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월 11, 2007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2007년 5월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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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7, 2007

직임과 명령이해

2007년 5월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11:1-7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

다원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세상 사는 하나의 지혜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앞서 언급한 이 말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 그리고 상대적 여지로서의 개선을 말한다고 할 때에 기존사회에 대한 대화하다는 것으로서의 '데모'(demo)적 개념은 과격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대화라는 개념이 그것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대화를 위한 협력과 상황에 적응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추이에 있어서 유독히, 교회의 질서이해에 대하여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그러한 입장에서 개혁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판단에 따른 상대적 여지를 통한 통렬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로서의 입장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들이 알지 못하지만 앞선 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광야에서의 자녀세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셨던 재앙들과 모세의 홍해의 기적 그리고 광야생활에서의 있었던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목도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고 하심에 있어서 진정으로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은 어떤 것이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것을 당시, 지금 시점에서 말씀하심은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주로 모압지방에서 주어지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모압지방이라고 함의 특색은 참으로 오늘날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압지방이란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음란한 세대를 지칭할 수 있는 구별된 지역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취한 가운데서 그 딸들과 동침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민족의 이름으로 지칭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음란한 곳으로서 황량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발람과 발락의 저주하려고 했던 곳이며 실제적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 이어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에 들게했던 것이 그 지역의 특성인 것입니다.(민 22장 25장참고)

음란한 세대는 어떤 윤리적 통념적인 것보다도 자신들의 임의적 개념의 윤리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간섭받기 싫고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어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타락한 본능적 개념에 충실히 행하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솔직하고 사실인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하는데 익숙해진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정황과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할 때에, 표면적으로는 순종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임의적으로라도 순종하겠지만 내면적인 공허함에서 결국 순종의 사실이라는 개념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광야세대에서 자라난 자녀들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로서 세상 물정이라고 하는 것에 아주 눈이 뜨여진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직임과 그 직임을 맡은 자로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은 상황적으로 당연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며 그들이 순종의 사실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중심이 읽혀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모세는 단도직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임과 그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 지난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앞서 언급되어지고 읽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안으로서의 답변이 되어짐을 또한 읽을 수 있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는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신 11:6)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직임에 대한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한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했던 자는 고라와 심지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위지파인 고로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여야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더욱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음을 인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러한 여론적 입장이 있는 때에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세의 손을 들어주시고 반역한 자들은 땅에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상황만 본다면 미리암 덕분에 모세도 목숨을 건졌고 그러한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었으면 누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도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장에 따라 백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실 때에 달리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음과 모세를 통하여서 인도하심에서 다른 말씀하심이 없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적 당위성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자존적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 당위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직임에 대한 상대적 여지만으로써 그 직임의 실존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자녀된 세대들의 순종하여야 할 직임을 맡은 자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반목일 경우, 그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망과 징벌이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을 판단함에 있어서, 교회의 질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 차이라는 개념만으로 개혁을 말한다는 명분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잘못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실제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개연적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의 진리가 아닌 의견(opinion)으로 교회개혁의 사실을 말하려는 진정 어리석음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 역사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황이라는 개념으로만 주목하는 가운데서,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목으로만 비로소 생각하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기존 교회의 질서에 반목하는 것이 어떤 마냥 의로운 투사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자 신교가 탄생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의 사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적 존재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질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 것이 합당하며 그것이 또한 신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구교에서의 '성직매매'가 있었는데, 이것은 실수에 따른 윤리적 잘못이라는 개념과 다시는 그런 행위가 없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봉합되어질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직임에 대하여서 바르게 기억하지 않은 자들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에 대한 불순종으로서 죄악인 것입니다.

윤리적 또한 연약함에서 있을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으나, 주께 불순종으로서의 성직매매라는 행위는 분명 죄악이며 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고 그것은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에 대한 직임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인 개념과 임의적 절대성을 가질 뿐 진정한 성직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 믿었더라면 성직을 가지고 그 특권을 가지고 재정을 채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번참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직을 사고 파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직임에 대한 개념이 욕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질서와 그 가운데서의 직임은 구별되어진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고 그 교회질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구별하여 주의 몸된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실제적 중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교의 교회의 질서로서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있게되어지는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상대성에 절대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그 질서적 차원에서 그것을 시행하도록 질서가운데 있게되어지는 종들의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그것을 통해서도 바르게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과 그 기도의 사실을 믿는 것이 옳은 모습인 것입니다.

