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개념은 전체적인 실제적 기준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임의적 본문에서의 하나님 안에서라는 말을 ‘여자(如字)적’으로만 해석할 것의 당위성이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사도들의 모임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모여서 주의 부활하심을 논할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시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라는 축복을 하셨습니다.(눅 24:33~36, 36~53참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심과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주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이제 주의 성도들에게 주의 평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에 그 절대 자존의 재가가 주의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의 사실의 확실성이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주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이라고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함과 함께 주어지는 그 평강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부끄럽게 상대적으로 판단되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사실 주 예수님의 관한 것, 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마음에 두게 될 때에, 주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성도로서 즉 스스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을 받은 사실과 소명을 행하게 행하고자 하는 그 중심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한 그 사랑의 증거가 그리스도의 형상적 그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가운데서 신앙윤리적인 정당함과 동기부여의 사실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와 행보를 찾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고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와 동일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로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율법적 행함 즉 신앙 윤리적 행함의 근거를 분별할 수 있도록 구약적인 차원에서 언약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나타난 주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적 회복을 입게 되어진 자의 그 중심에 믿음의 행보를 소원하는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은사와 그것이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율법과 구별되어진 것임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비참함이나 어떤 세상에 되어지는 것을 분별하여서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종말의 인식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피하기 위한 수단적 개념의 경건과 신앙의 윤리적 동기부여로써 나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주의 뜻하심을 믿음으로 ‘스스로 이루어가는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빌 2:13)을 기뻐하며 분별하여 이루고자 하는, 주의 사랑의 확증하심의 빗진자로서의 기쁨으로 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율법이 아닌 믿음 안에서의 행함의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인내의 소망을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지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