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8:28-34
참된 기도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하는 중심과 또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평안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지는데, 이는 인지상정적으로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일말의 당연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말의 당연함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주 앞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그러한 생각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러한 중심에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들로 그 기준을 자신의 소유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일관하여서 자신들의 삶을 의도하며 계획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그들의 의도와 계획함과 같은 인식이라고 함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결국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헛된 삶이라고 함을 나타내게 될 때에 그것은 극히 불쌍하다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현실적인 기준들로서의 소유라고 함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또한 혼란되어진 가운데 실험인생으로써 일관하게 되어지고 그것은 결국 신이 죽었다는 그러한 알지 못하는 합리성으로 자위하게 되는 그 또한 불쌍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기도가 되어짐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주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음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주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 정황도 읽게 하시는데, 그 귀신의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그의 주님께 행하고 있는 말과 그들의 요구로 인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 돼지들이 바닷물에 몰사하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돼지 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을 보고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함으로 인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임의적인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과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러한 타당성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죄로 인한 그 영향 때문에 근시안적인 소경의 길을 택하고 있음을 인한 불쌍한, 의도와 방향과 전 인격적인 삶의 기로로서의 기도를 주목하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주님을 영접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분별한 삶의 방향이라고 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 사실여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전체적인 측면을 살펴보게 되는데, 마태복음 8장은 산상보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한 단락을 이룬다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8장인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진다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전계되어지는 동일한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보다는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단위로서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자기 땅 자기 나라에 오시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윽고 3장에 가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주님과 함께한 자들로서의 ‘산위의 동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내려오셨으나 사람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섭리를 보이시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증거를 하셨고 오늘 보문에서는 결론적인 측면에서 영접하지 않고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가다라 귀신의 인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읽게되어지며 그 불쌍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모습을 반대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이 본문의 전반적인 인식과 이해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라는 곳에 가셨을 때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귀신을 괴롭게 하는 자로 오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식이 허용되어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은혜가 그에게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리적인 것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도 들었지만 그것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마 8:27참고)과 그것이 이 귀신과의 상관성으로 읽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의 주체적 개념까지 점령하여 소위 ‘귀신들린 자’로서의 기본적인 인격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결과적인 측면으로 말할 수 있는 그 열매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것이 ‘죄아래 팔린 인생’(롬 3:9; 갈 3:22)으로써 자리 매김되어지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소유권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려고 오심’(요 3:16)에 있어서 귀신은 말하기를 자신들을 괴롭게 하려고 오셨느냐는 식의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실재에 입각해서 그 죄악된 가운데서 타당성을 현실적 소유라고 함에서 찾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 그 교활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허락을 받는다는 측면을 현실적으로 부각해서 그 현실적인 책임을 주님께 전가하여 주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부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귀신이 그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인식의 통제권을 가지고 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수많은 돼지들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에 따라 들어가서 바다에 빠지게 하여서 그 현실적인 실재적 피해에 대한 타당성에 따른 임의적 정당함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두 번째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되어진 일들’이라는 현상적인 현실적인 소유권적인 개념의 타당성으로 주님의 자기 증거라고 함을 임의적인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왜곡되어진 합리성의 증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장검증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서 와서 보고 현실적인 타당성에 따른 인식의 결론으로써 주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관점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것이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좋은 것을, 생명을 잃게 되어지는 불쌍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준들 특히 그 선함으로써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소유라는 기준이 악하게 왜곡되어진 기준으로써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기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물질 만능’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러한 표명을 하면서도 사실 생명과 평안한 삶을 위해서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얻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있어서 모순된 모습이면서도 인정이 강요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능력의 표현으로 가능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 영혼을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서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재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의 사실적 재가를 받을 수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옳은 능력으로서의 한 표현이 되어지는 소유권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권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삶에 있어서의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스스로 취하심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존재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중심에 두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단지 현상적인 권세로서의 물질적 개념에서의 사실로 일관하며 인생의 삶과 존재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가운데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불쌍한 기도의 자들이 되어지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로서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한 자들로서 참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8:28-34
