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5월 24, 2006

내 마음 속의 지우개

2006년 5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레10:8-20
모세가 좋게 여겼더라

인생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좀더 지난 세월에 잘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불행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을 잊고 싶은 마음에 술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지울 수 없지만 지울수 있는 것같은 효과와 스트레스적인 것을 잠시 잊고 싶은 노력들인데 사실 그러한 것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음주를 하시는 분들도 인정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후에 일시적인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속이나 머리가 아픈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해보는 그러한 실험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또한 귀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레위기서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론에서 말씀하시는데 아론과 아론의 후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도록 하심과 영영한 규례라는 말씀과 그리하여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그 아론의 남은 아들들에게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으라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랐음에 대하여서 아론에게 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식이라고 함을 그렇게 행함을 책망하였는데 아론은 모세에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라고 답함이 기록되어 있고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과 아론의 생각이 다른 것같이 보이면서도 모세가 좋게 여겼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볼 때에, 레위기 9장은 제사장들을 성별하고 거룩하게 함에 있어서 7일이 지난 8일째 첫 공식적인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음에 대한 것과 그 직분이 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써 행하여지고 또 그 제사장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여드레날에 평안하기를 바라시며 그들에게 나타나서'(마 20:26)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제사장적인 직분의 사실성을 힘입을 수 있도록 말씀하심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또한 사도행전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 10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드리는 가운데서 죽임을 당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된 자로서 아론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라고 말함이 오늘 본문의 내용적 정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느 부모가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슬픔이라고 함은 그러한 감정의 골은 어떤 합리적인 말로도 매울 수 없는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분별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름을 잊기 위해서라도 독주를 찾을 수 있는 정황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한잔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모세는 경계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 중에서 아론과 그 제사장들이 먹어야 할 것을 불살랐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이것은 감정에 따른 분별력을 상실한 마치 술취하여서 분별력을 상실한 것과 같은 행위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의 제사장적 직분을 망각한 것으로 책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레 10:9)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슬픔에 따른 분별없는 이성적 사각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신 믿음으로 사실분별을 하였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할 때에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제사장적 실존과 그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충실했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왕적 권세, 제사장적 권세, 선지자적 권세를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성도의 권세와 증거를 기억할 때에 구약에서의 특별한 부류의 제사장을 말함은 이제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적인 인식과 상통하게 되어지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실제의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들라고 하면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마 10:37)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 죽은 줄 모르고 그 아들을 위해 간구하다가 죽은 후에는 주의 뜻하심의 선하심을 받아들여서 치우치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니다(삼하 12:19~23)

이러한 모습은,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제사장적 권세 즉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정함 거룩함을 구별하여 사실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도록 부름을 받음에 있어서 그 공적인 직분적 분별을 잊지 않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심의 의미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적 사유 즉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판단과 행함을 원하실까'에서 그 공적인 사역적 삶을 아주 평범한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입장에서는 구약에 불편하고 현대적이지 못한 것은 다 임의적으로 제하고 새로운 정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신약을 말하고 있고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계시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함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고후 1:19,20)에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부활하심에서 제사라는 개념의 실제를 완성하셨음에 따라서 지금은 구약에 제사적 입장의 현실적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계시적 실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에 따른 사실을 모세도 마음에 좋게 여긴다는 것과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분별하여 사실화 해 나가는 제사장적 실존을 메시아 안에서 이루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릴때에 지우개로 공책의 글씨를 지우다가 공책을 찢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적 불편함과 어려움과 정말 기억하기 싫은 것들로 점철되어진 우리의 지난날들 다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임의적인 실험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로서 그의 직분적 수행이라고 하는 제사장적 권세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그래서 부인하고 싶고 그것이 옳다고 보여지는 우리의 삶의 지난날들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다는 것과 지금을 위해서, 자존의 절대자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셨음을 믿을 수 있을 때에 나의 한정적인 생각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 또는 일부를 지워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공책을 찢는 것과 비교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로서의 내 삶 내 생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거룩하고 판단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귀히 보시고 인도하신, 비록 내가 의식하지 못한 때라고 하여도, 그 삶이 찢어지는 것은 옳지 않으며 현재와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는 것이 성경적인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속에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는데 사용되어질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슬픔의 감정과 미움과 같은 여러가지 분별력을 잃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과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들을 믿음으로 지울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아론과 같이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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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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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22, 2006

