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5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신 4:32-40
마음에 두는 것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지든 있을 수 있고 또한 의식해야하는 당위성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의 고통으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혜롭게도 자신의 앞날을 발판으로 삼게 되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정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기준을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삶을 부정으로 규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그래도 긍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어도, 삶에 대한 긍정이 옳다는 생각을 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기업들 아내 자녀 그리고 소중한 우리의 이웃들을 볼 때에 다시금 힘을 내고 있고,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긍정에로의 판단을 내림이 분명 옳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한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생각이면서도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써의 규정되는 사실로서 그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서 현실적 규정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 신명기 이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 성도들과 일반 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수용여부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결정이나 판단의 여지를 주장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패러디하고 있지만'(링크된글 각주1번참고) 그것이 이미 기각되어진다는 것도 전제적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0절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나간 날을 상고해보라고 하면서 불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이끌어내심을 받은 자들이 없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인 것으로써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3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려고 듣게 하시며 열조를 사랑하신 이유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과 기업을 주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로서의 실제적 성례적 역할을 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에 꼭 명심해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명심해야할 것으로써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문맥적 증거와 또한 그 앞서 명심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했을 때에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 하고 나온 어떤 '한 사람'(막 10:17~31)의 한가지 부족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라는 말씀을 하시는 배경적 문맥적 부분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신명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지방에서는 발락이 발람더러 저주하라고 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축복받은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여부와 상관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단의 시험이 있어서 음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게 되어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하심과 그로 인한 신앙적 정비와 분명한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민수기의 마지막장의 내용이 되어집니다.
그부분과 상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명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음란한 세대에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명심해야 할 것으로 이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4~35)
모세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심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리고 그 앞서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왔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좋은 땅이지만 자신들이 차지하기에는 소위 '그림의 떡'이라는 식으로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12명중 10명의 말에 공감한 이스라엘은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의 정당함보다도 현상적 현실적인 판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공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게 하시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스스로 취하시며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하심의 정당함을 배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의 기본적 근본중심이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노중에 다 죽게 되었고 이제 그 광야세대의 젊은이들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그러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그 가운데서 실재라고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짐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명심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미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주어졌던 십계명이 다음 본문 5장에서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십계명의 그 존재와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이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말하는 조약적 개념 즉 불평등의 개념의 조약이니 임의적 납득되어질 수 있는 상정적 주권이니 하는 그러한 점에서 하나의 언약개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순함은 상당히 모순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그러한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청년(막 10:17~31)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개념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리성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그냥 개연적인 선함의 대상으로써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비로소 선하신 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자존의 선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심으로 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거처럼 어렵다고 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율법의 완성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에서, 생각의 발상적 전환을 생각한다면 바늘귀라고 하는 것을 낙타만큼 크게 만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보편화된 바늘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구별되어진 상식선에서도 알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행함이나 또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소위 '힘'이라는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 재물이 없으면 구제도 못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행할 능력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 위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 행할 자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지도자적 권세자들의 여론의 반전적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하시는 주의 말씀에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막 10:27)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개념의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적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다 하실 수 있다는 규정적 사실을 천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 그것을 명심하지 못한 이것이 그 청년이 모든 것을 행하고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던 '부족한 한가지'(막 10:21)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열심과 형태를 갖추고도 그 합당히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사실을 마음에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느냐는 것과 행위없는 구원이냐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도 서점가에 맴돌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사랑받고 있었던 한 사람의 모습과 비교되어짐을 주목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은 삶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왜그런지는 말하지 않고 긍정의 실증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심하라고 하셨고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우리의 삶에서 좀더 바르게 합당하게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막연히 긍정하면 유익하다는 말보다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명심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둘 때에, 참되게 주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실제적인 정당함에 따라서 나의 모습의 현상적 어떤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것이 부과되어진 나의 삶은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긍정의 사실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더욱 긍정의 사실을 찾는 삶의 긍정에로의 중심과 그 사실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돌파구로 실증적인 개념, 그리고 합리성에서 파생되어지는 소위 '객관적 존재의 근거지움'과 같은 노력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씀하시는 그 명심하라고 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여전히 그 한 청년의 고민은 계속되어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에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유리라는 개념의 광야에 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가운데 자신이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중심의 사실을 명심하는 것의 하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서, 참으로, 음란한 세대에서도, 자기 백성을 계수하시는 선하신 주께서 주신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신 4:32-40
