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4월 20, 2007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2007년 4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1:1-14
아름다운 명령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허물이 안보인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콩깍지가 씌였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안 보인다기보다는 보고싶지 않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또는 그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디어져가는 가운데서 더 예민한 관찰자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더 그 특정인의 허물이 크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아는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혐호하게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의식함의 여부에 비례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규칙과 삶의 방식에서 어떤 특정한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관계정리를 위한 그 잘 아는 사람에게 비난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또는 그렇게 해야하는 당위성에 놓일 때가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시대를 막론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로는 '너하고 안놀아, 너는 못생겼어, 너하고 나하고 수준이 달라, 수준이 다르다니깐, 나는 너하고 달라, 너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단말야 나는 너 모른다, 저리 가'와 같은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다 획일적인 것이 아니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선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현상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 선함의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악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 앞에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뉘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디모데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는데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짓없는 믿음이 디모데의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디모데에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받음으로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임을 말하며 그러므로 주의 증거와 주를 위해 갇힌자된 사도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나타나심을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를 인해서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기가 의뢰한 자를 안다고 말하고 있고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도로서 성도된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진다는 잘못된 인식의 강요가 주어질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와 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것과 같이 인식되도록하는 경향의 세상의 정체성 없고 잘못된 인식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죄악 가운데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바르게 볼 수 있고 받지 않는다면 주의 형제를 '라가'라하는, '바보'라하는 자로서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마 5:22)을 받을 수 있는 자로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낳은 자로서 아들처럼 부르고 있는 사도 바울의 평강이 먼저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그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사랑받는','honouring God'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을 표현하는 자로서의 증거적 존재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편지하는 그것도 후서라는 특징을 읽게 된다면 재차 강조하는 내용적 증거임을 더욱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재차 누누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으로서 평강으로 축복하며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 주의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즉 디모데전서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라'(딤전 1:4)고 했던 것입니다.

신화라고 할 때에,'역사 이전에 기원을 둔 이야기. 사람의 지혜가 아직 열리지 못하여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활동으로 상상한 데 기인한다.','지혜가 미개한 상고(上古) 시대의 신을 중심으로 한 전승적 설화'이런 이야기나 또는 '신화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설화나 전설 또는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등 너무나도 다양하게 쓰여질 뿐만 아니라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용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고전학자 G.S. 커크도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무리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도리어 신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라는 백과사전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 기준이 없는 임의적 상상적 보편적 인식추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사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 의미부여에 따라서 사실화 또는 사태파악에 있어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학문이라는 개념에서는 원동력으로 임의적으로나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특성을 기억할 때에 시대정신 또는 상황적 여론의 통념화등을 들 수 있는 것으로도 현대적 신화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정 개인적으로도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인사에게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고통과 같은 루머의 통념적 비판과 같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참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적 비교에 따라서 형성되어진 잘못된 실제적이지 못한 통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진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임'에 대한 것을 강조해야 했고 그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었고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볼 때에 그런 죄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여론적 통념은 디모데에게 너무나 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죄수로 복역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말한다고 하면 상식적인 개념에서만 본다면 납득의 당위성은 이미 상실되어진 것이라는 판단이 있고 그러한 납득당위성이 상실되어진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고 하면서 감옥에 가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한다면 그를 풀어서 더 크게 일해야 할 것인데 그럴 기미는 그당시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사도라는 자가 그렇게 매이는데 '우리도 그 죄인의 사슬에 매이라고 가르치고 있냐'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말하는 하나의 재구성된 신화적 통념과 생각의 기준들이라고 하는 것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디모데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단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그러한 연약함에 사도 바울은 어릴적부터 디모데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과 사도바울이 비로소 복음을 전해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전통에서 있는 자이었음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하게 증거하는 자로서 생각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어떤 부족이라는 상대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상대적인 