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28, 2005

착한 행실을 보고

2005년 2월 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5:1-16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입장에서 콤플렉스(complex)를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종종 집착을 불러오기도 하고 또한 그로 인하여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경향도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러한 의미의 경향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비평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인정하고 있는 본문이 주님의 산상설교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도덕철학적인 선한 노력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 달리 도덕적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주님의 언급하심으로써 ‘착한 행실’을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 말씀하시는 자에 대한 인식과 의도라고 함을 분명하게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동의와는 다르게 그러면서도 신앙의 윤리적 합당한 모습과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심에 제자들이 나아옴과 산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팔복(八福)에 대한 언급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의 복을 말씀하시면서 받을 상이 큼과 전에 선지자들이 이렇게 핍박받았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세상에 소금과 빛을 말씀하시면서 그 맛을 잃으면 버리울 것과 다만 밟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모여든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둠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위 주님의 산상설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시험받으심 다음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그 상관성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 근거를 마음에 두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과 5장의 말씀의 문맥을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마음에 두어야 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종노릇하는 자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도 그러한 자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떡과 그 존재를 위한 뛰어내림과 자신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단의 시험이 있었고 주님이 메시아이심과 그 사역의 정당함을 부인하여 그 사역을 결박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오히려 사단을 결박하셨던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하심이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시비를 하는 월권적 행동이 제한되어짐을 실제적으로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단의 결박되어진 가운데, 사단은 주의 종 엘리야로 온 세례요한을 결박함으로써 그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의 행보라고 하는 것을 결박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산돌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사단의 성도들의 예표적 실제 증인인 세례요한을 결박한 것이 성도들을 결박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굴러다니는 ‘돌들과 같은 자들이 소리지르게 될 것’(눅 19:40, 참고)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와 그 형제들을 제자들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제자들을 통하여서 무리를 이루게 되어질 것과 그들의 주의 제자들로서의 보내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며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한 동네 주의 몸된 교회가 가리워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5: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사도 바울이 이처럼 증거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 부름의 상이라고 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 산상설교에서 팔복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핍박이라고 함과 같이 주님을 결박하려고 노력하였던 사단이 자신이 결박되어짐을 알고 해변가 모레와 같은 성도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의 아들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 처소를 예비하시며 양육하게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례요한이 개인적으로 사단의 결박이라고 할 수 있는 잡힘과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의 증거의 실패가 아니라 완성을 말씀하시며 그가 결박되어진 것이 아니라 결박당하는 것과 같은 ‘핍박의 사람으로서 선지자로 주목되어지는 것’(마 11:7~11)과 같이 천국의 상이 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예정되어진 가운데 인물인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 세례 요한과 같이 비록 결박당하는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재가가 있게 있는 예정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산위의 동네’라는 주님 앞에 나온 제자들의 한정되어진 무리들을 가르키시며 그들을 가리울 자들 결박할 자들이 없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의 현실적인 사실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 세상의 빛이라고 규정하신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 존재에 대한 분명한 실제사실을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생존 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위협 속에서, 착한 행실을 한다는 것의 콤플렉스(complex)를 통해 자신의 존재적 당위성을 찾는 것은, 그 사실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위 '도덕철학적 입장'은 그 콤플렉스(complex)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당위성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적 당위성이 칭찬을 받게 되어지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것이 마치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써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버려진 소금과 같이 그 존재의 가치와 그 달란트를 행하지 않는 자의 모습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연적인 도덕적 선함을 말함에 대해 산위의 동네와 같이 한정되어지는, 사단의 결박처럼 잘못된 인식과 비판으로써의 성도들의 모습이 인식강요되어질 수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어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작은 노력의 순종을 할 수 있는 합당한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심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콤플렉스(complex)와는 달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생존세계에서의 존재시비라고 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규정되어진 것이라고 할 때에 참된 실제로서의 착함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예수께서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그 보편적인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현실규정과 그 질서에 따른 판단과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그에 따른 선하심을 삶에 나타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해석되어지고 사실이 되어진 도덕적 개념을 말씀하심임을 받아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산위의 동네를 숨기우지 못하게 하심의 은혜를 받아 세상에 주의 구원의 빛을 비추는,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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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2월 24, 2005

주님의 청혼(부르심의 성격과 정체성)