최후의 만찬 이해 (The last supper)

2006년 5월 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4-30
최후의 만찬 이해

요즘은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유행하는 인기몰이 사상과 매체의 형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언제나 그러한 흥미와 인기몰이라는 개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행함에 대한 실제적인 윤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취하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새 언약을 세우신 유월절 식사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린 그림에 대한 이해로 예수님의 사상을 이해한 그 그림을 그린자의 인식을 확대 그리고 재구성하여 연구한 내용의 글과 그것을 영상화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로소 절대의 재가가 부여되어있는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을 판단한다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거늘 합리성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기만되어진 자들의 임의적 자기 이성들의 표현이 되어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오늘 본문에서의 그 증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 문둥이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이 있은,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예수님을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겠느냐는 흥정과 함께 은 삼십을 달아 받아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유월절 잡수실 것을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는지를 질문함에 예수께서 성 아무에게 가서 선생님 말씀이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제자들이 예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식사를 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함께한 자들 중에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근심하며 자신들인지 주께 묻게 되는데, 주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주님을 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유다가 말함에 유다 자신이 말하였다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그것이 주의 몸임을 말씀하시고 또 잔도 축복하셔서 이것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위하여 흘리는 주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함께 이르시는 말씀으로써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심과 이에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을 팔게 되어지는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그러한 상대적인 인식의 행보에 실제적으로 상관없이 주의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이 생겨났을까 하는 것과 주의 새 언약을 세우심에서 말씀하신 그 뜻하심을 찬미함에 있어서의 그 중심은 어떠함이 옳은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본문의 문맥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한 본문에 대한 이해에 선행되어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획일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때로는 한 문장 한 단어적 의미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 함을 읽을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문맥적인 차원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본문에서 언급되어질 것입니다.)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실제적인 경제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앞서 있는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은 여인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가운데서 기념(memorial)되는, 기억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앙인으로서의 누구나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라는 그 보편성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 앞서 그 항유를 부은 여인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의 하나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때에 합리성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실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증거는 주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주의 죽으심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그에 따른 사실이해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을 주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으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유다의 입장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죽을바에야 그를 넘겨주고 자신의 상대적 입지와 또한 실리적 입장을 챙긴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신다는 것에서 진정 사실을 말하는 것을 유다는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 사실인가 상황적 요구에 따른 필요성에 따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타당성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를 판단하는 있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는 결국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위험한 놀이로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계속되어질 수도 있는 잘못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것이 소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예수님을 팔아 돈을 챙기는 자들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이후 주의 뜻하심을 본 유다는 그 돈을 성전고에 돌리지만 그것으로 밭을 사서 '피밭'(마 27:8; 행 1:19)이라는 뜻에 여행객들의 무덤을 삼았던 것입니다.(마 27:6~8)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예수님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유다행각'들로써 그러한 사상들을 경험하는 여행객들의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실제적으로 주의 뜻하심을 부정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도구적인 것으로 실제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 도구적인 것이 없이 하나님이 그 뜻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볼 때에 그 증거적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앞에서 영혼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마땅히 증거해야 할 예수님의 뜻하심을 우리 성도들이 증거해야 증거할 뿐입니다. 주의 양들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주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을 주목합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비방이나 부인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판단받지 않은 분으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고 자기를 기만하는 가운데서의 윤리적 행태는 그 존재적 시비를 판단 받으며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있었기를 바라는 중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식과 한계와 그 자유와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만찬에 대한 새언약을 세우시는 본문'(마 26:26~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최후의 만찬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와 살로써의 그 예식을 행함에 있어서 주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그 뜻하심의 언약적 존재로서의 인증이 되어지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새살이 생겨나고 피가 흘려 따뜻한 생명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비유적인 표현을 말씀하시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써, 함께하시는 재가가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의 함께하심의 실존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절대의 재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더욱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주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또 임하실 것이라는 이미와 아직이 한 사건에 집약되어진 표현입니다. 즉 예수께서 세우시는 이 언약적 실제의 예식은 이미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 같이 표현되어진 것으로써 이제는 다른 언약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흉내내어서 자신이 자존자인 것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계 13:11~15) 그러한 자존자 행세를 하는, 예수님의 흉내를 내는 자들이, 그와 같이 예수님 흉내를 내며 새로운 언약식을 베풀 그 자들이, 바로 불법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 예식과 식사는 마지막 식사(The last supper)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후 제자들을 만나셔서 음식을 드신 것이나 또는 갈릴리 해변에서 조반을 드신 것과 같은 것은 이 언약을 세우시는 것으로써의 식사 최후의 만찬과는 비교되어져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은 앞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의 장사를 위하였던 그 여인의 증거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한 자기 계시의 뜻하심을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우리의 실존과 삶과 삶의 해석이 사실임을 믿는 것(고후 1:19,20)이 우리 성도들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에서 기억되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해와 증거의 합당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가룟유다와 같이 상황논리에 따라서 예수님을 파는 잘못을 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조장하는 경우의 한시적인 악함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에는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선하심을 그리고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찬미하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참고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의식에 의한 사실규정의 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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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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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01, 2006