입장에서 복음의 납득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정되어질 수 있다는 임의적 판단의 통념화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당위성이 없는 것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설득하려고하는 어리석음과 그에 따른 상대적 판단되어질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다는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비로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두렵다는 개념의 근거적 판단이 이미 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지만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실 때는 실재적인 실제적으로 합당하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예가 '다윗의 작은 물매돌'(삼상 17:41~50)이며 '주님께서 받으신 아이의 '오병이어'의 능력'(요 6:9,5~13)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 판단을 받는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비로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도 구별하여서 좋은 것을 선히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의 낮아짐, 주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의 사역의 실패나 또는 그의 가르침으로써 나타나는 주의 복음의 실존을 부인가능의 당위성을 실제화할 수 없는 것이 되며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럽다는 인식의 실재와 실제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전부터 주신 은혜대로 한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서 종들의 사역의 비교적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폄하되거나 그로인하여 부끄러워하여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복음의 실존가운데서 그 예정하신 은혜를 따라서 직분과 그 행함의 당위성을 마음에 둘 때에 '옥에 갇힌다는 것'과 같은 현상적 인식적 납득당위성이 없다는 실제성이 없는 규범적 신화에 착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앙의 중심적 증거를 하고 있는데, 12절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자신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뢰하는 자를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하심은 선하심은 상대적인 판단과 그 능력이라고 함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주관하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즉 예수그리스도의 자신을 계시하심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의 실존의 판단 여부를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도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께서 기쁘게 아릅답게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6~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뢰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라고 말하며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인생은 서로 평가하고 냄새나고 그것이 본래성인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선히 지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하신 하나님의 뜻하심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기억할 때에 교회에서 있게되어지는 여러가지 선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그 충돌이라고 함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악함과 또 부끄러움과 그로인한 배척으로 인해서 마음상하는 것과 같은 모습들의 모습들이 실제적인 본래성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은 본래적인 것을 비판해야 그 당위성이 비로소 성립되어질 수 있는데, 자존의 절대자와 그의 재가를 받게 되는 인식과 판단 외에는 그 성립을 말할 수 있는 실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그로 인한 믿음, 그 분량에 따른 믿음의 선함과 그 선함의 충돌로 있게 되어지는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부끄러움을 인하여서 형제를 부인또는 배척하는 가운데서 또는 복음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과 행함의 정당함을 찾는 일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죄악가운데서 선의 결핍이라는 가운데서의 악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악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기쁘시고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심과 그 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의 낮아짐과 상충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모습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까지도 기쁘고 아름답게 보며 위에서 언급한 시편과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그 명령에 순종하시는 자리에 서심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교회의 직분이 있는 분이 '안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신앙의 당위성을 놓는 것과 같이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의식도 결여되었으면서 자신의 합리성에 기반해서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난하는 어리석음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을 강변하다가 입장이 바뀌면 '나는 열심히 달렸는데 돌부리하나 때문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잘달렸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모습들 그리고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이 교권을 휘두르고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도 않았으면서도 판단하고 여론화시키고 부끄럽게 만들고 부끄러워하고 이런 모습들, 희망의 사실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들을 회개시키시고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그의 행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과 상관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능히 이루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대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비록 현실적으로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합당하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도 선히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항상 뵙기 때문에 기뻐하고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배척하여서 당위성을 찾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그런 행위가 정당한 것은 아니며 그런 일이 없어야하고 없도록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고 복음과 복음을 인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을 받은 디모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하심을 깨달아, 비록 우리의 연약함에서 있게되어지는 선함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악함과 형제를 부끄러워하여 배척적 당위성을 찾고 싶어지는 유혹이라고 함이 강변하고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복음전함을 아름답게 보시고 그것을 본 사도의 증거로서의 말씀인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 일어나, 형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제 사랑을 이루어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큰 칭찬'(계 3:7~13)이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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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4월 08, 2007

순종의 기초석

2007년 4월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8:11-20
순종의 기초석

