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갈1:11-24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
시대가 변하고 그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와 지식이 더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왕래가 또한 빨라지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그 누리는 문화라는 것이 유익을 위한 것으로써 좋은 것이면서도 그 받는 사람의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그 악한 면이 있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짐이라고 함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작금의 인터넷 문화라고 하는 것과 그것으로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진보에서 개인 정보의 유출이라고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지기도 하고 그에 따른 특정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리고 악용하는 것이 화제가 되어지기도 하는데,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명의도용적인 개념의 악한 자들이 사도 바울의 때에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있다는 것을 주목할 때에 진정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로서의 죄 없다 아니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악한 세대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존재와 소명적인 측면에서 증거함을 말하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주 앞에서 우리 성도의 소명의 사실을 재고하시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택정하심에 따라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순종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 삼년 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올라갔던 일과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한 것과 자신이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하여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사도에게 나타내실 때를 말하고 있음과 그에 따른 존재적 소명적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사도의 증거로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소명의 실제 즉 그 사실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1)사도가 말하고 있는 말은 상식적으로만 본다고 하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배웠고 그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복음을 접했고 배척했던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을 전혀 무시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만의 신비적 개념이라는 주관적인 호소의 동정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함의 것에서 비로소 해석함은 적당하지 않고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게 되는 차원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선입관을 배제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문맥상으로 갈라디아서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의 연관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에 비늘과 같은 것이 벗겨진 체험'(행 9:16~20)이 실제적으로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본 것과 같은 것임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함이 그 문맥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당연함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아버지와 엄마를 바라보며 알게 그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이 그것은 어떤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눈이 열리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할 때에 예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서 자신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사도는 자신의 존재와 소명에 따른 증거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6)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는 말의 의미를 받아 들이게 되어지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의 실제이며 그것이 주님이 내 중심에 오심의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자신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 자존자께서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의 판단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사실로 받을 수 있도록 인증해주시는 것에서 그것이 진정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상대적인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사도는 바른 인식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던 그 집안의 사람들 그 친밀도에 따른 혈육이라고 함의 그 근친적 정당함을 비로소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6~17)
어떤 사람들은 아라비아로 가서 새로운 신비주의를 비로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임의적 추상적 사고를 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희랍종교들의 영향력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한 어떤 합리성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임의적 신비적 권위를 찾는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그 사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실제적인 가치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인증을 받은 정당함을 받은 것으로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자신들의 임의적 말을 납득시키려고 할 때에 속된 말로써 '이것은 ~ 절대로 아니다.. 또는 이것은 절대 틀림이 없어..' 등과 같은 당위성을 '절대'라는 또는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상을 말함으로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임의적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계시적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적 정당함을 일반적인 가운데서도 얻지 못한다면 즉 허위적 개념을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시편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 116:10~11)
이러한 지혜의 근본도 없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러한 자들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 11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상대적인 질서적 개념을 존중하는 사실을 받아서 사도과의 만남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과의 만남에서 그 기간의 짧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정당함을 그곳에서 찾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허락되어질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운데 사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그의 그 후에 행적에 대한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알아본다고 할 때에 그의 행보에 관한 것은 사실의 시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이가 눈을 뜨는 것과 같은 소명의 사실과 그것의 실제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는 그 때임을 알도록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앞서 우리의 문화적 한 어두운 특정 한 단면으로써 인터넷 상의 명의도용이라고 하는 것을 말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거짓된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증거합니다.
자칭 '여호와 증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의 당위성을 비로소 그 상대적 합리성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유대교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은 사도 바울의 실수와 같이 소경된 자들로서 잘못된 길을 걷는 것입니다.
