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0월 17, 2006

포도가 익어갈 때에

2006년 10월 13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민13:1-33
포도가 익어갈 때에

어떤 시인은 포도의 익어가는 때를 묘사하는 시를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란 말로 서정적인 시점적 묘사로 일반 시점적인 개념을 넘어 기억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도록하는 시점으로 승화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가 지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힌 시점적 포도익는 계절을 통해 시인은 그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에서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민 13:20)이라고 함을 언급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말씀하심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에 따라서 각 지파의 족장 된자 한 사람씩 선발하여서 모세가 이들을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보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거하는 땅에 대한 것을 알아보려고 보내는데 그 때가 포도가 처음 익을 때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탐지하는 가운데서 포도송이를 메어오게 되는 것과 무화과와 석류를 취함에 따라 그 곳을 에스겔 골짜기라고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0일동안의 보냄을 받아 정탐을 한 자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긍정적인 입장은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녀온 족장 갈렙과는 달리 그곳을 취할 수 없는 정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 비교하여 메뚜기 같다는 어떤 피해의식까지 나타내보이는 정황적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그 계기적 입장에서의 사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는 포도가 처음익을 즈음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처럼 제철과일로써의 포도의 수확을 현실적으로 하면서도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을 읽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들의 당면적인 그 즈음, 그 시기, '포도가 익어가는 그 때'를 말씀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 깨어 경성해야할 때와 그 중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주장되어지고 표현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써 자존의 절대자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실존이 정당한 존재로서 인치심에 따라 인정되었음과 그러한 왕적 권세와 구별하는 제사장적 권세와 증거하는 선지적 증거가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의 능력의 실제와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이러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기도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눅 11:2; 눅 1:49),에서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가운데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성도들의 실존적 정당함과 권세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장들과 이어서 그들을 신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에 족장들의 증거를 듣고 울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라고 하는 정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그 실존을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살펴볼 때에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은 상식이라는 보편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보편을 판단가능하다는 개념으로 사실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포도가 처음 익어갈 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몰상식을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의 상식보편적 입장을 바르게 사실화하고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로서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그또한 다시 땅을 기경해야하는 40년 한 세대를 지나는 광야를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마 21:19~21)

즉 시기를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있어서는 그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인데 그 무화과는 세상적인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만 보는 가운데 그 시간관의 사실성을 알지 못하여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 열매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정당함을 얻게 되는 시기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데 형식적인 시간에 따른 인식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민수기에서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며 무화과와 석류 열매를 취하였지만 그 성례전적인 뜻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포도를 거두면서도 그 때를 말씀하시는 주의 뜻하심의 사실성을 마음에 두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에 따라서 판단하는데 이는 에스골골자기에 마른뼈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겔 37:1,2)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생기로 들아가게 하도록 대언하게 하심에 따라서 마른뼈들이 군대를 이룸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겔 37:1~14)

말씀을 맺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즈음에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이 진정한 사실을 말할수 있는 자들로서 그 중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그 봉사하며 그 성례전적인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로써 주께 드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가 익어갈 때를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일반 상식과 인류의 사상적 입장을 잘 활용하고 사용하여야하겠지만 그것이 주의 뜻하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주 앞에서 단호히 분명 아니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중심의 고백으로 힘써 행해 나아감이며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에스겔 선지와 같이 생기를 대언하는 은사를 입은 자들로서의 성령의 능력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 포도가 익어갈 즈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어 주께 드린바 되는 종들로서 그리고 그 섬김으로써의 열매로써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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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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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02, 2006

구름이 머무는 곳에

2006년 10월 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 9:15-23
구름이 머무는 곳에

