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3월 06, 2007

마음에 두는 것

2007년 3월5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신 4:32-40
마음에 두는 것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지든 있을 수 있고 또한 의식해야하는 당위성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의 고통으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혜롭게도 자신의 앞날을 발판으로 삼게 되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정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기준을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삶을 부정으로 규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그래도 긍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어도, 삶에 대한 긍정이 옳다는 생각을 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기업들 아내 자녀 그리고 소중한 우리의 이웃들을 볼 때에 다시금 힘을 내고 있고,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긍정에로의 판단을 내림이 분명 옳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한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생각이면서도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써의 규정되는 사실로서 그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서 현실적 규정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 신명기 이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 성도들과 일반 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수용여부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결정이나 판단의 여지를 주장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패러디하고 있지만'(링크된글 각주1번참고) 그것이 이미 기각되어진다는 것도 전제적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0절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나간 날을 상고해보라고 하면서 불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이끌어내심을 받은 자들이 없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인 것으로써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3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려고 듣게 하시며 열조를 사랑하신 이유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과 기업을 주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로서의 실제적 성례적 역할을 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에 꼭 명심해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명심해야할 것으로써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문맥적 증거와 또한 그 앞서 명심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했을 때에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 하고 나온 어떤 '한 사람'(막 10:17~31)의 한가지 부족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라는 말씀을 하시는 배경적 문맥적 부분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신명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지방에서는 발락이 발람더러 저주하라고 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축복받은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여부와 상관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단의 시험이 있어서 음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게 되어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하심과 그로 인한 신앙적 정비와 분명한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민수기의 마지막장의 내용이 되어집니다.

그부분과 상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명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음란한 세대에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명심해야 할 것으로 이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4~35)

모세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심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리고 그 앞서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왔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좋은 땅이지만 자신들이 차지하기에는 소위 '그림의 떡'이라는 식으로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12명중 10명의 말에 공감한 이스라엘은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의 정당함보다도 현상적 현실적인 판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공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게 하시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스스로 취하시며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하심의 정당함을 배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의 기본적 근본중심이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노중에 다 죽게 되었고 이제 그 광야세대의 젊은이들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그러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그 가운데서 실재라고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짐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명심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미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주어졌던 십계명이 다음 본문 5장에서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십계명의 그 존재와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이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말하는 조약적 개념 즉 불평등의 개념의 조약이니 임의적 납득되어질 수 있는 상정적 주권이니 하는 그러한 점에서 하나의 언약개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순함은 상당히 모순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그러한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청년(막 10:17~31)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개념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리성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그냥 개연적인 선함의 대상으로써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비로소 선하신 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자존의 선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심으로 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거처럼 어렵다고 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율법의 완성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에서, 생각의 발상적 전환을 생각한다면 바늘귀라고 하는 것을 낙타만큼 크게 만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보편화된 바늘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구별되어진 상식선에서도 알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행함이나 또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소위 '힘'이라는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 재물이 없으면 구제도 못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행할 능력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 위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 행할 자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지도자적 권세자들의 여론의 반전적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하시는 주의 말씀에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막 10:27)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개념의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적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다 하실 수 있다는 규정적 사실을 천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 그것을 명심하지 못한 이것이 그 청년이 모든 것을 행하고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던 '부족한 한가지'(막 10:21)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열심과 형태를 갖추고도 그 합당히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사실을 마음에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느냐는 것과 행위없는 구원이냐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도 서점가에 맴돌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사랑받고 있었던 한 사람의 모습과 비교되어짐을 주목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은 삶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왜그런지는 말하지 않고 긍정의 실증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심하라고 하셨고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우리의 삶에서 좀더 바르게 합당하게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막연히 긍정하면 유익하다는 말보다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명심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둘 때에, 참되게 주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실제적인 정당함에 따라서 나의 모습의 현상적 어떤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것이 부과되어진 나의 삶은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긍정의 사실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더욱 긍정의 사실을 찾는 삶의 긍정에로의 중심과 그 사실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돌파구로 실증적인 개념, 그리고 합리성에서 파생되어지는 소위 '객관적 존재의 근거지움'과 같은 노력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씀하시는 그 명심하라고 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여전히 그 한 청년의 고민은 계속되어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에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유리라는 개념의 광야에 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가운데 자신이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중심의 사실을 명심하는 것의 하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서, 참으로, 음란한 세대에서도, 자기 백성을 계수하시는 선하신 주께서 주신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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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2월 13, 2007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2007년 2월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9:30-37
예수님이 세우신 어린 아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의 인식의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는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을 선호하는 기호도는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임의적으로 정죄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만이 꼭 어떤 기호도를 넘어서 보편적인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하는 판단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함도 유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세의 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단순한 분으로서 묘사하는 듯한 임의적 규정때문에 그러한 전통속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유치한 것이 미화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에 서는 전통적인 해석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기호도에 따른 쉬움을 말하는 것을 떠나 임의성이 있는 어그러진 이성의 모습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주의 말씀으로써 그 어린아이와 같다는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읽게 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유년시기를 다 거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에 대한 생각들과 또한 교육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러한 유년시절이라는 인생의 작은 모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의 빛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의식할 수 있도록, 그러한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을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33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지나실 때에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심과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가운데서 노중에서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깨닫도록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과 그를 영접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의 인식을 가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것과 그로 인한 것으로 받게 되는 쟁론에 대하여서 꼭 기억해야할 것으로써 어린 아이를 통한 증거를 받도록 말씀하심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노중에 제자들의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은 '누가 크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과 제자들이 '쟁론하였음'이라는 것은 말이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디아로기조마이'(dialogivzomai)(막 9:33)라는 말이고 후자의 말은 '디아레고마이'(dialevgomai)(막 9:34) 즉 전자는 'reason 11, dispute 1, cast in the mind 1, muse 1, think 1,consider 1; 16'라는 뜻이고 후자는 'dispute 6, reason with 2, reason 2, preach unto 1,preach 1, speak 1; 13'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교해보면 그 특징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마음에 두는 것으로써의 생각하는 것들 고려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논쟁이라는 개념으로써 이유라고 하는 개념적 의미와 그것을 나타내는 가운데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께서 너희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고 그러한 서로의 입장으로서의 이유와 그것을 토론하였느냐는 말씀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쟁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었다는 개념보다는 이유라는 개념의 표면적 의미가 비로소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입장에서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그들은 마음에 무엇인가 옳은 것을 두고 그 입장의 옳고 그름에 따른 논의가 아니라 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임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그 부재되어진 그 중심에 마땅히 두어야 할 것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하심으로 어린아이를 통한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그 부재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주의 뜻하심으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은 주님의 부활하심의 사실성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중심과 그들을 영접하는 기본적인 모습의 합당함을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으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의 전반적인 문맥적인 측면을 보면 이 쟁론과 더불어 변론하게 되어지는 것과 함께 두 번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한 것으로써 믿음과 능력의 시비가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오늘 누가 크냐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8장에서 '가이사라빌립보에서 비로소 주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매'(막 8:27~31), 깨닫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막 9:10), 이어서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막 9:32)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심의 그 증거는 예수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과 사는다는 것의 판단의 시비는 존재에 대한 상대성이라는 판단의 절정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은 상대적인 존재와 사유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과 예수님의 가르치신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는 현실적인 비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여도, 비로소 그것의 실제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고 하셨던 것이며 그것의 재가를 공적으로 증거하심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모습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할 때에 자신의 모든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자신의 살아있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과 예수님에 대한 연민에 대한 충성적 입장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그러한 일이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으심과 부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되어지지만 납득의 당위성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의 뜻하심과 말씀하심이 상대적인 자기 표현이 절대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말씀하심에서 자신의 믿음의 당위성을 헤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잠시 접어두고 축전지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호주머니에 넣어서 사역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즉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막 9:28~29) 그 믿음의 실재와 그에 따른 믿음의 사역의 실제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실적 입장에 서지 못하여서 주의 책망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막 9:19참고)