명령을 지킴에 대하여서

주의 명령을 지키도록 말씀하시는 그 배경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외에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알라'고 하심(신 4:39)하에서 십계명이 주어졌음을 모세가 증거하고 있는데(신 5:5~22),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인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들의 잘못까지도 구별하셔서 증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기록된 말씀하심을 통해서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말씀을 받는 가운데 그 주의 말씀으로 듣고 명령을 지키는 순종의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전하는 자가 절대 실수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납득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전하는 자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실수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까지도 성도들이 주의 말씀 하심 안에서 선하게 달리 받을 수 있다는 측면과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심안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제사장적 권세가 주의 말씀하심을 구별하여 받음의 사실적 정당함을 가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적 영광으로서 그 직임적 권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인데 왕적, 선지자적, 제사장적 권세가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나타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대적 보편상식의 판단하에서 자유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비판이 정당한 것과 같이 기만되어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설교 말씀을 비롯한 주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을 따라야만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 여지가 있음에 대하여서 앞서 언급한 중심과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순종의 사실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해제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임의적 당위성에 따라서 순종함의 부당함을 잘못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사태파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함을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상식보편이나 거기서 거기인 철학적 당위성은 오히려 주의 질서적 개념에서의 직임과 그 명령의 순종의 사실에 동의하고 다른 당위성을 말하는 핑계를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나 주의 가르침으로서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안에서 실제화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순종함에 합당한 것입니다. 상황적 정황적 보편상식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오히려 그것들을 판단함의 근거적 사실로 자리매김되어짐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의 정하신 직임과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께서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받지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셨고, '항상 예수님께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상대적인 것을 사실화 시키는 가운데서, 상식적인 보편적 철학적 당위성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별하고 사실화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적 권세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인식과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서 교회에 개혁이라는 임의적 입장을 통해서 형제들을 라가라하는 가운데 주의 판단을 받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왕같은 제사장들로서의 성도임을 기억하여 그 사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때에도 주의 질서와 그에 따른 직임을 존중하고 바르게 이해하여 그러한 직임을 맡은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회중 가운데서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직임과 명령을 지키는 종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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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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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4월 20, 2007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2007년 4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1:1-14
아름다운 명령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허물이 안보인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콩깍지가 씌였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안 보인다기보다는 보고싶지 않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또는 그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디어져가는 가운데서 더 예민한 관찰자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더 그 특정인의 허물이 크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아는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혐호하게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의식함의 여부에 비례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규칙과 삶의 방식에서 어떤 특정한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관계정리를 위한 그 잘 아는 사람에게 비난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또는 그렇게 해야하는 당위성에 놓일 때가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시대를 막론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로는 '너하고 안놀아, 너는 못생겼어, 너하고 나하고 수준이 달라, 수준이 다르다니깐, 나는 너하고 달라, 너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단말야 나는 너 모른다, 저리 가'와 같은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다 획일적인 것이 아니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선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현상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 선함의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악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 앞에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뉘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디모데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는데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짓없는 믿음이 디모데의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디모데에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받음으로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임을 말하며 그러므로 주의 증거와 주를 위해 갇힌자된 사도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나타나심을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를 인해서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기가 의뢰한 자를 안다고 말하고 있고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도로서 성도된 형제가 부끄러워질 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진다는 잘못된 인식의 강요가 주어질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와 또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것과 같이 인식되도록하는 경향의 세상의 정체성 없고 잘못된 인식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죄악 가운데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바르게 볼 수 있고 받지 않는다면 주의 형제를 '라가'라하는, '바보'라하는 자로서의 모습으로 '주의 판단'(마 5:22)을 받을 수 있는 자로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낳은 자로서 아들처럼 부르고 있는 사도 바울의 평강이 먼저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그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사랑받는','honouring God'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을 표현하는 자로서의 증거적 존재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편지하는 그것도 후서라는 특징을 읽게 된다면 재차 강조하는 내용적 증거임을 더욱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재차 누누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으로서 평강으로 축복하며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 주의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즉 디모데전서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라'(딤전 1:4)고 했던 것입니다.