사람들은 어떤 덧없음에 대한 것, 또는 허상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을 비교할 때에 '구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용납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든지, 정황적 어울림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가운데서 표현되어진 말에 대하여서 '아니 애가 무슨 각중에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냐?'라는 말로 핀잔에 비교되어지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기독교에 대하여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구름에 비교되어지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묘사하기를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과 기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개념은 항상 같은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막을 설치하고 다시 걷어서 그 구름이 머무는 곳에 거하게 되는 그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이 구름따라 세월따라 헛도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성경을 인용가능함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작 성경이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증거함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의 현상적 판단과 부당한 인용적 오용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에 따라서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그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위에 불모양과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음과 항상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하였고 진을 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있어서도 그 구름이 떠오르기 전까지 그 기간이 짧든지 길든지 머물러 있었음과 떠오르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도하심의 사실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구름을 따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고,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구름의 의미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름을 통한 증거가 그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어떤 다른 차원에서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민수기 9장과 그 내용적 증거라고 함의 문맥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어지는 오늘의 민수기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민수기의 이름은 그 당시 정황적 인식 즉, 책의 첫 부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식들 따라서 '수'(numbers)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의 갯수를 세다'와 같은 전제적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관심대상에 관련된 경우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 관심대상에 대한 '헤아림'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이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게 하시도록 그 백성들을 먼저 헤아리심과 그들에게 적절하고 합당한 생활에 대한 기술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헤아리라'(막 4:24)고 말씀하심과 사도들의 그 가르침의 연속성에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라'(살전 5:21)고 함과 같은 것은 이 민수기적인 측면에서 이미 증거되어진 것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이제 광야 여정을 출발함에 있어서 소위 인원점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수를 파악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자들로서의 공식적 비공식적 모습을 일괄적으로 읽도록 하시고 장자의 권한 대행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처음난 자들의 위치에서 행할 수 있도록 구별을 받고 처음난 자들의 속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레위인들의 달란트적인 기업을 이루게 하심을 주목하고 그 성막의 기구들도 기름부어 성별하였음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유월절을 지냄에 있어서 시체로써 더러워짐을 인한 유월절 지냄에 대한 것을 여호와께 물어서 결정하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이면서도 실제의 구름의 이동을 통해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보를 내 뒤디고 여호와께서 맡기신 직임을 지켰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계시를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로써 '구름'은 세상의 자연현상적 입장에서 구름에 대한 인식과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용납의 정당함을 같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먼저 이러한 일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구름에 대한 통념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서 이루어진 불가지론적 입장을 나타나는 것이고 죄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하나의 인식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즉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실재라고 하는 것에 입각한 그 실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적 입장을 아무리 헤아리려고 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그렇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인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으나, 그러나 주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자기 증거'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자의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성경의 특별영감은 일반적인 오늘날의 인생에 있어서 일반적인 그 영감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생각과 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판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재고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도, 절대라는 범주의 재가를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그 절대에 비길 수 있는 비판과 그에 따른 부정적 규정의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기를 거절한 불순종의 모습들에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외에는 일반적인 은총적 입장에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전 1:2,3)

그러나 이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구름을 따른다는 실제의 개념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헛됨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 절대의 보편적 정당함을 부여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과 정당한 인생의 행보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헛됨의 비판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도, 결코 헛됨이라는 판단의 사실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하여서 불가지적 입장에서 현실적인 사실성을 임의적으로 규정하여서 열심히 우리의 삶을 경영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실존과 사실에 대하여서 절대적인 확신과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름을 잡는 헛된 인생이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을 증거하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누가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신앙생활에 의미를 두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러한 기우적인 개념의 판단에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필요성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오늘 본문에서 구름과 '불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구름과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재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서는 '구름위에 인자가 있는데 그가 낮을 휘두르니 곡식이 거두어짐'(계 14:14~20)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주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철장으로 심판하실 예수님의 사역적 증거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 쓸데없이 소위 '시간죽인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용납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말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세상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본다면, 우리 인생이 헛되다는 측면에서 별로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 보다는 인생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어떤 특별한 선민의식을 가진 것과 같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련한 웃음의 행보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자기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주 평범해보이고 헛된 삶의 연속과 별로 차이없어 보이는 신앙생활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우셨음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헤아려 볼 때에, 우리 성도의 실존과 행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구름을 따르는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생의 실존과 사실로써의 구원을 보게 되며 그 헤아림 속에서 주의 헤아리심으로 더욱 받게 되는 가운데 잘 했다 칭찬이 있는 주의 맡겨진 소임을 보게 되며 감당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모습의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바르게 보며, 그 직임을 잘 감당해내시는 가운데 잘했다 칭찬함을 얻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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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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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25, 2006

