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5월 24, 2006

내 마음 속의 지우개

2006년 5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레10:8-20
모세가 좋게 여겼더라

인생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좀더 지난 세월에 잘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불행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을 잊고 싶은 마음에 술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지울 수 없지만 지울수 있는 것같은 효과와 스트레스적인 것을 잠시 잊고 싶은 노력들인데 사실 그러한 것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음주를 하시는 분들도 인정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후에 일시적인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속이나 머리가 아픈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해보는 그러한 실험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또한 귀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레위기서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론에서 말씀하시는데 아론과 아론의 후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도록 하심과 영영한 규례라는 말씀과 그리하여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그 아론의 남은 아들들에게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으라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랐음에 대하여서 아론에게 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식이라고 함을 그렇게 행함을 책망하였는데 아론은 모세에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라고 답함이 기록되어 있고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과 아론의 생각이 다른 것같이 보이면서도 모세가 좋게 여겼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볼 때에, 레위기 9장은 제사장들을 성별하고 거룩하게 함에 있어서 7일이 지난 8일째 첫 공식적인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음에 대한 것과 그 직분이 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써 행하여지고 또 그 제사장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여드레날에 평안하기를 바라시며 그들에게 나타나서'(마 20:26)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제사장적인 직분의 사실성을 힘입을 수 있도록 말씀하심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또한 사도행전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 10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드리는 가운데서 죽임을 당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된 자로서 아론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라고 말함이 오늘 본문의 내용적 정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느 부모가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슬픔이라고 함은 그러한 감정의 골은 어떤 합리적인 말로도 매울 수 없는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분별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름을 잊기 위해서라도 독주를 찾을 수 있는 정황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한잔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모세는 경계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 중에서 아론과 그 제사장들이 먹어야 할 것을 불살랐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이것은 감정에 따른 분별력을 상실한 마치 술취하여서 분별력을 상실한 것과 같은 행위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의 제사장적 직분을 망각한 것으로 책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레 10:9)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슬픔에 따른 분별없는 이성적 사각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신 믿음으로 사실분별을 하였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할 때에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제사장적 실존과 그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충실했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왕적 권세, 제사장적 권세, 선지자적 권세를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성도의 권세와 증거를 기억할 때에 구약에서의 특별한 부류의 제사장을 말함은 이제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적인 인식과 상통하게 되어지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실제의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들라고 하면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마 10:37)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 죽은 줄 모르고 그 아들을 위해 간구하다가 죽은 후에는 주의 뜻하심의 선하심을 받아들여서 치우치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니다(삼하 12:19~23)

이러한 모습은,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제사장적 권세 즉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정함 거룩함을 구별하여 사실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도록 부름을 받음에 있어서 그 공적인 직분적 분별을 잊지 않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심의 의미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적 사유 즉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판단과 행함을 원하실까'에서 그 공적인 사역적 삶을 아주 평범한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입장에서는 구약에 불편하고 현대적이지 못한 것은 다 임의적으로 제하고 새로운 정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신약을 말하고 있고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계시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함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고후 1:19,20)에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부활하심에서 제사라는 개념의 실제를 완성하셨음에 따라서 지금은 구약에 제사적 입장의 현실적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계시적 실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에 따른 사실을 모세도 마음에 좋게 여긴다는 것과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분별하여 사실화 해 나가는 제사장적 실존을 메시아 안에서 이루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릴때에 지우개로 공책의 글씨를 지우다가 공책을 찢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적 불편함과 어려움과 정말 기억하기 싫은 것들로 점철되어진 우리의 지난날들 다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임의적인 실험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로서 그의 직분적 수행이라고 하는 제사장적 권세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그래서 부인하고 싶고 그것이 옳다고 보여지는 우리의 삶의 지난날들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다는 것과 지금을 위해서, 자존의 절대자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셨음을 믿을 수 있을 때에 나의 한정적인 생각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 또는 일부를 지워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공책을 찢는 것과 비교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로서의 내 삶 내 생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거룩하고 판단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귀히 보시고 인도하신, 비록 내가 의식하지 못한 때라고 하여도, 그 삶이 찢어지는 것은 옳지 않으며 현재와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는 것이 성경적인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속에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는데 사용되어질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슬픔의 감정과 미움과 같은 여러가지 분별력을 잃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과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들을 믿음으로 지울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아론과 같이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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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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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22, 2006

