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11, 2007

손 마른 인생

2007년 12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6:1-11
네 손을 내밀라

어떤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그 손으로 집어주며 먹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받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는 있어서 그 받는 사람의 절실한 입장이라고 할 때에 받아 먹을 수도 있고 또 굴욕적 강요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적 여지를 감안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신앙적 실제의식에 따른 판단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절대'라는 획일적 고립적 성립되지 않는 그 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성은 자존의 자기 정당함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상대적면서도 절대적인 실제의식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절대자 하나님 자신의 받으심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며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목해 볼 때에, '손'이라는 표현이 증거로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과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내용의 기술적(記述的) 전반적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적 증거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에 따라 어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적 위반을 말하면서 시비(是非)를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임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아 송사할 빙거를 찾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심에 따라 그 손이 회복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송사할 빙거를 찾던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동일본문과 문맥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되어진 복음서 기자의 의식이 또한 주의 말씀에 따른 증거를 위해 특별 영적인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되어지는 해석적 당위성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안식일이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 성례적 기호적 표적으로서의 손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행하신 성찬이 그 전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증거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시적 표적적인 거룩한 예표로서 읽을 수 있는 성례로서 각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고쳐진 '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쉼이라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 안에서 그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을 나타내는 부활하신 날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시간적 개념의 전통적 안식의 규정적 입장보다 바른 안식의 실제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으로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하심과 섭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거짓을 범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읽지 않고 그가 쓴 책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과 같이, 그것을 주장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우기는 것이요 잘못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의 실존이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 자기 속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자신이 그와 같은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셨고 그 안식에서 주권적 정당함을 취하심에 따라 상대적 관점의 시비라는 것에 실존적 정당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제자들의 인식과 행보라는 것에 있어서의 판단도 주의 뜻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경우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첫 안식일에 있는 주의 답변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바로 '세상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나는 지팡이가 뱀과 같이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읽게 하시는 것이며, 또한 무슨 상대적인 말들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시려는 것으로 연결되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손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하여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일로서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손 마르다는 개념이 위생적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럽다는 개념으로 바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정상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몸의 질병적 개념으로만 볼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정당함에서 판단되는 행위들로서 정체성을 잃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개념이 이입되어짐의 당위성을 설정함의 정당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가인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벨보다 가인이 더 수고하고 노력해서 밭의 소산들을 드렸다고 하는 측면에서 더 받음직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서의 성례전적인 양을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보와 그려한 행함의 손은 하나님께 드림과 섬김으로서의 정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그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청함받은 자들의 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로서의 손길과 다른 것으로서 마른 손에 비교되어지는 진실로 고침을 받아야 할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성례전적 증거로 받을 수 있음의 타당성과 일관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습임을 받게 될 때에 본문과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난 두 번째 기적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6~7)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신 18:15; 행 7:37)을 예언했던 모세의 증거를 마음에 둘 때에 예수께서 모세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체험을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자존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의 증거와 같이 예언되어진 메시아 구주이심에 대한 것과 구약이 증거하는바 예수님을 믿음이 옳으며 믿게될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손을 고쳐주심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주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낼 모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어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상대적인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황적 실존일진대 절대와 상관하겠다는 것 절대에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당위성을 비로소 얻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고 할 때에 과연 인생의 손은 마른 손입니다.