신화라고 할 때에,'역사 이전에 기원을 둔 이야기. 사람의 지혜가 아직 열리지 못하여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활동으로 상상한 데 기인한다.','지혜가 미개한 상고(上古) 시대의 신을 중심으로 한 전승적 설화'이런 이야기나 또는 '신화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설화나 전설 또는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등 너무나도 다양하게 쓰여질 뿐만 아니라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용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고전학자 G.S. 커크도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무리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도리어 신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라는 백과사전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 기준이 없는 임의적 상상적 보편적 인식추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사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 의미부여에 따라서 사실화 또는 사태파악에 있어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학문이라는 개념에서는 원동력으로 임의적으로나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데로 '실제적이지 못하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특성을 기억할 때에 시대정신 또는 상황적 여론의 통념화등을 들 수 있는 것으로도 현대적 신화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정 개인적으로도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인사에게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고통과 같은 루머의 통념적 비판과 같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사도 바울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참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적 비교에 따라서 형성되어진 잘못된 실제적이지 못한 통념은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진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임'에 대한 것을 강조해야 했고 그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었고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볼 때에 그런 죄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여론적 통념은 디모데에게 너무나 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죄수로 복역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말한다고 하면 상식적인 개념에서만 본다면 납득의 당위성은 이미 상실되어진 것이라는 판단이 있고 그러한 납득당위성이 상실되어진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고 하면서 감옥에 가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한다면 그를 풀어서 더 크게 일해야 할 것인데 그럴 기미는 그당시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사도라는 자가 그렇게 매이는데 '우리도 그 죄인의 사슬에 매이라고 가르치고 있냐'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말하는 하나의 재구성된 신화적 통념과 생각의 기준들이라고 하는 것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디모데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단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그러한 연약함에 사도 바울은 어릴적부터 디모데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과 사도바울이 비로소 복음을 전해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전통에서 있는 자이었음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하게 증거하는 자로서 생각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어떤 부족이라는 상대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상대적인 입장에서 복음의 납득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이 부정되어질 수 있다는 임의적 판단의 통념화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당위성이 없는 것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설득하려고하는 어리석음과 그에 따른 상대적 판단되어질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다는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비로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두렵다는 개념의 근거적 판단이 이미 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지만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실 때는 실재적인 실제적으로 합당하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예가 '다윗의 작은 물매돌'(삼상 17:41~50)이며 '주님께서 받으신 아이의 '오병이어'의 능력'(요 6:9,5~13)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 판단을 받는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비로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도 구별하여서 좋은 것을 선히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의 낮아짐, 주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의 사역의 실패나 또는 그의 가르침으로써 나타나는 주의 복음의 실존을 부인가능의 당위성을 실제화할 수 없는 것이 되며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럽다는 인식의 실재와 실제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전부터 주신 은혜대로 한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서 종들의 사역의 비교적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폄하되거나 그로인하여 부끄러워하여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복음의 실존가운데서 그 예정하신 은혜를 따라서 직분과 그 행함의 당위성을 마음에 둘 때에 '옥에 갇힌다는 것'과 같은 현상적 인식적 납득당위성이 없다는 실제성이 없는 규범적 신화에 착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신앙의 중심적 증거를 하고 있는데, 12절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자신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뢰하는 자를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하심은 선하심은 상대적인 판단과 그 능력이라고 함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주관하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즉 예수그리스도의 자신을 계시하심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의 실존의 판단 여부를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도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께서 기쁘게 아릅답게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6~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뢰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라고 말하며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인생은 서로 평가하고 냄새나고 그것이 본래성인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선히 지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하신 하나님의 뜻하심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기억할 때에 교회에서 있게되어지는 여러가지 선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그 충돌이라고 함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악함과 또 부끄러움과 그로인한 배척으로 인해서 마음상하는 것과 같은 모습들의 모습들이 실제적인 본래성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은 본래적인 것을 비판해야 그 당위성이 비로소 성립되어질 수 있는데, 자존의 절대자와 그의 재가를 받게 되는 인식과 판단 외에는 그 성립을 말할 수 있는 실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그로 인한 믿음, 그 분량에 따른 믿음의 선함과 그 선함의 충돌로 있게 되어지는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부끄러움을 인하여서 형제를 부인또는 배척하는 가운데서 또는 복음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과 행함의 정당함을 찾는 일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죄악가운데서 선의 결핍이라는 가운데서의 악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악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기쁘시고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심과 그 인식의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의 낮아짐과 상충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모습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까지도 기쁘고 아름답게 보며 위에서 언급한 시편과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그 명령에 순종하시는 자리에 서심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교회의 직분이 있는 분이 '안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신앙의 당위성을 놓는 것과 같이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의식도 결여되었으면서 자신의 합리성에 기반해서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난하는 어리석음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을 강변하다가 입장이 바뀌면 '나는 열심히 달렸는데 돌부리하나 때문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잘달렸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모습들 그리고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이 교권을 휘두르고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도 않았으면서도 판단하고 여론화시키고 부끄럽게 만들고 부끄러워하고 이런 모습들, 희망의 사실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들을 회개시키시고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그의 행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과 상관없는,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을 능히 이루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대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비록 현실적으로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합당하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도 선히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항상 뵙기 때문에 기뻐하고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배척하여서 당위성을 찾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그런 행위가 정당한 것은 아니며 그런 일이 없어야하고 없도록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고 복음과 복음을 인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을 받은 디모데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하심을 깨달아, 비록 우리의 연약함에서 있게되어지는 선함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악함과 형제를 부끄러워하여 배척적 당위성을 찾고 싶어지는 유혹이라고 함이 강변하고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복음전함을 아름답게 보시고 그것을 본 사도의 증거로서의 말씀인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듯 일어나, 형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제 사랑을 이루어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큰 칭찬'(계 3:7~13)이 있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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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4월 08, 2007

