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8월 31, 2006

미갈을 데려오라

2006년 8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3:1-16
미갈을 데려오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주목한다, 사람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목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시대마다 또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 왔음을 기억하면서도 어떤 한 방향으로 악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데, 바른 여성관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인생들에게 유념해야할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대적으로 모계 중심의 사상에서는 숭배의 사상도 있었고 욕정적인 측면에서 노예적인 측면의 부정의 모습도 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에 대한 상품과 그에 따른 지배개념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 악한 모습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생계형이라는 개념으로도 당연성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중심이 바르게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게되는 것 중에 오늘 말씀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의 아내됨을 인하여서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께서 마땅히 가져야할 오늘날 여성에 대한, 인식과 중심으로써의, 실제의식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 전쟁이 오래동안 있는 가운데 사울의 집은 쇠하여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감을 언급하시면서 다윗의 아내와 소생들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집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시 동일한 때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전쟁이 있는 가운데서 사울의 집안을 기술하고 있는데, 아브넬이 그 집안의 권세를 잡음을 기록하고 있고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한 것에 대하여서 이스보셋이 어찌 그렇게 하는가 하는 말을 건넴에 따라서 아브넬이 자신이 '개 머리'냐는 말을 하면서 이스보셋에게 반목하게 되어지고 이스보셋은 아무말도 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반목후에, 다윗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사울의 땅을 다 넘겨주겠다는 것으로 언약을 제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가를 데려오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보셋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처 미갈을 다윗에게 돌리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이스보셋이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취하매 발디엘이 바후림까지 울며 따라왔는데 아브넬이 발디엘 그에게 돌아가라고 함에 따라서 그가 돌아갔음에 대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움의 사람 이스보셋과 세상의 입신양명의 아브넬의 정치적 입장에서의 취하는 그들의 여성관과 그 일시적으로 취하였던 발디엘의 연모하는 여성관과 다윗이 자신의 아내로서의 정당함에 따른 미갈을 찾음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은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다윗이 그 자신의 아내로서의 미갈을 찾는 그 중심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성관으로써 우리에게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어지는 여러가지 관점들이라고 하는 것이 다양히 있을 수 있는데 그것들은 주의 말씀하신 바 여성은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란 말씀의 의식속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섭리적 입장에서 질서를 말씀하심을 인하여서 일반적인(?) 세상의 여성 폄하의 근거를 말한다는 합리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합리성의 기원이 상대적인 인륜적 입장에서 비로소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섭리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 세상의 합리적 표현이 차용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여성이 남성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상대적인 측면의 합리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할 때에, 즉 합리성의 굴절과 사실을 정당하게 말할 때에 여기에 대한 논점이탈적 개념에서의 비롯될 수 있는 논의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함에 있어서 합당하게 전제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의 인생들에게 있어서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의 왜곡과 굴절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맹목적인 다산의 상징으로써 숭배하는 것이나 또는 색욕이라는 정욕의 대상으로써의 추구라는 것으로 영광이라는 것을 오욕하도록 하는 것과 산업시대에 있어서는 그 영광을 추구함을 물질적 개념으로 바라보아 성상품에 대한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상대적 측면에서의 연약한 사람들은 안티적 개념으로서 손쉬운 동성으로써의 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과 교육의 인식과 정황에 따라서 남성이 여성적 환경에서 자라게 되어지는 가운데 발달성장에 있어서 몸의 호르몬적인 영향으로 동성이나 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하나의 추구하는 영광에 대한 인식의 임의적 선택이 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해야 하는 고통과는 달리 진정한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음의 당연함을 말하게 되는 중심에서 여성관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다윗의 미갈을 찾음이 그것이라고 함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사울의 집안의 몰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 의미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거짓된 신앙까지 표현되어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여성관의 바른 인식도 가지지 못함에 대한 사실로써 측정되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황을 고려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더욱 믿음안에서 세상의 정황을 살피고 구별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오히려 힘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정황을 살핌에 있어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하나님안에서의 실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상대적인 요구에 따른 인식을 비로소 따르고 있었기에 그러한 몰락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즉 사울의 그 이름은 '요구되어진(desired)'라는 뜻의 이름의 실존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 입장에서 임의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사울이 발디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개념에 있어서는 여성이라고 함의 그 영광을 정치적 목적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보셋아브넬의 반목의 근거되는 이유라고 하는 것은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아비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고대 왕국에서의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왕의 첩을 취한다는 것은 그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추구하는 그 영광을 여인에게서 찾는 경우가 그것이었습니다. 아브넬이 그 충성한 대가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하는 그 입신양명적인 속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목후에도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아비 사울의 딸 미갈을 내어주도록 조치를 취하였고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힘의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가운데 다윗과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물고를 트기위해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도록 그 정부되었던 발디엘을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인 도구적 입장에서의 여성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의 경우에 있어서는 라이스는 '강함'을 말하고 있고 발디엘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존재적 증거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이름의 '미갈'여인을 취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하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강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내를 얻는 자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것'(잠 18:22)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설득력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강함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강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영광으로써의 미갈은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으로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디엘의 경우는 결국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자의 요행적 입장의 아내를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여성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상대적인 정치적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기쁨으로써의 여성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름은'사랑받는 자'(beloved)입니다. 그런데 그는 시편에서 거의 하나님의 자존자로서의 계시적 이름인 '여호와'하나님의 자존적 그리고 사역적 실제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첫번째 내용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영광으로써 여자를 합당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합당하게 아내로 취하게 되어진 여인이고,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미갈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미갈의 중심은 다윗이 마음에 둔 합당한 기준으로서의 여인의 모습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후자적인 측면의 그 영광을 인해서 '사울의 조건적인 측면을 들어 정식으로 아내를 삼았다'(삼상 18:27)고 주목함이 더욱 옳은 것이며 그것을 바르게 자리매김되도록 하는 것이 그 신정왕국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다윗의 해야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성도들의 '가정을 살펴보는 자로서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딤전 3:5)를 읽게하심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한 영광을 바라봄에 있어서 여러 여인을 거느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써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과 그 형태로서 성경이 일부일처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러한 논란으로 논점을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은 특별계시의 영감안에서 허용되어진 그의 신앙적 측면을 나타내는 존재로서의 생애를 살았고 지금에 있어서 특히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어진 가운데서의 일반영감 속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모습과 일반인들의 모습은 단순한 동일비교의 문제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굴절되어진 것같은 일부 다처제적 입장을 취한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특별영감적 차원의 합당함을 말하면서도 허용적 증거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심'을 나타내는 그 현실적 증거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허용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이며,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어짐의 사실이 그러한 현실적인 실제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메이지 않으시는 본질적 언약의 개념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실제라는 것이 더이상 계시의 담지자적 역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윗의 다처제적인 입장을 맹목적으로 흉내내는 것은', 시대적 인식의 착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본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합당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갈이 나중에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즐거워 춤추는 다윗을 보고 못마땅해하는 그러한 모습과 그로인해서 그 미갈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뜻하실 때에 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미갈의 완전성 때문에 다윗이 그를 비로소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하심의 섭리에 따른 믿음으로 미갈을 찾았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미갈이 그만한 완벽한 자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먼저 마음에 둘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여자로서의 아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진정한 여성을 바라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허락되어진 나의 삶을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자로서의 영광은 누구인가를 믿음으로 주목하고 아내를 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써 합당히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 18:22)