2005년 2월 2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8:12-39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이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는 것을 소위 청혼을 받았다 ‘프로포즈(propose)’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일반적으로 그 청혼을 받을 때에 그 분위기가 좋은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형성이 되어지면 더할 나위없는 좋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되지 못할 때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또 정식 청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좀더 예를 든다고 하면, 둘만의 공간에,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는 바쁘고 고달픈 가운데서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날 수도 있고 청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상대방에게 본의 아니더라도 볼멘소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을 돌려, 우리 주님의 청혼하심 즉 교회가 신부가 되어지고 그 교회의 신랑으로서 오셨으며 오심에 있어서 그 청혼하심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서 읽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을 형제로서 부르면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을 말하며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임을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녀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함과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보이지 못한 소망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과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에 따른 섭리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예정하심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반문과 함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가운데 정죄할 자가 없을 것과 그것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현실적으로 잔혹한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 되어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은혜로 넉넉히 이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의 고백적인 증거로써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이라고 함의 이해와 그러한 신앙윤리라는 개념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협력이라고 하는 것이 회의적인 모습이 들 수 있다는 심정과 이러한 모습과 정체성에서 주님의 신부된 자들로서의 교회의 모습과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회의적인 모습을 사도 바울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넉넉히 이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신부된 자로서의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는 가운데서 자포자기적인 생각과 그것으로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이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말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습에 신랑되신 예수님의 프로포즈, 청혼하심, 함께 일어나 가자고 하신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중매쟁이로서의 사도 바울은 해석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파들, 독특한 성격의 성도들의 개개인의 모습들, 그들을 인도하는 리더십의 차이, 믿음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차이들, 어쩌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있을 수도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임의적인 자성적 비판에 대하여서 답변하는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마지막 전도여행으로써 로마로 여행하는 가운데서 그가 탄 배가 파선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을 전제로 하여서 본문을 말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절 아후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가운데 처음 탄 배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였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는 배,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드라뭇네노’라는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탐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진 그러한 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배를 타게 되어지는 것은 그 전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어질 것으로써의 성례전적인 의미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호가 오히려 죽음의 공회적 실제의 파선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배라는 개념이 성례전적인 공회의 한 표현을 말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그 실제는 그 안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함께했던 자들이 그 죽음의 공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그 예표적 의미를 다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알렉산드리아 호에서 사도 바울은,비로소 이때부터 예정적 뜻하심을 깨달은 것은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은혜를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가 행선자를 다 사도 바울에게 주었고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이미 예정하심의 말씀하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섬에 걸리리라는 말씀하심의 실증적 측면의 예표적 실제도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행 27:23~26)

그처럼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들은 그 신앙의 정체성과 신앙윤리적 정체성에 따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에 있어서 분란이 있어 옴을 볼 때에 그러한 것을 지적받고 있는 즈음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볼 때에 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어떤 속담에서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뜻하심의 따른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없는 ‘아드라뭇네노’와 같은 즉, ‘죽음의 공회’라는 생명력이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라고 함을 사도 바울은 잊지 않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그러한 죽음의 공회라는 개념의 판단이 있게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도, ‘성도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입은 성도들은 우리가 낙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고 함의 불연속성에서 판단할수 없지만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그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이루실 것을 믿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시고 있는데(34절), 이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기억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앞서 말한 그 말의 정당함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형식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성도들의 연합하지 못하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죽음의 공회적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형식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예정하심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을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승리라고 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정하심에서의 상대적 표현을 취할 때에 넉넉히 이기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5)