한 여인의 증거

2006년 4월 3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13
한 여인의 증거

사람들의 인식을 나타내는 말들 중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즉 ‘대중(大衆)의 힘’ 또는 ‘민중의 정의실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대중의 무지’ 또는 ‘다수(多數)의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절한 표현과 납득이 되어짐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논란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함의 신앙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오해되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신앙만이 옹호되어야 한다는 소위 ‘약한 자 편들기’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에 대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그 말씀하신 바를 들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따른 영생과 영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것을 말씀하심과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진행 중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음에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잘못된 질책을 여인에게 말하매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그 여인이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주의 장사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진실로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과 그 때에 있게 되어지는 대중적인 인식의 악함이 믿음의 증거로서의 한 여인의 증거를 왜곡함에 있어서 주께서는 그것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시며 그 증거적 내용을 기념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주목함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본문에 앞서는 25장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인자되신 예수 자신께서 임금으로 오심에 대한 것과 의인과 저주받은 자들을 구별하여 말씀하심과 영생과 영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고 그 기준이 그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하지 않음이라고 함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더 언급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함이 어떤 한특정 개인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교회의 특징적인 것을 인격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눅 14:13,21) 하나님의 순애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자임에 대한 것에서 부터 정당함을 얻을 때에는 그 지극히 작은 자로서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한다면,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로써 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또 생각과 마음이 곱지 못하고 소위 삐딱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적 입장에서 정상적이다고 판단받을 수 없어 보이는 현상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단체도 이러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윤리적 도덕적 개념에서는 이러한 판단으로 낙인 또한 심판하고자 하는 판단을 하려는 자들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인식의 판단이 강요받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믿는 그들을 의롭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지극히 작아 보이는 형제도 주님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름으로 구별된 거룩한 성도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자가 그 순애보적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의 주리심과 목마르심을 채우는 자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는 대제사장들의 아문에서는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합리성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써 주님을 죽이기로 주장하고 있음이 대세적인 그 당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예정하신 뜻하심에서 허용되어진 것이고 또한 주님의 뜻하심이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그러한 모사들을 앞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울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주의 제자들의 일부 중에서도 영향력을 받은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음에 대하여서 그것을 허비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아까움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하게 되지만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는 사람 사형선고를 암묵적으로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입장도 있었다고 함을 말함이 정황에 더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의 대중의 판단의 보편성은 기각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어찌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에 따라서 약한 자의 판단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에서 임의적으로 단순하게 한 여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분명 주께서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 신앙고백적인 증거를 교회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하는 도덕적 개념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기꺼이 헌신했다.. 귀한 것을 바쳤다는 개념만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전제되어진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인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함은 그 당시 증인들의 역사적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증거로서의 정당함이 있기에 역사적 보편성과 상대성으로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증거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로 인하여 종노릇하는 존재를 다시 살리시고 종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를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녀는 그 자신의 전재산과 같은 향유옥합의 가치로 향기로써 주의 죽으심의 거룩함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자신으로서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주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예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고후 1:19,20)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6,27)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고전 2:16)주의 가르침을 말함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오실때까지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신앙의 노선에서 증거되어짐을 읽게 되며 이것은 주의 받으신 바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증거는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과 그래서 본보기적으로 우리도 좋은 것을 드리자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할 때에는 임의적인 좋은 것이 되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죽음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드림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셨음에 그가 자존자로서 말씀하심이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아서 그의 말씀하심에서 삶의 가치와 삶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사실을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진실된 사실로 받는 것이 이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과 동일한 중심으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진정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심의 그 말씀하심이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진정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는 은혜'(눅 7:38)를 주님나라 임하실 때에 받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어지는데 이와 같은 은혜(계 7:17)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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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4월 23, 2006

