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2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1:15-33
마른 무화과 나무를 보며
요즘에 우리가 먹는 식단을 살펴보면 상당히 풍성하고 또 미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과일이나 채소에 있는 비타민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적게 섭취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것도 우리 몸과 정신에 좋은 것인데, 그러한 선호도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일이나 채소 등을 말할 때에, 아무렴 제철에 나는 과일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주목되어질 수 있는 '제철' 즉 '일반적으로 특정 과일이 나는 때'를 말하는데, 이 제철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기간적인 조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나 또는 속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까지 생각하면 시간의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은 의미없어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날씨라는 것이 변화되어지는 계절의 변화 추이를 보이는 가운데서는 '제철'이라는 말이 또한 변경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적 개념에서도 우리는 열매맺게 하는 수확적 입장의 기간조정과 때를 분별함에 있어서 임의적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그 때라고 하는 즉 수확의 시기라는 것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일상적 개념보다도 수확적 개념에서 시기조정이 있게 되고 또한 그 선함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과일은 어떤 한 때에 먹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적인 측면으로 더이상 주장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일이라고 함의 열매를 수확함의 시기에 대한 시기조정이라고 하는 것으로써의 때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주님의 뜻하심의 때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때에 부요할 줄 아는 그러한 분별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말할 수 있고 주께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자리에 서는 은혜의 자리에 섬이 옳은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심과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심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 것인가 꾀하고 있고 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함은 무리를 의식하여 예수님을 두려워함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성밖으로 나가시는데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비유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의 하늘로부터의 증거적 정당성을 묻자 그들은 답변을 상황에 따른 판단으로 회피함이 기록되어 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권한의 정당함을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마름'이라고 하는 것과 '대제사장들의 모습'이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의 중요성과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순서적 입장에서 또는 맥락적 입장에서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과 그 판단이 기록되어짐이 그것인데 그것은 비교되어지는 두 개념으로써의 성전을 표현함에 있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개념과 '강도의 굴혈'이라는 개념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중심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예배당과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성전의 거룩함의 실제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는 '강도의 굴혈'의 실제적 판단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의 개념은 '야곱의 모습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고백이 되어지는 것'(창 28:16~22)으로서 이해하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 그 앞서 성전이라는 개념이 예배처소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바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 '내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구원받아 이미 아버지집에 왔습니다는 그 신앙고백을 한 예배처소를 정하고 나와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구원을 이루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에서부터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한 정당한 사실을 구별하여 받고 그 분복을 이루어나가는 자들로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써 노력하는 삶자체로서의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처소로서의 성전을 기억할 때에 과연 교회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심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만민이라는 개념을 또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한다면 임의적인 만민제사장적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주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말씀하심 바의 뜻하심에서 역사하심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만민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는 자기 자신과 또한 예배처소라는 개념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서 거룩한 처소이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한다면 그것은 결국 돈벌이 하기 위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는 식으로 말하고 그럼 없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에 있다는 것에 상황적 유익이라는 개념이나 여러가지 조건적 합리성을 말하는 도박의 원리적 개념으로만 의식한다면 여전히 확실성의 의문은 제기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고 결국 '하나님이 계신가에 대한 시험이 실존할 수밖에 없는 시험'(출 17:7)에 넘어질 수 있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같으면 레오 10세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마음껏 즐기자라는 그러한 입장은 언제든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1번참고). 즉 돈을 벌기위한 강도의 굴혈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냐 강도의 굴혈이냐는 그 인식의 기저에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의 실제적 사실이 좌우하게 된다는 것으로써 주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심으로 증거하신 계시적 증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눈을 여셔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말랐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서의 성례전적인 존재로서의 마른 무화과나무를 의식하도록 하심의 시점을 생각하도록 하시면서 본문 22절에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는 우리 성도들 보다도 사태파악에 대한 인식이 예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분별력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른 모습을 취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의 의미를 현상적인 개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늘 본문 산을 옮기는 것으로써의 믿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있어 기도하면 산을 옮긴다면서 하는 조롱과 함께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나타남이 없으면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기도응답의 실제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개념으로 사태파악이 가능하다고 