주인되고 남편된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호세아를 통하여 회유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거친 들에서.. 이것과 같이 분위기 없는 그러한 청혼과 같은 모습에 자꾸 상대적인 실제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것들의 실제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한 주님의 프로포즈는 우리 인생의 청혼의 개념과 달리 나타난다고 하여도 진정 절대의 신실하심을 통하여서 말씀하신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참된 청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그러한 판단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증거는 이처럼 호세아, 하나님의 구원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다시 읽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청혼하심의 신실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이라고 함이 요원하여 보인다는 상대적 실제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의 신부되어진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힘들어 보이는 피곤하고 바쁜 생존세계에서, 주님의 함께 가자시는 청혼의 말씀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랑 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예정하신 가운데서 성도의 넉넉히 이기게 하심의 뜻하심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참되게 주님과 동행하며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지혜 있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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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화요일, 2월 15, 2005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2005년 2월 1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4:1-11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삶의 어려움을 느낄 때에 누군가 힘이 되어주며 삶의 희망이라고 함을 용기라고 함을 주며 삶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동요하는 그러한 노력이 참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광고들 속에서도 그러한 태마의 선전 문구들이나 주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어떤 그러한 주제를 통한 노력들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는데 필요라기보다는 즉 합목적적인 인위성의 판단에서 벗어나서 예언적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신앙의 경건한 삶을 위한 그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에 있어서 많은 신관(神觀)들 그리고 범신적 개념의 신앙들을 모두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할 당위성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 신관(神觀)이라고 함이 이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임의성을 벗어나지 못한 실체들로서 부인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적 자체적 정당함을 지닌 자로서의 참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심에 대한 것으로 증거하심의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삼위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증거가 있고 난 다음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사단에게 시험받으심과 그 내용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심으로 주리신 가운데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표를 보이라는 것으로써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첫 번째 시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께 같은 증표를 요구하며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것을 시험하는 자가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시험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님에 대한 말씀하심과,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 것과 물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심으로 답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시험받으신 이유와 목적이라고 함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의 계시로써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인 권세를 얻게 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식이 먼저이냐 존재가 먼저인가 그러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존재가 있는 가운데서 인식을 말하게 되어지는가 아니면 인식이라고 함이 시작할 때에 존재에 대한 의식이 기본적인가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동연적(coterminous)으로 즉 같이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 현상적 의미에서 현대의 생각들은 생각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인 개념에서 사람의 존재와 인식에 대하여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도 존재에 대한 시비라고 함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에 대한 그 존재라고 함도 배고픔이란 것으로 한정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죄인된 인생의 모습이 자기 기만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판단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체적 부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리신 것은 ‘모세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게 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예언하였던 것’(신 18:15; 행 7:37)과 같이 그러한 모세의 사십 주야로 산이 있어 말씀을 받았던 것과 같은 모습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에 따른 그 예언되어진 분으로서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기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가 산에서 시험받았는가 하는 것과 시내산과 광야의 유비적 동일성을 말할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증거의 실체가 이미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말하기 위한 성례전적인 개념의 구체적 사실이라고 함과 동일한 장소의 유비라는 개념의 의미를 재고(再考)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이 요구되었다면 좀더 이미 모세의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의 시험으로써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시비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그 차이점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전 꼭대기라고 하는 신앙적인 모습의 정체성에 대한 전제적 비난으로써 신앙의 절정적인 입장에서 존재가 부인되어진다고 할 때를 말하기 위해서 그 장소를 택하여 뛰어내리라는 것과 그것이 신앙의 정체성의 사실을 말한다는 말씀하심에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으로써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이 되신 즉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합리성 자체로써, 자체적 정당함이 없이, 판단함의 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음에 대하여서 변론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시험하는 자는 다시 그 말씀하심의 장소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에 대한 것을 소유한 것과 같이 기만하여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전 5:18,19)을 임의적으로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기만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과 같이 기만된 모습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함을 자신이 규정하는 권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그의 월권적 모습과 정체성에 대한 한정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에 대한 주재(主宰)권을 말하는 것과 같이 그러한 것에서 물러나라 즉 그 권세라고 함이 한정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심에서는 이미 그의 반론적인 시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국한되어질 것이라고 함과 그 존재가 결박되었음을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정통성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존재규정에 따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신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만왕의 왕으로서 오신 분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는 현상적인 실제적 판단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에 섬김의 사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시험당하신 것은 피동적 개념의 모습에서 말씀하시면서도 실상은 주권적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시며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시험을 당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자신의 신실하심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실제적 강요에서도 벗어나 진정으로 주 앞에서 경배하게 하심의 은혜를 성도들이 입게 하신다는 것을 사실화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께서는 기도하심에서 말씀하셨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험받으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땅에서 이루실 것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인하여서 땅에서 주의 뜻하심에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들의 믿음의 노력에 따른 결박을 풀어버림에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자녀가 되며, 복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핍박함이 있게 되어질 것인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믿어도 나사로와 같이 생활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욥과 같이 재산과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육신의 고통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신앙인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 합당한 것인가?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비로 인하여서 신앙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부정을 요구하는 때가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그 욥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의 결박을 풀고자 하는 그 순전한 노력에 주의 은혜로 재가를 받게 하셔서 그 정당함으로 주 앞에서 합당한 존재로서 증거되어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의 시험받으심에서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신앙이 밥 먹여주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의 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존재적 시비를 성도들에게 물어올 수 있다는 것이며 끊임없는 집요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 인생으로써 별도리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상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이냐는 식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의 사실과 구원의 사실을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당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라고 하심의 히브리서의 증거의 근거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단이 월권적 노력으로써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것을 통하여서 즉 주의 예정하심을 이루었으니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주의 부활하심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신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에서 놓아주시며 아브라함의 자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붙들어 주시기를 그의 절대 신실하심의 정당함으로 인(印)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은혜로 우리 성도들이 곤고한 삶 속에서 생존세계에서 존재의 시비에 대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주님과 동행하시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가시며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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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2월 07, 2005