삶의 이유에 대하여

2006년4월23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레6:1-7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나라에 한 옛정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수박서리' 또는 '참외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당시에서는 어른들의 책망이 있으면서도 용인되던 한 문화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박이나 참외의 수확기가 되면 또 감자나 여러 가지 곡식들의 수확기가 되면, 아이들이 일부를 어른들몰래 얼마를 가져다가 그 또래들끼리 먹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잘못된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에게 묵시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런 정서라고 함으로 당연시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으로 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각박해졌음을 말하기 보다는 분명한 가치관에 따른 문화의 한 모습을 찾음을 말할 수 있을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형식상으로나마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레위기의 말씀을 주목하며 삶을 위한 변명이 진정한 증거적 사실임을 마음에 두게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나 거짓 맹세를 하는 것으로 범죄했을 때에 그 거짓 맹세한 것은 돌려보내고 오분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과 그는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와서 제사장에게 끌어오고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도덕개념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소유에 대한 물건을 불법적으로 취득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대한 회개가 그리고 속죄가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하심은 모세를 부르신 가운데서 제사법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광야에서의 모습이니.. 사막과 같은 곳으로 그 기온차이와 주위 환경은 그만한 최악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는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는 아이들 나이가 드신 어른들의 힘듬 위생이 없는 것, 갈곳도 언제까지도 모르고 기약이 없는 그러한 것을 주야장차 가야하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모습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애굽에서 그나마 조금 챙겨온 것을 도적질 당했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의 존재적인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풍요로울 때에 어떤 것을 가져간다고 하면 그래도 그쯤이야 또는 다 아는 사이인데 그냥 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 되겠지만, 단랑 한개 있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불법적으로 가져갈 때에는 그 피해자는 존재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존재를 존재할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함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즉 속된 표현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그 자체가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그 영광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겠다는 것이며 그 인생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을 임의적으로 막는 것과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써의 존재적 자리매김을 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은 상식적인 측면의 인륜적 범죄보다도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고통속에서도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냄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 피해를 본 자에게 나타내시고 위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경영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고 또 오분의 일이라고 함으로 상대적으로 조금 무거운 판단을 받게 하심 가운데서의 교육적 가르침으로 그 시벌을 당하는 자의 고통도 마음에 두시는 선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에서는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모든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예수님안에서 사실의 규정과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전케 하심에 대한 사실을 오히려 부정하는 것으로 죄가 되지만 허용되어졌던 그 때에는 실제의 사실로서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만이 그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셨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살려고 노력하는 기본적인 의지의 영광이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는 제사법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레위기 첫말(일반적으로 책의 이름이 됨)이 '카라'라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의 그 화목제로 자신을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는 가운데 드리심을 바르게 아는 자들이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의 증거되어지는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과 또한 그의 지으심을 받은 자들의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그러한 말을 했던 유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에는 사람이 산다는 것에 있어서 실증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그러한 판단으로 죽음에 대한 판단을 말하게 되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증적 판단이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믿고 그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서 열심히 스스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변명이면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 삶에 판단을 실증적으로나 여러가지 상황적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중심으로 삶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에 주께서는 주시며 그 신실하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신다고 하셔도 주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찬송함에 당연함을 마음에 둘 때에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의 품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눅 16:25)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삶을 위한 노력을 할 때에 그 삶의 변명에 나서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내 목숨을 취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기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힘써 노력하시는 가운데 자존의 아바 하나님아버지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귀한 신실한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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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06, 2006

