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2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35-58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한번은 학생들과 성경공부하기 전에 고민되는 질문이나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 축구하는데 두 팀 모두에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 이기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기를 하는데, 경기의 승패가 있을 경우 지게된 팀의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가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하지 않은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의 답변으로는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으로 기도를 들어주심에 대한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즉 이기는 자의 영광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의 주의 축복하심과 영광은 비교되어서 비로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실을 상대적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대적 여지를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부활의 상대적 납득 가능성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존재부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자들이 있는데 부활이 있다고 함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목하며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그러한 이어지는 인식과 그에 따른 질문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씨와 형체의 차이는 그 상대적으로도 비교되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즉 형체가 다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라는 형체가 되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실제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체로써의 육체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영광도 다 다름에 대한 것으로 동일한 영광의 상대적 비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속한 영광, 땅에 속한 영광,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핑계치 못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기록된 계시된 말씀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며, 그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시며, 비로소 살려주는 영이 되심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른 형상과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혈과 육, 썩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며 우리들도 변화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을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전반적인 증거의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출 7:10~12)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성찬식의 포도주와 떡을 임의적으로 먹는 것과 같은 불량배적인 모습이 죄악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고,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교회의 질서와 증거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부활의 참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난 교회의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정황적으로 볼 때에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쇠퇴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던 것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연보를 해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교회의 모습들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상황에서의 현대적인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인가 그러한 초라한 모습에서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위로하는 거짓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느냐는 그 사실 시비적인 인식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그것의 현실성적인 증거도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 현실이라고 함을 상대적이지만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있다고 하여도 몇몇 사람들인데, 그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초라한 것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인식적 시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되는가 하는 시비적 입장의 인식을 가진 자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목을 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의식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참고)
부활의 모습에 대한 상대적인 설명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나는 형체의 연속성에 대한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와 식물이라는 형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모습들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전혀 비교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럴 가능성의 상실이라는 느낌에서,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형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확신할 수 없는 부당한 임의적 말을 하고 있음에 어리석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던 고린도교회의 모습들과 지역교회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들의 연보로 서로 돕고 있는 모습과 많은 빈곤한 모습이 있다고 할 때에,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닌 위로차원의, 임의적 자위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을 말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자고 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이 가능한 것과 비판이 옳은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 여러 영광들의 모습의 다양성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실존과 사실을 믿는다면 그 절대 선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영광이 비교되어져서 부끄러운 쇠퇴하고 버려야할 영광으로 자리매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연보를 하고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런 모습에서 또한 도움을 주는 자나 받는 자들의 모습들도 그렇게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들, 성도들의 그 때당시의 풍족하지 못한 모습들, 그러한 것들에서 그 영광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영광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모두 사라질 사실로써 부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상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론적 비판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인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그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개념을 주권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 속의 진리로 나타내신 바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존재부정이라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심을 나타내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그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기름부으심과 구별하심으로 주의 말씀을 다르는 자들의 존재를 영생을 얻도록 사실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가 상대적인 형태로써의 성도들에게 그 존재와 삶과 섬김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으로의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규정은 비로소 성도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 세월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진리의 말씀 진리의 사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의 증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좀더 주목해보면 그 앞서 사도 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출 7:10~12)
애굽의 왕 바로 앞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뱀이 그 애굽의 지팡이로서의 뱀을 삼킨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지팡이로 여러 기적을 행하던 가운데(출 7:15)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출 14:16)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부활의 사실의 실재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나타내시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시며 세상의 존재적 정당함이 없는 간교한 지혜의 상징으로써의 상대적 지혜는 그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이기게하심 즉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지혜에 삼킨바가 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도록 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그 사실과 그 재가를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실재는 모든 상대적인 핑계라는 간교한 지혜의 실존을 부정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를 손에 들게 하시는 것과 같이 이제 주의 부활하심과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는 지혜를 믿으며 마음에 두며, 주의 뜻하심을 위한 그 믿음의 섬김의 손을 뻗어서 주의 영광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즐거히 믿음의 선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간교한 말의 존재적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 부활의 사실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됨의 말씀이 응하심을 기쁨으로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시며 이후에 나타날 예비된 면류관으로 주께 