성도의 화평에 대하여

2006년 9월 2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5:11-25
성도의 중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지혜를 축척해왔습니다. 고전적인 입장에서는 어떤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고 통속적인 측면에서는 처세술과 같은 대인관계를 비롯한 특별관계들에 대한 것으로써 그것들을 재고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하겠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잘됨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 또 그러한 판단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그 앞서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치 또는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함을 기초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것은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편안한 관계, 서로에게 화평케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 성도들이 인식하게 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바른 중심과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마 5:9)이라는 그 증거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인데, 아주 기본적인 성도의 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지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 본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로와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고 함을 인함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음과 그로 인해서 아들과 딸들이 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다윗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킴을 말하고 있고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그들을 치라고 하심을 듣고 그들을 침과 그것이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다윗 앞에서 그의 대적을 흩으셨다하여 바알브라심이라 칭함이 기록되어있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버린 그 우상을 치웠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함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또 다시 물어 그 말씀하신 병법을 따라 그 전쟁을 이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있는 곳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엄습하라고 하셨는데, 그 시기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동작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다윗을 앞서 블레셋 군대를 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인 순종하여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로써의 처세, 그 처세의 기본으로써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그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로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선한 청지기의 중심이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기본으로 서로 좋게 화목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그 처세를 말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그 화목을 위해 상대방을 배려하고 더 지나친 모습까지도, 즉 상대방에게 필요이상의 정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나 또는 요구하는 관계를 근간으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는 서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깨어지게 되고 그것은 그 자신의 비참함을 현실적인 고통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비교되어지는 본문인 누가복음을 먼저 주목하고 그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떤 표현으로 읽게 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본문으로써 오늘 본문이 주목됨에 따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누가복음(눅 16:8, 눅 16:1~10)에 대한 화평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그러한 것이 주인에게 들린 것으로 알고 직분을 빼앗길 것을 생각해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서 그 주인에게 줄 물목들을 고치도록 해서 이러한 불의한 행동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서 쫓겨날 때에 그들이 영접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 관계를 성립함을 재고하고 있고 그 화평을 구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화평을 위한 불의의 재물과 같은 형식으로 화평을 구한다면 그러한 자에게 재물을 다시 말해서 그 달란트를 맡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 이러한 처세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그러한 처세술을 알지 못한 자라는 측면에서 비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세상을 알아 살기 위해 더 처절해야 돈을 구할 수 있고 살아남는단 말이야’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것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는 이미 그들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움을 지적하셨으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옳다는 개념 상대적인 것을 전혀 배제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판단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대한 정당함을 배제한, 임의적 사실은 자존의 절대자 앞에서 취하게 되는 그들의 소송적 입장이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의 실존이 부정되어지는 자로서의 미움을 그들이 적합하게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집을 지어주는 경의를 표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것을 상대적인 정황을 미루어보아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가운데서의 관계성을 마음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국의 왕에게 미움을 받아 대군의 추격을 받는 자로서 죽지 못해 산 것과 같이 외국으로 도망치고 하더니 온 나라의 신임이 그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필시 신의 섭리라고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혹 그와 같은 존재라면 서로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이 좋기 때문에 히람왕은 화평을 구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정황 속에서 블레셋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일시적이라고 하여도 그 블레셋의 나라의 한 신하가 되었던 다윗을 볼 때에 그가 나라를 세웠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억되어지는 다윗의 정황은,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가서 살기위해 미친척을 해야 했던 것과 그의 종자들과 그들의 신하적 입장에서 시글락에 머물렀던 것은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이스라엘나라에 있어서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사울의 침공에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상책으로서 그의 나라를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주시기까지 자신은 이민자의 자리에 서겠다는 그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라는 그 이름의 뜻은 '이민자'라는 뜻인데, 다윗이 여러족속가운데서 그 족속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자신의 기업에 대한 것을 맡긴다는 것과 그들의 신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그의 복잡한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행보도 성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살기위해서 아부적 개념에서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선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운데서의 질서적 자리매김에서 그 사실의 거룩함을 받아들여서 그 신앙으로 그 열심을 다했던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수와도 화목케하시는 그 능력에 따라서 허락되어진 그 질서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블레셋은 다윗에게 그 골리앗을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가운데서 과연 상식적으로 다윗을 신하로 신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화목케하심이 아니고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자신들이 다윗에게 배려해준 것과 같은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화평의 주체가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 화평의 주체로서 다윗의 분깃으로 그 나라에 대한 소유권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임의적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화평의 이해에 대한 중심이 다윗과 다른 가운데서 그 화평의 관계는 깨어지고 전쟁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 전쟁에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된 것으로 말씀하심을 읽게 하는 그 승리를 말씀하셨고 다윗은 그것이 ‘바알브라심’이라고 함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갈라진 틈의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깨어짐에 있어서 주관자, 승리자’(lord of the breaks)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화평이라고 함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판단하심의 재가를 따른 자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알이 격파한다’라는 뜻도 되면서도 이것은 세상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다음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써 그 확고히 전쟁을 통해 분명히 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블레셋의 두번째 다윗의 이스라엘을 침공함에 대한 주 하나님의 병법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병법에서 인간의 걸음에 비교되어지는 걸음소리가 나는 가운데서 그 공격의 시작 점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다윗의 병사들보다 앞서 나가신다는 것은 인격의 창조자이시며 인격적인 자신의 행보를 주목하도록 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상대적인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변론하시는 인격적인 주 하나님의 판단하심이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역사적 시기과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과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 뜻하심 안에서 사람마다 다 달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주를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의 사실을 믿고 누리고 증거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의 현실적인 증거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도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의식에서 화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로 인한 사람들의 인식과 질서와 그에 따른 예의와 더 나아가서 처세라고 하는 것도 존중하고 그들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말씀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기본적인 존중을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존중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일반적인 사회의 질서라고 하는 것과 보편인식들과 그에 따른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로써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관계를 주의 구원하심의 화평에서 새롭게 규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볼 때에는 그 잘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여서 아부의 수준처럼 또는 필요이상의 비하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또는 맹목적인 순종을 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시비를 불러오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주의 구원하심에 따른 화목케하심을 마음에 바르게 두는 성도의 중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 많은 처세술적인 기술(技術,記述)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따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참고하고 재고함이 옳은 것이며, 주의 말씀하심에서 받을만한 사실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것에서 좀더 지나쳐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것은 물질적 개념이나 심지어 맹목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평케된다는 것과 그 정황에 따른 주어진 상황에서 질서적 화목을 이루는 평안을 구할 때에 세상의 주고 받음의 보상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화평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따른 화목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천국의 아들된 성도들의 화목의 기본이며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 주의 뜻에 합당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에게 화평케함에 대한 신원하심과 같은 그것이 일률적인 상대적 입장에서 우리 성도들의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신원하심이 실제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주의 구원에 따른 화평을 전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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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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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04, 2006