강변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요 그리고 그 사태파악도 그 역사속에 있게 되어지는 관계로 그 시간이라는 개념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판단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적 의미에서 비로소 실제적인 판단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할 때에 그러한 것이 있게 실제적인 것이지, 임의적으로 '믿습니다'라는 자의적 믿음의 현실사태판단 요구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믿지 않는 자들의 비판적 판단도 빗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실존과 행함과 그것의 정당함의 주관적 사실로서의 기정 재가있는 믿음이 되어지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과는 다른 가운데서도 실제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담아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기를 기만하는가 하는 것의 판단이 요구되어지고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분별 못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자칫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판단은 우리 성도들에게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하심 즉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종들로서 세워지도록 말씀하심에 그 증거하심의 정당함을 말하는 권위는 무엇이냐는 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예수님은 죽음 즉 존재의 유무라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되어지는 것'(고후 1:19)으로서 그가 그렇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심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자로서의 권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에도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것을 이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심이 무엇인지 그들은 의아해했던 것입니다.(막 9:31~32) 하지만 이미 주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를 받은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러한 고백이 또한 씨앗으로나마 그들에게도 있었다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하면서도 상식보편적 개념의 자리에서 비로소 신앙의 실제를 마음에 두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여 예수님을 잡지 않았고 무리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식을 의지하였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들의 열매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읽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라진 버리운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말씀을 맺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말하는 앞선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였는데(요 4:32~35) 그것은 우물가에 물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생수라고 하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함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비유 된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뜻하심을 생각지 않고 제철을 따라 열매맺을 때가 아님을 따르는 무화과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하심으로써 자라게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했던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샘물을 먹지 않은 가운데 다시 목말랐던 것(요 4:13~14)이며 그것은 마른 무화과나무의 자체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심'(빌 2:13)을 기억할 때에 일상적인 뜻하심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는 주님의 때를 보아야 하는데 그것에 민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규정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고 가인과 같이 임의적인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의 받으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반문하는 것에서 주목하게 되는 그들의 인식의 보편은 결국 상식보편적인 개념에서의 신앙의 윤리의 실제적 의미를 생각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 그들이 무화과나무와 동일시되어짐을 기억할 때에, 열매맺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신앙을 규정하려는 자였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의 기본은 하나님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상식을 비로소 의지하여서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으로서, 그런 것과 비롯된 인식들도 역시 주의 뜻하심의 때를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자기자신들과 함께한 자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돈을 위한 그들의 지위를 위한 가운데서 시비를 구하는 자들로써 마른 성내를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이나 또한 철학적 입장의 사람들의 요구와 판단에서는 현실적인 극단적 생각이나 이상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에 신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더 나아가서 인식의 강요를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과는 달리 우리 성도들은 상식이라는 개념을 비로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도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중요한 실재로서의 규범적 역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식도 구별하여서 편견되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상식있는 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마음에 두는 것은 그 상식의 실존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진다는 것과 그 개체적인 판단도 역시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로소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스코틀랜드 상식보편철학이 영향을 끼친다는 상황을 볼 때에는 그것을 분별하고 또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한 것이면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전통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매너리즘에 입각해서 단순한 신앙행위의 반복과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주님의 뜻하심과 그 때에 부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전통을 해석하고 지난 전통과 차이가 있거나 다른 실제적 입장이면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가운데서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생수와도 같은 말씀에 입각해서 사실을 분별하고 부르심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이 있는 자들이 진정 수가성 여인의 모습과 같이(요 4:9~30),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의 시장하심의 때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즉, 주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 양식을 드릴 수 있는, 제 때에 과일을 맺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며 그 과일과 같은 것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또한 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 자신을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깨달아,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뜻하심을 깨달아서, 주의 인도하심과 뜻하심에, 주님의 뜻하심의 때에 열매를 드리는 가운데,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오는 종들로서, 주 앞에서 잘했다 칭찬함을 입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막 11:15-33