천국과 아브라함

2005년 2월 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3:1-17
천국과 아브라함

한동안 춥던 추위도 지나고 입춘도 지난 시점에서 봄을 말할 수 있는, 기대하게 되는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서 특히 새로운 생명들의 새싹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사실들을 증거하며 그 사실들의 실제를 주목하게 되어지는 사건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그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구약의 엘리야로서 주께 평가받게 되어지는 이 세례요한의 증거에서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보여지면서도 실상의 그 연속성이 마치 씨앗과 그 생명을 가진 씨앗으로부터 발아하여 성장하는 식물의 연속성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증거의 시초를 주목하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때, 즉 예수님께서 유아학살을 피하시고 애굽에서 돌아오셔서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실 때, 세례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함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는 것과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있어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함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요한의 모습에 대한 간략한 기술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나와 그에게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함의 언급으로 신랄하게 책망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말하고 아브라함의 자손됨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뒤에 오실 분에 대한 언급이 기술되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졌고 또한 그 정황이라고 함이 함께 기술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천국의 임함에 대한 증거인데,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에 대한 것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로서의 세례를 집행함으로써의 증거를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개념의 차이라는 것에 대하여서 세례요한이 분명히 하려고 함에 대한 것과 자신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세례가 천국복음의 내용임을 의미함으로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정체성이라고 함은 이미 주님께서 구약의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요한 그 사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도의적 차원에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존적 정당하심에서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서 그 예언에 대한 증거자로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라는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의 존재적 정체성이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의 증거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가 아브라함을 말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아브라함의 의를 말하고 있고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동일함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전제로 그의 사상적 측면의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4장, 롬 4:23,24)

세례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것은 창세기의 말씀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렇게 기록함이 그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하는 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상대적인 현실적인 실제적 판단보다도 더 합당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 실제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지시할 땅 즉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땅이 아니라도 그 말씀하심에서 준비하시는 그 신실하심의 사실과 실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혈통적 계보에서 아브라함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었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았던 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이 언약적 실제와 현실적인 실제의 연속성이 항상 같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자들로서 죄악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즉 형식적인 신앙과 습관을 따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의 전통이라고 함의 범주에서 신앙의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를 믿지 못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은 항상 상대적인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에 전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며 단지 그러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람들의 동의적인 차원에서 상대적인 정당함으로 인식 가능성의 여지를 잡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그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 판단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그 절대 신실하심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가 회개의 열매를 맺는 열매를 가진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21,22)

더욱 사도 바울은 자신을 드리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그 종이 됨과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써 열매를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세례요한이 말하고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그 상관성과 그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동일한 열매의 분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라는 개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믿음의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혈통적 계보와 언약적인 계보가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언약적인 계보가 전통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정체성에서 전통이 그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은 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로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형식은 있어도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사망의 열매가 그들에게 있게 되어지며 그러한 것이 옳다고 함의 그들의 모습은 독사의 자식들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세례를 증거함에 대한 것을 유대인들이 받지 못하는 사건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신앙적 열매라고 함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요 8:53)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5:57~59)

세례요한이 물로 예수님께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물세례만이 아니라 성령 자신의 세례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물론 물세례도 주께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주도록 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이라는, 존재의 상대적 있고 없음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실 것을 이 세례에서부터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 존재적 정당함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하늘에서 나신 말씀으로써 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증거하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하심의 의미인 것입니다.

즉 자신을 아들로 나타내심에 있어서 그 위격의 차이로 말씀하심에 있어서도 상대적인 인성적 표현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 소유격적인 표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정당함에서 증거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하며 천국이 임하였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있어서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상대적인 판단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가능성에 따른 상대적 동의에 의한 가운데 임의적으로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의 복음을 그런 식으로 개연적인 것으로 따른다면 세례요한이나 사도 바울의 증거에서 읽게 되어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과 이미 가졌음에 대한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자들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또한 증거하는 주님에 대한 증거도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 상대적이면서도 합당한 실제로서의 사실로써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복음(눅 16:22~23)에서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을 때에 예수님이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사실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불가지론의 상대적 정당함을 따른 합리성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에서 우리의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잘 알려진 ‘여호와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지 못하는, 거짓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확신한다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믿으며 주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을 의지하시는 가운데서 회개의 열매를 이미 받은 자들로서 세례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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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2월 03, 2005

