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이 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이 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