그리고 주의 사역을 감당함에는 그 사역에 따르는 주의 영광이 그 사역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알아주고 그에게 나타나는 그 달란트로서의 사역을 축하하고 주께 감사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사실규정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합당하게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렇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재가되어진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받음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가 되는 이유임에 따라서 주께서 주신 달란트와 그 사역과 영광은 비교판단되어지는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자존적 증거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적 규정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비교우위라는 개념의 판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직분적 서열이 인격의 서열과 존재의식의 서열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교회 내에서의 창조적 질서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여성권위적 개념에 신장적 입장으로 해석함에 당위성을 말하는 어리석음의 개념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역사적 계시의 형태만 취하여서 여성의 남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개연적 가능성의 당위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가히 미리암의 죽음과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살렸던 누이로서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모세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에 모세에게 그의 지도자적 역활을 내놓으라는 입장을 취함에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로소 심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들의 차이가 있고 질서적 의미에서 그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들의 그 차이는 비교우위적 영광과 실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과 그 영광과 일반 성도들의 섬김의 사역과 그 영광은 존재의식의 비교우위적 개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와 같이 동일하게 주께서 주신 것이라는 정당함에서 그 직분과 그 섬김의 사역과 영광의 실재의식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것은 그 실재의식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계시적 증거로서 예수께서 자존의 성부하시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비로소 바르게 두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세우시며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 즉 하나님을 영접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성도를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이들은 아빠가 엄마가 좋은 것, 맛있는 것을 해주면 아이는 '우리 아빠 최고' '우리 엄마 최고'.. 아빠말과 엄마 말이라면 누구의 말보다도 신뢰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고백의 실제적인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 항상 예만 되는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임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하나님나라에 대한 실재와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히 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의 시대는 열두 사도의 시대에 이미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의한 영성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사실 규정의 입장을 취하게 하시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을 항상 계시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계시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성별되어질 수 있는 어떤 특정적인 것을 일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말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해석적 당위성과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린 아이라고 하는 증거는 특별계시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영역이 차용되어진 것으로써 그 해석의 방향이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은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어린 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니까, '미숙'이라는, 역사적으로 아직 성장이라는 개념의 판단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받게되어지는 그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은 기본적이며 또한 완성적 개념의 아직과 이미가 함께하는 것으로 일상적인 시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숙하면, 부모의 생각과 달리 잘 판단할 수 있는 성인으로써의 독립을 말할수 있는 것에 비교하여, 하나님에 대하여서 그대로 믿다가 회의할 수 있는 인생의 모습으로 비로소 이른다는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의 판단에서의 실제의식일 뿐 이미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란 것이 있는 성도들의 실존과 신앙중심은 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이 성숙해가면서도 이미 온전한 하나님이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미약과 미숙이라는 개념을 성도의 존재적 시비로 확장해석하는 것은 실제의식이 결여되고 편협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생각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중세에서 하나님을 단순자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수학적인 개념의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임의적으로 정의하고 행하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실제의식을 가질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실제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면죄부라는 윤리적 파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그것보다도 그 본래적 입장은 바로 그러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에 대한 의미와 사실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롯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전통은 하나님을 항상 철학적으로 단순자로 이해하고 그의 형상적 입장이라는 말이 가능한 가운데서 신앙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인위적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어떤 어린아이들의 유약함과 미숙함을 모방하는 듯한 행동이 어린아이의 신앙과 같은 모습으로 잘못되게 미화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마음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이름이 임마누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과 그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바르게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세우시는 한 아이와 같은 증거자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가진 증거자가 되며, 마치 아이가 아빠를 최고를 알고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를 진실로 아멘으로 받을 수 있는 성도로서의 모습으로 주앞에, 복음으로 낳아 길러,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세우신 어린 아이와 같이 주의 받으신 바된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만나뵙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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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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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월 15, 2007

