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2월 13, 2007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2007년 2월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9:30-37
예수님이 세우신 어린 아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의 인식의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는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을 선호하는 기호도는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임의적으로 정죄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만이 꼭 어떤 기호도를 넘어서 보편적인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하는 판단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함도 유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세의 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단순한 분으로서 묘사하는 듯한 임의적 규정때문에 그러한 전통속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유치한 것이 미화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에 서는 전통적인 해석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기호도에 따른 쉬움을 말하는 것을 떠나 임의성이 있는 어그러진 이성의 모습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주의 말씀으로써 그 어린아이와 같다는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읽게 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유년시기를 다 거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에 대한 생각들과 또한 교육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러한 유년시절이라는 인생의 작은 모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의 빛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의식할 수 있도록, 그러한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을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33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지나실 때에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심과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가운데서 노중에서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깨닫도록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과 그를 영접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의 인식을 가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것과 그로 인한 것으로 받게 되는 쟁론에 대하여서 꼭 기억해야할 것으로써 어린 아이를 통한 증거를 받도록 말씀하심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노중에 제자들의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은 '누가 크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과 제자들이 '쟁론하였음'이라는 것은 말이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디아로기조마이'(dialogivzomai)(막 9:33)라는 말이고 후자의 말은 '디아레고마이'(dialevgomai)(막 9:34) 즉 전자는 'reason 11, dispute 1, cast in the mind 1, muse 1, think 1,consider 1; 16'라는 뜻이고 후자는 'dispute 6, reason with 2, reason 2, preach unto 1,preach 1, speak 1; 13'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교해보면 그 특징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마음에 두는 것으로써의 생각하는 것들 고려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논쟁이라는 개념으로써 이유라고 하는 개념적 의미와 그것을 나타내는 가운데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께서 너희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고 그러한 서로의 입장으로서의 이유와 그것을 토론하였느냐는 말씀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쟁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었다는 개념보다는 이유라는 개념의 표면적 의미가 비로소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입장에서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그들은 마음에 무엇인가 옳은 것을 두고 그 입장의 옳고 그름에 따른 논의가 아니라 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임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그 부재되어진 그 중심에 마땅히 두어야 할 것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하심으로 어린아이를 통한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그 부재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주의 뜻하심으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은 주님의 부활하심의 사실성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중심과 그들을 영접하는 기본적인 모습의 합당함을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으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의 전반적인 문맥적인 측면을 보면 이 쟁론과 더불어 변론하게 되어지는 것과 함께 두 번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한 것으로써 믿음과 능력의 시비가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오늘 누가 크냐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8장에서 '가이사라빌립보에서 비로소 주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매'(막 8:27~31), 깨닫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막 9:10), 이어서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막 9:32)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심의 그 증거는 예수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과 사는다는 것의 판단의 시비는 존재에 대한 상대성이라는 판단의 절정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은 상대적인 존재와 사유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과 예수님의 가르치신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는 현실적인 비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여도, 비로소 그것의 실제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고 하셨던 것이며 그것의 재가를 공적으로 증거하심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모습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할 때에 자신의 모든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자신의 살아있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과 예수님에 대한 연민에 대한 충성적 입장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그러한 일이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으심과 부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되어지지만 납득의 당위성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의 뜻하심과 말씀하심이 상대적인 자기 표현이 절대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말씀하심에서 자신의 믿음의 당위성을 헤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잠시 접어두고 축전지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호주머니에 넣어서 사역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즉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막 9:28~29) 그 믿음의 실재와 그에 따른 믿음의 사역의 실제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실적 입장에 서지 못하여서 주의 책망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막 9:19참고)

그리고 주의 사역을 감당함에는 그 사역에 따르는 주의 영광이 그 사역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알아주고 그에게 나타나는 그 달란트로서의 사역을 축하하고 주께 감사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사실규정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합당하게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렇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재가되어진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받음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가 되는 이유임에 따라서 주께서 주신 달란트와 그 사역과 영광은 비교판단되어지는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자존적 증거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적 규정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비교우위라는 개념의 판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직분적 서열이 인격의 서열과 존재의식의 서열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교회 내에서의 창조적 질서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여성권위적 개념에 신장적 입장으로 해석함에 당위성을 말하는 어리석음의 개념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역사적 계시의 형태만 취하여서 여성의 남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개연적 가능성의 당위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가히 미리암의 죽음과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살렸던 누이로서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모세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에 모세에게 그의 지도자적 역활을 내놓으라는 입장을 취함에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로소 심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들의 차이가 있고 질서적 의미에서 그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들의 그 차이는 비교우위적 영광과 실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과 그 영광과 일반 성도들의 섬김의 사역과 그 영광은 존재의식의 비교우위적 개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와 같이 동일하게 주께서 주신 것이라는 정당함에서 그 직분과 그 섬김의 사역과 영광의 실재의식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것은 그 실재의식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계시적 증거로서 예수께서 자존의 성부하시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비로소 바르게 두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세우시며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 즉 하나님을 영접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성도를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이들은 아빠가 엄마가 좋은 것, 맛있는 것을 해주면 아이는 '우리 아빠 최고' '우리 엄마 최고'.. 아빠말과 엄마 말이라면 누구의 말보다도 신뢰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고백의 실제적인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 항상 예만 되는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임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하나님나라에 대한 실재와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히 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의 시대는 열두 사도의 시대에 이미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의한 영성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사실 규정의 입장을 취하게 하시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을 항상 계시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계시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성별되어질 수 있는 어떤 특정적인 것을 일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말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해석적 당위성과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린 아이라고 하는 증거는 특별계시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영역이 차용되어진 것으로써 그 해석의 방향이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은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어린 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니까, '미숙'이라는, 역사적으로 아직 성장이라는 개념의 판단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받게되어지는 그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은 기본적이며 또한 완성적 개념의 아직과 이미가 함께하는 것으로 일상적인 시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숙하면, 부모의 생각과 달리 잘 판단할 수 있는 성인으로써의 독립을 말할수 있는 것에 비교하여, 하나님에 대하여서 그대로 믿다가 회의할 수 있는 인생의 모습으로 비로소 이른다는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의 판단에서의 실제의식일 뿐 이미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란 것이 있는 성도들의 실존과 신앙중심은 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이 성숙해가면서도 이미 온전한 하나님이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미약과 미숙이라는 개념을 성도의 존재적 시비로 확장해석하는 것은 실제의식이 결여되고 편협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생각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중세에서 하나님을 단순자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수학적인 개념의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임의적으로 정의하고 행하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실제의식을 가질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실제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면죄부라는 윤리적 파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그것보다도 그 본래적 입장은 바로 그러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에 대한 의미와 사실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롯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전통은 하나님을 항상 철학적으로 단순자로 이해하고 그의 형상적 입장이라는 말이 가능한 가운데서 신앙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인위적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어떤 어린아이들의 유약함과 미숙함을 모방하는 듯한 행동이 어린아이의 신앙과 같은 모습으로 잘못되게 미화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마음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이름이 임마누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과 그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바르게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세우시는 한 아이와 같은 증거자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가진 증거자가 되며, 마치 아이가 아빠를 최고를 알고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를 진실로 아멘으로 받을 수 있는 성도로서의 모습으로 주앞에, 복음으로 낳아 길러,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세우신 어린 아이와 같이 주의 받으신 바된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만나뵙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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