즉 속된 표현이지만,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같이 아무리 고귀한 척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 앞에서 무엇인가 받을 만한 행보를 나타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시는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적 기준에서 마련한 그 방법, 절대의 정당함을 얻는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게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받으신 바를 행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손 인생..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나의 중심과 삶에 기준으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마른손으로서의 인생의 모습이 치유함을 받아,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 바되는 그 섬김으로서 잘했다 칭찬함을 받게 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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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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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월 04, 2007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2007년 11월2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26:1-11
광주리에 담긴 소산물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이라고 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월을 인식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적 개념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처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과 나중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의 의지적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일반은총적 개념의 한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에서의 '처음'이라는 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선점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계기적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제 고별설교를 하는 중심에서의 말씀으로서의 신명기의 말씀인데 즉 모압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서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하게 되어지는 신앙의 예식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0절과 11절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신 땅에 들어가 거하게 될 때에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제사장에게 가져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할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의 조상이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음과 그곳에서 번성했는데 학대와 압제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셔서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렀음에 대한 회고와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과 11절의 말씀에서는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음과 경배함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집에 복을 주셨음을 인하여서 레위인들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들거워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시행하게 되어지는 광주리에 담긴 맏물로서의 소산물을 담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타나는 십일조에 관한 것과는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언급하면, 창세기 28장과 레위인과 사도의 관계성예수님 안에서 그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그에 따른 십일조의 해석적 실체를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목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 아래 있었지만,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구름따라 광야를 헤매며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고 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위 '문화적 충돌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그곳에 있는 자들의 기득권적인 행사를 구별하여서 따르거나 협력하는 가운데서 독자적인 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는 죄와 타협이 기만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곳에서의 첫 열매들 즉 소산의 맏물들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놓고 경배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만 볼 때, 하나의 추수감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그러한 상황적 특별성과 개체적인 판단 입장으로 단순화 또는 잊혀질 것의 성격이 아니라,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고백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몸된 구약 교회의 언약적 기반과 증거를 나타낸다는 것과 성례전적으로 신약교회를 포함한 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 28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에 동일한 언약의 고백적 자리에 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8장 16~22절에서는 하란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 돌배개로 잠을 청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곳에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어 하늘문으로서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라고 함의 실제적 의식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한 그곳에 와서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와 그 상관성을 의식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약속하신 곳에 왔다는 것, 아버지의 약속하신 곳 그 집에 왔다고하는 것, 이미 구원받아 예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이미 소속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니 오늘날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특히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하여 실제로 받는 한 예배처소에 나와서 그 구원받아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증거로 이 야곱과 같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한 신앙고백적 표현과 증거가 바로 십일조와 헌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소산의 '맏물'이라는 것은 레위인과 사도들의 각각의 특성과 그들의 사역적 불연속성과 동시에 연속적 개념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맏물'이라는 것은 처음 난 것으로써 특히 정착적 상황에서 본다고 할 때에 첫 열매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맏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함께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과 함께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자들로서의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의 정당함을 부여받게 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지의 소산물의 맏물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주님께 드리는 가운데서 야곱의 서원을 이행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인과 사도성의 관계의 시대적 정황적 불연속적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속성과 주의 뜻하심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심'(고전 15:20)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는데, 레위인들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에 장자을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 즉 장자들은 다 죽임을 면하였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이 장자들은 속전을 내고, 그 장자적 입장의 사역을 대신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장자를 대표하는 가운데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성례전적으로 부활하신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그 말씀의 사역이 맡겨진 자들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정체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시대와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과 사역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십일조에 대한 야곱의 언약적 서원을 지금도 이행함의 당위성을 합당하게 읽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이며 그것을 위해 그 고아와 과부와 객들로 함께 하며 레위인들과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말씀하심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10절과 11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면에서는 12절에서 19절까지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쁜 세상에 그리고 간접적인 측면에서 연락망과 교제라는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교회 예배당 출석이라고 하는 것은 간과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심지어 아무 중심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출석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증거합니다라는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질서를 따라 구별되어진 장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야곱과 같이 서원을 이행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고 그것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는 그 일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광주리에 그 땅 소산의 맏물을 담아오라고 하심의 뜻하심과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토지의 소산의 맏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담아 드릴 수 있는, 세상의 흙에서 난 인생을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바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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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9월 11, 2007

요한의 탄생

2007년 9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1:57-66
요한의 탄생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름에 대하여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쁜 한글이름을 지으시는 분도 있고, 대부분 신앙적으로나 또는 무속적 개념에서까지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적 법적 개념까지 나아가는 해프닝도 보도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족의 분류상 우리 나라는 알타이어계 셈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창 9:26)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기억합니다. 즉 셈족의 정체성과 그 이름적 개념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죄악 가운데서도 셈족계통에서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적 발생을 의식하도록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상적 실제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이 인식의 타당성의 객관성을 말할 때 여전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도 신앙적 정당함을 비로소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에 대한 것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실제적인 것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기만적 사실로서 받음이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적 개념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납득되어지는 현상들과 사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의 정이라는 현실적인 맹목성 개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개념에서도 그 실재적 다른 입장이 있으니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탄생에서 주목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에 따라서 부친 사가랴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과 일시 벙어리되었던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함을 말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놀라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4절에서 6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가 예언한 것과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서의 요한이 탄생하고 이름을 요한이라고 함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그 예언되어진 것과 같이 입이 풀려 말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과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되어진 일들이 계시로서 기록되어짐과 그것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의원 누가가 '데오빌로'(눅 1:3)게 써보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아 쓰게되어지는데 이것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에서 증거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벗'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에게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그 데오빌로라는 개인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성도를 지칭하는 역활적 증거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벗'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은 자가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함을 실제적인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자의 중심 그것이 셈족 계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에게는 그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여러가지 합리적인 판단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터전과 기반이 있는 생활을 버리고 갈 곳도 정해지지 않는 곳을 가라는 것에 순종함에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상대적으로만 볼 때는 전혀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께서 말씀하심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고 실제화하여야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상대적인 고려 자체가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성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실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적 정당함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함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며 실제라는 사태파악과 납득과 인식이 바로 하나님의 친구라는 벗이라는 칭함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것들은 상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정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가진 것으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중심이며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주의 세우신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이 누가복음에서 기록되어진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편지로서의 그 말씀을 마음에 세기는 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개인적인 특수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적 차원의 한 증거자일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54~55)