무엇이 보이느냐

2007년 1월14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8:11-26
무엇이 보이느냐

새해가 되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그러한 다짐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 또는 대세를 이루고 있는가 보편적인 인식들인가에 따라서 편승하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필요라는 개념이 상당히 가치관적인 입장에서 좋은 것이면서도 비로소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로소 의지해야만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좀더 현실적인 것과 정황에 따른 판단이 요구되어질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것들까지도 재고하여서 판단하게 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쉬운 예를 들어서 표현한다면, 요즘 텔레비젼에서 보게 되는 드라마는 어떤 것이 유행이더라는 것은 방송 피디들의 입장이나 일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의 드라마는 거의 좀 '촌스러우면서도 열심을내는 기염을 토할 수 있는' 뭐 그러한 드라마가 주종을 이루거나 사극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대부분의 드라마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아마도 시청률과 인기라고 하는 것의 대세가 어떤지 그러한 시대적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표적을 잘 살펴보는 지혜의 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의 '현상'을 살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타나는 시대적 '표적'을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상을 살펴보는 우리 성도들의 현실이해 표적이해 사회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주목하여보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심과 저희를 떠나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동행하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서로 의논하기를 떡을 가지고 오지못하여 떡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하도록 말씀하시며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는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벳새다에 이르러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바라매 예수께서는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그에게 두 번 안수를 하셔서 그가 주목하여 밝히보게 치료하시고 그의 집으로 그를 보내시며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현상이해로서의 표적에 대한 이해와 우리 성도들의 표적이해로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비유로서의 소경을 고치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통해 주의 뜻하심을 밝히 볼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언급한다면, 두 가지 주목함에 있어서 먼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현실이해로서의 표적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음'을 본문에서 읽고 증거하도록 하고 다음으로는 '진정한 시대이해로서의 표적과 그 사실관계에 대한 것으로서의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가'하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현실이해로서의 표적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음'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막 8:11~12)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그 표현적 입장에서는 그렇게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정황적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별된 가운데서 차용되어진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 범신론적인 판단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자존적 절대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인식은 사실 당위성의 정당함은 상실되지만 말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정당함이 부여된 현상 즉 그러한 표적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주권적 입장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중심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앞에서 그들 자신들의 모습은 율법적인 개념의 판단을 받으며, 그 의문의 판단아래서 이미 기각되어지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여러가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해 즉 하나의 인식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만 그러한 것은 일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특정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에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인정되어질 수 있는 것들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보편의 실존은 그 자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의 구성이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받게 되는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기원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그 어떤 보편 인식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을 때에 비로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고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 건전한 사고를 사람들이 납득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함에 있어서도 아직 죄악된 세상에서 그 상식보편이 주의 말씀하심과 그 일반적인 뜻하심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기도 하기 때문에 보편의식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존적 분별을 정당하게 요청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행위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소위 이러한 표현들이 예일 것입니다.