최후의 만찬 이해 (The last supper)

2006년 5월 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4-30
최후의 만찬 이해

요즘은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유행하는 인기몰이 사상과 매체의 형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언제나 그러한 흥미와 인기몰이라는 개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행함에 대한 실제적인 윤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취하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새 언약을 세우신 유월절 식사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린 그림에 대한 이해로 예수님의 사상을 이해한 그 그림을 그린자의 인식을 확대 그리고 재구성하여 연구한 내용의 글과 그것을 영상화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로소 절대의 재가가 부여되어있는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을 판단한다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거늘 합리성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기만되어진 자들의 임의적 자기 이성들의 표현이 되어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오늘 본문에서의 그 증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 문둥이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이 있은,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예수님을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겠느냐는 흥정과 함께 은 삼십을 달아 받아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유월절 잡수실 것을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는지를 질문함에 예수께서 성 아무에게 가서 선생님 말씀이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제자들이 예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식사를 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함께한 자들 중에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근심하며 자신들인지 주께 묻게 되는데, 주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주님을 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유다가 말함에 유다 자신이 말하였다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그것이 주의 몸임을 말씀하시고 또 잔도 축복하셔서 이것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위하여 흘리는 주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함께 이르시는 말씀으로써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심과 이에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을 팔게 되어지는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그러한 상대적인 인식의 행보에 실제적으로 상관없이 주의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이 생겨났을까 하는 것과 주의 새 언약을 세우심에서 말씀하신 그 뜻하심을 찬미함에 있어서의 그 중심은 어떠함이 옳은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본문의 문맥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한 본문에 대한 이해에 선행되어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획일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때로는 한 문장 한 단어적 의미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 함을 읽을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문맥적인 차원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본문에서 언급되어질 것입니다.)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실제적인 경제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앞서 있는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은 여인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가운데서 기념(memorial)되는, 기억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앙인으로서의 누구나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라는 그 보편성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 앞서 그 항유를 부은 여인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의 하나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때에 합리성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실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증거는 주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주의 죽으심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그에 따른 사실이해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을 주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으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유다의 입장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죽을바에야 그를 넘겨주고 자신의 상대적 입지와 또한 실리적 입장을 챙긴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신다는 것에서 진정 사실을 말하는 것을 유다는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 사실인가 상황적 요구에 따른 필요성에 따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타당성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를 판단하는 있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는 결국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위험한 놀이로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계속되어질 수도 있는 잘못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것이 소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예수님을 팔아 돈을 챙기는 자들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이후 주의 뜻하심을 본 유다는 그 돈을 성전고에 돌리지만 그것으로 밭을 사서 '피밭'(마 27:8; 행 1:19)이라는 뜻에 여행객들의 무덤을 삼았던 것입니다.(마 27:6~8)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예수님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유다행각'들로써 그러한 사상들을 경험하는 여행객들의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실제적으로 주의 뜻하심을 부정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도구적인 것으로 실제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 도구적인 것이 없이 하나님이 그 뜻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볼 때에 그 증거적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앞에서 영혼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마땅히 증거해야 할 예수님의 뜻하심을 우리 성도들이 증거해야 증거할 뿐입니다. 주의 양들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주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을 주목합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비방이나 부인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판단받지 않은 분으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고 자기를 기만하는 가운데서의 윤리적 행태는 그 존재적 시비를 판단 받으며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있었기를 바라는 중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식과 한계와 그 자유와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만찬에 대한 새언약을 세우시는 본문'(마 26:26~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최후의 만찬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와 살로써의 그 예식을 행함에 있어서 주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그 뜻하심의 언약적 존재로서의 인증이 되어지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새살이 생겨나고 피가 흘려 따뜻한 생명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비유적인 표현을 말씀하시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써, 함께하시는 재가가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의 함께하심의 실존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절대의 재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더욱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주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또 임하실 것이라는 이미와 아직이 한 사건에 집약되어진 표현입니다. 즉 예수께서 세우시는 이 언약적 실제의 예식은 이미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 같이 표현되어진 것으로써 이제는 다른 언약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흉내내어서 자신이 자존자인 것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계 13:11~15) 그러한 자존자 행세를 하는, 예수님의 흉내를 내는 자들이, 그와 같이 예수님 흉내를 내며 새로운 언약식을 베풀 그 자들이, 바로 불법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 예식과 식사는 마지막 식사(The last supper)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후 제자들을 만나셔서 음식을 드신 것이나 또는 갈릴리 해변에서 조반을 드신 것과 같은 것은 이 언약을 세우시는 것으로써의 식사 최후의 만찬과는 비교되어져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은 앞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의 장사를 위하였던 그 여인의 증거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한 자기 계시의 뜻하심을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우리의 실존과 삶과 삶의 해석이 사실임을 믿는 것(고후 1:19,20)이 우리 성도들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에서 기억되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해와 증거의 합당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가룟유다와 같이 상황논리에 따라서 예수님을 파는 잘못을 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조장하는 경우의 한시적인 악함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에는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선하심을 그리고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찬미하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참고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의식에 의한 사실규정의 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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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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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1, 2006