합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임의적 개념에서 그 영광으로써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음란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바라보게 되어지고, 그 여성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이성과 그 자신의 존재를 값싼 표류하는 이성적 판단의 거품에 사라지게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형제 자매 모든 성도 여러분, 주의 마음에 꼭들었던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그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고 비록 세상의 여러가지 합리성의 여파속에서 형태적인 측면에 부응해야하는 가운데서도 바르게 취할 수 있는 중심이 되어서 음란한 세상에서 다윗처럼 합당한 영광을 바라보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영광에서 주의 영광으로 이르게 되어지는 뜻하심을 받드는 자리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성도된 자매여러분도, 세상의 여러 관점과 관능의 아름다움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의 기만에 자신을 내어주지마시고,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남자의 영광이 되어주셔서 주의 가정을 통하여서 교회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운데서 기뻐하는 성도들로서 여성관을 바르게 가지는 가운데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그 주님의 영광의 길을 잘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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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8월 07, 2006

복음의 시작

2006년 8월 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1:1-8
복음의 시작

소위 '차포를 떼고..'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여건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때에 아주 원색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할 때에 사느냐 죽느냐 생존적 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재고의 일순위도 아니고 영순위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달리 어떤 불필요한 것을 강요하거나 당위성을 요구한다면, 요즘 코믹한 언어를 사용해서 상당히 '짜증 그대로의 모습'도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생존세계, 살기 위해서 밤잠 못자고 노력하고 있는 또는 그러한 노력을 해야하는 가운데서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한가하게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나 또는 그래도 살아가기 급하지 않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상당히 교회에서 증거하는 내용들에 대하여서 경멸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달리 평가되어질 수 있음은 또한 기정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과연 이러한 말들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세계에서의 지친 영혼들에게 주의 복음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회유적 합목적성에서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재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뜻하심이 그렇기 때문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의미로 말한다면 교회가 그들에게 속보이는 것으로 능력을 상실하지만 후자의 입장이라면 그 지친 영혼들이 주 앞에 나오게 되어지는 능력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이사야의 증거된 말씀을 따라서 세례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함과 온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한의 모습이 기술되며 그의 증거의 내용으로서 회개의 세례와 그 세례의 주체자에 대한 설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소위 '구원파'라는 잘못된 해석적 선택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시작을 바르게 알때에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로서 빛된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음의 시작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먼저 복음은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그냥 허무맹랑한 귀를 즐겁게 하는 유희적 개념의 비실제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주관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명과 관련된 실제적인 것입니다. 즉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롬 1:2),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생존세계에서 살고있는 것은 내 생명을 지켜나가고 풍요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기위해 노력하기에도 바쁜 것은 바로 나의 생명에 관한 실제적인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의식되어질 수밖에 없음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다고 할 때에 과연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함에 마음을 두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밤잠 못자고 다른 곳에 눈돌릴 수 없는 바쁜 나의 삶을 위한 변명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에게도 더욱 솔직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어질 것입니다.