'아 나는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몇십년해 보았어 그런데 말야 아닌 것같다'와 같은 표현이나 '나도 교회 다녀보고 십일조도 해봤는데 뭐 크게 다른 것이 없고 허송생활을 했어' 등등의 인식들.. 이러한 것들은 그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실을 붙잡을 수 있는 인식의 표적을 이미 주께서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의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자존적 절대적 보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의 확실성을 잡을 수있도록 하심에 있어서, 신앙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이 귀한 것이며 존중되어져야 하는 것이면서도 비로소 신앙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심의 그 배려하심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그 행함에 대한 것외에 하나님께 드리는 자원하는 심령 즉 하나님의 형상적 입장에서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가에 대한 여부로 그들의 잘못된 것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분별해야 한다고 하심을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현실이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주께서 말씀하시고 계신데도 떡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것에 대한 것이 공통적인 인식으로써 논의적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는 책망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하며 또한 그것에 대한 가르치심이 나타나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것이 다음 본문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정한 시대이해로서의 표적과 그 사실관계에 대한 것으로서의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가'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에 있어서 마을밖에 나가셔서 두 번 안수하여 고치셨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번에 고치지 못하시는 전능성의 시비를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안수하심으로 고치시기로 작정되어진 가운데서의 계시적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과 같이 참으로 눈을 뜨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죄와 이미 실제적으로 상관없는 존재이면서도 상대적인 현실적인 삶속에서의 실제적 죄악가운데 있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 성도들의 눈이 감기게 되어지는 현상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보여주시며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사물을 실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는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에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말씀하심에서 '주목하여 보더니'라는 말은 본문 헬라어로는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주목한다는 표현과 어떤 것을 꽤뚫어 본다는 것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본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은 '통하여 본다'라는 해석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안수하셨다는 구별적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과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도 지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첫 번째 본문에서 당면한 현실 떡이라고 하는 것이 없음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상기하도록 하는 그의 가르침을 의도하셨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본다는 개념으로 주목하여 본다는 개념으로 연결되어져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에서 기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도록 하심에 있어서 성도들의 생활의 기본이 되어질 때에 현실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주의 명령은 공허한 상상이나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하심이 현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라 증인을 세울 때에 두명 이상 세우게 되어진 것과 같이 두번을 통해서 주의 계시적 이상과 실재라는 것은 현실을 주장하는 것으로써의 합당함과 그것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시는 구주의 증거적 사실을 받도록 말씀하심이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의 정당함에서 현실이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로서 제자들은 그것에 대하여서 잠시 주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주님을 통하여 사실 규정의 정당함'의 사실을 마음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도마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연악함에 있어서도 주 예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는 정당함에서는 종국적인 그들의 눈을 여시는 주의 선하심의 사실적 증거가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소경의 눈을 열어서 밝히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목하여 보더니'라는 말은 본문 헬라어로는 '디아블레포우'라는 뜻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전 1:19)고 하신 사도의 증거의 기준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하심을 통하여서 표적의 사실적 입장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는 것 즉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합리성과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 합당한 것으로 알아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서의 사실 표적을 분별해보는 것이 성도의 인식으로서의 합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심에 있어서 그것을 나누어주시도록 한 것은 제자들과 그의 합당함을 입은 종들이라는 사실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한 것에서 그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의 사실적 완성과 증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연약함에서 세상적인 속물적 눈이 뜨여질 수도 있지만 주의 택하심을 믿을 때에 그것에 비로소 우리의 시선이 머물 수 없으며 그러한 자리에 나가지 않도록하시는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을 붙들게 되는 것임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힘쓰는 종들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은혜주심이라고 하는 것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진실로 주님을 믿는다면 편리를 위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 중심의 실존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되니까 죄를 지어도 좋다는 식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타 여러 우리 상대적인 인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뜻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예정하심의 구원하심에 대해 시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신의 피로 사신 예수께서 이미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성도라는 진정한 이름을 얻게 하셨는데 이제 '무엇이 보이느냐'(막 8:23)는 말씀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 진정한 구원과 진리와 사실을 밝히 보나이다'라는 증거로 인식의 표적이 없는 마을에서 비로소 진리를 찾아보겠다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증거자로서의 모습으로 보다 더 합당한 사역을 감당하시는 종들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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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26, 2006

온 세상의 구주 예수

2006년 12월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예배설교
눅 2:1-21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거룩한 이의 탄생,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실제적인 기쁨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이 상대적인 모순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합당한 진리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그 보여지는 화면에서 산사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장식이 있음을 주목하면서 상생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도 옳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라고 하는 그 뜻하심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과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오셨다고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음을 인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임을 인하여서 유대를 항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거기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는데 그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을 인함이라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나신 그 지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것을 증거하고, 이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진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하며 빨리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함으로 인해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게 되는 것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그 모든 것을 인하여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돌아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주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는 가운데 분별되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기 예수님을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모습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간략하게 주목하게 된다면, 가아사 아구스도 때에 나타난 호적하도록 명한 시대적 상황과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와 마리아의 사태에 대한 이해와 중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호적하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이것은 통치자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에 해당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다윗의 잘못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써의 세상적 모습이면서도 주 안에서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을 돌아보시며 헤아리심의 일반적인 자기계시로서의 구별되어진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구조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민수기를 중심으로 보면 모세가 처음에 시내산에서 그 광야교회로서의 출발하기 전에 그 백성들을 계수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의 백성들을 계수한다는 것이 그 헤아림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로서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자기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마음에 두도록하시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의 증거를 그 인구조사에서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으로서 발락의 저주를 위한 발람을 통한 축복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으로 염병이 있어 죽게 되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비느하스와 같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가운데서 평화의 언약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시험이 올 때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분별하여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들도록하시는 것으로써의 인구조사가 행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주의 백성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도록 그의 백성을 헤아림으로써의 본질적 성격에 따른 인구조사와 악을 선으로 이기게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위한 가운데서 그 백성을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의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러한 인구조사에서는 그러한 성격의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통치자로서의 자기의 유익적 개념으로써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 인구조사를 행하는 가운데 그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적인 입장인데 그와 같은 세상적 입장으로써의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이 통치자의 안목과 필요에 따른 것을 위한 호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관리되어지고 헤아리게 되는 의도와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시행하게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나실 아기 예수는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러한 시대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여서 자신의 백성들을 헤아리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있고 그 백성들과 같이 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자기 계시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을 그 시대적 악함에서도 그것에 국한되어지지 않고 그들을 헤아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의 증거와 찬송인데,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음에 대한 증거와 그 찬송으로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그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구주 아기가 나셨다는 것의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의 증거적 사실에 앞서 그것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언이 그 당시 이후에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정황적 사태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함까지도 예언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5장에서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미 5:2~6)