이러한 문맥적인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의 첫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머리로서의 남편 사가랴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의 기억(memory of Jehovah )'이라는 뜻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맹세(oath of God)'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라는 예정적 뜻하심의 주권적 기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기억적 사실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적 뜻하심의 표현으로서의, 맹세로서의 증거로서의,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증거를 하는 자로서 사랑받는 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는 천사의 이름을 말해준 것과 같이, 일반적 아비의 이름을 따르지 않음의 비판적 여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일반적인 죄의 굴래의 상속적 실존과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선택된 자며 또한 그 증거자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서 합당하게 그 당위성의 실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받는 자들로서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의 요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의 증거적 의미를 안다면, 굳이 세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명을 달리함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막연한 가운데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은혜로 마음에 비로소 둘 수 있는 사가랴는 찬송을 하게 되는데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 되어지는 사랑받는 자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의 복음을 통하여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고전 4:15)에서는 어쩜 그렇게 화려함도 없어보이고 요한과 같이 늦둥이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즉 아이의 양육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인 여러 모순을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작은 모습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연함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사실로서, 그 복음으로 길러내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읽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이름모를 작은 교회들에서는 장차 사도가 될 바울의 그 모진 행동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권위적 증거자로서의 바나바의 증언에 따라 사도 바울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도 바울을 통한 주의 함께하심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을 주목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어떤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모순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고 하는 말과 같이 여러가지 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실 것을 보고, 죄가 아닌 이상 허물을 덮는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증거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실제의식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마땅한 것이며,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존적 정당함을 가진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사실화하고 그것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증거와 그 기업으로서의 아들의 탄생을 통한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자존적 주권과 그 기억하심과 그 은혜로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따라 하나님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일 가족을 통해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그 자손으로서의 야곱과 같이 여러 상대적인 것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해석이 진정한 내가 납득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은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자로서 거듭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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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7월 10, 2007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유와 증거