자유를 주셨으니

2006년 4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갈5:1-12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어떤 일에 대한 부담이 있을 때에 그 일을 다 했다는 상황에 처할 때에 하나의 해방감과 그에 따른 해방감을 느낄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자유롭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라고 하는 것 정도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단순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에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와 실제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다가는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일을 다 행했다고, 다 했다 또는 그로 인해서 해방과 자유라고 함을 말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의미도 아무 생각도 없이 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한 것에 그 일의 '잘 됨'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 자유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고 여전히 멍에 아래 기만되어진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을 말씀하심에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서의 의미와 실제를 믿고 아는 가운데서 자유로운 언약의 종이 되어질 것으로 우리 삶에 더욱 풍부함으로 주 앞에 충성할 수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함을 말하면서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과 오히려 율법을 전부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자며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하는 역사하는 믿음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누가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는 말과 함께 그들의 권면이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님에 대한 정당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언급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을 확신함을 말하고 있고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자신이 할례를 전하는 것이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을 말하면서 성도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그러한 것에 종노릇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그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심으로 증거하는 내용이 할례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사실과 그 의미라고 하는 것임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전반적인 전 후의 문맥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본문을 이해함이 좀더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좀더 주목해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초등학문과 같이 해와 달의 절기라는 개념에서 읽을 수 있는 임의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들로서 정당함의 기본이 되어지지 않은 그것을 가리지 못하는 합리성을 다루는 학문으로 그 권위적 개념으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여 왜곡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로움'(창 15:6)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그 인식의 정당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믿음의 조상들로써의 언약이 같이 혈통적으로 나타나는 뜻하심이 있을 때에 이삭과 같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혈통이라고 하는개념에 하나님의 언약이 종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읽게 되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음을 전제로 한 혈통적 계보임을 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할례에 관한 것과 십자가에 대한 인식의 비교에 따른 것임을 지적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 이후에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주께서 보내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간접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인식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와 십자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할례와 세례에 대한 그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고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하심의 자유주심의 실제가 되어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할례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하심에서 그 행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으로 부터의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는 가운데서 그것의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지 오늘날 소위 위생관념으로 행하는 그와 유사한 개념은 의미를 이미 비교할 수 있는 사실적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와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논란이 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믿음의 오시기 전과 후에 대한 이해로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들이 한 교회에서 아직도 구분하고 신앙의 정통성과 사실에 대한 논쟁적 모습이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한 교회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도록 자유를 주셨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 주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으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사실은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20)고 하는 것으로써 예수님 안에서의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사실의 정당함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 합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의 실존과 그 정당함이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의미를 찾게 되어지고 그 할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의 뜻하심이 있을 것을 예표적 실제로 증거하는 것에 의미와 실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하였던 것과 같이 할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는다고 할 때에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실 규정을 받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해석의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할례를 행함의 특징을 주목하면 남자의 성기의 양피를 베는 것과 같은 것에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사실화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혈통적 개념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의 정당함에 따른 혈통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이삭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억되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적 의미에 존재적 사실을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함에 대한 예표적 사실이 되어지며 그리스도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그 새언약의 계보가 있을 것을 또한 할례에서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할례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와 결코 거치는 것이 아닌 것이며 오히려 그 가운데서 그 실제적 의미와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기만 한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고 그것의 완성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한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임의적인 시간관의 절기를 따라서 합리적인 당위성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통성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인데 이들이 바로 적은 누룩과 같이 퍼지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함을 사도는 마음에 두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조심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후에 사도의 반열에 세움을 받은 가운데서도 마음에 두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16:6,11,12; 눅 12:1; 막 8:15)

