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13, 2006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2006년 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3:1-12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하게 귀중한 것이고 일반 학문을 하시는 분들이나 또는 일반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사람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이라고 함을 전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러한 이성의 중요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중요함이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함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고 그러한 점에서 일말의 그러한 인식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의 한 인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가운데서도의 모습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정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또한 합당한 가치관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러한 가운데서의 판단은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고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는 것과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그러한 것들이 언급되어 있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나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는 것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자이심을 말씀하시며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해한 가운데서 분별되어져야 할 것들을 몇가지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뜻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그 다음 말씀도 분별할 수가 없는 가운데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 대한 모습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소위 ‘형제단’이라고 하는 단체에 속하신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은 교회의 제도적인 모순에 대하여서 걱정하는 그러한 것을 들으면서 아주 할말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극단적으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근거는 바로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잘못된 시각을 가진 결과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옳다는 것은 달리 나타난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교회의 질서적 제도라고 하는 것이 모순이 있다는 것과 모두 배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선하게 받아야할 질서의 실존은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질서적 개념에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하는 바 기득권적인 것을 취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 앞서 그들의 인식의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되어진 것이라고 함의 행함이으로 그것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표현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인식은 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가르침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들의 인식의 잘못됨으로 인해서 그 가르침과 달리 또는 잘못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따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맥적 관계성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이에’라는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과 전반적인 이해에서도 그 상관성에서 그 인식의 연관성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장인 마 22장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의 비유적 실제로서 언급하였던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의 존재적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인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 그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적인 모습이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행동이라고 함이 바로 그 진정한 신앙의 실존으로써의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그들의 말한 바는 지키되 그들의 행함이라고 함은 본받지 말라고 하심의 뜻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언급된 그들의 행동을 주목해보면 이렇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은 자의 모습, 저희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행위, 상석에 앉으며 문안과 납비라 칭함을 받는 것, 아비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는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교회의 질서적 의미와 아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일시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함에 있어서는 그 동일시와 동일의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어그러지게 임의적으로 취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성막을 옮기게 되어질 때에 그 임무는 고라자손이 책임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이 되신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신약적 배경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반론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달란트의 고유성이라고 함을 존중하여야 하며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집사이고 모두가 교역자이고 하면 그것의 사역적 달란트를 위해 헌신함에 있어서 그 질서를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또한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 행한 바는, 언급한 바와 같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의 재가적 허락이라고 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모습들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행위나 상석에 앉는 것과 문안하는 것이나 아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잘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함께하라고 하심과 같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사역적 정당함이 있는 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 믿음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섬김이고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섬기는 자나 섬김을 받는 자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심에서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문안이라고 하는 것도 사도의 가르침에서 성도의 문안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비라고 함에 있어서도 복음으로 사람을 바르게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부로서의 재가를 받은 아비를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적 차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질서의 한 부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질서의식은 합당한 것으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그러한 중심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의 발로로써 행함의 모습이 있어서 동일한 표현의 질서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까지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생각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엘리 제사장과 그에게서 신앙을 배운 사무엘의 모습이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삼상 3: 참고)

엘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을 심의하는 그러한 종의 모습이 비로소 나타나는 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앞에서 범죄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소문이 않좋다는'그러한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 사실심의에도 그의 연로한 판단이 어두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자식의 죽음이라고 함의 비보를 듣는 가운데서 그의 목이 부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이 부러져 죽은 엘리 제사장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의 질서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두는 사무엘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의 훌륭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주관적이면서도 사실로써 받을 수 있는 모습에서 신앙의 자유와 또한 사실로써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아무리 타락해도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고쳐나가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그러한 소명적 합당한 자리에 세움을 받지 않았다면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구별적 사실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별하여서 선하게 받을 수 있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어진다는 것과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주관적인 판단의 사실도 진정한 객관적 사실로 받음에 합당함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행하고 가르치는 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구별하고 가르치지 못한 행위를 본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의 근본적인 인식인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기득권처럼 사용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적 사역이 우리 삶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써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관적인 사실도 구별하여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며 판단함의 그 사실도 선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교회에서 섬김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득권적 개념의 질서적의미를 교회의 모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서 동일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임의적으로 기득권적 입장에서 행하는 자들로 인해서 판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써 왕으로서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바리새인인줄을 분별하지 못하는 악한 모습이라고 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말한 바를 행하고 그들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바르게 따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받으시는 열매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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