본문의 예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 예수님의 나심의 장소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아기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을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시기 전부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바로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그에 따른 합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양무리를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에 가르쳐주신 주기도(마 6:9~13)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주장하시는 가운데서 사실규정을 절대 정당하게 말씀하심에 따라 구주 예수님 안에서 정당한 사실을 비로소 말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나심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그들의 중심에 주의 탄생하심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의 오심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교에서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할수 있는 한 예로써, 모 방송사 오늘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초월하여서..'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월' 또는 '초월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보편 자체나, 보편으로의 행보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신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는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도 동일한 기술적표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상대적인 보편 상대적인 무한개념의 임의적 설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불교도들과의 연합도 취하고 있는 것이 구교의 입장입니다, 불교의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의 '다르마'라는 것은 역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규정을 넘어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 비로소 합당한 정당함을 항상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편을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를 규정하는 그러한 사상적 보편의 개체적 특성을 넘어선다는 것이 구 가톨릭교와 불교의 연합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으로 같이 활동하고 같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스처로써, 열린다는, 틀을 깬 보편을 지향함으로써 상식적인 보편적 입장의 인식에서는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원적으로 종교라는 어떤 실재자와 연결을 추구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의 규정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이 그 실재자라고 하는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다 신을 의식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미가서 5장에 나타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보편의 재가를 통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항상 예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적 보편이라는 개념과 그 틀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써의 보편을 의지하는 구교 즉 가톨릭교의 입장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의 뜻하심을 비로소 받들지 못한다는 실제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 그 열림이라는 개념의 틀을 넘어서 다르마라는 보편을 상정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인 보편이요 절대의 보편의 판단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자들과 마리아의 사태인식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변경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의 헤아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위성을 비로소 받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 온 백성에게 증거되어지는 기쁜 소식과 땅위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적 예언이 되어지는 것은 미가서 5장에서 주목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8)

주의 택한 백성들이 열국중과 여러 백성들 중에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들을 권면하시는 그들을 헤아리시는 분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며, 그것은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의 '호적'이라는 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러운 증거를 구별하셔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러한 '주 예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고후 1:19)을 읽게 되는 종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함의 사실로서의 존재적 무리가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화한 사람들의 보편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통용되어질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관계들과는 달리, 주의 헤아리심의 사실은 편협하다고 할 수 있는 몇몇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들에게 온 백성에서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의 증인적 증거를 몸소 증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라고 하는 것과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류와 또한 실제적인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합당한 증거를 받게되는 종들을 의미하며, 후자는 미가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미 5:4 中)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함'(마 6:9)의 중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어서'(고후 1:19) 그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 규명을 합당하게 받으며 행하는 사람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적 인식과 그 표현은 보편이라고 함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임의적인 상대적 보편의 개념의 변종인 틀을 해체시킨다는 개념에서의 열림이라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과 그 재가 있는 상대적인 보편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개념의 보편성이라고 함을 위해서 상대방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관용의 재스처를 취함으로 사람들의 인식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구걸하는 개념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눅 16:1~9)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온세상의 구주이시면서 주의 택한 백성을 실제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이해의 결핍과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서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임의적인 것이요 절대적이지 못할 때에 그러한 주장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서 주 앞에서 부끄러움의 사실의 판단을 비로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그러한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도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러한 표현과 사실로서 절대적 사실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이미 예언되어진 성경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미 5:4)

온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생들과 그들에게 주신 바된 것들이 모두 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실존적 구원과 일반적인 잘됨의 구원으로서 그들의 모든 영향력의 실존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사실도 어디까지냐는 정도적인 규범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실제적 주의 심판하실 때까지 내버려두도록 말씀하심과 또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데로 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적이지 못한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치 실존적인 신이라고 하는 전제로 상관할 사실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불의한 청지기들로서의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제스처로 에큐메니칼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나와서 오히려 들녁에 머문다고 하여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고 하심의 소리를 전해들은 이들 목자와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주의 나심의 뜻하심과 증거하심을 찬양하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시는 가운데 그 믿음대로 이 땅에서와 주의 나라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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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2월 16, 2006