서기관의 의문

2006년 9월 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2:1-12
서기관의 의문

입추도 지난지 오래되어 기억하지 않는 이 때에도 아직도 매미는 울고 있는 그러한 때.. 아직도 한 낮에는 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도 식중독에 따른 보도가 있어서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그러한 경각심을 가지게 됩니다.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 귀한 것이지만 상하거나 해롭게 된다면 때로는 버릴 수도 있는 특권이 또한 같이 주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아깝지만 건강을 위한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위 어느 '먹자 골목'에서 팥이든 빵을 사먹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상하였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빵속이 없는 것을 사먹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는데 그래도 빵은 그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이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맛없는 빵을 '앙꼬없는 빵(bean jam)'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에서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의 중심은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구주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칭 '구원파'와 같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일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고 집에 계심이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신할 수도 없었는데 한 문둥병자를 네명이 메고 와서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내리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그곳에 앉았다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며 참담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그 중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 속의 의문을 아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상을 들고 가라고 병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어나 상을 들고 감에 따라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문둥병자 그리고 그 네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함께한 사람들, 서기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서기관의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중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또한 오늘의 주목할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문 앞장이 되어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라는 개념으로 한정시켜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위적으로 받으려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성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 나은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시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적 실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도록 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나기를 나타내시고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귀감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신 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들짐승과 같이 계셨던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짐승의 마음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 그러한 다니엘의 증거(단 4:32)을 읽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이해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있어서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예언에 대하여서 분명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않는 자들은 주검이 있는 곳(마 24:28; 눅 17:37)에 있게 되어지는 독수리처럼 되어짐으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의 의문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써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면서도 성경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들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주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 행함에 열심이 있는 자들 즉 문둥병자를 짊어지고 온 자들은 예수님이 그 데려온 자를 낳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나 정황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존경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구원과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메시아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능력이 많으신 참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사의 모습 자체로서의 존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보시고 네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적 믿음으로써 인쳐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즉 그 낳게 해주시는 의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에서 주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의 실체를 마음에 두도록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사함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실제의식을 부여하여서 그것에 비로소 목을 메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는 구원파의 입장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 주목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사실적 증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그 서기관이 더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재가적 입장을 읽을 수 있는데, 그 서기관의 판단에 대한 시비를 직접 거론하시면서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께 있다는 것과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것을 선언하심에 있어서는 서기관과 같은 상대적인 인식에서의 비판적 당위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황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고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과 같이 행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 증거와 사역과 그 풍성함인데,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그 풍성이라는 인식을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국한하려는 그러한 악한 모습에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눈감게 만들어버려려는 것입니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경향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복음과 같이 사회활동과 노력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복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붙든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주목할 때에 과연 소위 이단인 '구원파'와같이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개념의 사실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실용적 필요성에 따라서 구원을 실제적으로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이미 주의 정하신 바 구원을 실제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을 주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비롯되어질 때에 진정 생명의 떡이 진정한 양식의 떡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변질되어져서 신앙의 식중독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해보자는 인지상정과 또 잘못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유익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보편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실존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같이 즉 '지경을 확고히하다'라는 그 뜻과 같이 임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가운데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적 입장에서 짐승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묶여있어야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이심을 먼저 기억하고 그가운데서의 사실의 실존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으로 그 풍성함과 구원함을 증거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서기관과 같이 성경을 많이 알고, 지위를 가졌다고 하나 그 실제의식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비로소 두는 것보다도 다른 것을 우선시하고 실제화한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의 판단에 침묵하여야 할 것이며 그 진밖에,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신앙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가운데서 말씀하심의 실제의식을 비로소 잘 구별하여 보는 가운데 참으로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주의 성도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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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31, 2006