참된 기도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하는 중심과 또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평안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지는데, 이는 인지상정적으로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일말의 당연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말의 당연함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주 앞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그러한 생각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러한 중심에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들로 그 기준을 자신의 소유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일관하여서 자신들의 삶을 의도하며 계획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그들의 의도와 계획함과 같은 인식이라고 함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결국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헛된 삶이라고 함을 나타내게 될 때에 그것은 극히 불쌍하다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현실적인 기준들로서의 소유라고 함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또한 혼란되어진 가운데 실험인생으로써 일관하게 되어지고 그것은 결국 신이 죽었다는 그러한 알지 못하는 합리성으로 자위하게 되는 그 또한 불쌍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기도가 되어짐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주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음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주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 정황도 읽게 하시는데, 그 귀신의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그의 주님께 행하고 있는 말과 그들의 요구로 인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 돼지들이 바닷물에 몰사하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돼지 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을 보고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함으로 인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임의적인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과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러한 타당성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죄로 인한 그 영향 때문에 근시안적인 소경의 길을 택하고 있음을 인한 불쌍한, 의도와 방향과 전 인격적인 삶의 기로로서의 기도를 주목하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주님을 영접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분별한 삶의 방향이라고 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 사실여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전체적인 측면을 살펴보게 되는데, 마태복음 8장은 산상보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한 단락을 이룬다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8장인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진다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전계되어지는 동일한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보다는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단위로서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자기 땅 자기 나라에 오시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윽고 3장에 가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주님과 함께한 자들로서의 ‘산위의 동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내려오셨으나 사람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섭리를 보이시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증거를 하셨고 오늘 보문에서는 결론적인 측면에서 영접하지 않고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가다라 귀신의 인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읽게되어지며 그 불쌍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모습을 반대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이 본문의 전반적인 인식과 이해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라는 곳에 가셨을 때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귀신을 괴롭게 하는 자로 오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식이 허용되어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은혜가 그에게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리적인 것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도 들었지만 그것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마 8:27참고)과 그것이 이 귀신과의 상관성으로 읽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의 주체적 개념까지 점령하여 소위 ‘귀신들린 자’로서의 기본적인 인격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결과적인 측면으로 말할 수 있는 그 열매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것이 ‘죄아래 팔린 인생’(롬 3:9; 갈 3:22)으로써 자리 매김되어지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소유권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려고 오심’(요 3:16)에 있어서 귀신은 말하기를 자신들을 괴롭게 하려고 오셨느냐는 식의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실재에 입각해서 그 죄악된 가운데서 타당성을 현실적 소유라고 함에서 찾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 그 교활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허락을 받는다는 측면을 현실적으로 부각해서 그 현실적인 책임을 주님께 전가하여 주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부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귀신이 그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인식의 통제권을 가지고 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수많은 돼지들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에 따라 들어가서 바다에 빠지게 하여서 그 현실적인 실재적 피해에 대한 타당성에 따른 임의적 정당함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두 번째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되어진 일들’이라는 현상적인 현실적인 소유권적인 개념의 타당성으로 주님의 자기 증거라고 함을 임의적인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왜곡되어진 합리성의 증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장검증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서 와서 보고 현실적인 타당성에 따른 인식의 결론으로써 주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관점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것이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좋은 것을, 생명을 잃게 되어지는 불쌍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준들 특히 그 선함으로써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소유라는 기준이 악하게 왜곡되어진 기준으로써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기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물질 만능’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러한 표명을 하면서도 사실 생명과 평안한 삶을 위해서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얻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있어서 모순된 모습이면서도 인정이 강요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능력의 표현으로 가능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 영혼을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서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재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의 사실적 재가를 받을 수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옳은 능력으로서의 한 표현이 되어지는 소유권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권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삶에 있어서의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스스로 취하심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존재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중심에 두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단지 현상적인 권세로서의 물질적 개념에서의 사실로 일관하며 인생의 삶과 존재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가운데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불쌍한 기도의 자들이 되어지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로서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한 자들로서 참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