그래서 할례냐 무할례냐는 개념에서 사실논의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철학이니 세상의 초등학문이니 그러한 것에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인 배척을 말하면서 임의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것임에 대한 것을 바르게 말하고 구별하여서 핑계치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바가 되었음을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유되어 그 정당함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의 해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그 신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의 그 당시의 작금의 모습에서 비난의 모습이 있고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의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을 취하지 않을 줄을 안다는 진정한 사실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적 이해 즉 갈라디아 교인들의 연약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실제적으로 넘어질 줄을 알고 또한 그러한 것으로 자신에게 봉사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려는 그러한 지도자들은 그 정당함의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취할 수도 없는 가운데서 심판의 사실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심판을 자초하는 것에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베어버리도록 사도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에 대한 사실 분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며 할례는 더 이상 십자가와 거치는 것이 아니면서 이제는 계시적 실존의 완성이 되어졌을 뿐이며 실제를 이해함에 대한 조력적 사실뿐이며 계시로서 행하여질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할례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모든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의 이해의 총체로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진 종교적 윤리의 기본적인 태제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일반 사람들의 윤리와 그 최상의 신의 윤리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고 하여도 그 도덕적 완성이라는 개념 선하게 생활한다는 개념이 비로소 더 이상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행함의 완성을 가지고 어떤 신앙의 연륜이나 행함으로 내가 하나님께 할만큼 했다고 하거나 그것으로 비로소 기준이 되어서 형제들의 연약함을 넘어지게 한다면 역시 그는 그 행함의 사실과 의미의 개념이 없는 바라새인들과 동일한 판단을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완성되어지지 못한다고 하여도 보리떡과 같이 찌든 생선 두 마리와 같이 볼품이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주께서 받으심의 사실을 말할수 있는지 또 주의 허락하심의 사실을 바라볼 때에 우리 성도들은 순종함으로써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셔서 들어쓰시는 참된 자유한 자의 자녀로서의 능력을 담아내어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그 볼품없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고 작고 그러한 달란트의 모습이 다양하고 그것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현실적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주께서 기뻐하시고 정당하게 받으심의 사실을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된 자유한 종들로서, 그리스도 주께서 자유케 하심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서, 주 앞에서 능력을 담아내며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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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27, 2006

천국, 열 처녀 비유

2006년 3월 2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5:1-13
천국, 열 처녀 비유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미리 미리 준비해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미련함이나 약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본다는’ 것에 대한 관점을 생각해보면,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매일 직접적인 필요성도 없는 ‘비상식량’이라는 것을 집에 쌓아놓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상적인 판단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 행하는 자가 위기의식이나 비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지난 역사에서도 주목할 수 있는 ‘오일쇼크(The 'Oil Shock')’와 같은 것이 있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름을 비축하는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것은 그 당시 사회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각 나라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석유를 수입해서 쓰기도 하고 나름대로 비축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원고갈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일쇼크’와 같은 그러한 상태를 생각해서 각 집안마다 나름대로의 필요한 것을 구입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도 그러한 석유만을 비축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의 당위성이 없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성적인 판단에 있어서 그 기준으로서의 상식선에서 용납의 여부와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이라고 함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에는,오늘 본문에서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상식선이라는 기준에서 비로소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에서 그 기준을 기억하고 상식이라고 함도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천국에 대한 세상의 이해하지 못함과 종말의 때에 대한 합당한 사실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그 종말의 때를 그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다고 하심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써 미련한 자들은 등은 가지고 나갔으나 기름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나갔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다 신랑이 더디옴으로 인해 졸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밤중에 신랑이라는 소리와 함께 나와 맞으라고 할 때에 그 처녀들이 다 준비하는데, 미련한 자들은 슬기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구했으나 슬기 있는 자들은 둘다 모자를 수 있으니 기름을 파는 자에게 가서 구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저들이 기름을 사러 간후에 신랑이 와서 예비되었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문을 열어주기를 구할 때에 그 신랑의 목소리로 보이는 말씀이 그들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심을 기록하고 있고 그날과 그시는 처녀들로 비유된 성도들이 모른다는 말씀과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인식'인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자는 깨어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로써 바른 천국에 대한 인식으로 믿음으로써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한 자로서 주 앞에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문맥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은 본문 1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 때라고 말씀하심이 바로 종말의 때를 전제로 하고 있고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마 24장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마태복음 23장의 내용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적절하고 정당하게 문맥적인 것을 살핀다면, 마태복음 23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라고 함과 그것의 화를 말씀하시고 있고 24장에서는 그 종말의 때에 성도가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25장에서는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천국에 대한 인식이 믿음으로써 나타나는가 그 여부에 따른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모습으로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등은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을 미련한 자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을 의식하게 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없어 그의 신랑을 보지 못하는 모습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맥적으로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일상적이고 신앙적인 것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었고 임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 당시 성전세를 내기 위해 예물로 가리켜 맹세한 자는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측면으로 잘못되게 가르쳤고 비교되어지는 성전과 제단과 같은 것으로 가리킨다는 그 가치관적인 기준의 모호함을 보였던 것입니다.(마 23:16~24참고)