2007년 7월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8:12-26
성전봉헌의 축복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 따라 그 누리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일관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호화로운 주택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착민에게 있어서는 그와 달리 좀더 안정적인 측면에서 의식주를 생각할 때에 거할 곳으로서 그 주택의 의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현대의 재태크적인 측면으로 의미가 변화되어진 모습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재태크라는 개념이 어떤 부동산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적 개념에도 변형되어진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대형 사업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상식적 입장에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우와 같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해석되어진다는 것과 납득당위성을 비로소 갖는다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즉 합당한 예배당에 대한 인식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의 인식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교회의 예배당의 건물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그러한 신학적 입장의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의 그러한 측면으로 접근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인식의 연약함을 이해한다는 것과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음에 대한 현실태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복음전도의 준거점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그러한 준거점적 실재에 대하여서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상대적 현실성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선히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또한 선히 받을 수 있기를 마음에 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 성도들이 성전으로서의 예배당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 증거적 입장을 마음에 둘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에서 그 중심을 배워 익히며 증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주께서 계실 영원히 계실 처소'로서의 성전을 선포하고 이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고자 했으나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지을 것이라고 하심의 정당함에 따라서 그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라는 중심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는데 하나님뜻대로 이루게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한 가운데서 그 약속하심이 그 백성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솔로몬 성전봉축이라는 개념이 계시적 실제적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과 봉헌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솔로몬성전 건축을 마치고 그 성전건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증거와 그러한 합당한 봉헌식을 가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의지하여서 그러한 신실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주의 말씀에 따른 정당함에 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백성들에게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신실하심의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임의적 강요에 따른 간구가 아닌 합당한 종들의 증거와 섬김과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정당함에 따른 성전봉헌을 말할 때에 다윗이 건축하지 않고 자신이 짓도록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정당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이 아니면 상식적으로 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권세를 합당하게 취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시고 솔로몬을 통한 건축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상식적인 측면의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그 뜻하심을 살펴서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천사들의 증거를 통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증거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에 따라 구속받은 자들과 그의 지으신 백성들에게 있게되어지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주어지는 차이가 있는 평화이면서도 실제적인 그들의 평화가 있게되어짐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기뻐하심이라는 것은 '(기쁨과 의지와 선택Will, Choice)'을 의미하는 말인 유도키아스(ευδοκιας )라는 말입니다. 주의 주권적 기뻐하심과 그 의도하심에 따른 택하심에, 구약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의 증거적 복됨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 중에 평화는 살롬적 성전의 성례전적인 증거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성의 이름이면서도 동일한 '살롬'이라는 기원적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즉 '살롬' '평안' 그 평안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성이며, 평화로서 주어진 성전으로서의 솔로몬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을 때에 이 모든 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의 실존적 자신을 주의 소유된 자로서 주님께 드리게되는 헌신의 실재를 예표하는 성례전적인 성소였던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솔로몬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도 있지만 성례전적인 개념이 주의 정하심의 뜻하심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제 그 계시의 시간이 지난 가운데서는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이 비로소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고난과 고통속에서 무너짐을 주목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지상의 성전적 개념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님'(요 2:21)이 오셨고 다시 오실 언약이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는 계시의 시대가 이미 완성되어진 가운데서 성례전적인 개념에서 성소라는 개념을 비로소 취하는 성전의 개념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배처소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한정되어지면서도 실제적인 성전의 의미를 마음에 둠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받으신 바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받으셨음에 대하여서 우리 자신을 드림이라는 헌신에서의 성전봉헌의 실제적인 모습과 증거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εν Χριστος)을 예수님 몸 안에 존재적 흡수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세를 지나 존재의 유출적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롬 5:1; 갈 3:11)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은 실존적 존재로서 주 앞에 거하게 되는 것'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서 가장 아름답고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창세기28장의 말씀입니다. 즉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노숙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을 꾸게 되어 그곳에서 돌배게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함의 '벧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한 구별적 장소에서 그는 아버지집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으며 자존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8장 10~22절 )

우리 성도들도 이미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롬 5:1), 앞으로 구원받아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이미 실제적으로 구원받은 자들로서 현실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한 예배처소를 구별하고 그곳에 나와서 야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나의 하나님이심을, 주의 구원하심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의 기본이며 예배당 출석의 실제적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간접인격적 의미부여로서의 인터넷이나 예배의 인도자의 직접인격적 인도를 배제한 어떤 화상적 예배는 그 의미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측면에서 도우미로서의 실제적 의미를 가질 뿐 교회 예배당 출석을 통한 신앙고백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인격적 예배라고 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과 증거로서 한 처소를 주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의 질서에 따라 구별하여 그곳에 출석하며 예배하여 자신을 드림의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솔로몬 성전봉헌식은 예수그리스도의 참성전이심을 근거로한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자들로서,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장소를 구별하여서 예배하며 주의 말씀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 이루이지기를 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세상의 복음의 접촉점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구별되어질 수 있으나, 이러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는 그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하심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함에 있어서는 그 구하는 자의 신실함이 주의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되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바르게 주일성수 및 예배생활을 통해서 성전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롬 5:1) 주의 말씀과 같이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함을 받으며(마 5:9) 그러한 면류관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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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18, 2007

겟세마네의 고통 이해

2007년 6월1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 14:32-42
머물러 깨어 있으라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습니다.