돌려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전15:35-58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한번은 학생들과 성경공부하기 전에 고민되는 질문이나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 축구하는데 두 팀 모두에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 이기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기를 하는데, 경기의 승패가 있을 경우 지게된 팀의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가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하지 않은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의 답변으로는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으로 기도를 들어주심에 대한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즉 이기는 자의 영광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의 주의 축복하심과 영광은 비교되어서 비로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실을 상대적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대적 여지를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부활의 상대적 납득 가능성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존재부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자들이 있는데 부활이 있다고 함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목하며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그러한 이어지는 인식과 그에 따른 질문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씨와 형체의 차이는 그 상대적으로도 비교되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즉 형체가 다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라는 형체가 되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실제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체로써의 육체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영광도 다 다름에 대한 것으로 동일한 영광의 상대적 비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속한 영광, 땅에 속한 영광,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핑계치 못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기록된 계시된 말씀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며, 그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시며, 비로소 살려주는 영이 되심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른 형상과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혈과 육, 썩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며 우리들도 변화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을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전반적인 증거의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출 7:10~12)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성찬식의 포도주와 떡을 임의적으로 먹는 것과 같은 불량배적인 모습이 죄악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고,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교회의 질서와 증거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부활의 참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난 교회의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정황적으로 볼 때에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쇠퇴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던 것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연보를 해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교회의 모습들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상황에서의 현대적인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인가 그러한 초라한 모습에서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위로하는 거짓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느냐는 그 사실 시비적인 인식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그것의 현실성적인 증거도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 현실이라고 함을 상대적이지만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있다고 하여도 몇몇 사람들인데, 그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초라한 것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인식적 시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되는가 하는 시비적 입장의 인식을 가진 자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목을 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의식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참고)
부활의 모습에 대한 상대적인 설명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나는 형체의 연속성에 대한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와 식물이라는 형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모습들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전혀 비교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럴 가능성의 상실이라는 느낌에서,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형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확신할 수 없는 부당한 임의적 말을 하고 있음에 어리석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던 고린도교회의 모습들과 지역교회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들의 연보로 서로 돕고 있는 모습과 많은 빈곤한 모습이 있다고 할 때에,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닌 위로차원의, 임의적 자위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을 말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자고 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이 가능한 것과 비판이 옳은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 여러 영광들의 모습의 다양성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실존과 사실을 믿는다면 그 절대 선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영광이 비교되어져서 부끄러운 쇠퇴하고 버려야할 영광으로 자리매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연보를 하고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런 모습에서 또한 도움을 주는 자나 받는 자들의 모습들도 그렇게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들, 성도들의 그 때당시의 풍족하지 못한 모습들, 그러한 것들에서 그 영광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영광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모두 사라질 사실로써 부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상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론적 비판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인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그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개념을 주권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 속의 진리로 나타내신 바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존재부정이라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심을 나타내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그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기름부으심과 구별하심으로 주의 말씀을 다르는 자들의 존재를 영생을 얻도록 사실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가 상대적인 형태로써의 성도들에게 그 존재와 삶과 섬김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으로의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규정은 비로소 성도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 세월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진리의 말씀 진리의 사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의 증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좀더 주목해보면 그 앞서 사도 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출 7:10~12)
애굽의 왕 바로 앞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뱀이 그 애굽의 지팡이로서의 뱀을 삼킨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지팡이로 여러 기적을 행하던 가운데(출 7:15)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출 14:16)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부활의 사실의 실재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나타내시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시며 세상의 존재적 정당함이 없는 간교한 지혜의 상징으로써의 상대적 지혜는 그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이기게하심 즉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지혜에 삼킨바가 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도록 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그 사실과 그 재가를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실재는 모든 상대적인 핑계라는 간교한 지혜의 실존을 부정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를 손에 들게 하시는 것과 같이 이제 주의 부활하심과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는 지혜를 믿으며 마음에 두며, 주의 뜻하심을 위한 그 믿음의 섬김의 손을 뻗어서 주의 영광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즐거히 믿음의 선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간교한 말의 존재적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 부활의 사실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됨의 말씀이 응하심을 기쁨으로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시며 이후에 나타날 예비된 면류관으로 주께 돌려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