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22:39-53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에 대한 기본적 단위로서의 인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서양의 개념에서보다 동양에서 보다 더 그런 경향을 읽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자신보다도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습과 그 남편이 잘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측면에서는 구시대의 한 모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주고 싶은 것이 또한 한 중심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밤 늦게 들어와서 잠든 모습들을 보면 남편 자신이 더 잘해야 할 것인데 하는 중심에서 미안해 할 수 있는 모습, 그런 가운데서도 또한 새 힘을 내고자 다짐하는 것이 또한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고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사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건강한 가정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신부로 표현할 때에, 그 신부된 교회가, 성도가 주님에 대한 확신이나 그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 슬픔으로 인해 잠들 때가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7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저희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돌던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기도하심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슬름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 47절에서 53절말씀에서는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입맞추고 인자이신 예수님을 파는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지적하시니 그 좌우가 그 될 일을 생각해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 것과 주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에 있을 때에 그들이 잡지 아니하였음을 지적하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있던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위격적 차이를 드러내시는 것으로서의 인성적 차원을 통해 우리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인데, 그 위격적 차이를 상대적으로 비로소 해석적 모순이라는 객관적 근거지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할 때에는 부정이나 모순으로서의 부정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아바 아버지로부터의 정당한 사실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며 인간으로서의 정당하다는 판단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범과 동시에 십자가를 지시는 성자로서의 그 감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적 당위성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보이시는 것도 하늘로부터의 사자의 도움도 언급되어짐으로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여러 상념에서 고통을 잊고싶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괜히 예수를 주로 따라왔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입장이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드러내도 의미없는 상황에서 잠이나 자자는 심정인 것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도 그 지역의 유지들로 보이는 자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 피해본 자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떠나달라는 푸대접을 받았지, 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배척해서 다른 길로 가야하는 것이지..
뭐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할 때에 앞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한다고 하지.. 그래 예수님이 죽는다고 할 때에, 그를 따르는 우리는 뭐가 될까..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볼 때.. 그냥 위로차 하는 이야기지 그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 감람산..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친 것과 같이 숨기 쉬운 곳으로서 감람나무가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 제자들이 와 있는 심정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반역자를 수색한다고 하면 다른 곳보다도 그곳 감람산을 먼저 수색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제자들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이 후회되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욱 제자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쯤 떨어져서 기도하시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예수님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놓고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열심당 시몬과 같은 사람을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그분에 대하여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 앞서 있는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너희를 청구했다'는 말씀과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것입니다.(눅 22: 31~32)
즉 본문의 문맥을 먼저 볼 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했을 예수님을 잡히게 되는 그 상황이라는 것 앞서 주님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먼저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아무도 나에게 기도하지 않는 것 같아도 본문의 앞섬이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통해 그 앞서 이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음과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본래적으로 앞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자로서의 주님의 기도는 상대적인 실제로서의 현실적 시험이 성도를 비로소 넘어지거나 실족함의 사실을 구한다고 해도 그것의 실제적인 성립은 기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도 여기에 기준되어지는 것이며 예정하심의 현실적 섭리로서 항상 성도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정 사실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맥적 본문을 주목해 볼 때에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한다는 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실제적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함을 의도한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1~33)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제자들에게 감추였다는 것은 그 죽으심과 부활의 자기 계시는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죽는다' 또는 '산다'라는 즉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와 같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서 예수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상대적 판단 속에서 절대를 읽지 못하고 현실적 사태가 실제인 것과 같이 납득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가진다는 것에 인식적 강요를 당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실적 실제의 궁색한 표현들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슬픔은 체념의 고통을 잊기 위한 잠을 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청구한다는 것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밀 까부르다'라는 표현은 알곡과 실재라는 실제를 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임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실재론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 것이 사단의 청구내용의 핵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에 대해서