매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에서 있게 되어지는 '입시전쟁' '삶을 위한 투쟁', 시간을 비롯한 적당한 또는 최소한의 물적 심적 노력 투자에 따른 최대의 기대효과와 그것의 내용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경쟁에 대한 것은 삶을 위한 변명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작금의 삶에 대한 인식일 수 있고, 또 시대의 변천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진일보할 것이라는 것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을 것같다는 인식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인식 그 삶의 여정의 배경으로서의 시간투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이라고 할 때에 입시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에 각성제도 먹어보는 입시생들의 심정은 분야가 다를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시대에 민감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의 '깨어있다'는 '분별력을 위한 또한 분별력이 있다'는 개념으로 이야기 되어질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신앙적으로 또는 그 가운데서 해석되어지는 삶에 있어서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합당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들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로서의 사리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32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서 구성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번 기도하심과 제자들의 깨어 있지 못함에 대한 모습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인데, 내용은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라는 실제적 증거로서 말씀하심을 읽게하는 것과 그들의 연약함을 받으시며 그들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심과 예수님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하심은 그 내용적 계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제자들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서의 그들의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연약성이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 내용적 계시그들의 연약성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역을 묘사하고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감람산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가셨는데, 그 때에 주의 성자로서의 성부께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용적 계시에 대하여서

본문 32절과 34절 말씀에서는 제자들에게 그 한 곳에 '앉아 있으라' 그리고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고민하시며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고뇌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 도망치기 위한 개념으로 상식선에서 규정함은 옳지 않습니다. 정당성 시비에서 이미 죄악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개념적 정리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규정적 인식은 가능하나 정당한 규정적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인간적인 고뇌로 나타나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흩어짐의 사실이 없을 것이나, 결코 구원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일시적이라고 해도,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 그들의 받을 현상적 실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덜어줄 수 없음에 대한 것으로서의 실존적 비참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적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이 메시아로서의 인식적 차원에서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히 4:15 참고 사 53: 질고를 아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아)