왕을 부르는 소리

2006년 12월1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3:13-26
왕을 부르는 소리

조금은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라스트 신(the last scene) 중에 마차경주에 대한 장면이 아주 인상깊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교적 개념의 월계수를 구별하여서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가 그 연구중에 결국 회심하여서 이 작품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약성경을 배경하여서 쓰게된 문학작품이면서도,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오히려 영감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이 저주하기 위해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구약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주목할 때에 축복하게 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번째로 발락이 발람더러 다른 곳에서 저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림이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는 말을 받고 그것을 묻고 있는 발락과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과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발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힘이 들소같다는 것과 야곱과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크냐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을 또 사자에 비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것을 본 발락은 발람을 보고 축복도 저주도 하지 말라고 하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에서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근거는 그들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왕을 부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적 입장에서 주목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에 그 행보를 세차례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오히려 발락과 함께한 자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첫번째 축복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두번째 저주를 위해 소빔들 비스가에 이르렀지만 앞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의 중심'(민 23:10)에 이어서 하나님의 식언치 않으시는 신실하심과 함께 그들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음에 대한 근거로 더욱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라고 하는 기준이 진정으로 타당한가에 대하여서는 세상에서는 동의적 차원에서 말할뿐 '본래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정황적이나마, 본래성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정당함이 타당함에서도 인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저작권이나 로열티와 같은 것 또는 인증에 대한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상식으로 우리 주위에서 읽게 되는 개념들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 즉 그 이름의 뜻은 '유린하는 자' 즉 '파괴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하는 가운데서 그 행보를 마음에 둘 때에 발람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발람의 뜻은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모사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믿는 구약의 성도들의 존재적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하는 합리적인 당위성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속된 표현으로 '절대로 아니다, 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등등의 절대성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사실을 미련하게 그와 같은 방법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발람의 저주라는 것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확실성을 위한 노력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락이 발람을 통해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인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적 정당함을 부인했다고 하는 인식의 확실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도 바로 이러한 몸부림의 어설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이 이른 곳인 '소빔'이라고 하는 곳은 '파수꾼' '살펴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현상적 이해에서의 가장 높은 곳으로써의 위치를 선점하는 기득권을 유도하는 곳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장소에서 '비스가'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절벽, 쪼개진 틈(clef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융기나 지각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높은 낭떨어지나 구렁과 같이 벌어진 경계를 말하는 곳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그 백성들의 존재와 행보를 주목해서 해석한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한 내용중에서는 그들에게는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를 부르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 사상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마 6:9~13),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다는 것'(살전 2:4)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그것을 근거로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람은 멀리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왕을 부르다'라는 히브리 본문은 '터루야 멜렉흐'라고 말하고 있는데, 부르다는 말인 '터루야'라는 말은 '소리치다', 특히 '깨어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이것은 시끄러워보이는 가운데서도 인식의 납득당위성이 비로소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왕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실존이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의 옳게 여김을 받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부르다는 말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경우를 볼 수 있고 또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놀람이라고 하는 것 당황함이라고 함에서의 묘사라고 하면 그 내용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 옥합을 깨뜨림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이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말씀하신 바로서의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는 모든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롭게 말하는 기준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산다는 그러한 상대적 개념과 판단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주권적 정당한 자신의 증거가 자신의 기준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옳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행위라고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자신의 깨트림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는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정황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 파생적 당위성을 가지고 본래성을 주장하는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엉둥한 신의 속성적 개념으로써의 임의적 절대의식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라고 하는 메시야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본래성의 정당함의 실존을 임의적 스스로 취하여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힘이 들소와 같고 그들을 해할 사술과 복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술법들의 합리성은 있다고 하여도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현상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판단 가능성과 또한 속된 표현으로 만만히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소들과 같이 힘은 있지만, 다소 조절이나 어떤 이성적 개념의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가르쳐주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할 때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당위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왕을 부르는 중심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하심 안에서 더욱 신실성의 재가를 받도록 그 말씀을 사모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 서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세상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현상적으로나마 받지 않도록 노력함도 갖추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깨서 왜 고초당했나..라는 찬송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중심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되어지는 왕을 부르는 기도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특히 12월 성탄의 기쁨과 감사로 오늘도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들 속에 함께하며 주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오실때까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나누기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옳게 여기심에 마음을 두며, 왕을 부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받들어내는 담지자들로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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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1월 14, 2006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2006년 11월 1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0:1-13
미리암의 죽음과 다툼

젊을 때는 어떤 연락(宴樂)하는 곳이 더 호감이 갈 수도 있습니다. 젊음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성의 실제를 모두 진실인 것과 같이 받아도 된다는 그러한 호기에 찬 시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시기가 지나면 그런 연락(宴樂)이라고 하는 즐김이라고 하는 것이 식상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잊게 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고 그 선함이 일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현실적 상황에서 지혜를 주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락하는 곳보다도 초상집이라고 하는 곳에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것이 남은 인생을 경영하는데 한 지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인은 축복된 삶인데 무슨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염세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가 하는 반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가운데서 어떤 소망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인생의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계시의 특성으로써의 죽음은 결코 아니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현실적인 삶이라는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을 열어'(호 2:15)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소망을 전해야 할 것은 보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습니다.