누가복음 36절의 말씀에서는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검 두자루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였고 주님께서는 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2:38 참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검이란 예수님을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성령의 검으로서의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서 행할 때에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임을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데, 제자들은 현실적인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족하다고 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심과 또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의 역사적 현재를 이루시기 전이므로 그들의 인식적 한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메시아적 마음에 꼭들었던 사람으로 그 증거가 있었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그 뜻하심을 분별할 수 없었음의 구차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실재적 실제의 분별이 형성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예수님을 판다는 상황인식에서 물리적 검을 사용함의 당위성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에 따른 강변일도의 입장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자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터부시하고 극단적 배척을 하거나 성도들의 자기 비하적 개념으로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예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850대 1명으로서 하나님의 불을 내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보였건만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오히려 아무 감각도 없고 심지어 되지도 않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그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로 그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였고, 그러한 바른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합왕조는 예후의 사역에서 아합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세벨까지 죽임을 당하는 신원하심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적기라고 생각되는 그 때에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의 실제를 믿는다면 엘리야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자기를 실족에 내몰지 않고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예수님의 실재와 실제의식을 결여한 제자들은 현실적인 실제에 믿음 보다는 도의적 차원에서의 강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하시는 경건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본문에서는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는 말씀과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음을 상기시키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 개념에서만 본다면 잡히는 자의 입장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러한 것을 취한다고 할 때의 한 개인의 편협한 그리고 궁색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황상의 개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이 골리앗을 대면하여서 '너는 창과 방패로 나가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삼상 17:45 참고)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서 자기 부정이라는 것을 자기 능동으로 취하신다는 것을 객관적 규정을 지으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자신이 허락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시험의 모든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거하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과 같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사단이 그것을 의도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더욱 곤고하게 서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밀 까부르는 듯한 시험을 이미 자신이 받으심으로써 이제 더 이상 시험이 현실적으로 성도들을 비로소 정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고전 10:13)는 그 뜻하심을 증거하심으로 성도들의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이 어려울 때면 어떤 한 시인이 한 말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냥 참고 견디는 것으로서의 버티기적 개념도 유용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제의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를 받는 가운데, 도의적 경건이 아니라 믿음의 경건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짐에서 찾을 때,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무엇이 진정한 삶의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세상에서의 비몽사몽간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슬픔을 인한 잠'에서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을 갖추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는 우리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 청구할 만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검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갖추는 즉 깨어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시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가운데, 주의 강한 군사들로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주의 뜻을 행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눅 22:39-53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에 대한 기본적 단위로서의 인식은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서양의 개념에서보다 동양에서 보다 더 그런 경향을 읽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자신보다도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습과 그 남편이 잘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측면에서는 구시대의 한 모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받을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주고 싶은 것이 또한 한 중심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밤 늦게 들어와서 잠든 모습들을 보면 남편 자신이 더 잘해야 할 것인데 하는 중심에서 미안해 할 수 있는 모습, 그런 가운데서도 또한 새 힘을 내고자 다짐하는 것이 또한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고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사회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건강한 가정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신부로 표현할 때에, 그 신부된 교회가, 성도가 주님에 대한 확신이나 그 뜻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 슬픔으로 인해 잠들 때가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감람산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7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 39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저희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돌던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기도하심과 그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슬름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 47절에서 53절말씀에서는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입맞추고 인자이신 예수님을 파는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지적하시니 그 좌우가 그 될 일을 생각해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 것과 주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에 있을 때에 그들이 잡지 아니하였음을 지적하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있던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모범의 의미와 슬픔을 인하여서 잠든 제자들의 인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위격적 차이를 드러내시는 것으로서의 인성적 차원을 통해 우리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인데, 그 위격적 차이를 상대적으로 비로소 해석적 모순이라는 객관적 근거지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할 때에는 부정이나 모순으로서의 부정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통해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아바 아버지로부터의 정당한 사실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며 인간으로서의 정당하다는 판단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범과 동시에 십자가를 지시는 성자로서의 그 감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적 당위성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보이시는 것도 하늘로부터의 사자의 도움도 언급되어짐으로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여러 상념에서 고통을 잊고싶은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괜히 예수를 주로 따라왔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입장이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도 드러내도 의미없는 상황에서 잠이나 자자는 심정인 것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군대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도 그 지역의 유지들로 보이는 자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 피해본 자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떠나달라는 푸대접을 받았지, 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배척해서 다른 길로 가야하는 것이지..