이러한 신앙의 가치관과 실제관을 가진 자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송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기본적 첫번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마태복음 23장 39절과 마태복음 6:9절의 말씀을 비교할 때에 진정 일관성이 있는 말씀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써 언급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라는 그 이름의 증거적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힘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20)고 하심이 그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의 본문에서 주목함과 주의 가르치심의 전제적 의도하심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함의 사실을 생각하여,임의적으로 행하지 않고, 신앙의 진정한 의미와 사실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거룩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중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냥 참되게 믿는다는 임의적 의지적 표현만으로 비로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라고 하는 예수의 그 계시적 뜻하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우리 삶에 나타내기를 소원하는 신실함을 나타낼 때에 기름을 준비한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기름을 준비함으로 그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것의 한 예가 사무엘 상 3장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목이 부러져 죽게 되는 신실하지 못했던 엘리의 섬김 속에서도, 그 질서적 정당함을 직접적으로 부인하시지 않는 한에서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잘 성장한 예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들으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존재적 사역적 인물'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을 읽도록 하심이 등불을 준비하는 처녀들의 중심에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2~4)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종말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며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함에 있어서 '독선'이라는 말을 하고 있고 아주 편협한 것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무지함과 그 독선을 상대적으로 가리고자 할뿐 지혜없는 미련함을 지닌 자라고 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이고 그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에서 편협을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천국의 사실과 그곳에 들어가는 지혜로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비로소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으로도 그들의 말이 편협함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임의적인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임마누엘의 이름으로 오심을 기억하지 못하고 소경된 자로 미련하게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치 못하는 복음이라고 함은 자존의 하나님의 그 이름에 나타나는 그 계시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믿고 '자존의 하나님이 우리의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예수의 이름인 것을 기억할 때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우리의 삶을 그 정당히 분별하여 받으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 거룩함이 함께하시는 주의 거룩하심의 재가를 입는 자들로서 슬기로운 자들로서 기름을 준비한 자들로서 주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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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02, 2006

요셉의 생철학

2006년 3월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창41:14-36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