순종의 기초석

2007년 4월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8:11-20
순종의 기초석

어떤 아이들을 보면, 소위 영악하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나이에 비해 조숙해 있는 아이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개 일반적인 안정된 가정이라는 조건보다는 참으로 어렵게 자라온 아이들의 모습에서 좀더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어른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가운데 현실관이 뚜렷할 수 있고 그것은 잘 준비되어지고 교정되어지지 않은 경향이 있을 수 있어서 극단적일 수도 있는 특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주 잘 균형잡힌 판단으로서 생각하는 아이들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가정환경이라는 것과 여러가지 여건에서 그런 생각과 판단으로 생활해온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앞선 자들로서 사랑과 그 사랑의 중심으로써 그들의 인식의 평안과 균형잡힌 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광야시대를 지나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있는 하나님 앞에 선 모세의 설교는 그와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오히려 원천적인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하였던 세대들은 모두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죽고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자손들과 갈렙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세대와 신세대들로서, 모압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소위 속된 표현으로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 고생이라고 하는 것과 함께 자라온 세대, 입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막 유목민인데 이제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갔을 때에 생활방식이 달라지는 가운데서의 문화적 충격과 그것을 현상적으로 읽어낼 이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모세는 걱정이 되었고 그것에 대하여서 이제 순종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으려고 설교하고 있는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은, 오늘 본문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순종의 기초석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말씀이 나타나고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모세가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가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그들의 우양이 번성하며 그들의 은금이 증식되며 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것 같아,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땅에서 이끌어 내심과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두렵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자신들의 능과 자신들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 수 있음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답변으로써,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 그들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임을 말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생활양식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라는 개념에서 약삭빠른 판단을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며 합당하게 증거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함을 '아편'에 비교하여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잘된 것인지에 대한 것과 그것의 합당한 사실와 진리로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지만 현상적 개연적 입장에서 강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세상의 입장일 수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다 적용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정한 참된 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인생의 고통을 위안해주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돈을 받게 되는 자들로서 진정한 신앙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만적 요소로 돈까지 강탈하는 이른바 강도의 굴혈로 말할 수 있고 그런 것은 사람을 망치는 종교로서 아편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자신의 성전을 깨끗게 하심을 말씀하시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함의 사실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막 11:15~18)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와 신앙과 달리, 합당하지 못한 것이 세상에 상대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 허용되어진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과 거룩함을 구별하여서 받게 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거친 광야에서도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서 그 고통의 거친 곳에서 소망의 문을 준비하며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편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고통이 없어지는 상황적 논리와 환경이 조성되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힘든 사람들이 비록 그 사람을 시들게 하는 것이라도 힘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가운데서 유익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개연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상황논리적 당위성을 열어놓고 하나님을 필요적 개념에서의 요청적 입장과 실용적 개념의 판단하에서 인식적 신앙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현상적 인식으로서 당위성을 상대적으로 가질 수도 있는 개념입니다. 물론 가질 수 있다는 것과 합당하다는 것은 달리 나타날 수 있음은 그들로써는 기억해야 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어릴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광야에 있는 신세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기존 여호수와와 갈렙의 족속들은 어릴때부터 그 고통의 생활을 지내온 까닭에 그들의 현상적 인식에서 본다면 위에서 말한 그런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사막 유목민의 생활, 모래바람과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어져서 생물이 살기 어렵고 물이 없고 그 가운데서 출산의 고통과 사랑받아야 할 유년시기에 그러한 안정된 조건적 입장이 전혀 허용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성장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나온 앞선 세대 그 고통을 잊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고통을 위한 치료제라고 하는 '몰핀'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상대적인 것으로만 볼 때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 정착생활을 하게 되어지고 그러한 정착한 자들과의 상관성이라는 보편적 이해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 상황적 판단인식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보다 안정되어지는 생활 형태에서 이제는 고통을 이기기 위한 몰핀과 같은 효과로도 인식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이제 필요없다는 것도 상황적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강요되어질 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상황 논리와 관계라는 보편성에서 이교적인 사람들과의 상관성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재고해야 하는 가운데서 자기 의식이 주권적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임의적으로 정초되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신 8: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는 말씀을 마음에 받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을 바르게 놓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심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대적인 정황적 논리라고 하는 것과 인식의 상대적 변화추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상황이 안좋을 때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든가 상황이 좋아지고 안정되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유익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아도 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본래성인 것같이 착각하는 것은 진리로서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은 그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 절대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상대적 표현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유익이라는, 상황적 논리라는 상대적 정당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멀리하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일반 타종교들에 대한 현상적 판단이 가능한 몰핀적 개념의 위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은혜와 섭리라고 하는 것과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계시의 상황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경험해왔고 그들의 소위 그 고통속에서 잔뼈가 굵어오면서 체험했는데 그것을 또 이렇게 인식적으로 강요하는가 하는 그러한 간과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이들이 아빠와 생활해오면서 아빠와 같이한 시간은 분명 있는데, 아빠와 좋은 기억들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좋은 기억들 속에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아빠들도 다 똑같은데 아빠만의 좋은 모습, 그리고 아빠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좋은 기억들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하나님만의 계시적 특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율법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는 측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신의 행함의 상대적인 증거를 취함에 있어서 비로소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넘어가며 그들의 관계성의 보편성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그 강요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율법을 이미 지킨 자들로서의 신앙고백으로서 또 지켜나가는 것으로써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음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만의 특수성, 남들과 구별되는 그 특징, 그것은 그 좋은 기억과 앞으로의 좋은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자존적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인 여러 정황적 보편성과 비교되어지 않으시는 자존적 절대 보편성과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구별되어지는 상대적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는 권세를 성도들에게 마치 아비가 아들에게 주심과 같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며 부활주일을 기대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는 그 죽는다 산다(to be or not to be)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고 하심'(고후 1:19)을 마음에 두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석이며 순종의 기초석임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와 죽으심의 의미는 바로 이런 우리 인생들에게 죄를 사하시며 구원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인생의 존재와 행보에 대한 사실을 구별하여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동의어가 되어지며, 예수님이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고 하심'(마 6:9)을 마음 속에 둘 때에,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임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그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구별하여 판단하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서 말씀하신다는 것, 즉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 정당한 말씀과 사실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고 또한 받으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는다'는 그 말은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대적인 여지가 있을 수도 있고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심을 기억할 때에 그 말씀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정한 사실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식적인 선에서 시무룩하게 지내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으며 자존의 절대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의기소침이 아니라 더욱 주의 말씀하심이 나의 모든 것이며 진정으로 합당한 것임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할 수 있는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신 8:17)의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내가 교회에 나왔고 교회가 어려울 때에 내가 그래도 일이 되도록 힘을 썼다는 생각을 할 때에 오늘날도 그와 같은 자기의식적 임의적 주권을 마음에 둘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래도 하나님께 그런 말은 못하고 또는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할 수 있고 겸손이라고 판단하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임의적 주권이라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의 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는 중심에서 판단한다면, 내가 결정한다는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의지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신 것임을 기억할 때에 현상적인 인식과 판단으로써 나의 모습의 주권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본래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합당한 자리세우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무엇인가 상대적인 여지라고 하는 것에서 어떤 것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인 존재인 '나'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렸다고 하는 것이나 또는 스스로 했다는 것의 기정사실이 비로소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마음에 잊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눅 17:10)은 도덕적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비로소 말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고백을 하게되는 자리에 세우심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순종의 기초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는, 무엇이 진정한 실제냐는 세상의 인식들로서의 임의적인 인간의 주관적 주권이 필요에 따라서 요청할 수 있는 고통을 위한 몰핀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며 합당하게 우리의 존재를 구원하시며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자이심을 분명히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때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심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존재와 사실을 규정하는 사실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고난과 죽으심을 마음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함을 말할 때에, 무엇인가 어려움을 당해야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참 모습은 그런 고난이라고 하는 경험에서 어쩔수없이 붙드는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삶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야 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대해 말을 많이 하면서도 그 섭리라는 것의 일상성이라는 것에 식상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아바 아버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아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축복속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잊지 않는 종들로서 순종의 기초석을 좀더 바르게 놓은 가운데서,'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뜻하심'(잠 16:7)을 나타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함'(마 5:9)을 받으시는 그 영광을 주께 돌리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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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29, 2007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the fruits in His times)