죄아래 있는 모습을 취하여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한다면,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고통속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냥 연락(宴樂)하는 것에 대한,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것만으로는 소망을 비로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다툼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진정의 소망이 무엇이며, 과연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지는 가운데 거룩함을 말하는 것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민 20:1)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와서 물이 없음으로 인해 모세와 아론을 공박함을 그 정황적 입장에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공박의 내용은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그 백성들을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심에 따라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투었음에 대한 것은 그 상관성이 역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있다는 것과 그것은 광야같은 세상길 걸을 때에 처음부터 마음에 둘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의 문을 보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구약의 성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의 광야교회생활에서 전제되어진 소망의 문을 이곳에서 보게 하시는 거룩함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먼저 미리암의 죽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가데스에서 죽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미리암.. 그의 이름의 뜻은 '높다'라는 뜻과 동시에 '반란(rebellion)'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다라는 고귀함과 반란이라는 이 언어적 표현이 미리암의 생애에 그대로 나타났던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먼저 그녀의 '높다'는 이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녀의 생애를 주목하면,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누나로써 모세가 나일강에 갈대상자에 버리움을 당하였을 때에 모세의 생모에게 유모자격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서 규정되어지는 현실적인 모세를 먹이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미리암이 없었다면 아마도 모세의 생애는 달리 규정되어질 수도 있었을 수 있는 그러한 아주 큰 공로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라는 이름의 뜻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열두 지파의 두령들을 정탐꾼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을 때에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의견은 약속의 땅을 취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실제할 수 없는 무리한 행보라고 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은 분노와 슬픔으로 울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여세를 몰아서 고라일당과 함께 모세의 영도력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고 그녀와 고라의 지도자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고라의 일족은 땅에 삼키움을 당하고, 미리암은 그 외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애굽여자를 모세가 믿음으로 취함에 있어서 반론하다가 문둥병에 들어서 진밖에 있다가 모세가 기도함에 다시 정결하게 되어지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과연 셈족의 특성적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이름에서 주목되어지는 것과 같이 높음과 반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데스'(holy)에서 죽음을 본문에서는 첫번째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안에서 그 죄악된 반란이 그 존재적 상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고난이 광야생활을 떠나기 전에 그 인생의 합목적적인 뜻하심임을 헤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리암의 죽음이라고 함을 살펴본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모세와 아론에 대한 공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써의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민 20:3) 이 말은 앞서 있었던 고라의 일행과 고라의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라 모세의 신통술에 죽은 것과 같이 인식하며 반론한 자들의 염병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민 16장 참고, 민 16:41~48)

직접적으로 고라와 함께하였던 미리암과 관계되어져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일부에게 공정한 심판으로써의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하여서 아직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적 입장이라고 하면서 현실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이 해석적 실존으로 해석하여 사실로 받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의 현실적 실제의식으로써 모세와 아론을 공박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는 그 되어지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현상적인 현실적 사실이해가 둘다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을 현실적인 것에서 비로소 둘 것인가 아니면 합당하게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둘 것인가의 문제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자를 택하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의 인도하심의 사실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다는 시비를 내세우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의 시비다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현상적 실제인식에서는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그러한 인식이 그들의 눈을 감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비윤리의 반란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자존적 자기 신실하심을 따라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만되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예표하는 물을 그들이 다투어 마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리바의 물은 비로소 투쟁의 물이 아니라 자존자의 은혜의 생명의 은혜로서의 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현실적인 실제에서도 가늠할 수 있도록 광야시대에 그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죄의 사하심을 얻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하여서 이제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종노릇되어지는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비로소의 중심을 가지지 않게 되어지는 윤리적 선한 열매를 고통속에서도 선하게 맺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언급했던 것과 비교되어 받게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3-15)

귀고리와 패물 연예하는 자의 연락을 따르다가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유하여 거친들과 괴로움을 말하는 아골골짜기 그곳으로 소망의 문을 삼으셨다는 것, 현실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말씀이 진정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적인 괴로움의 사실의 완성인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하여 하나님께 어리석게 다투는 자리에 서지 않는 비로소 거룩한 곳에 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리암의 죽음이 게데스에서 이루어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진정한 경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경건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심에 있어서 예수님 안에서 현실을 구별하고 이 거친들 괴로움의 골짜기, 아골골짜기를 잘 구별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진정한 현실적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을 구별하여 현실의 거룩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임의적인 세상을 사랑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는 현실은 세속인들이 의미를 두는 세상보다도 더욱 합당한 실제적인 현실적 사실이라는 점을 마음에 둘 때에 우리의 작은 삶 비록 그것이 거칠고 고난이고 그로인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강을 건너야할 즈음에서도 거룩함을 말하게 되며 우리의 삶을 주께 드리는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거룩함의 사실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와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주 안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하는 지위에 세워질 때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만하지 않고 내 자신을 쳐서 주께 복종시킴으로 죄로 인한 교만의 사실성과 그 실재를 우리 삶속에 장사시키는, 주의 뜻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의 귀함과 사실을 따르는 가운데 현실적인 측면으로 하나님께 다투는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의 부활하신 그 뜻하심이 내 속에 이루어지도록 주의 제사장적인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것을 내 삶에서 나타나도록 힘쓸 때에, 참된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구원의 소망이심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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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06, 2006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2006년 11월 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6:14-29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