어떤 아이들을 보면, 소위 영악하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나이에 비해 조숙해 있는 아이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개 일반적인 안정된 가정이라는 조건보다는 참으로 어렵게 자라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좀더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어른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가운데 현실관이 뚜렷할 수 있고 그것은 잘 준비되어지고 교정되어지지 않은 경향이 있을 수 있어서 극단적일 수도 있는 특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주 잘 균형잡힌 판단으로서 생각하는 아이들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가정환경이라는 것과 여러가지 여건에서 그런 생각과 판단으로 생활해온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앞선 자들로서 사랑과 그 사랑의 중심으로써 그들의 인식의 평안과 균형잡힌 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광야시대를 지나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있는 하나님 앞에 선 모세의 설교는 그와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오히려 원천적인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하였던 세대들은 모두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죽고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자손들과 갈렙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세대와 신세대들로서, 모압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소위 속된 표현으로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 고생이라고 하는 것과 함께 자라온 세대, 입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막 유목민인데 이제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갔을 때에 생활방식이 달라지는 가운데서의 문화적 충격과 그것을 현상적으로 읽어낼 이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모세는 걱정이 되었고 그것에 대하여서 이제 순종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으려고 설교하고 있는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은,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순종의 기초석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말씀이 나타나고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모세가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가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그들의 우양이 번성하며 그들의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것 같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땅에서 이끌어 내심과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자신들의 능과 자신들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 수 있음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답변으로써,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 그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임을 말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생활양식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라는 개념에서 약삭빠른 판단을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합당하게 증거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함을 '아편'에 비교하여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잘된 것인지에 대한 것과 그것의 합당한 사실와 진리로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지만 현상적 개연적 입장에서 강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세상의 입장일 수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다 적용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정한 참된 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인생의 고통을 위안해주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돈을 받게 되는 자들로서 진정한 신앙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만적 요소로 돈까지 강탈하는 이른바 강도의 굴혈로 말할 수 있고 그런 것은 사람을 망치는 종교로서 아편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자신의 성전을 깨끗게 하심을 말씀하시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함의 사실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막 11:15~18)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와 신앙과 달리, 합당하지 못한 것이 세상에 상대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 허용되어진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과 거룩함을 구별하여서 받게 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거친 광야에서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서 그 고통의 거친 곳에서 소망의 문을 준비하며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편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고통이 없어지는 상황적 논리와 환경이 조성되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힘든 사람들이 비록 그 사람을 시들게 하는 것이라도 힘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가운데서 유익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개연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상황논리적 당위성을 열어놓고 하나님을 필요적 개념에서의 요청적 입장과 실용적 개념의 판단하에서 인식적 신앙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현상적 인식으로서 당위성을 상대적으로 가질 수도 있는 개념입니다. 물론 가질 수 있다는 것과 합당하다는 것은 달리 나타날 수 있음은 그들로써는 기억해야 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어릴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광야에 있는 신세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존 여호수와와 갈렙의 족속들은 어릴때부터 그 고통의 생활을 지내온 까닭에 그들의 현상적 인식에서 본다면 위에서 말한 그런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사막 유목민의 생활, 모래바람과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어져서 생물이 살기 어렵고 물이 없고 그 가운데서 출산의 고통과 사랑받아야 할 유년시기에 그러한 안정된 조건적 입장이 전혀 허용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성장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나온 앞선 세대 그 고통을 잊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고통을 위한 치료제라고 하는 '몰핀'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상대적인 것으로만 볼 때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 정착생활을 하게 되어지고 그러한 정착한 자들과의 상관성이라는 보편적 이해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 상황적 판단인식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보다 안정되어지는 생활 형태에서 이제는 고통을 이기기 위한 몰핀과 같은 효과로도 인식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이제 필요없다는 것도 상황적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강요되어질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상황 논리와 관계라는 보편성에서 이교적인 사람들과의 상관성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재고해야 하는 가운데서 자기 의식이 주권적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임의적으로 정초되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신 8: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는 말씀을 마음에 받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심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대적인 정황적 논리라고 하는 것과 인식의 상대적 변화추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상황이 안좋을 때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든가 상황이 좋아지고 안정되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유익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아도 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본래성인 것같이 착각하는 것은 진리로서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은 그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 절대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상대적 