그러한 연민은 상식적인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는 모든 것을 구별하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부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께 구해서 그 제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의 현상적 개념을 구별하여서 사실화 시키는 즉 십자가를 지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있어주는 가운데서도 그 뜻하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의 인성적 뜻하심 보다도 성부하나님의 신성적 뜻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얻는 것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기도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16)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없이 상식적인 개념에서 시간적 보편성에 따라서 볼 때에는 상황에 따른 예수님의 인식의 변화와 고뇌 메시아로서의 자기 인식의 변화 즉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비로소 자기 신뢰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그 때에 비로소 있었다는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자로서의 그 복음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죽고 사는 문제'(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이 자존적 합당함에 따라 전제되어 있다고 할 때에, 시간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서 메시아적 자기 인식의 변화와 자기 쇄뇌라는 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옳은 본문 해석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해석의 정당성 시비에서 옳다 하는 그러한 사실적 판단을 내리고 진리로서의 실존적 정당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상식적인 해석 가능성에 의한 실존적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서 본문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로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11:12)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의 이름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기 계시를 하시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들이 질서를 찾아 실존하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해하고 되어질 일들에 있어서 그 연민의 정과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자이지만 성부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인식과 행함의 사실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실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실체, 삶의 전 방향과 실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낸다는 것이 합당한 기도임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가장 중요한 시간에 그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함으로 인해서 더욱 깊이 잠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있게되어지며 앞으로 되어지는 그들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로서 자리매김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상황적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상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당되어지는 현실적 조짐들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곳에서 평안을 취하려고 하는데 깨어 있어야하는 그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을 바르게 마음에 두었더라면 그것이 합당하게 가능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적인 이해가 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연약성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제자들은 바리세인들과 서기관과 그 당시 성전과 관련되어진 자들의 인식과 그 행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합목적적인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과 언약을 맺고 동행하고 있는 가운데서 인식적으로 또는 몸으로도 상당히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고 계시니 별 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긴장이 풀려질 수 있고 아주 좋은 휴식시간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시간에 눈이 감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상황적 그들의 인식의 추이를 이해하는 것이고,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연약함이라고 함이 죄악으로 나아가는 즉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게되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계시적인 증거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4,4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시고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계시에 따른 '예수님의 별세'(막 9:31)를 말씀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을 볼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다는 말씀이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음'(요 20:9)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달리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 부활의 해석적 근거를 말씀하심이 이렇게 기록되어짐을 봅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6,27)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서 자주 언급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소리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것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잘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2장에서 사두개인들과 대화속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부활이라는 것의 사실적 근거는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마음에 두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즉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성경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개념적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사도개인과 같이 부활의 실존을 믿을 수 없으며 믿는다는 중심을 가져도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여서 부활신앙에서 잠들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으면 많은 가능성의 성경해석이 오해의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제자들이 지칠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함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졸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하여도 깨어있을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 있음의 정당함을 따라서, 깨어있기를 실제적으로 주 하나님께 예수님처럼 주 하나님의 마음에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더라면, 깨어 있었을 수 있는 사실적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 모두 졸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로서의 다섯처녀의 실존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마 25:5, 1~10)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통해 사실 규정을 함이라는 왕같은 제사장적 입장의 행보로서의 순종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반석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두는 것에서 멀리하여지는 당위성에서 속수무책의 고통의 현실을 맞보아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슬프고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혜의 실제는 어떻게 나타나며 상황적 세상의 모습은 성례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 같이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택하심은 그들의 연약함에서 비롯되어지는 부활의 개념이 비록 확실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주의 자존적 택하심이 있을 때에, 그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어지는 은혜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함에 대한 사실적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같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은 이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예만 된다는 그 사실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여러 시험이 있고 결국 예수님을 돈벌이식으로 이용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을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확실하지 않다, 또는 예수님의 실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부활의 상대적 증거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이다, 예수외에 다른 예수가 가능하다. 즉 '예수 후 예수' 또는 '예수로 예수를 뛰어 넘기' 등, 성립되지도 않는 말들이 그 합리적 당위성을 가지고 말할 때에 답변하지 못하고 자기기 가진 신앙에 확신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고통의 밤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름을 짜는 듯한 개인적인 고통이 되어질 것입니다. 즉 갯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비로소 왔던 곳이 아니고 그곳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고 또 왔을 수 있는 곳으로서 세상의 사람들의 고통의 장소로서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것에서 성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으로써 구별되어진 그 기름짜는 곳으로서의 이름을 가진 겟세마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운데서 쉼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깨어있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주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로서의 겟세마네의 증거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제적 평안과 사실은 예수님안에 있으며'(마 11:28~30) 예수님의 증거로서 가르쳐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 참 주의 말씀과 같이 '갈수록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진다고 하신 것'(단 12:4)과 같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생존의 발을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그 흐름으로써의 신경씀이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오면 되지' 뭐 또 '성경공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옳고 그르고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강요받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말못할 고민이 되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사실화하고 기뻐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합당한 필요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뜻하심과 섭리를 따라 순종하기 위한 노력들의 기본으로서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며 그 자체가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기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과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자존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취하시기 때문에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내 실존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워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성도들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의 삶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주일 내내 신경쓸일 많고 쉬지 못하고 예배드리고 출석하는 것까지 했는데 좀 쉬고 싶은데, 성경공부와 섬김이라는 것에 메인다는 것은 어쩜 '기름을 짜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송이꿀 같아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의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사실을 마음에 둘 때에 그 위로의 말씀은 그 위로의 쉼으로서의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현상적 일률적 단정적인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느낌의 판단과 달리 실제적으로 주어짐에 있어서는 동일한 은혜의 사실로 기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임의적 개연적 당위성만 갖추어서 사실시비를 가리는 고통의 밤에 답변할 것을 온유함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강조되어지는 증거들이 일시적인 각성제 역활을 해서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 속쓰림으로 나타나 이제는 더 죽도 못먹는 단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각성제도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비판의 목소리들 속쓰린 소리들을 내밷고 있는 것은 임의적 각성제만으로 부흥만을 말하려고 하는 모습에 식상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우리 성도의 존재적 정당함과 개연적 모습의 상대적 증거라도 주의 말씀의 재가에 따라 사실화시키고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한 진리임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하여 증거하시는 가운데 이제 단단한 것도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며 성장하며 진정으로 이 세상에 머물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 있어, 사실을 분별하고 세상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여지에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온유함으로 내세의 소망을 증거해 그들을 주예수께서로, 옳은데로, 인도하시는 자들로서 하늘의 별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그 영광으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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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5월 15, 2007

죽음의 지혜를 벗어나

2007년 5월1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2:13-25
죽음을 자초한 악한 종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구별하여주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생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한다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은총에서 있게되어지는 사람들의 의식적 지혜의 발상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적 개념이나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특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면서도 일반은총적 개념의 사실 속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가능하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러한 입장에서 재고되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구성적 경향의 '많음'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정당한 인식의 개체적 소수로서의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깨닫게 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작은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실제적인 정당함을 고려하지 않은 많은 말들보다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인 개념은 기만적 요소로서 그 판단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만나서 수넴여인 아비삭 여인을 아도니아 자신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밧세바는 좋다며 솔로몬에게 말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일로 말하려고 솔로몬에게 나아가니 솔로몬이 어미에게 예를 갖추고 그를 우편에 앉히는 가운데서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청을 솔로몬에게 말하자 솔로몬은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하고 아도니아를 죽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아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악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그것과 다른 선한 종들로서의 지혜를 구함과 그로 인한 충성으로 수종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아의 구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솔로몬이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이 왕위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의 왕위 계승권의 실재를 위해 그 왕국의 질서적 당위성을 따라서 말하는 아주 간교함이 배여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의 인식의 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그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과 거짓을 주목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전반적인 측면을 상식에서만 본다면 별로 흠이 없는 겸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진정한 상식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재적인 당위성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아는 그러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것입니다.