종의 신분

2005년 2월 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6:1-23
종된 자의 자기(自己) 정체성

우리의 삶 속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나 주체적으로 해 나가는 일들에 있어서 그 방법론에 대한 재고를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방법론이 좋다는 개념만으로 취득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기에는 이르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방법론이 좋다고 하여도 그 방법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에 대한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법론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고후 10:5)이 전제되어진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그의 삶의 정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고자 하는 그 합리적인 생각들의 정체성도 옳은 모습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게 하심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종 된 자로서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는 성도들의 종된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음에 대한 언급에서 이어지는 말씀인데, 반문되어질 수 있는 말로써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써 사도 바울은 6장의 증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반문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면서 그러한 것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장사되어진 자의 실제적인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의 상관성에서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유하다는 것과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것과 은혜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은혜아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반문되어질 수 있었던 은혜를 위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좀더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그 받는 자의 종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바가 된 외적인 공통된 신앙고백이라고 함을 전제로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 바가 된 자들로써의 우리 성도들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드려진 자에게 있게 되어지는 열매를 생각하게 하며 언급을 맺고 있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의의 종이 된 자에게 거룩하게 하는 열매를 얻었다고 함을 말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종의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행함의 결과들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공허한 허영의 집’(호 5:8)에서의 깨닫는 자로써 슬픔의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들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기본적인 생각’(고후 10:5)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의의 병기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준비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 가지 주목할 수 있는 기구가 있는데, 그것은 ‘통발’이라는 것입니다. 그 ‘통발’은 “가는 댓조각이나 싸리를 엮어서 통같이 만든 고기잡이 기구. 아가리에 작은 발을 달아 날카로운 끝이 가운데로 몰리게 하여 한번 들어간 물고기는 거슬러 나오지 못하게 하고 뒤쪽 끝은 마음대로 묶고 풀게 되어 있어 안에 든 물고기를 꺼낼 수 있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때에 그 생각이라고 함, 특히 인생의 존재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생각이라고 함을 사로잡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이 없는 합리성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피곤하게 하여서 손들게 하는 그러한 개연적인 포기상태를 이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고라고 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가질 때에 참된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함에서 상대적으로도 복음이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고라는 개념 우리 인생에 대한 존재 이해가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만 규정되어져서 항상 여지를 남겨두는 가운데서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고 그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에게 정죄하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은 한 반론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상대적으로는 은혜를 위한 죄의 가능성과 필요성이라고 함까지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롬 5:20; 롬 6:1)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실제의 상황에서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서 은혜로 전환하게 되어지는 현상을 말하게 되어지며 앞서 언급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실제로서의 삶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사실들이 성도들을 심판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자신이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기름 부어 성별케 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보내시는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의롭다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그 의로움은 상대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 활동하게 되어지는 권세와 사실을 분별하며 사실화 시켜나가는 그리고 그 사실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자의 권세를 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함이 말씀안에서 성도들에게 부여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이 상대적인 불합리성으로써의 은혜를 위한 죄의 필요성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쌍방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의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印)쳐진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와 함께 죽었으며 다시 살았다는 그 믿음은 현실적인 상대적 연속성에서 부당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존재에 관한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 잡아 복종케하심의 너무나 합당함을 읽으며 증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이하에서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판단과 사고가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이 상대적 판단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을, 은혜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고 할 때에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 합리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을 고려하지 못하는 그것에서, 존재의 확실성에 의문과 논쟁에 잡히며 은혜를 위해서는 죄라도 요구되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내어주는 죄의 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에 따른 의의 종의 자리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의의 병기가 될 것인지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고 이미 그러한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는 열매 그리스도를 이미 받았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실 은혜의 법이라고 함의 사실을 조롱거리로 여겨 분란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종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연약함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사실로 믿는다고 하면 그는 진정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의 자리에 결코 서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연약함과 우리 모두의 성숙해 나감이라고 함에 있어서 겸손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우리 성도들의 머리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롬 4:25)를 마음에 두면서 그 가운데서의 우리의 존재의식의 정당성을 찾아 판단하며 합리성의 정체성과 사실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체성과 사실을 진실로 말할 수 있다고 함을 기억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시는 가운데, 핑계치 못하는 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주의 의의 병기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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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