표현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유익이라는, 상황적 논리라는 상대적 정당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멀리하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일반 타종교들에 대한 현상적 판단이 가능한 몰핀적 개념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은혜와 섭리라고 하는 것과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계시의 상황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경험해왔고 그들의 소위 그 고통속에서 잔뼈가 굵어오면서 체험했는데 그것을 또 이렇게 인식적으로 강요하는가 하는 그러한 간과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이들이 아빠와 생활해오면서 아빠와 같이한 시간은 분명 있는데, 아빠와 좋은 기억들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좋은 기억들 속에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아빠들도 다 똑같은데 아빠만의 좋은 모습, 그리고 아빠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좋은 기억들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하나님만의 계시적 특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율법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는 측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신의 행함의 상대적인 증거를 취함에 있어서 비로소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넘어가며 그들의 관계성의 보편성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그 강요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율법을 이미 지킨 자들로서의 신앙고백으로서 또 지켜나가는 것으로써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음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만의 특수성, 남들과 구별되는 그 특징, 그것은 그 좋은 기억과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자존적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인 여러 정황적 보편성과 비교되어지 않으시는 자존적 절대 보편성과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구별되어지는 상대적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는 권세를 성도들에게 마치 아비가 아들에게 주심과 같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며 부활주일을 기대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는 그 죽는다 산다(to be or not to be)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고 하심'(고후 1:19)을 마음에 두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이며 순종의 기초석임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와 죽으심의 의미는 바로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죄를 사하시며 구원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인생의 존재와 행보에 대한 사실을 구별하여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동의어가 되어지며, 예수님이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고 하심'(마 6:9)을 마음 속에 둘 때에,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임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그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구별하여 판단하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서 말씀하신다는 것, 즉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 정당한 말씀과 사실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고 또한 받으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는다'는 그 말은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대적인 여지가 있을 수도 있고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심을 기억할 때에 그 말씀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정한 사실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식적인 선에서 시무룩하게 지내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으며 자존의 절대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의기소침이 아니라 더욱 주의 말씀하심이 나의 모든 것이며 진정으로 합당한 것임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할 수 있는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7)의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내가 교회에 나왔고 교회가 어려울 때에 내가 그래도 일이 되도록 힘을 썼다는 생각을 할 때에 오늘날도 그와 같은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을 마음에 둘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래도 하나님께 그런 말은 못하고 또는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할 수 있고 겸손이라고 판단하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임의적 주권이라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의 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는 중심에서 판단한다면, 내가 결정한다는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의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신 것임을 기억할 때에 현상적인 인식과 판단으로써 나의 모습의 주권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본래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합당한 자리세우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무엇인가 상대적인 여지라고 하는 것에서 어떤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인 존재인 '나'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나 또는 스스로 했다는 것의 기정사실이 비로소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마음에 잊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눅 17:10)은 도덕적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비로소 말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고백을 하게되는 자리에 세우심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순종의 기초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는, 무엇이 진정한 실제냐는 세상의 인식들로서의 임의적인 인간의 주관적 주권이 필요에 따라서 요청할 수 있는 고통을 위한 몰핀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며 합당하게 우리의 존재를 구원하시며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자이심을 분명히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때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심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존재와 사실을 규정하는 사실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고난과 죽으심을 마음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함을 말할 때에, 무엇인가 어려움을 당해야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참 모습은 그런 고난이라고 하는 경험에서 어쩔수없이 붙드는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삶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야 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대해 말을 많이 하면서도 그 섭리라는 것의 일상성이라는 것에 식상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아바 아버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아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속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잊지 않는 종들로서 순종의 기초석을 좀더 바르게 놓은 가운데서,'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뜻하심'(잠 16:7)을 나타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함'(마 5:9)을 받으시는 그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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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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