(상식이 스스로 실존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상대적인 존재인 한 그 자체적 정당함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납득당위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적 당위성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실존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아의 진술 속에서 '내 것이었고'라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기존사실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외적인 상황의 반전으로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당위성에 상대적으로 밀렸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황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형식적인 도의적으로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예를 갖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적 반전 정도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정한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짓을 전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 또는 '모든', 이라는 말들은 상황적 차원에서 특정한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개체적인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판단하에 있는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정황하에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서 상황논리적 판단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앞에서의 실재의식과 그 실제적 판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이 참되지 못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악함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아의 이러한 개념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의 근거인 것과같이 자신을 기만한 가운데서 밧세바에게 그 자신의 왕위를 위한 당위성을 위하여서 인식의 상황적 변화를 위하여서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함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의 왕위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으로서 자신을 세울 때에 결정적으로 솔로몬에게 지게 된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타던 노새에 앉았기 때문이며, 다윗의 재가를 말하는 정당함이 아도니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작은 하나가 모든 민심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 인식을 솔로몬에게 두는 것이 옳다는 당위성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여전히 남았고 또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비 다윗의 시종을 들었던 아내와도 같은 수넴여인 아비삭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아비삭'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잘못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삭 : 빗나간..'이라는 뜻과 '아비: 아버지'라는 말들이 합성되어진 이름으로서의 아비삭의 이름을 보는데 그것은 그 이름의 존재적 증거가 아도니아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왕위로 세운 아버지는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아도니아와 결혼해도 상대적 윤리성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바른 아버지 다윗의 영광은 아도니아에게 있는 것이라는 그러한 자기 정당함을 세상에 알려 결국 아도니아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함을 나타내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솔로몬은 왕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도니아의 악함에 대하여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아도니아도 넷째 아들로서 앞선 세 명의 형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왕위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왕이 되려는 노력과 그것을 위한 질서를 따른 가운데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윤리적 잘못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상황적 개념에서만 임의적으로 보편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더욱 하나님의 실제적 재가라는 특수상황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는 그러한 생각 일변도라는 것은 오히려 보편을 가장한 개체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의 절대성의 부여와 그에 따른 사실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진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불특정 시기와 장소와 사람들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의 한 형태적이라는 개체적 동의의 당위성을 얻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당위성으로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강변하기에는 편견으로서의 실존적 판단하에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재가 있는 하나님의 뜻하심의 사실을 반전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삭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윗과 동침하지 않은 가운데서 윤리적 입장의 법적인 측면으로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있도록 천거되어진 자로서 자신의 아비의 영광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를 상관하겠다는 것은 부모의 하체를 취하겠다는 것,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롱하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모습과 동일한 자리에 서는 죄'(창 9:21~25)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같이 종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왕상 2: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한 바로 직후에 있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사면이라든지 어떤 그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아도니아에게 그렇게까지 행하지 않는 것이 솔로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아도니아도 그러한 점을 마음에 두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모를리도 없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강경책을 두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왕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합당한 당위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시비하겠다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용서할 권한이 솔로몬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으로서 죄없다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하에 솔로몬 자신이 임의적으로 무죄를 선포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도나이의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가만히 주의 양무리에 들어온 자'를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측면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양들을 약탈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인 자신의 질서적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1:4)

'아도니아'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하신 말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아도니아처럼 상대적인 정당함만 생각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구별을 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들어와 자신의 입장을 위한 색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그리고 주의 양들을 잘못 먹이고 있는 자신의 양들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상식도 없는 것이 신앙이다'고 함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와 사실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인식함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솔로몬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모습이 되어짐을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아도니아와 같은 잘못된 거짓되고 악한 죽음을 부르는 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서 때를 따라서 주의 영혼들과 굶주린 영혼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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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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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1, 2007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2007년 5월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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