2007년 3월2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1:15-33
마른 무화과 나무를 보며

요즘에 우리가 먹는 식단을 살펴보면 상당히 풍성하고 또 미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과일이나 채소에 있는 비타민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적게 섭취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것도 우리 몸과 정신에 좋은 것인데, 그러한 선호도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과일이나 채소 등을 말할 때에, 아무렴 제철에 나는 과일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주목되어질 수 있는 '제철' 즉 '일반적으로 특정 과일이 나는 때'를 말하는데, 이 제철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기간적인 조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닐하우스나 또는 속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까지 생각하면 시간의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은 의미없어지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날씨라는 것이 변화되어지는 계절의 변화 추이를 보이는 가운데서는 '제철'이라는 말이 또한 변경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적 개념에서도 우리는 열매맺게 하는 수확적 입장의 기간조정과 때를 분별함에 있어서 임의적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그 때라고 하는 즉 수확의 시기라는 것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일상적 개념보다도 수확적 개념에서 시기조정이 있게 되고 또한 그 선함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과일은 어떤 한 때에 먹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적인 측면으로 더이상 주장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일이라고 함의 열매를 수확함의 시기에 대한 시기조정이라고 하는 것으로써의 때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주님의 뜻하심의 때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주의 뜻하심의 때에 부요할 줄 아는 그러한 분별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말할 수 있고 주께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자리에 서는 은혜의 자리에 섬이 옳은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15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심과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심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 것인가 꾀하고 있고 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함은 무리를 의식하여 예수님을 두려워함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20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성밖으로 나가시는데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비유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인 27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라는 질문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의 하늘로부터의 증거적 정당성을 묻자 그들은 답변을 상황에 따른 판단으로 회피함이 기록되어 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주의 권한의 정당함을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마름'이라고 하는 것과 '대제사장들의 모습'이 동일시되어지는 가운데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의 중요성과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순서적 입장에서 또는 맥락적 입장에서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과 그 판단이 기록되어짐이 그것인데 그것은 비교되어지는 두 개념으로써의 성전을 표현함에 있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개념과 '강도의 굴혈'이라는 개념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중심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예배당과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성전의 거룩함의 실제적 입장을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는 '강도의 굴혈'의 실제적 판단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의 개념은 '야곱의 모습과 같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고백이 되어지는 것'(창 28:16~22)으로서 이해하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 그 앞서 성전이라는 개념이 예배처소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바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 '내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구원받아 이미 아버지집에 왔습니다는 그 신앙고백을 한 예배처소를 정하고 나와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구원을 이루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에서부터 우리의 존재와 삶에 대한 정당한 사실을 구별하여 받고 그 분복을 이루어나가는 자들로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힘써 노력하는 삶자체로서의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처소로서의 성전을 기억할 때에 과연 교회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심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만민이라는 개념을 또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한다면 임의적인 만민제사장적 개념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주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말씀하심 바의 뜻하심에서 역사하심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만민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는 자기 자신과 또한 예배처소라는 개념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서 거룩한 처소이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면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한다면 그것은 결국 돈벌이 하기 위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는 식으로 말하고 그럼 없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에 있다는 것에 상황적 유익이라는 개념이나 여러가지 조건적 합리성을 말하는 도박의 원리적 개념으로만 의식한다면 여전히 확실성의 의문은 제기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고 결국 '하나님이 계신가에 대한 시험이 실존할 수밖에 없는 시험'(출 17:7)에 넘어질 수 있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같으면 레오 10세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마음껏 즐기자라는 그러한 입장은 언제든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1번참고). 즉 돈을 벌기위한 강도의 굴혈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냐 강도의 굴혈이냐는 그 인식의 기저에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의 실제적 사실이 좌우하게 된다는 것으로써 주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심으로 증거하신 계시적 증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눈을 여셔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말랐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서의 성례전적인 존재로서의 마른 무화과나무를 의식하도록 하심의 시점을 생각하도록 하시면서 본문 22절에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는 우리 성도들 보다도 사태파악에 대한 인식이 예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분별력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른 모습을 취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의 의미를 현상적인 개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늘 본문 산을 옮기는 것으로써의 믿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있어 기도하면 산을 옮긴다면서 하는 조롱과 함께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적인 나타남이 없으면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기도응답의 실제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개념으로 사태파악이 가능하다고 강변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요 그리고 그 사태파악도 그 역사속에 있게 되어지는 관계로 그 시간이라는 개념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판단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적 의미에서 비로소 실제적인 판단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할 때에 그러한 것이 있게 실제적인 것이지, 임의적으로 '믿습니다'라는 자의적 믿음의 현실사태판단 요구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믿지 않는 자들의 비판적 판단도 빗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실존과 행함과 그것의 정당함의 주관적 사실로서의 기정 재가있는 믿음이 되어지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과는 다른 가운데서도 실제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담아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자기를 기만하는가 하는 것의 판단이 요구되어지고 분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분별 못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자칫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판단은 우리 성도들에게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전을 깨끗게 하라고 하심 즉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종들로서 세워지도록 말씀하심에 그 증거하심의 정당함을 말하는 권위는 무엇이냐는 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 예수님은 죽음 즉 존재의 유무라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되어지는 것'(고후 1:19)으로서 그가 그렇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심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자로서의 권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에도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것을 이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심이 무엇인지 그들은 의아해했던 것입니다.(막 9:31~32) 하지만 이미 주님을 믿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를 받은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러한 고백이 또한 씨앗으로나마 그들에게도 있었다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하면서도 상식보편적 개념의 자리에서 비로소 신앙의 실제를 마음에 두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무리를 무서워하여 예수님을 잡지 않았고 무리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식을 의지하였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들의 열매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읽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라진 버리운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말씀을 맺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시장하심을 말하는 앞선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였는데(요 4:32~35) 그것은 우물가에 물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생수라고 하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함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비유 된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뜻하심을 생각지 않고 제철을 따라 열매맺을 때가 아님을 따르는 무화과는 주께서 주시는 말씀하심으로써 자라게하심의 자리에 서지 못했던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샘물을 먹지 않은 가운데 다시 목말랐던 것(요 4:13~14)이며 그것은 마른 무화과나무의 자체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심'(빌 2:13)을 기억할 때에 일상적인 뜻하심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는 주님의 때를 보아야 하는데 그것에 민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삶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규정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고 가인과 같이 임의적인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의 받으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반문하는 것에서 주목하게 되는 그들의 인식의 보편은 결국 상식보편적인 개념에서의 신앙의 윤리의 실제적 의미를 생각하고 있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 그들이 무화과나무와 동일시되어짐을 기억할 때에, 열매맺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따라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신앙을 규정하려는 자였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의 기본은 하나님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상식을 비로소 의지하여서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으로서, 그런 것과 비롯된 인식들도 역시 주의 뜻하심의 때를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자기자신들과 함께한 자들을 기만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돈을 위한 그들의 지위를 위한 가운데서 시비를 구하는 자들로써 마른 성내를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이나 또한 철학적 입장의 사람들의 요구와 판단에서는 현실적인 극단적 생각이나 이상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에 신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는. 더 나아가서 인식의 강요를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과는 달리 우리 성도들은 상식이라는 개념을 비로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도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중요한 실재로서의 규범적 역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상식도 구별하여서 편견되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상식있는 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마음에 두는 것은 그 상식의 실존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진다는 것과 그 개체적인 판단도 역시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로소 사실화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스코틀랜드 상식보편철학이 영향을 끼친다는 상황을 볼 때에는 그것을 분별하고 또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한 것이면서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전통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매너리즘에 입각해서 단순한 신앙행위의 반복과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주님의 뜻하심과 그 때에 부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전통을 해석하고 지난 전통과 차이가 있거나 다른 실제적 입장이면서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가운데서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생수와도 같은 말씀에 입각해서 사실을 분별하고 부르심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이 있는 자들이 진정 수가성 여인의 모습과 같이(요 4:9~30),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의 시장하심의 때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즉, 주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 양식을 드릴 수 있는, 제 때에 과일을 맺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며 그 과일과 같은 것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또한 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 자신을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깨달아, 예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뜻하심을 깨달아서, 주의 인도하심과 뜻하심에, 주님의 뜻하심의 때에 열매를 드리는 가운데,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오는 종들로서, 주 앞에서 잘했다 칭찬함을 입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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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3월 06, 2007

