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3:1-13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작금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그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의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서 시도되어지는 것이 이 문화를 통하여서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아주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인식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고 그것만큼의 사람의 자기 이미지 관리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인사라고 하는 것이 부담되어지고 오히려 폐가 되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씁쓸한 모습도 인사문화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 그리고 상대가 되는 가운데서 인사를 하면 그것이 적절하고 또한 요구되어지는 것이지만 반목이 있는 사람 그리고 상대되지도 않는다는 신분적 격차가 느껴지는 가운데서는 그 인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위를 깎아 내리는 듯한 것으로 그 인사를 받는 사람들이 인사받기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사를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또는 그것보다도 근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지혜가 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를 훼방하는 무리의 일단이 있는 그러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그 축복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고려하는 가운데서 행하고 있음을 보는데, 세상의 반목이라고 하는 것의 현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아야할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또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제 사도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갈 터인데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치리적 입장에서 책망하고 권징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전에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강하심이라고 하는 것,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서 사도가 틀린 것이 아닌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시험하고 고린도교회 자신들을 확증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과 오직 진리를 위할 뿐임과 그로 인해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사도가 약할 때에도 섬김을 받는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하고 이것을 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성도의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에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써 그 서신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뻐하고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임과 그 가운데서 평안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고 있고 모든 성도가 문안함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의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한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개념의 어떤 정도적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실분별과 그것을 진리로 받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서 증거하며 가르치려고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예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되어지는 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 중 사도의 존재와 가르침을 부인하며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린도교회에 가르치는 자들은 합리성 자체에서만 어떤 납득의 당위성을 가지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러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 안에서 구별되어진 자신에 대한 부득불 자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에 의한 재가 있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득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여도 객관적인 당위성이 있고 정적인 납득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고후 12:19)
이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서신의 부분으로써 한번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어떠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사실분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과 그 비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연약하심으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의미와 그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의 사실임을 받야야함을 받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정하신 그 자기의 뜻하심에 순종하심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아버지 이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것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비록 상대적인 주관적인 사실적 모습이라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참된 실제로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진리가 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고후 1:19)
그 말씀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사실 규정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인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당위성을 찾고 있는 가운데서 분파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자들로써 교회의 질서를 따라 섬기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교회의 권징을 하게 되어지는 그날에는 사도가 그 권징의 사실로써 그들에게 분명한 시벌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인격적인 사도의 가르침으로서 성경의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버린 자와 같이 판단되어지는 것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모자라고 버린바되어진다는 그 사실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도에 대한 평가로서의 사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성도들을 위하는 자리에 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중심에서 심긴다는 것의 마지막으로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으로 형제된 성도들을 문안하라고 함의 주문적인 개념으로써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내며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파가 되어진 가운데서 그 성도들의 모습을 화목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임의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분파적 입장의 합리성과 그것에서 비롯되어지는 당위성을 따라야 하는 강요적 입장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심의 분석한다면 다른 형제안에서 옳고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적 제사장적 선지자적 개념의 사역적 형상을 내 삶속에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주관적인 개념이면서도 재가받은 개관적 사실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화목의 사실, 형제안에서 화평케하는 사실을 담아내는 종들의 고백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바로 여러 합리적인 말들이 많이 있고 이익적인 당위성의 강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나의 왕이시며 예수께서 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기에 내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왕이신 예수님안에서 사실을 구별하고 심의하여 판단하여 그 형제의 합당한 모습을 인정하고 대화를 하게 하고 화목하게 한다면,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나에게서 나타나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적인 모습으로서의 주앞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확증이라는 말을 이런 측면에서 사실로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가 가르친 자신들이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라고 하는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 또는 많은 사람을 인도했다는 것, 교회 예배당을 몇개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 몇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 등과 같은 것에서 임의적 동의에 따른 객관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합리적인 것과 실리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의 강요가 내게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정당함으로부터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그 주관적인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 믿음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으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여진 주관적인 사실을 믿음 안에서 사실로 받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의 복된 모습이 자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합리성의 사심의 시비를 벗어나서 분란되어져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을 