마른 무화과 나무를 보며
요즘에 우리가 먹는 식단을 살펴보면 상당히 풍성하고 또 미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과일이나 채소에 있는 비타민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적게 섭취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것도 우리 몸과 정신에 좋은 것인데, 그러한 선호도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일이나 채소 등을 말할 때에, 아무렴 제철에 나는 과일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주목되어질 수 있는 '제철' 즉 '일반적으로 특정 과일이 나는 때'를 말하는데, 이 제철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기간적인 조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나 또는 속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까지 생각하면 시간의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은 의미없어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날씨라는 것이 변화되어지는 계절의 변화 추이를 보이는 가운데서는 '제철'이라는 말이 또한 변경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적 개념에서도 우리는 열매맺게 하는 수확적 입장의 기간조정과 때를 분별함에 있어서 임의적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그 때라고 하는 즉 수확의 시기라는 것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일상적 개념보다도 수확적 개념에서 시기조정이 있게 되고 또한 그 선함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과일은 어떤 한 때에 먹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적인 측면으로 더이상 주장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일이라고 함의 열매를 수확함의 시기에 대한 시기조정이라고 하는 것으로써의 때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주님의 뜻하심의 때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때에 부요할 줄 아는 그러한 분별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말할 수 있고 주께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자리에 서는 은혜의 자리에 섬이 옳은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심과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심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 것인가 꾀하고 있고 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함은 무리를 의식하여 예수님을 두려워함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성밖으로 나가시는데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비유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의 하늘로부터의 증거적 정당성을 묻자 그들은 답변을 상황에 따른 판단으로 회피함이 기록되어 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권한의 정당함을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마름'이라고 하는 것과 '대제사장들의 모습'이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의 중요성과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순서적 입장에서 또는 맥락적 입장에서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과 그 판단이 기록되어짐이 그것인데 그것은 비교되어지는 두 개념으로써의 성전을 표현함에 있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개념과 '강도의 굴혈'이라는 개념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중심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예배당과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성전의 거룩함의 실제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는 '강도의 굴혈'의 실제적 판단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의 개념은 '야곱의 모습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고백이 되어지는 것'(창 28:16~22)으로서 이해하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 그 앞서 성전이라는 개념이 예배처소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바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 '내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구원받아 이미 아버지집에 왔습니다는 그 신앙고백을 한 예배처소를 정하고 나와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구원을 이루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에서부터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한 정당한 사실을 구별하여 받고 그 분복을 이루어나가는 자들로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써 노력하는 삶자체로서의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처소로서의 성전을 기억할 때에 과연 교회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심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만민이라는 개념을 또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한다면 임의적인 만민제사장적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주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말씀하심 바의 뜻하심에서 역사하심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만민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는 자기 자신과 또한 예배처소라는 개념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서 거룩한 처소이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한다면 그것은 결국 돈벌이 하기 위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는 식으로 말하고 그럼 없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에 있다는 것에 상황적 유익이라는 개념이나 여러가지 조건적 합리성을 말하는 도박의 원리적 개념으로만 의식한다면 여전히 확실성의 의문은 제기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고 결국 '하나님이 계신가에 대한 시험이 실존할 수밖에 없는 시험'(출 17:7)에 넘어질 수 있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같으면 레오 10세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마음껏 즐기자라는 그러한 입장은 언제든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1번참고). 즉 돈을 벌기위한 강도의 굴혈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냐 강도의 굴혈이냐는 그 인식의 기저에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의 실제적 사실이 좌우하게 된다는 것으로써 주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심으로 증거하신 계시적 증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눈을 여셔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말랐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서의 성례전적인 존재로서의 마른 무화과나무를 의식하도록 하심의 시점을 생각하도록 하시면서 본문 22절에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는 우리 성도들 보다도 사태파악에 대한 인식이 예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분별력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른 모습을 취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의 의미를 현상적인 개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늘 본문 산을 옮기는 것으로써의 믿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있어 기도하면 산을 옮긴다면서 하는 조롱과 함께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나타남이 없으면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기도응답의 실제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개념으로 사태파악이 가능하다고 강변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요 그리고 그 사태파악도 그 역사속에 있게 되어지는 관계로 그 시간이라는 