미갈을 데려오라

2006년 8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하3:1-16
미갈을 데려오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주목한다, 사람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목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시대마다 또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 왔음을 기억하면서도 어떤 한 방향으로 악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데, 바른 여성관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그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인생들에게 유념해야할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대적으로 모계 중심의 사상에서는 숭배의 사상도 있었고 욕정적인 측면에서 노예적인 측면의 부정의 모습도 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성에 대한 상품과 그에 따른 지배개념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 악한 모습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생계형이라는 개념으로도 당연성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중심이 바르게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게되는 것 중에 오늘 말씀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의 아내됨을 인하여서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께서 마땅히 가져야할 오늘날 여성에 대한, 인식과 중심으로써의, 실제의식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이 전쟁이 오래동안 있는 가운데 사울의 집은 쇠하여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감을 언급하시면서 다윗의 아내와 소생들을 기록하고 있는 다윗의 집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역시 동일한 때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전쟁이 있는 가운데서 사울의 집안을 기술하고 있는데, 아브넬이 그 집안의 권세를 잡음을 기록하고 있고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한 것에 대하여서 이스보셋이 어찌 그렇게 하는가 하는 말을 건넴에 따라서 아브넬이 자신이 '개 머리'냐는 말을 하면서 이스보셋에게 반목하게 되어지고 이스보셋은 아무말도 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반목후에, 다윗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사울의 땅을 다 넘겨주겠다는 것으로 언약을 제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가를 데려오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보셋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처 미갈을 다윗에게 돌리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이스보셋이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취하매 발디엘이 바후림까지 울며 따라왔는데 아브넬이 발디엘 그에게 돌아가라고 함에 따라서 그가 돌아갔음에 대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움의 사람 이스보셋과 세상의 입신양명의 아브넬의 정치적 입장에서의 취하는 그들의 여성관과 그 일시적으로 취하였던 발디엘의 연모하는 여성관과 다윗이 자신의 아내로서의 정당함에 따른 미갈을 찾음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은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다윗이 그 자신의 아내로서의 미갈을 찾는 그 중심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여성관으로써 우리에게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어지는 여러가지 관점들이라고 하는 것이 다양히 있을 수 있는데 그것들은 주의 말씀하신 바 여성은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란 말씀의 의식속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섭리적 입장에서 질서를 말씀하심을 인하여서 일반적인(?) 세상의 여성 폄하의 근거를 말한다는 합리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합리성의 기원이 상대적인 인륜적 입장에서 비로소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섭리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 세상의 합리적 표현이 차용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여성이 남성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상대적인 측면의 합리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판단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할 때에, 즉 합리성의 굴절과 사실을 정당하게 말할 때에 여기에 대한 논점이탈적 개념에서의 비롯될 수 있는 논의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함에 있어서 합당하게 전제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의 인생들에게 있어서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의 왜곡과 굴절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맹목적인 다산의 상징으로써 숭배하는 것이나 또는 색욕이라는 정욕의 대상으로써의 추구라는 것으로 영광이라는 것을 오욕하도록 하는 것과 산업시대에 있어서는 그 영광을 추구함을 물질적 개념으로 바라보아 성상품에 대한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상대적 측면에서의 연약한 사람들은 안티적 개념으로서 손쉬운 동성으로써의 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과 교육의 인식과 정황에 따라서 남성이 여성적 환경에서 자라게 되어지는 가운데 발달성장에 있어서 몸의 호르몬적인 영향으로 동성이나 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하나의 추구하는 영광에 대한 인식의 임의적 선택이 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해야 하는 고통과는 달리 진정한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음의 당연함을 말하게 되는 중심에서 여성관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다윗의 미갈을 찾음이 그것이라고 함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사울의 집안의 몰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 의미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거짓된 신앙까지 표현되어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여성관의 바른 인식도 가지지 못함에 대한 사실로써 측정되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정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황을 고려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더욱 믿음안에서 세상의 정황을 살피고 구별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오히려 힘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정황을 살핌에 있어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하나님안에서의 실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상대적인 요구에 따른 인식을 비로소 따르고 있었기에 그러한 몰락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즉 사울의 그 이름은 '요구되어진(desired)'라는 뜻의 이름의 실존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치적 입장에서 임의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사울이 발디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개념에 있어서는 여성이라고 함의 그 영광을 정치적 목적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반목의 근거되는 이유라고 하는 것은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아비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고대 왕국에서의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왕의 첩을 취한다는 것은 그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추구하는 그 영광을 여인에게서 찾는 경우가 그것이었습니다. 