주님께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후13:1-13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작금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그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의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서 시도되어지는 것이 이 문화를 통하여서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아주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인식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고 그것만큼의 사람의 자기 이미지 관리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인사라고 하는 것이 부담되어지고 오히려 폐가 되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씁쓸한 모습도 인사문화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 그리고 상대가 되는 가운데서 인사를 하면 그것이 적절하고 또한 요구되어지는 것이지만 반목이 있는 사람 그리고 상대되지도 않는다는 신분적 격차가 느껴지는 가운데서는 그 인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위를 깎아 내리는 듯한 것으로 그 인사를 받는 사람들이 인사받기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사를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또는 그것보다도 근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지혜가 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를 훼방하는 무리의 일단이 있는 그러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그 축복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고려하는 가운데서 행하고 있음을 보는데, 세상의 반목이라고 하는 것의 현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아야할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또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제 사도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갈 터인데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치리적 입장에서 책망하고 권징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전에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강하심이라고 하는 것,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서 사도가 틀린 것이 아닌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시험하고 고린도교회 자신들을 확증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과 오직 진리를 위할 뿐임과 그로 인해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사도가 약할 때에도 섬김을 받는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하고 이것을 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성도의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에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써 그 서신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뻐하고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임과 그 가운데서 평안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고 있고 모든 성도가 문안함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의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한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개념의 어떤 정도적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실분별과 그것을 진리로 받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서 증거하며 가르치려고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예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되어지는 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 중 사도의 존재와 가르침을 부인하며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린도교회에 가르치는 자들은 합리성 자체에서만 어떤 납득의 당위성을 가지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러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 안에서 구별되어진 자신에 대한 부득불 자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에 의한 재가 있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득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여도 객관적인 당위성이 있고 정적인 납득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고후 12:19)
이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서신의 부분으로써 한번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어떠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사실분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과 그 비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연약하심으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의미와 그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의 사실임을 받야야함을 받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정하신 그 자기의 뜻하심에 순종하심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아버지 이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것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비록 상대적인 주관적인 사실적 모습이라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참된 실제로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진리가 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고후 1:19)
그 말씀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사실 규정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인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당위성을 찾고 있는 가운데서 분파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자들로써 교회의 질서를 따라 섬기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교회의 권징을 하게 되어지는 그날에는 사도가 그 권징의 사실로써 그들에게 분명한 시벌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인격적인 사도의 가르침으로서 성경의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버린 자와 같이 판단되어지는 것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모자라고 버린바되어진다는 그 사실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도에 대한 평가로서의 사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성도들을 위하는 자리에 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중심에서 심긴다는 것의 마지막으로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으로 형제된 성도들을 문안하라고 함의 주문적인 개념으로써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내며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파가 되어진 가운데서 그 성도들의 모습을 화목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임의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분파적 입장의 합리성과 그것에서 비롯되어지는 당위성을 따라야 하는 강요적 입장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심의 분석한다면 다른 형제안에서 옳고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적 제사장적 선지자적 개념의 사역적 형상을 내 삶속에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주관적인 개념이면서도 재가받은 개관적 사실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화목의 사실, 형제안에서 화평케하는 사실을 담아내는 종들의 고백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바로 여러 합리적인 말들이 많이 있고 이익적인 당위성의 강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나의 왕이시며 예수께서 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기에 내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왕이신 예수님안에서 사실을 구별하고 심의하여 판단하여 그 형제의 합당한 모습을 인정하고 대화를 하게 하고 화목하게 한다면,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나에게서 나타나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적인 모습으로서의 주앞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확증이라는 말을 이런 측면에서 사실로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가 가르친 자신들이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라고 하는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 또는 많은 사람을 인도했다는 것, 교회 예배당을 몇개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 몇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 등과 같은 것에서 임의적 동의에 따른 객관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합리적인 것과 실리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의 강요가 내게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정당함으로부터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그 주관적인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 믿음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으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여진 주관적인 사실을 믿음 안에서 사실로 받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의 복된 모습이 자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합리성의 사심의 시비를 벗어나서 분란되어져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을 주님께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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