마음에 두는 것

2007년 3월5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신 4:32-40
마음에 두는 것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지든 있을 수 있고 또한 의식해야하는 당위성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절망의 고통으로 삶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혜롭게도 자신의 앞날을 발판으로 삼게 되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정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기준을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삶을 부정으로 규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서 사람들이 그래도 긍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어도, 삶에 대한 긍정이 옳다는 생각을 해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기업들 아내 자녀 그리고 소중한 우리의 이웃들을 볼 때에 다시금 힘을 내고 있고,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긍정에로의 판단을 내림이 분명 옳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한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생각이면서도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써의 규정되는 사실로서 그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서 현실적 규정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 신명기 이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 성도들과 일반 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마음에 명심해야 할 것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수용여부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결정이나 판단의 여지를 주장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있고, 심지어 '어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패러디하고 있지만'(링크된글 각주1번참고) 그것이 이미 기각되어진다는 것도 전제적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40절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나간 날을 상고해보라고 하면서 불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이끌어내심을 받은 자들이 없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인 것으로써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인 36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려고 듣게 하시며 열조를 사랑하신 이유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과 기업을 주려 하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로서의 실제적 성례적 역할을 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에 꼭 명심해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명심해야할 것으로써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문맥적 증거와 또한 그 앞서 명심하라고 하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했을 때에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 하고 나온 어떤 '한 사람'(막 10:17~31)의 한가지 부족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어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라는 말씀을 하시는 배경적 문맥적 부분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신명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지방에서는 발락이 발람더러 저주하라고 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축복받은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여부와 상관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단의 시험이 있어서 음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게 되어지는 시련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하심과 그로 인한 신앙적 정비와 분명한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민수기의 마지막장의 내용이 되어집니다.