물론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이 진짜라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손해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손해를 본다는 것의 상대적 여지를 가지고 강조점을 이동시켜서 이러한 소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항상 남는 것임에도 마음을 여전히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같이 생각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러한 것에서 신앙의 확신을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과 그 절대 합당함까지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제적 책임을 질 수 있음에 대한 여지적 반론의 모든 말들을 기각시키신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신앙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개연적인 측면에서 비판도 긍정의 사실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과, 그것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이미 부여되어진 실제적인 사실로서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자복하고 회개하게 된 것은 그들의 실존의 문제라고 하는 것, 그 당시 로마의 종속되어진 상황과 고통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산다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예수의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정황에서 비로소 동기부여되어진 자들도 있고 생활적인 빈곤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존의 문제의 실제적 문제로서 동기부여를 받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정화되어질 수 없는 것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사실성에서 정확하게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부르셨음에 대한 사실은 기정사실로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름부음을 받으신자'가 자신의 주권적 기뻐하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정당함의 사실을 부여하시는 분으로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못하면 정황적인 사실이해에서 그 사실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고 다만 맹목적인 임의적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현대적인 이성적 입장에서는 나약한 사람 힘든 사람의 자위적 개념으로만 오해하게 되어지는 현상적 인식의 자기 기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러한 중심을 가지는 것까지는 옳은 것이나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도 그 구원의 사실의 확신을 임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그러한 것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대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질문해놓고 그 구원의 확신을 아직 연약한 가운데서 마음에 두지 못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그 합당함의 시비를 거치지 못한 가운데서 말하여서 임의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적인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베푸실 분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로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그 주체로서의 예수님이 누구신가 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충족성을 합리성에 비로소 두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론에 기반한 실제론이 아니라는 것에서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모두 성경적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논리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인용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의 인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에서 인용한 가운데 그 인용의 사실을 합당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마 4:1-11 참고)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실제의식에 매인 나머지 그 구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의 구원의 확신의 사실을 말함의 충족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소위 이단 '구원파'의 거짓됨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실제적 사실은 합리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 합리성의 전환적 모색으로써 성경인용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는 곳에 나가도록 말하는 모든 이단들에 대하여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함 즉 예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할 때에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로 알게 될 때에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며 합당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깊이와 정도는 달리 나타나고 그 확신의 정도도 상대적이지만 그 믿음을 주시는 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의 믿음의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점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실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비로소 구약과 단절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이전에는 어떤 후에 오게 되어지는 또는 후에 기술되어지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으로도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시작이라고 함을 말함에 대한 당연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약성경으로써의 이사야의 말씀의 예언적 정당함을 말씀하심으로 그 신구약의 연속성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그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예수께서 기름부음받으신 자로서 그 기름부어 사실화한 것은 그 거룩성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르케'라는 말로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태초에'라는 말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되어지는 '바라'(태초에)(창 1:1)라는 말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그 시점적 이해가 다르면서도 실제적인 비교에서 사실을 읽을 수 있는 것을 허락하신 것으로써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태초라는 것과 복음의 시작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새로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즉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연속성에서 고생하고 우리의 존재를 임의적인 스스로 주관한다는 것에서 책임지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을 때에 주님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써의 시작 그 예정된 그 뜻하심의 시작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 별로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여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되었고 그들을 통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증거되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말했던 것을 이 복음의 시작에서 이미 주목한 자신의 신앙고백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특별영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 성도의 일반 영감과 다르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들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나이들며 쇠퇴해져가는 모습과 그렇게 들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전보다 못한 모습이라고하는 인식의 판단 강요가 가능한 나의 모습이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지 못한다는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대한 합리성의 표현과 기술이 불가능하게 여겨진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현상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나를 복음의 시작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은 기정사실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에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별로 내놓을 것이 없는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는 나의 삶 속에서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씨를 뿌릴 수 있는 종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빌 2:13)을 바라보게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으로 그가 그 믿는자를 구원하신다는 그 진정한 실제의 것으로써 모든 인생들이 들어야할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제의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그 충족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알아가는 자리에서 주의 구원의 확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은혜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존세계에서 밤잠 못하고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확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음에 대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바빠서 또는 여러가지 생존에 대한 이유로 거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진실된 자는 믿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친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로서,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그 감사로 복음의 시작으로 나를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성실하심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아주 평범한 가운데서도 주의 특별하신 섭리를 받들어내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첩경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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