아브넬이 그 충성한 대가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하는 그 입신양명적인 속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목후에도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아비 사울의 딸 미갈을 내어주도록 조치를 취하였고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힘의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가운데 다윗과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물고를 트기위해 미갈을 다윗에게 보내도록 그 정부되었던 발디엘을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인 도구적 입장에서의 여성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의 경우에 있어서는 라이스는 '강함'을 말하고 있고 발디엘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존재적 증거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이름의 '미갈'여인을 취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하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강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내를 얻는 자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것'(잠 18:22)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설득력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강함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강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영광으로써의 미갈은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으로써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디엘의 경우는 결국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자의 요행적 입장의 아내를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여성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상대적인 정치적 측면에서 취할 수 있는 기쁨으로써의 여성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름은'사랑받는 자'(beloved)입니다. 그런데 그는 시편에서 거의 하나님의 자존자로서의 계시적 이름인 '여호와'하나님의 자존적 그리고 사역적 실제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첫번째 내용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영광으로써 여자를 합당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합당하게 아내로 취하게 되어진 여인이고,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미갈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미갈의 중심은 다윗이 마음에 둔 합당한 기준으로서의 여인의 모습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후자적인 측면의 그 영광을 인해서 '사울의 조건적인 측면을 들어 정식으로 아내를 삼았다'(삼상 18:27)고 주목함이 더욱 옳은 것이며 그것을 바르게 자리매김되도록 하는 것이 그 신정왕국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다윗의 해야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성도들의 '가정을 살펴보는 자로서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딤전 3:5)를 읽게하심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한 영광을 바라봄에 있어서 여러 여인을 거느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써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과 그 형태로서 성경이 일부일처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러한 논란으로 논점을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은 특별계시의 영감안에서 허용되어진 그의 신앙적 측면을 나타내는 존재로서의 생애를 살았고 지금에 있어서 특히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어진 가운데서의 일반영감 속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모습과 일반인들의 모습은 단순한 동일비교의 문제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굴절되어진 것같은 일부 다처제적 입장을 취한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특별영감적 차원의 합당함을 말하면서도 허용적 증거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심'을 나타내는 그 현실적 증거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허용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이며,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어짐의 사실이 그러한 현실적인 실제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메이지 않으시는 본질적 언약의 개념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실제라는 것이 더이상 계시의 담지자적 역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윗의 다처제적인 입장을 맹목적으로 흉내내는 것은', 시대적 인식의 착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본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합당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갈이 나중에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즐거워 춤추는 다윗을 보고 못마땅해하는 그러한 모습과 그로인해서 그 미갈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뜻하실 때에 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미갈의 완전성 때문에 다윗이 그를 비로소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하심의 섭리에 따른 믿음으로 미갈을 찾았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미갈이 그만한 완벽한 자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먼저 마음에 둘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여자로서의 아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진정한 여성을 바라봄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허락되어진 나의 삶을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자로서의 영광은 누구인가를 믿음으로 주목하고 아내를 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써 합당히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 18:22)

