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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