꿈과 현실 그리고 꿈과 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심리학이나 기타 관련학을 다루는 자들이나 아니면 몽매한 신비주의자들이 마음을 두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 고민하는 자들은 배척하거나 또는 그 연관성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이 사람들의 동의적 차원에서 그 특정 집단에 사실화시키는 기만적 모습도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또한 신앙에서 꿈과 계시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된다는 것이 중요성을 과연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고민하게 되는데 그 즈음에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주목할 수 있는 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로가 꿈을 꾼 후에 해석을 위해 고민하는 가운데 술관원의 천거로 인해서, 요셉을 부름과 그에게 자기의 꿈에 대한 것을 진술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살찐소 일곱'과 '파리하고 흉악한 소일곱' 그리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술객들에게 말하였으나 보이는 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셉의 바로가 꾼 꿈에 대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고 함을 언급하면서 그 해석과 그것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즉 일곱소들과 일곱이삭들의 관계는 7년 풍년과흉년에 대한 현실적인 사실에 대한 것임을 말하고 있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고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는 안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꿈과 계시의 상관계이고, 그것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꿈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개념과 그 자의식의 불만이나 여러 정황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적 입장에서 합리성을 비로소 이끌어 나가기 보다는 우리의 두뇌가 쉬지 못하고 불편한 가운데서 불규칙하게 의식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정보적인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의식활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이 쇠약하거나 또는 악한 악령의 사악한 주장으로 인해서 의식의 활동이 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와 그 수하천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정에 대한 근거는 좀더 뒤에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계시로서의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이라고 함을 통해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 자존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선택적 정당함은 하나님 자신께 있기에 여러 불합리하다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견해는 이미 의미를 상실한 기각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 꿈의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또한 합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의 꿈입니다.(창 37:6~11) 그 중에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인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마 6:9~10)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광명한 새벽별'(계 22:16)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요셉에게 그 빛을 더하고 그로 빛나게 하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적 의미가 요셉에게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실 때에 '해와 연한을 이루라'고 말씀하심으로 비로소 그 때 시간이 창조되어진 것은 아니면서도 그 시간의 실존적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심의 징표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의 인식을 주목할 때에 그 계기로서 시간과 그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하게 되는 사유의 총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사유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복종하게 하실 것을 성경이 말씀하시고 있는데(고후 10:5), 이것은 구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그것에 대한 노력이 실패하였고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요셉의 꿈이라고 함에 이미 나타났던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그의 꿈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것으로써의 권위적 사실로서의 권세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임의적인 꿈해석이라고 함을 말하는 실제없는 합리성으로만 행하게 되는 애굽의 술사와 같은 오늘날의 몽상가와는 그 권위적 실존과 그 사실은 비로소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그 정당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재가를 입은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실의 진정성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꿈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나 오늘날 임의적인 해몽가의 행함과 비교되어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정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의 사실에 있어서도 분명 그렇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에 대한 가장 합당한 권세로 기름부음의 실제적 권세가 이미 요셉의 존재에 꿈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꿈은 비로소 그 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것을 그 때에 비로소 나타내셨을 뿐이기 때문에 임의적 꿈이라고 함에서 몽상가로서의 발을 들여놓는 것과 전혀 다른 실존적 인물이 요셉이었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이라고 하는 특성에 대하여서 주목해보면, 이것은 어떤 거리와 공간이라는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써의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써의 의식활동입니다.

즉 이것은 창세전에 역사라고 하는 것의 활동의 산물과 그에 따른 인식의 산물이라는 사유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어지지 않으면서도 판단의 형식을 취하는 계시의 성격을 잘 드러낼수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러한 꿈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스도의 뜻하심의 재가를 입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는 타락한 천사들의 강요에 따른 인식의 발생으로 꿈의 실존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삶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지 않는 것으로써 오히려 삶을 외곡시키는 것으로 또한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계시자를 숭배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며 이것은 그렇게 행하는 존재가 판단을 받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 22:18)고 하심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존재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면서 본문에서 주목하면 바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창 41:24)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의 세상에서는 삶이 반영되어질 수 있는 의식들을 해석하거나 창출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셉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자녀되어진 사들이 주 안에서 합당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노력으로 '세상에 빛'(마 5:14)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식함이 옳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로의 꿈을 해석함이 요셉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이처럼 세상에 성도들이 그리스도 빛되신 주님 안에서 세상의 사실도 규정함의 합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사실 우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에 대한 정당함의 시비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실 우상주의라는 개념을 단정짓기 위한 그들의 판단인식의 정당함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거나 또는 그 정당함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임이 기정사실일 때에, 그들의 옳지 못한 말로 사람의 눈을 가리고자 하는 중심을 주목할 수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꿈과 계시라는 것은 삶을 해석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사유로서 철학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임의적 꿈과 임의적 해석으로, 또는 그 꿈이라고 하는 것이 의식활동의 반영이라고 함을 볼 때에 비합리성을 넘나드는 정교한 지식이라고 함의 확장적 의미를 말한다고 할 때에 그러한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라고 하는 고품격?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운데서는 합당하게 우리 인생의 삶을 바르게 실제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빛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편협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 안에서 사실의 실제적 정당함에 따른 판단으로써의 합당한 사실을 통하여서 삶을 해석해내고 인도하시는 주님 안에서 구원과 그 삶을 바르게 분별해 내며 인도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며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주 앞에서 상급이 있는 그것을 좇아 가는 참된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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