그부분과 상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명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음란한 세대에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명심해야 할 것으로 이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4~35)

모세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심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리고 그 앞서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왔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좋은 땅이지만 자신들이 차지하기에는 소위 '그림의 떡'이라는 식으로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 12명중 10명의 말에 공감한 이스라엘은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의 정당함보다도 현상적 현실적인 판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공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사실규정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게 하시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실제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합당하게 스스로 취하시며 상대적인 것으로도 실제적인 것으로 규정하심의 정당함을 배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의 기본적 근본중심이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노중에 다 죽게 되었고 이제 그 광야세대의 젊은이들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그러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그 가운데서 실재라고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실제의식을 가짐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을 명심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미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주어졌던 십계명이 다음 본문 5장에서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십계명의 그 존재와 그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이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언급되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말하는 조약적 개념 즉 불평등의 개념의 조약이니 임의적 납득되어질 수 있는 상정적 주권이니 하는 그러한 점에서 하나의 언약개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순함은 상당히 모순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그러한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청년(막 10:17~31)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개념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리성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그냥 개연적인 선함의 대상으로써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비로소 선하신 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자존의 선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심으로 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거처럼 어렵다고 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에서는 율법의 완성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에서, 생각의 발상적 전환을 생각한다면 바늘귀라고 하는 것을 낙타만큼 크게 만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보편화된 바늘귀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구별되어진 상식선에서도 알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행함이나 또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소위 '힘'이라는 개념으로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 재물이 없으면 구제도 못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행할 능력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 위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 행할 자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지도자적 권세자들의 여론의 반전적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하시는 주의 말씀에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것'(막 10:27)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개념의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적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다 하실 수 있다는 규정적 사실을 천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 그것을 명심하지 못한 이것이 그 청년이 모든 것을 행하고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던 '부족한 한가지'(막 10:21)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에게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열심과 형태를 갖추고도 그 합당히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사실을 마음에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느냐는 것과 행위없는 구원이냐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도 서점가에 맴돌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명심하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한 사랑받고 있었던 한 사람의 모습과 비교되어짐을 주목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은 삶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왜그런지는 말하지 않고 긍정의 실증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심하라고 하셨고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우리의 삶에서 좀더 바르게 합당하게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막연히 긍정하면 유익하다는 말보다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명심하라고 하신 그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둘 때에, 참되게 주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실제적인 정당함에 따라서 나의 모습의 현상적 어떤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것이 부과되어진 나의 삶은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긍정의 사실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모습에서도 더욱 긍정의 사실을 찾는 삶의 긍정에로의 중심과 그 사실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돌파구로 실증적인 개념, 그리고 합리성에서 파생되어지는 소위 '객관적 존재의 근거지움'과 같은 노력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씀하시는 그 명심하라고 하심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여전히 그 한 청년의 고민은 계속되어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에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유리라는 개념의 광야에 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래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가운데 자신이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중심의 사실을 명심하는 것의 하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서, 참으로, 음란한 세대에서도, 자기 백성을 계수하시는 선하신 주께서 주신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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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2월 13, 2007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2007년 2월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9:30-37
예수님이 세우신 어린 아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의 인식의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는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을 선호하는 기호도는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임의적으로 정죄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만이 꼭 어떤 기호도를 넘어서 보편적인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하는 판단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함도 유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세의 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단순한 분으로서 묘사하는 듯한 임의적 규정때문에 그러한 전통속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유치한 것이 미화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에 서는 전통적인 해석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기호도에 따른 쉬움을 말하는 것을 떠나 임의성이 있는 어그러진 이성의 모습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주의 말씀으로써 그 어린아이와 같다는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읽게 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유년시기를 다 거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에 대한 생각들과 또한 교육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러한 유년시절이라는 인생의 작은 모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의 빛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의식할 수 있도록, 그러한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을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33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0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지나실 때에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심과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가운데서 노중에서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깨닫도록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과 그를 영접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의 인식을 가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것과 그로 인한 것으로 받게 되는 쟁론에 대하여서 꼭 기억해야할 것으로써 어린 아이를 통한 증거를 받도록 말씀하심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노중에 제자들의 토론한 것 즉 쟁론한 것은 '누가 크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과 제자들이 '쟁론하였음'이라는 것은 말이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디아로기조마이'(dialogivzomai)(막 9:33)라는 말이고 후자의 말은 '디아레고마이'(dialevgomai)(막 9:34) 즉 전자는 'reason 11, dispute 1, cast in the mind 1, muse 1, think 1,consider 1; 16'라는 뜻이고 후자는 'dispute 6, reason with 2, reason 2, preach unto 1,preach 1, speak 1; 13'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교해보면 그 특징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마음에 두는 것으로써의 생각하는 것들 고려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논쟁이라는 개념으로써 이유라고 하는 개념적 의미와 그것을 나타내는 가운데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님께서 너희들은 어떤 중심을 가지고 그러한 서로의 입장으로서의 이유와 그것을 토론하였느냐는 말씀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쟁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었다는 개념보다는 이유라는 개념의 표면적 의미가 비로소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입장에서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그들은 마음에 무엇인가 옳은 것을 두고 그 입장의 옳고 그름에 따른 논의가 아니라 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임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그 부재되어진 그 중심에 마땅히 두어야 할 것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하심으로 어린아이를 통한 증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그 부재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주의 뜻하심으로 주목되어지는데, 그것은 주님의 부활하심의 사실성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중심과 그들을 영접하는 기본적인 모습의 합당함을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으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의 전반적인 문맥적인 측면을 보면 이 쟁론과 더불어 변론하게 되어지는 것과 함께 두 번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한 것으로써 믿음과 능력의 시비가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오늘 누가 크냐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8장에서 '가이사라빌립보에서 비로소 주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매'(막 8:27~31), 깨닫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막 9:10), 이어서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막 9:32)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심의 그 증거는 예수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과 사는다는 것의 판단의 시비는 존재에 대한 상대성이라는 판단의 절정적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은 상대적인 존재와 사유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과 예수님의 가르치신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여지가 있다는 현실적인 비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여도, 비로소 그것의 실제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고 하셨던 것이며 그것의 재가를 공적으로 증거하심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모습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할 때에 자신의 모든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자신의 살아있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과 예수님에 대한 연민에 대한 충성적 입장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그러한 일이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으심과 부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되어지지만 납득의 당위성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의 뜻하심과 말씀하심이 상대적인 자기 표현이 절대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말씀하심에서 자신의 믿음의 당위성을 헤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잠시 접어두고 축전지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호주머니에 넣어서 사역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즉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막 9:28~29) 그 믿음의 실재와 그에 따른 믿음의 사역의 실제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실적 입장에 서지 못하여서 주의 책망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막 9:19참고)

