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2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5:12-21
오실 자의 표상
우리의 삶 속에서 유사한 사물이나 개념으로써의 실체들을 주목할 때가 많으며 또한 그러한 것을 선히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체되어질 수 있는 유사한 에너지 개발에 대한 노력이라고 함이나 새로운 세대에 걸맞는 비교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것은 유사적 개념의 사실들에서 찾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유사한 개념의 사실들 현실적인 실제들로써 인식되어지는 것들 속에서도 사실 그러한 것들의 구분적인 분별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분별되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더 어려움이 있게 되어지는 경우가 강요되어지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그 분별로 인해서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유사한 윤리적 행함의 동인(動因)과 그것을 해석하는 원리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본적인 구분적 분별이 요구되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세상에서 인지상정(人之常情)적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에 대한 것과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기본적인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확증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과 그것의 구체적인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주목하게 하심의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는 ‘오실 자의 표상’으로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분별함에 있음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 있었음과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함에 대한 언급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마디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임에 대한 해설적 의미가 나타나고 있는데 은사와 선물이 그 범죄한 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비되어지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서 사망이 왕 노릇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을 인하여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는 것과 그것이 로마교회에 있었던 유대인으로써의 그리스도인과 헬라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 간에 있게 되어지는 행함의 문제라고 함을 바르게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것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11절에서 주목하였던 앞선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행함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함의 동인(動因)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서 그 실제가 나타나는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이며 그것을 소망하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주의 복음의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소망을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자체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그 동인의 인식에서 구별되어지며 분별해야 할 문제로써 아담이라고 함의 존재와 그 행함에 있어서 나타나고 있는 죄와 율법의 관계성에 대한 것을 이해하여야하며 그것의 기본이 오실 자의 표상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전제되어지고 있는, 유대인과 헬라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들의 율법이해라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지금의 언급함의 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행함의 요구적 실체로써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온 시기라고 함을 놓고 그 시효(時效)적인 즉 ‘어떤 사실 상태가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되는 일. 그 상태가 진실한 권리관계에 합치하느냐는 묻지 않고 그 상태를 진실한 권리관계로 인정하여 일정한 법률의 효과를 인정한다’는 것과 같은 권세적 판단으로 논박이 있었던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율법이 오기 전에 한 사람의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그리고 율법이 왔다고 했을 때에 그 행함의 요구적 실체로써 율법이라고 함이 사망보다도 죄 보다도 뒤에 설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헬라적인 입장에서의 성도들로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하여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도 최선을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마저 하지 못하는 자로써 거룩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유대교적 입장이었던 성도들의 반론적인 입장의 인식이 팽팽해졌던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으로써의 아담의 후손적 입장에서는 죄라고 함과 사망이라고 함의 앞선 입장에서는 정죄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선물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의 증거자적인 모습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적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의 본분이라고 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을 논함에 있어서 그리고 죄와 사망이라고 함을 앞서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대비적 모습으로 말씀하시면서 다른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아담과 그리스도의 다름과 같이 우리 동일한 인생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른 은사와 선물을 가졌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부터 제가를 얻게 되어지는 것을 말함과 그것의 실상이라고 함이 은사로써 다른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모세의 시대 즉 율법이 오기 전에 있었던 두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분명하게 증거되어짐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가인과 아벨입니다.(창 4장 참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드림이 있었습니다. 그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예물에 대한 받으실 것에 대한 믿음도 형태적으로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둘 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으며 그 드리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물 드림에 있어서 그들이 가졌던 믿음들 중에서 ‘아벨의 믿음의 실상’(히 11:4)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났고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었으며, 가인의 믿음의 실상은 말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주신 언약’(호 6:7)이라고 함에 기반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그러한 행위언약적 개념을 앞선 은혜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인생의 지음받음 자체가 바로 언약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것은 언약이라고 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납되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아벨의 제사에서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가운데서 임의적 자신의 소산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임의적 믿음의 행함이라고 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은 그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언약의 주님 안에서의 존재와 행함의 정당함을 찾는 그 믿음 안에서의 은사가 임의적 행함의 것으로써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며 다른 것임을 또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벨의 이름과 같이 ‘헛됨’, ‘덧없음’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오히려 그가 죽음으로 말한다는 것을 나타내심으로써 그의 존재와 행함과 그에 따른 소망이 부끄럽지 않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의 아담의 후손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라고 함과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증거적 실상의 축복하심과 그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과 실상이 어떻게 다른지 기억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행함의 여부로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써 그 말씀의 재가에 따른 삶의 증거와 그것의 실상으로 주의 구원하심의 복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오실자로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행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서 어떤 선함이나 또는 아들을 낳았다는 어떤 기득권적인 열매라는 개념적 실체가 있다는 여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가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어쩜 현실적인 실제적인 판단에서 ‘덧없음’이라는 ‘헛된 수고’라는 판단이 되어진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재가에 따른 수고의 실상을 말씀하시며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사 65:23; 고전 15:58)
아벨과 같이 오히려 믿음으로써 말하는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며 다시오실 구주 예수님의 표상적 증거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5:12-21