뭐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할 때에 앞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한다고 하지.. 그래 예수님이 죽는다고 할 때에, 그를 따르는 우리는 뭐가 될까..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만 그건 상식적으로 볼 때.. 그냥 위로차 하는 이야기지 그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 감람산..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친 것과 같이 숨기 쉬운 곳으로서 감람나무가 많은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 제자들이 와 있는 심정은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반역자를 수색한다고 하면 다른 곳보다도 그곳 감람산을 먼저 수색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제자들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신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이 후회되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욱 제자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쯤 떨어져서 기도하시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예수님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놓고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열심당 시몬과 같은 사람을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그분에 대하여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 앞서 있는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너희를 청구했다'는 말씀과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것입니다.(눅 22: 31~32)
즉 본문의 문맥을 먼저 볼 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했을 예수님을 잡히게 되는 그 상황이라는 것 앞서 주님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먼저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아무도 나에게 기도하지 않는 것 같아도 본문의 앞섬이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통해 그 앞서 이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음과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본래적으로 앞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자로서의 주님의 기도는 상대적인 실제로서의 현실적 시험이 성도를 비로소 넘어지거나 실족함의 사실을 구한다고 해도 그것의 실제적인 성립은 기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도 여기에 기준되어지는 것이며 예정하심의 현실적 섭리로서 항상 성도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정 사실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맥적 본문을 주목해 볼 때에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한다는 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실제적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함을 의도한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1~33)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 제자들에게 감추였다는 것은 그 죽으심과 부활의 자기 계시는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죽는다' 또는 '산다'라는 즉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와 같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서 예수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상대적 판단 속에서 절대를 읽지 못하고 현실적 사태가 실제인 것과 같이 납득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가진다는 것에 인식적 강요를 당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실적 실제의 궁색한 표현들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슬픔은 체념의 고통을 잊기 위한 잠을 청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청구한다는 것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밀 까부르다'라는 표현은 알곡과 실재라는 실제를 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임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실재론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 것이 사단의 청구내용의 핵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린 것의 의미와 주님의 치료하심의 뜻하심에 대해서
누가복음 36절의 말씀에서는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검 두자루가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였고 주님께서는 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2:38 참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검이란 예수님을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이후에 있게 되어지는 성령의 검으로서의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서 행할 때에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임을 총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데, 제자들은 현실적인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족하다고 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심과 또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의 역사적 현재를 이루시기 전이므로 그들의 인식적 한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메시아적 마음에 꼭들었던 사람으로 그 증거가 있었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그 뜻하심을 분별할 수 없었음의 구차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실재적 실제의 분별이 형성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예수님을 판다는 상황인식에서 물리적 검을 사용함의 당위성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에 따른 강변일도의 입장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자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터부시하고 극단적 배척을 하거나 성도들의 자기 비하적 개념으로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예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850대 1명으로서 하나님의 불을 내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보였건만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오히려 아무 감각도 없고 심지어 되지도 않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할 때에 그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로 그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였고, 그러한 바른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합왕조는 예후의 사역에서 아합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세벨까지 죽임을 당하는 신원하심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적기라고 생각되는 그 때에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의 실제를 믿는다면 엘리야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자기를 실족에 내몰지 않고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권세 또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예수님의 실재와 실제의식을 결여한 제자들은 현실적인 실제에 믿음 보다는 도의적 차원에서의 강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하시는 경건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하신 52절과 53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본문에서는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는 말씀과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음을 상기시키시면서 이제는 어둠의 권세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 개념에서만 본다면 잡히는 자의 입장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러한 것을 취한다고 할 때의 한 개인의 편협한 그리고 궁색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황상의 개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이 골리앗을 대면하여서 '너는 창과 방패로 나가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삼상 17:45 참고)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서 자기 부정이라는 것을 자기 능동으로 취하신다는 것을 객관적 규정을 지으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자신이 허락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시험의 모든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거하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과 같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사단이 그것을 의도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더욱 곤고하게 서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볼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밀 까부르는 듯한 시험을 이미 자신이 받으심으로써 이제 더 이상 시험이 현실적으로 성도들을 비로소 정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고전 10:13)는 그 뜻하심을 증거하심으로 성도들의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이 어려울 때면 어떤 한 시인이 한 말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냥 참고 견디는 것으로서의 버티기적 개념도 유용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제의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를 받는 가운데, 도의적 경건이 아니라 믿음의 경건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짐에서 찾을 때,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무엇이 진정한 삶의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세상에서의 비몽사몽간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슬픔을 인한 잠'에서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의 모습을 갖추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는 우리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 청구할 만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검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의식을 갖추는 즉 깨어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시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가운데, 주의 강한 군사들로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주의 뜻을 행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