지금 예배드리는 이시간에 마치 90여년만에 가장 따뜻했다고하는 올해 가을날씨의 마지막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듯이 컴컴해지고 비가 퍼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마치 사람의 시셈이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심리를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비교되어지는 것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의 방법도 있지만 소위 '육감'이라는 몸의 느낌적인 개념의 인식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철학들도 애매성의 철학이라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논의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기 보다는 소위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범하게 범죄한 어떤 한 심리의 인식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에 따라서 헤롯이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의 하나라고 하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임에 대한 상황적 묘사가 나타나는 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서 춤을 추어 함께한 자들을 기쁘게 한 것으로 인해 그 여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다면서 자신에서 청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고 그 여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함에 결국 헤롯대왕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세례요한의 주검을 그의 제자들이 장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시점으로 시작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적 사역을 먼저 말씀하시고 있고 이어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헤롯의 범죄심리적인 표현을 통해서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과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예수님의 공생애적 시점의 차이를 일반적인 기술을 통하지 않으시고 달리, 그 표현의 순서적 기술을 달리하도록 영감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먼저 두게 되어지는 것은 다른 복음서와 절적인 차이의 이질성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의 그 사역의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시고 있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의 강조적 표현으로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그리고 구약적 정당함을 취하심으로써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 헤롯의 범죄심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헤롯'이라는 말과 '헤로디아'라는 말의 뜻은 '영웅, 또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과 '영웅의, 영웅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구약시대의 기골이 장대함을 통해 힘의 제압을 말할 수 있는 네피림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그러한 네피림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헤롯왕과 그 관계되어진 자들의 모습을 의식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출애굽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12명의 정탐꾼이 그곳을 정탐하였는데 10명이 그곳의 좋음을 보고하면서도 그곳의 네피림과 같은 자들이 있어서 비교할 때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는 피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론화되어지는 가운데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인과관계적인 측면으로 해석되어지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존적 선하심에서 예정하신 뜻하심의 결과임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출애굽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기골이 장대한 네피림들과 같은 그시대의 영웅호걸과 맞선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현실성의 사실의 판단에서 불리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적인 위협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이 그와 같은 모습의 성례전적인 측면을 바르게 읽을 수있는 증거있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세례를 배풀었으면서 비록 그 자신이 물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의 현실적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를 인정하셨음에 대한 실제적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가진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례의 여러 뜻이 있지만 구별되어진 사랑받는자라는 뜻으로써 받게 되어지는데 이는 다윗과 같이 사랑받는자(beloved)라는 뜻이고 구별되었다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자로서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존재적 증거자가 되는 것이며 그 앞서 출애굽한 구약 교회의 백성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모두 대표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입장의 증거를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제압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시각에 따라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현실적인 실제의 사실을 비로소 받는 어리석음에서 울게 되어지는 모습과 같이 애통함이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을 이루었던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애굽와 바로에게 말하였던(출 3:14,출 5:1-2참고,) 근거로서 자존의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심과 비교되어지는 사실로써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40일동안 주리시고 시험받으실 때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비로소 사실성을 말할 수 있다는 임의성으로 예수님 자신을 부정하도록 하며 그 사역을 막으려는 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종말의 때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세례요한이 엘리야로서 구약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받들도록 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축복하심을 막으려고 시대의 영웅 호걸을 통해 현실적으로 죽임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구약과 동일한 것으로써의 계시적 전진과 완성을 비로소 부인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 그러한 것을 보시고 공식적인 나서심으로써의 공생애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을 담지하는 그의 자녀들이 비록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며 주의 택한 백성들은 어디서든지 부르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음모적 죄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베드로를 보내심은 주위에 널리 있는 돌맹이들을 들어서 반석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능성을 말씀하시며 또한 사단의 주의 사역의 한정을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하는 것도 지적하시며 상대적인 측면에서 사단의 방해가 있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은 계속되어지며 그의 사역을 주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음의 사역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가운데서의 죽고 사는 상대적인 존재의 시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으로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의 근거'(고후 1:19)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미 세례요한을 보낸 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시킨 자로서의 위상적 동등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본문의 인식을 다른 본문과 동일한 순서를 전제로 하시면서 기록을 귀납적으로 나타내게 하시며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세례요한의 죽음 이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의 이해를 통한 증거를 받게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세례요한의 성례전적인 증거자의 의미를 전제로 볼 때에 예수님이 그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는 구약의 디셉사람 엘리야의 재생적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규정적 차원에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디셉사람 엘리야가 아닌 가운데서 요한을 자존적 자신의 절대 합당한 정당함을 통해서 그를 그렇게 규정하심의 당연한 사실을 근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존재적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로 가르쳐주신 주님'(마 6:9; 눅 11:2)께서는 그러한 신앙고백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정체성을 가지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로 분별하여 받게 된다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실해석이 우리 인생의 실존적 정당한 사실인 것을 받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제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자유케하신 주님'(히 2:15)을 온전히 따르게 하셔서 사단의 가장 큰 무기로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성도는 두지 않고 상대적인 판단의 평가절하라고 하는 개념에 비로소 의미를 두어 대성통곡을 하는 어리석음을 취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 호걸이라고 하는 자들도 감당치 못하는 자들로서의 성도들'(히 11:38)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에 영향을 주었고 그러한 것이 미국을 통하여서 우리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거창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실 신앙도 모두 어떤 상대적인 판단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공감되어지는 아픈 모습을 본다고 하겠습니다.

즉 교회 성장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교회의 본질이 판단받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자연스러워져서 이제는 교회의 개척이 작으면 인정되지않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개척이 위축되고 고사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자든 공감하고 있는 것들과 또 하나님께 드림이 상대적으로 외형적인 어떤 특징적인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 섬김의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교회에서의 섬김. 주일학교 봉사 식당봉사 서로 다투다시피되어질 수도 있는 재정관계등 여러 모습들에서 그 작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으신바가 된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못하는 현실적 인식 강요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러한 앞선 지적과도 재고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것이라도 그 실존적 귀하고 합당하다는 것을 마음에 둘 수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둘 때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작은 것에서도 실제로 '감사로 제사적 섬김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시 50:23) 이루며 나타내는 종들로서의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의 이해에서 비롯되어지는 증거를 바르게 받으시는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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