오실 자의 표상
우리의 삶 속에서 유사한 사물이나 개념으로써의 실체들을 주목할 때가 많으며 또한 그러한 것을 선히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체되어질 수 있는 유사한 에너지 개발에 대한 노력이라고 함이나 새로운 세대에 걸맞는 비교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것은 유사적 개념의 사실들에서 찾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유사한 개념의 사실들 현실적인 실제들로써 인식되어지는 것들 속에서도 사실 그러한 것들의 구분적인 분별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분별되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더 어려움이 있게 되어지는 경우가 강요되어지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그 분별로 인해서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유사한 윤리적 행함의 동인(動因)과 그것을 해석하는 원리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본적인 구분적 분별이 요구되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세상에서 인지상정(人之常情)적으로 행함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에 대한 것과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기본적인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확증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과 그것의 구체적인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주목하게 하심의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는 ‘오실 자의 표상’으로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분별함에 있음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 있었음과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함에 대한 언급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마디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임에 대한 해설적 의미가 나타나고 있는데 은사와 선물이 그 범죄한 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비되어지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서 사망이 왕 노릇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을 인하여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는 것과 그것이 로마교회에 있었던 유대인으로써의 그리스도인과 헬라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 간에 있게 되어지는 행함의 문제라고 함을 바르게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것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11절에서 주목하였던 앞선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행함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함의 동인(動因)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에서 그 실제가 나타나는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이며 그것을 소망하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주의 복음의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소망을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자체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그 동인의 인식에서 구별되어지며 분별해야 할 문제로써 아담이라고 함의 존재와 그 행함에 있어서 나타나고 있는 죄와 율법의 관계성에 대한 것을 이해하여야하며 그것의 기본이 오실 자의 표상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전제되어지고 있는, 유대인과 헬라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들의 율법이해라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지금의 언급함의 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행함의 요구적 실체로써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온 시기라고 함을 놓고 그 시효(時效)적인 즉 ‘어떤 사실 상태가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되는 일. 그 상태가 진실한 권리관계에 합치하느냐는 묻지 않고 그 상태를 진실한 권리관계로 인정하여 일정한 법률의 효과를 인정한다’는 것과 같은 권세적 판단으로 논박이 있었던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율법이 오기 전에 한 사람의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그리고 율법이 왔다고 했을 때에 그 행함의 요구적 실체로써 율법이라고 함이 사망보다도 죄 보다도 뒤에 설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헬라적인 입장에서의 성도들로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하여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도 최선을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마저 하지 못하는 자로써 거룩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유대교적 입장이었던 성도들의 반론적인 입장의 인식이 팽팽해졌던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으로써의 아담의 후손적 입장에서는 죄라고 함과 사망이라고 함의 앞선 입장에서는 정죄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선물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의 증거자적인 모습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적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의 본분이라고 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을 논함에 있어서 그리고 죄와 사망이라고 함을 앞서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대비적 모습으로 말씀하시면서 다른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아담과 그리스도의 다름과 같이 우리 동일한 인생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른 은사와 선물을 가졌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부터 제가를 얻게 되어지는 것을 말함과 그것의 실상이라고 함이 은사로써 다른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모세의 시대 즉 율법이 오기 전에 있었던 두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분명하게 증거되어짐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가인과 아벨입니다.(창 4장 참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드림이 있었습니다. 그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예물에 대한 받으실 것에 대한 믿음도 형태적으로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둘 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으며 그 드리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물 드림에 있어서 그들이 가졌던 믿음들 중에서 ‘아벨의 믿음의 실상’(히 11:4)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났고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었으며, 가인의 믿음의 실상은 말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주신 언약’(호 6:7)이라고 함에 기반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그러한 행위언약적 개념을 앞선 은혜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인생의 지음받음 자체가 바로 언약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것은 언약이라고 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납되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아벨의 제사에서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가운데서 임의적 자신의 소산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임의적 믿음의 행함이라고 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은 그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언약의 주님 안에서의 존재와 행함의 정당함을 찾는 그 믿음 안에서의 은사가 임의적 행함의 것으로써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며 다른 것임을 또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벨의 이름과 같이 ‘헛됨’, ‘덧없음’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오히려 그가 죽음으로 말한다는 것을 나타내심으로써 그의 존재와 행함과 그에 따른 소망이 부끄럽지 않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의 아담의 후손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라고 함과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증거적 실상의 축복하심과 그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과 실상이 어떻게 다른지 기억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행함의 여부로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써 그 말씀의 재가에 따른 삶의 증거와 그것의 실상으로 주의 구원하심의 복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오실자로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행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서 어떤 선함이나 또는 아들을 낳았다는 어떤 기득권적인 열매라는 개념적 실체가 있다는 여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가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어쩜 현실적인 실제적인 판단에서 ‘덧없음’이라는 ‘헛된 수고’라는 판단이 되어진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재가에 따른 수고의 실상을 말씀하시며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사 65:23; 고전 15:58)
아벨과 같이 오히려 믿음으로써 말하는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며 다시오실 구주 예수님의 표상적 증거자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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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