그리고 주의 사역을 감당함에는 그 사역에 따르는 주의 영광이 그 사역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알아주고 그에게 나타나는 그 달란트로서의 사역을 축하하고 주께 감사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넘어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사실규정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합당하게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렇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재가되어진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받음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가 되는 이유임에 따라서 주께서 주신 달란트와 그 사역과 영광은 비교판단되어지는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자존적 증거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적 규정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비교우위라는 개념의 판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직분적 서열이 인격의 서열과 존재의식의 서열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가 교회 내에서의 창조적 질서라는 개념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여성권위적 개념에 신장적 입장으로 해석함에 당위성을 말하는 어리석음의 개념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역사적 계시의 형태만 취하여서 여성의 남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개연적 가능성의 당위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가히 미리암의 죽음과 비교되어질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살렸던 누이로서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모세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에 모세에게 그의 지도자적 역활을 내놓으라는 입장을 취함에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로소 심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들의 차이가 있고 질서적 의미에서 그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들의 그 차이는 비교우위적 영광과 실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과 그 영광과 일반 성도들의 섬김의 사역과 그 영광은 존재의식의 비교우위적 개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와 같이 동일하게 주께서 주신 것이라는 정당함에서 그 직분과 그 섬김의 사역과 영광의 실재의식을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것은 그 실재의식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계시적 증거로서 예수께서 자존의 성부하시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비로소 바르게 두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세우시며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 즉 하나님을 영접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성도를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이들은 아빠가 엄마가 좋은 것, 맛있는 것을 해주면 아이는 '우리 아빠 최고' '우리 엄마 최고'.. 아빠말과 엄마 말이라면 누구의 말보다도 신뢰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주목합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고백의 실제적인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판단을 받지 않는 항상 예만 되는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임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하나님나라에 대한 실재와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히 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의 시대는 열두 사도의 시대에 이미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의한 영성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사실 규정의 입장을 취하게 하시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을 항상 계시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계시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성별되어질 수 있는 어떤 특정적인 것을 일시적으로 말할 수 있고 말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해석적 당위성과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린 아이라고 하는 증거는 특별계시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영역이 차용되어진 것으로써 그 해석의 방향이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은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어린 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니까, '미숙'이라는, 역사적으로 아직 성장이라는 개념의 판단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받게되어지는 그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은 기본적이며 또한 완성적 개념의 아직과 이미가 함께하는 것으로 일상적인 시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숙하면, 부모의 생각과 달리 잘 판단할 수 있는 성인으로써의 독립을 말할수 있는 것에 비교하여, 하나님에 대하여서 그대로 믿다가 회의할 수 있는 인생의 모습으로 비로소 이른다는 개념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의 판단에서의 실제의식일 뿐 이미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란 것이 있는 성도들의 실존과 신앙중심은 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이 성숙해가면서도 이미 온전한 하나님이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미약과 미숙이라는 개념을 성도의 존재적 시비로 확장해석하는 것은 실제의식이 결여되고 편협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생각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중세에서 하나님을 단순자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수학적인 개념의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임의적으로 정의하고 행하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실제의식을 가질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실제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면죄부라는 윤리적 파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그것보다도 그 본래적 입장은 바로 그러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에 대한 의미와 사실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롯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전통은 하나님을 항상 철학적으로 단순자로 이해하고 그의 형상적 입장이라는 말이 가능한 가운데서 신앙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인위적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어떤 어린아이들의 유약함과 미숙함을 모방하는 듯한 행동이 어린아이의 신앙과 같은 모습으로 잘못되게 미화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마음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이름이 임마누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과 그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을 바르게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세우시는 한 아이와 같은 증거자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가진 증거자가 되며, 마치 아이가 아빠를 최고를 알고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바아버지를 진실로 아멘으로 받을 수 있는 성도로서의 모습으로 주앞에, 복음으로 낳아 길러,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세우신 어린 아이와 같이 주의 받으신 바된 자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만나뵙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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