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4:1-22
이가봇의 영광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을 비교하여 ‘속빈 강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래 과자류로써 ‘강정’이라는 것은 아주 맛있고 좋은 그것이지만 형태적 특성을 고려해서 실속이라는 개념의 부재를 가르킬 때에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증사회에서나 결과가 중요한 그러한 것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을 하는 그러한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과들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나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되어지는 일들에 대하여서 실증적인 개념은 있어도 그것의 판단 기준의 신실하지 못함에 있어서 실제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실재와 실제적인 것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회이면서도 그것의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가 추구한 그 영광과 실제는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진정한 실제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상대적인 것만을 따라 비로소 판단하는 실제적인 판단은 그 영광이 떠난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참되게 신앙생활하게 되는 가운데서도 실상은 그 영광이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모습은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가운데서 등불을 켜지 못하는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됨과 비교되어지는 정황으로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행함에서 패배하고 어찌되어진 것인가를 논하는 가운데서 실로에서 그룹 사이에 계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음과 그 제사장들은 엘리와 비느하스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충천하였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상식선에서의 경건의 모양을 취하며 담대히 이스라엘과 전투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투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엘리제사장에게 패전 소식과 아들들의 죽임 당함을 이야기하매 나이 많고 비둔하여 눈이 어둔 그는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산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아기를 낳게 되며 죽어가는데 그의 증거는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비느하스의 아내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실증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이었음을 주목하며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하는 것을 켜지 못하는 미련한 자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표현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대조되어지는 가운데서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등불이 모두 꺼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패배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엘리에게 알려진 것이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34; 삼상 3:13,14)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을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나타내심의 사실을 믿었다면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회개하게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러한 것은 기록되어지지 않고 있고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는 개념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심과 그 가운데서 사실 규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자신의 목이 부러진 것의 사실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며느리, 그의 아들 비느하스, 그의 기업의 영광인 그가 볼 때에 그가 그 기업을 실제적으로 이을 수 없음을 주목하는 비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엘리의 가르침은 상식적인 설명의 합리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지 그것의 재가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로 말미암는 현숙한 여인으로서의 며느리 즉 자기 기업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자식은 그 낳은 자의 기업이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기업으로써 홉니는 손으로 치는 자 ‘복서’를 의미하고 즉 폭력을 가하는 자이며 비느하스는 그 이름이 ‘뱀의 입’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입술로서 간교함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와를 타락시켰던 뱀은 하와에게 합리적인 설명으로만 일관하여 비로소 타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서의 정당함을 무시하도록 한 아주 간교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에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비느하스 즉 ‘뱀의 입’이라는 것으로 그의 기업을 가지려고 하는, 즉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만으로 낳은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죽으면서 한 말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가봇이다’라는 말에 담겨진 내용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서 그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의 해석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떠났다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인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과 같은 모양은 있을 수 있으나 그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실제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는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납득당위성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과 그 사실규정을 바라볼 때에 이러한 이가봇의 영광의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이 갈수록 빨라지고 지식이 더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고 또한 세상의 답변을 온유함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상식선에서의 설명과 비로소 당위성을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들은 진정 세상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빛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지혜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뵙기에 예비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규정을 말하고 증거할 때에 참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구원의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실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그 ‘이가봇의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세상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등불을 밝히는 깨어있는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주님을 맞이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삼상4:1-22
이가봇의 영광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을 비교하여 ‘속빈 강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래 과자류로써 ‘강정’이라는 것은 아주 맛있고 좋은 그것이지만 형태적 특성을 고려해서 실속이라는 개념의 부재를 가르킬 때에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증사회에서나 결과가 중요한 그러한 것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을 하는 그러한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과들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나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되어지는 일들에 대하여서 실증적인 개념은 있어도 그것의 판단 기준의 신실하지 못함에 있어서 실제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실재와 실제적인 것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회이면서도 그것의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가 추구한 그 영광과 실제는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진정한 실제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상대적인 것만을 따라 비로소 판단하는 실제적인 판단은 그 영광이 떠난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참되게 신앙생활하게 되는 가운데서도 실상은 그 영광이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모습은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가운데서 등불을 켜지 못하는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됨과 비교되어지는 정황으로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행함에서 패배하고 어찌되어진 것인가를 논하는 가운데서 실로에서 그룹 사이에 계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음과 그 제사장들은 엘리와 비느하스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충천하였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상식선에서의 경건의 모양을 취하며 담대히 이스라엘과 전투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투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엘리제사장에게 패전 소식과 아들들의 죽임 당함을 이야기하매 나이 많고 비둔하여 눈이 어둔 그는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산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아기를 낳게 되며 죽어가는데 그의 증거는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비느하스의 아내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실증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이었음을 주목하며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하는 것을 켜지 못하는 미련한 자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표현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대조되어지는 가운데서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등불이 모두 꺼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패배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엘리에게 알려진 것이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34; 삼상 3:13,14)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을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나타내심의 사실을 믿었다면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회개하게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러한 것은 기록되어지지 않고 있고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는 개념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심과 그 가운데서 사실 규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자신의 목이 부러진 것의 사실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며느리, 그의 아들 비느하스, 그의 기업의 영광인 그가 볼 때에 그가 그 기업을 실제적으로 이을 수 없음을 주목하는 비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엘리의 가르침은 상식적인 설명의 합리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지 그것의 재가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로 말미암는 현숙한 여인으로서의 며느리 즉 자기 기업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자식은 그 낳은 자의 기업이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기업으로써 홉니는 손으로 치는 자 ‘복서’를 의미하고 즉 폭력을 가하는 자이며 비느하스는 그 이름이 ‘뱀의 입’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입술로서 간교함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와를 타락시켰던 뱀은 하와에게 합리적인 설명으로만 일관하여 비로소 타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서의 정당함을 무시하도록 한 아주 간교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에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비느하스 즉 ‘뱀의 입’이라는 것으로 그의 기업을 가지려고 하는, 즉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만으로 낳은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죽으면서 한 말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가봇이다’라는 말에 담겨진 내용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서 그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의 해석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떠났다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인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과 같은 모양은 있을 수 있으나 그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실제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는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납득당위성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과 그 사실규정을 바라볼 때에 이러한 이가봇의 영광의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이 갈수록 빨라지고 지식이 더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고 또한 세상의 답변을 온유함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상식선에서의 설명과 비로소 당위성을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들은 진정 세상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빛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지혜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뵙기에 예비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규정을 말하고 증거할 때에 참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구원의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실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그 ‘이가봇의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세상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등불을 밝히는 깨어있는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주님을 맞이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