한 여인의 증거

2006년 4월 3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13
한 여인의 증거

사람들의 인식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즉 ‘대중(大衆)의 힘’ 또는 ‘민중의 정의실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대중의 무지’ 또는 ‘다수(多數)의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절한 표현과 납득이 되어짐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논란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함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신앙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소위 ‘약한 자 편들기’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에 대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그 말씀하신 바를 들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따른 영생과 영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것을 말씀하심과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 중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음에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잘못된 질책을 여인에게 말하매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그 여인이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주의 장사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진실로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대중적인 인식의 악함이 믿음의 증거로서의 한 여인의 증거를 왜곡함에 있어서 주께서는 그것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시며 그 증거적 내용을 기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주목함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본문에 앞서는 25장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인자되신 예수 자신께서 임금으로 오심에 대한 것과 의인과 저주받은 자들을 구별하여 말씀하심과 영생과 영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고 그 기준이 그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하지 않음이라고 함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더 언급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함이 어떤 한특정 개인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교회의 특징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눅 14:13,21) 하나님의 순애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자임에 대한 것에서 부터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그 지극히 작은 자로서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로써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또 생각과 마음이 곱지 못하고 소위 삐딱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적 입장에서 정상적이다고 판단받을 수 없어 보이는 현상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단체도 이러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윤리적 도덕적 개념에서는 이러한 판단으로 낙인 또한 심판하고자 하는 판단을 하려는 자들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인식의 판단이 강요받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믿는 그들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지극히 작아 보이는 형제도 주님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름으로 구별된 거룩한 성도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자가 그 순애보적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주리심과 목마르심을 채우는 자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의 아문에서는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합리성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써 주님을 죽이기로 주장하고 있음이 대세적인 그 당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예정하신 뜻하심에서 허용되어진 것이고 또한 주님의 뜻하심이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그러한 모사들을 앞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울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주의 제자들의 일부 중에서도 영향력을 받은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음에 대하여서 그것을 허비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아까움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하게 되지만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는 사람 사형선고를 암묵적으로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입장도 있었다고 함을 말함이 정황에 더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의 대중의 판단의 보편성은 기각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어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에 따라서 약한 자의 판단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에서 임의적으로 단순하게 한 여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분명 주께서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 신앙고백적인 증거를 교회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하는 도덕적 개념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기꺼이 헌신했다.. 귀한 것을 바쳤다는 개념만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전제되어진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인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함은 그 당시 증인들의 역사적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증거로서의 정당함이 있기에 역사적 보편성과 상대성으로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증거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로 인하여 종노릇하는 존재를 다시 살리시고 종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를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녀는 그 자신의 전재산과 같은 향유옥합의 가치로 향기로써 주의 죽으심의 거룩함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자신으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주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예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고후 1:19,20)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6,27)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고전 2:16)주의 가르침을 말함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오실때까지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신앙의 노선에서 증거되어짐을 읽게 되며 이것은 주의 받으신 바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증거는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과 그래서 본보기적으로 우리도 좋은 것을 드리자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인 좋은 것이 되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죽음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드림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셨음에 그가 자존자로서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아서 그의 말씀하심에서 삶의 가치와 삶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사실을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진실된 사실로 받는 것이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과 동일한 중심으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심의 그 말씀하심이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진정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는 은혜'(눅 7:38)를 주님나라 임하실 때에 받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어지는데 이와 같은 은혜(계 7:17)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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