개념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판단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적 의미에서 비로소 실제적인 판단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할 때에 그러한 것이 있게 실제적인 것이지, 임의적으로 '믿습니다'라는 자의적 믿음의 현실사태판단 요구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믿지 않는 자들의 비판적 판단도 빗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실존과 행함과 그것의 정당함의 주관적 사실로서의 기정 재가있는 믿음이 되어지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과는 다른 가운데서도 실제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담아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기를 기만하는가 하는 것의 판단이 요구되어지고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분별 못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자칫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판단은 우리 성도들에게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하심 즉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종들로서 세워지도록 말씀하심에 그 증거하심의 정당함을 말하는 권위는 무엇이냐는 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예수님은 죽음 즉 존재의 유무라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되어지는 것'(고후 1:19)으로서 그가 그렇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심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자로서의 권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에도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것을 이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심이 무엇인지 그들은 의아해했던 것입니다.(막 9:31~32) 하지만 이미 주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를 받은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러한 고백이 또한 씨앗으로나마 그들에게도 있었다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하면서도 상식보편적 개념의 자리에서 비로소 신앙의 실제를 마음에 두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여 예수님을 잡지 않았고 무리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식을 의지하였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들의 열매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읽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라진 버리운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말씀을 맺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말하는 앞선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였는데(요 4:32~35) 그것은 우물가에 물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생수라고 하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함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비유 된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뜻하심을 생각지 않고 제철을 따라 열매맺을 때가 아님을 따르는 무화과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하심으로써 자라게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했던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샘물을 먹지 않은 가운데 다시 목말랐던 것(요 4:13~14)이며 그것은 마른 무화과나무의 자체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심'(빌 2:13)을 기억할 때에 일상적인 뜻하심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는 주님의 때를 보아야 하는데 그것에 민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규정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고 가인과 같이 임의적인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의 받으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반문하는 것에서 주목하게 되는 그들의 인식의 보편은 결국 상식보편적인 개념에서의 신앙의 윤리의 실제적 의미를 생각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 그들이 무화과나무와 동일시되어짐을 기억할 때에, 열매맺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신앙을 규정하려는 자였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의 기본은 하나님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상식을 비로소 의지하여서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으로서, 그런 것과 비롯된 인식들도 역시 주의 뜻하심의 때를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자기자신들과 함께한 자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돈을 위한 그들의 지위를 위한 가운데서 시비를 구하는 자들로써 마른 성내를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이나 또한 철학적 입장의 사람들의 요구와 판단에서는 현실적인 극단적 생각이나 이상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에 신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더 나아가서 인식의 강요를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과는 달리 우리 성도들은 상식이라는 개념을 비로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도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중요한 실재로서의 규범적 역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식도 구별하여서 편견되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상식있는 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마음에 두는 것은 그 상식의 실존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진다는 것과 그 개체적인 판단도 역시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로소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스코틀랜드 상식보편철학이 영향을 끼친다는 상황을 볼 때에는 그것을 분별하고 또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한 것이면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전통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매너리즘에 입각해서 단순한 신앙행위의 반복과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주님의 뜻하심과 그 때에 부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전통을 해석하고 지난 전통과 차이가 있거나 다른 실제적 입장이면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가운데서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생수와도 같은 말씀에 입각해서 사실을 분별하고 부르심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이 있는 자들이 진정 수가성 여인의 모습과 같이(요 4:9~30),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의 시장하심의 때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즉, 주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 양식을 드릴 수 있는, 제 때에 과일을 맺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며 그 과일과 같은 것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또한 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 자신을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깨달아,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뜻하심을 깨달아서, 주의 인도하심과 뜻하심에, 주님의 뜻하심의 때에 열매를 드리는 가운데,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오는 종들로서, 주 앞에서 잘했다 칭찬함을 입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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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