마음에 두는 것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지든 있을 수 있고 또한 의식해야하는 당위성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의 고통으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혜롭게도 자신의 앞날을 발판으로 삼게 되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정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기준을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삶을 부정으로 규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그래도 긍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어도, 삶에 대한 긍정이 옳다는 생각을 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기업들 아내 자녀 그리고 소중한 우리의 이웃들을 볼 때에 다시금 힘을 내고 있고,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긍정에로의 판단을 내림이 분명 옳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한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생각이면서도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써의 규정되는 사실로서 그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서 현실적 규정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 신명기 이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 성도들과 일반 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수용여부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결정이나 판단의 여지를 주장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패러디하고 있지만'(링크된글 각주1번참고) 그것이 이미 기각되어진다는 것도 전제적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0절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나간 날을 상고해보라고 하면서 불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이끌어내심을 받은 자들이 없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인 것으로써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3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려고 듣게 하시며 열조를 사랑하신 이유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과 기업을 주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로서의 실제적 성례적 역할을 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에 꼭 명심해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명심해야할 것으로써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문맥적 증거와 또한 그 앞서 명심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했을 때에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 하고 나온 어떤 '한 사람'(막 10:17~31)의 한가지 부족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라는 말씀을 하시는 배경적 문맥적 부분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신명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지방에서는 발락이 발람더러 저주하라고 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축복받은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여부와 상관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단의 시험이 있어서 음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게 되어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하심과 그로 인한 신앙적 정비와 분명한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민수기의 마지막장의 내용이 되어집니다.
그부분과 상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명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음란한 세대에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명심해야 할 것으로 이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4~35)
모세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심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리고 그 앞서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왔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좋은 땅이지만 자신들이 차지하기에는 소위 '그림의 떡'이라는 식으로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12명중 10명의 말에 공감한 이스라엘은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의 정당함보다도 현상적 현실적인 판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공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게 하시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스스로 취하시며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하심의 정당함을 배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의 기본적 근본중심이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노중에 다 죽게 되었고 이제 그 광야세대의 젊은이들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그러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그 가운데서 실재라고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짐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명심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미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주어졌던 십계명이 다음 본문 5장에서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십계명의 그 존재와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이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말하는 조약적 개념 즉 불평등의 개념의 조약이니 임의적 납득되어질 수 있는 상정적 주권이니 하는 그러한 점에서 하나의 언약개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순함은 상당히 모순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그러한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청년(막 10:17~31)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개념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리성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그냥 개연적인 선함의 대상으로써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비로소 선하신 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자존의 선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심으로 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거처럼 어렵다고 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율법의 완성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에서, 생각의 발상적 전환을 생각한다면 바늘귀라고 하는 것을 낙타만큼 크게 만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보편화된 바늘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구별되어진 상식선에서도 알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행함이나 또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소위 '힘'이라는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 재물이 없으면 구제도 못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행할 능력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 위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 행할 자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지도자적 권세자들의 여론의 반전적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하시는 주의 말씀에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막 10:27)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개념의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적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다 하실 수 있다는 규정적 사실을 천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 그것을 명심하지 못한 이것이 그 청년이 모든 것을 행하고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던 '부족한 한가지'(막 10:21)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열심과 형태를 갖추고도 그 합당히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사실을 마음에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느냐는 것과 행위없는 구원이냐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도 서점가에 맴돌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사랑받고 있었던 한 사람의 모습과 비교되어짐을 주목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은 삶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왜그런지는 말하지 않고 긍정의 실증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심하라고 하셨고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우리의 삶에서 좀더 바르게 합당하게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막연히 긍정하면 유익하다는 말보다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명심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둘 때에, 참되게 주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실제적인 정당함에 따라서 나의 모습의 현상적 어떤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것이 부과되어진 나의 삶은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긍정의 사실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더욱 긍정의 사실을 찾는 삶의 긍정에로의 중심과 그 사실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돌파구로 실증적인 개념, 그리고 합리성에서 파생되어지는 소위 '객관적 존재의 근거지움'과 같은 노력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씀하시는 그 명심하라고 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여전히 그 한 청년의 고민은 계속되어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에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유리라는 개념의 광야에 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가운데 자신이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중심의 사실을 명심하는 것의 하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서, 참으로, 음란한 세대에서도, 자기 백성을 계수하시는 선하신 주께서 주신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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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