합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임의적 개념에서 그 영광으로써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음란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바라보게 되어지고, 그 여성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이성과 그 자신의 존재를 값싼 표류하는 이성적 판단의 거품에 사라지게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형제 자매 모든 성도 여러분, 주의 마음에 꼭들었던 다윗과 같이 남자의 영광으로 빗으신 그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고 비록 세상의 여러가지 합리성의 여파속에서 형태적인 측면에 부응해야하는 가운데서도 바르게 취할 수 있는 중심이 되어서 음란한 세상에서 다윗처럼 합당한 영광을 바라보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영광에서 주의 영광으로 이르게 되어지는 뜻하심을 받드는 자리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성도된 자매여러분도, 세상의 여러 관점과 관능의 아름다움을 시험해보고 싶은 욕망의 기만에 자신을 내어주지마시고,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남자의 영광이 되어주셔서 주의 가정을 통하여서 교회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운데서 기뻐하는 성도들로서 여성관을 바르게 가지는 가운데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그 주님의 영광의 길을 잘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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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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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8월 07, 2006

복음의 시작

2006년 8월 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막1:1-8
복음의 시작

소위 '차포를 떼고..'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여건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때에 아주 원색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할 때에 사느냐 죽느냐 생존적 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재고의 일순위도 아니고 영순위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달리 어떤 불필요한 것을 강요하거나 당위성을 요구한다면, 요즘 코믹한 언어를 사용해서 상당히 '짜증 그대로의 모습'도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생존세계, 살기 위해서 밤잠 못자고 노력하고 있는 또는 그러한 노력을 해야하는 가운데서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한가하게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나 또는 그래도 살아가기 급하지 않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상당히 교회에서 증거하는 내용들에 대하여서 경멸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달리 평가되어질 수 있음은 또한 기정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과연 이러한 말들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세계에서의 지친 영혼들에게 주의 복음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회유적 합목적성에서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재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뜻하심이 그렇기 때문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의미로 말한다면 교회가 그들에게 속보이는 것으로 능력을 상실하지만 후자의 입장이라면 그 지친 영혼들이 주 앞에 나오게 되어지는 능력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이사야의 증거된 말씀을 따라서 세례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함과 온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한의 모습이 기술되며 그의 증거의 내용으로서 회개의 세례와 그 세례의 주체자에 대한 설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소위 '구원파'라는 잘못된 해석적 선택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시작을 바르게 알때에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로서 빛된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음의 시작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먼저 복음은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그냥 허무맹랑한 귀를 즐겁게 하는 유희적 개념의 비실제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주관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명과 관련된 실제적인 것입니다. 즉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으로써(롬 1:2),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생존세계에서 살고있는 것은 내 생명을 지켜나가고 풍요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기위해 노력하기에도 바쁜 것은 바로 나의 생명에 관한 실제적인 것이 아주 현실적으로 의식되어질 수밖에 없음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난다고 할 때에 과연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함에 마음을 두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밤잠 못자고 다른 곳에 눈돌릴 수 없는 바쁜 나의 삶을 위한 변명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에게도 더욱 솔직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어질 것입니다.