더욱 구교를 비롯한 현대신학에서는 플라톤적인 개념으로써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신관에서 실재론을 취하여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상대적 합리성의 미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두겠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고 방법론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나 임의적인 자기 사실을 말하려고 하며 더욱 합세하여 하나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출 20:7; 신 5:11)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증거합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 주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는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이 받아들여질 때에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때라고 함'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 앞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 행하는 종들로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갈1:11-24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
시대가 변하고 그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와 지식이 더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왕래가 또한 빨라지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그 누리는 문화라는 것이 유익을 위한 것으로써 좋은 것이면서도 그 받는 사람의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그 악한 면이 있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짐이라고 함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작금의 인터넷 문화라고 하는 것과 그것으로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진보에서 개인 정보의 유출이라고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지기도 하고 그에 따른 특정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리고 악용하는 것이 화제가 되어지기도 하는데,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명의도용적인 개념의 악한 자들이 사도 바울의 때에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있다는 것을 주목할 때에 진정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로서의 죄 없다 아니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악한 세대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존재와 소명적인 측면에서 증거함을 말하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주 앞에서 우리 성도의 소명의 사실을 재고하시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택정하심에 따라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순종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 삼년 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올라갔던 일과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한 것과 자신이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하여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사도에게 나타내실 때를 말하고 있음과 그에 따른 존재적 소명적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사도의 증거로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소명의 실제 즉 그 사실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1)사도가 말하고 있는 말은 상식적으로만 본다고 하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배웠고 그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복음을 접했고 배척했던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을 전혀 무시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만의 신비적 개념이라는 주관적인 호소의 동정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함의 것에서 비로소 해석함은 적당하지 않고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게 되는 차원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선입관을 배제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문맥상으로 갈라디아서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의 연관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에 비늘과 같은 것이 벗겨진 체험'(행 9:16~20)이 실제적으로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본 것과 같은 것임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함이 그 문맥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당연함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아버지와 엄마를 바라보며 알게 그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이 그것은 어떤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눈이 열리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할 때에 예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서 자신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사도는 자신의 존재와 소명에 따른 증거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6)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는 말의 의미를 받아 들이게 되어지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의 실제이며 그것이 주님이 내 중심에 오심의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자신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 자존자께서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의 판단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사실로 받을 수 있도록 인증해주시는 것에서 그것이 진정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상대적인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사도는 바른 인식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던 그 집안의 사람들 그 친밀도에 따른 혈육이라고 함의 그 근친적 정당함을 비로소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6~17)
어떤 사람들은 아라비아로 가서 새로운 신비주의를 비로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임의적 추상적 사고를 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희랍종교들의 영향력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한 어떤 합리성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임의적 신비적 권위를 찾는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그 사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실제적인 가치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인증을 받은 정당함을 받은 것으로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자신들의 임의적 말을 납득시키려고 할 때에 속된 말로써 '이것은 ~ 절대로 아니다.. 또는 이것은 절대 틀림이 없어..' 등과 같은 당위성을 '절대'라는 또는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상을 말함으로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임의적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계시적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적 정당함을 일반적인 가운데서도 얻지 못한다면 즉 허위적 개념을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시편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 116:10~11)
이러한 지혜의 근본도 없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러한 자들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 11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상대적인 질서적 개념을 존중하는 사실을 받아서 사도과의 만남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과의 만남에서 그 기간의 짧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정당함을 그곳에서 찾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허락되어질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운데 사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그의 그 후에 행적에 대한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알아본다고 할 때에 그의 행보에 관한 것은 사실의 시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이가 눈을 뜨는 것과 같은 소명의 사실과 그것의 실제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는 그 때임을 알도록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앞서 우리의 문화적 한 어두운 특정 한 단면으로써 인터넷 상의 명의도용이라고 하는 것을 말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거짓된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증거합니다.
자칭 '여호와 증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의 당위성을 비로소 그 상대적 합리성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유대교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은 사도 바울의 실수와 같이 소경된 자들로서 잘못된 길을 걷는 것입니다.
더욱 구교를 비롯한 현대신학에서는 플라톤적인 개념으로써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신관에서 실재론을 취하여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상대적 합리성의 미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두겠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고 방법론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나 임의적인 자기 사실을 말하려고 하며 더욱 합세하여 하나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출 20:7; 신 5:11)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증거합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 주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는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이 받아들여질 때에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때라고 함'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 앞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 행하는 종들로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