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욘2:1-10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삶에 있어서 어떤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일을 한다는 것만큼 불안하고 또 심지어는 꺼려지는 것은 또한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살이에서 호감을 가지고 행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항상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있고 오히려 호감이 없다고 하여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일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렇게 적지 않게 우리의 삶에 또한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부정에 대한 학습이라고 하는 것이 그 부정적인 입장과 도피적 인생, 마지못하여 행하는 모습들이 있는데, 신앙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삶 전체와 그것의 생명이 되어지는 신앙이라는 총체적인 인생에 있어서 부정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서 주목하며 그 말씀하심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합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이 자신의 음성을 들으셨음에 대한 것과 회개와 증거와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심에 따라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요나의 증거인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의 중요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 요나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마 16:4; 눅 11:29; 눅 11:30 참고)
주님께서 언급하신 이 말씀에서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것의 뜻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that by which a person or a thing is distinguished from others and is known)
이처럼 다 상대적인 것으로 알려진다는 개념이 특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메시야라고 하는 것도 그 구별되어진 사실이 아닌 상대적인 존재로써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표적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굳이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보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정욕적인 개념으로 자기 정당화 시키는 자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표적을 말할 때에 요나라는 선지자의 인물을 통하여서 구별되어짐을 이미 말씀하셨음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요나의 증거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가능한 또는 허용되어진 가운데서 판단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니느웨에 가서 주의 명하신 바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곳에 가면 자신의 역량이라고 함보다도 비교되어질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는 도대체 그곳에 가는 것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요나를 아밋대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밋대’라는 말은 ‘나의 진리’(my truth)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진리라는 자의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생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협한 것을 전한다고 할 때에 아주 큰 성에 그것에 대하여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함에 도대체 이러한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증거하라는 말인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이 지적하셨던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한 자는 아니었어도 주인의 그 맡겨주심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못한 자로써 그 악한 권세에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스올의 뱃속으로써의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시며 그를 인도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을 깨닫고 자신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음에 대한 예정하신 섭리의 오묘함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셨나이다라는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 상대적인 주관적 진리라는 것에게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절대의 정당함이 그에게 부여되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함이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이 구별되어진 것임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그러한 스올의 뱃속으로써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 안에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되어지는 법적 의로움을 취하게 되어지는 자들이 진정으로 깨닫게 하심의 은혜가 있게 되어질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 요나가 쓰임 받는 것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세상의 상대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온전하게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요나로부터 이미 예언되어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자신의 음성을 주께서 들으셨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한 것은 이후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라고 함이 그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육체적인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존재의 부정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에, 죽음이라고 것에, 메여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언약을 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아 절대의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이 있을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또는 여러번 강조하는 표적으로써 상대적 충족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당위성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심은 너무나 합당하시고 신실하신 말씀이심을 마음에 두며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뜻도 있고,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장소, ‘지하세계’ 등등 있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서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러한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요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죽음의 종노릇하는 것에서 자유하시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성도들로써 삶이라고 하는 죽음의 종노릇하는 살기위해 전쟁을 치룬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나의 사실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인도하심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구원의 증거자로써 인도하신다는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이미 우리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신 바된 것을 고백하며 증거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진리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우리의 스올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상적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회개하며 찬송하며 증거하시는 가운데 거룩한 길을 가는 시대의 주의 구원의 표적이 되어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욘2:1-10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삶에 있어서 어떤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일을 한다는 것만큼 불안하고 또 심지어는 꺼려지는 것은 또한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살이에서 호감을 가지고 행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항상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있고 오히려 호감이 없다고 하여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일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렇게 적지 않게 우리의 삶에 또한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부정에 대한 학습이라고 하는 것이 그 부정적인 입장과 도피적 인생, 마지못하여 행하는 모습들이 있는데, 신앙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삶 전체와 그것의 생명이 되어지는 신앙이라는 총체적인 인생에 있어서 부정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서 주목하며 그 말씀하심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합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이 자신의 음성을 들으셨음에 대한 것과 회개와 증거와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심에 따라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요나의 증거인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의 중요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도 특히 이 요나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마 16:4; 눅 11:29; 눅 11:30 참고)
주님께서 언급하신 이 말씀에서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것의 뜻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that by which a person or a thing is distinguished from others and is known)
이처럼 다 상대적인 것으로 알려진다는 개념이 특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메시야라고 하는 것도 그 구별되어진 사실이 아닌 상대적인 존재로써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표적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굳이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을 보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정욕적인 개념으로 자기 정당화 시키는 자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의해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표적을 말할 때에 요나라는 선지자의 인물을 통하여서 구별되어짐을 이미 말씀하셨음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요나의 증거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가능한 또는 허용되어진 가운데서 판단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니느웨에 가서 주의 명하신 바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곳에 가면 자신의 역량이라고 함보다도 비교되어질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에는 도대체 그곳에 가는 것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요나를 아밋대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밋대’라는 말은 ‘나의 진리’(my truth)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진리라는 자의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생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협한 것을 전한다고 할 때에 아주 큰 성에 그것에 대하여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함에 도대체 이러한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증거하라는 말인가 하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주님이 지적하셨던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한 자는 아니었어도 주인의 그 맡겨주심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못한 자로써 그 악한 권세에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스올의 뱃속으로써의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시며 그를 인도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요나서 1장 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을 깨닫고 자신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음에 대한 예정하신 섭리의 오묘함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셨나이다라는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 상대적인 주관적 진리라는 것에게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절대의 정당함이 그에게 부여되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함이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이 구별되어진 것임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그러한 스올의 뱃속으로써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 안에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되어지는 법적 의로움을 취하게 되어지는 자들이 진정으로 깨닫게 하심의 은혜가 있게 되어질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 요나가 쓰임 받는 것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실을 세상의 상대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온전하게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이 요나로부터 이미 예언되어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자신의 음성을 주께서 들으셨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한 것은 이후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라고 함이 그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육체적인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존재의 부정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에, 죽음이라고 것에, 메여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언약을 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아 절대의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이 있을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시 또는 여러번 강조하는 표적으로써 상대적 충족성을 만족시켜야 하는 당위성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심은 너무나 합당하시고 신실하신 말씀이심을 마음에 두며 또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뜻도 있고,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장소, ‘지하세계’ 등등 있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서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러한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요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죽음의 종노릇하는 것에서 자유하시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성도들로써 삶이라고 하는 죽음의 종노릇하는 살기위해 전쟁을 치룬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나의 사실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인도하심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구원의 증거자로써 인도하신다는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이미 우리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신 바된 것을 고백하며 증거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진리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우리의 스올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상적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회개하며 찬송하며 증거하시는 가운데 거룩한 길을 가는 시대의 주의 구원의 표적이 되어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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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