물론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이 진짜라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손해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손해를 본다는 것의 상대적 여지를 가지고 강조점을 이동시켜서 이러한 소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항상 남는 것임에도 마음을 여전히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같이 생각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러한 것에서 신앙의 확신을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과 그 절대 합당함까지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에 대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제적 책임을 질 수 있음에 대한 여지적 반론의 모든 말들을 기각시키신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신앙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개연적인 측면에서 비판도 긍정의 사실도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과, 그것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의 사실적 정당함이 이미 부여되어진 실제적인 사실로서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자복하고 회개하게 된 것은 그들의 실존의 문제라고 하는 것, 그 당시 로마의 종속되어진 상황과 고통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산다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예수의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것을 마음에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정황에서 비로소 동기부여되어진 자들도 있고 생활적인 빈곤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존의 문제의 실제적 문제로서 동기부여를 받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정화되어질 수 없는 것의 모습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사실성에서 정확하게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부르셨음에 대한 사실은 기정사실로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름부음을 받으신자'가 자신의 주권적 기뻐하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에 대한 정당함의 사실을 부여하시는 분으로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못하면 정황적인 사실이해에서 그 사실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고 다만 맹목적인 임의적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현대적인 이성적 입장에서는 나약한 사람 힘든 사람의 자위적 개념으로만 오해하게 되어지는 현상적 인식의 자기 기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이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러한 중심을 가지는 것까지는 옳은 것이나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도 그 구원의 사실의 확신을 임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또한 그러한 것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대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질문해놓고 그 구원의 확신을 아직 연약한 가운데서 마음에 두지 못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그 합당함의 시비를 거치지 못한 가운데서 말하여서 임의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실제적인 사실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베푸실 분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로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그 주체로서의 예수님이 누구신가 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충족성을 합리성에 비로소 두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론에 기반한 실제론이 아니라는 것에서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모두 성경적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논리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인용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의 인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에서 인용한 가운데 그 인용의 사실을 합당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마 4:1-11 참고)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실제의식에 매인 나머지 그 구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의 구원의 확신의 사실을 말함의 충족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소위 이단 '구원파'의 거짓됨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실제적 사실은 합리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 합리성의 전환적 모색으로써 성경인용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는 곳에 나가도록 말하는 모든 이단들에 대하여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함 즉 예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할 때에 그 구원의 주체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로 알게 될 때에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며 합당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깊이와 정도는 달리 나타나고 그 확신의 정도도 상대적이지만 그 믿음을 주시는 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의 믿음의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점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실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시작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비로소 구약과 단절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이전에는 어떤 후에 오게 되어지는 또는 후에 기술되어지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으로도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시작이라고 함을 말함에 대한 당연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약성경으로써의 이사야의 말씀의 예언적 정당함을 말씀하심으로 그 신구약의 연속성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그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함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예수께서 기름부음받으신 자로서 그 기름부어 사실화한 것은 그 거룩성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르케'라는 말로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태초에'라는 말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되어지는 '바라'(태초에)(창 1:1)라는 말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그 시점적 이해가 다르면서도 실제적인 비교에서 사실을 읽을 수 있는 것을 허락하신 것으로써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태초라는 것과 복음의 시작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새로움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즉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연속성에서 고생하고 우리의 존재를 임의적인 스스로 주관한다는 것에서 책임지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을 때에 주님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써의 시작 그 예정된 그 뜻하심의 시작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 별로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여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되었고 그들을 통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증거되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말했던 것을 이 복음의 시작에서 이미 주목한 자신의 신앙고백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특별영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 성도의 일반 영감과 다르면서도 연속성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들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나이들며 쇠퇴해져가는 모습과 그렇게 들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전보다 못한 모습이라고하는 인식의 판단 강요가 가능한 나의 모습이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지 못한다는 강요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대한 합리성의 표현과 기술이 불가능하게 여겨진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현상적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나를 복음의 시작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은 기정사실로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에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별로 내놓을 것이 없는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는 나의 삶 속에서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씨를 뿌릴 수 있는 종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빌 2:13)을 바라보게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으로 그가 그 믿는자를 구원하신다는 그 진정한 실제의 것으로써 모든 인생들이 들어야할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제의 구원의 확신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그 충족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이며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알아가는 자리에서 주의 구원의 확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은혜로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존세계에서 밤잠 못하고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확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음에 대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바빠서 또는 여러가지 생존에 대한 이유로 거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진실된 자는 믿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친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로서, 예수님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그 감사로 복음의 시작으로 나를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성실하심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아주 평범한 가운데서도 주의 특별하신 섭리를 받들어내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첩경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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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6월 26, 2006

시글락에 머문 다윗- 복잡한 세상속에서..

2006년 6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27:1-12
시글락에 머문 다윗

우리 인생이 경영하는 '인생이라는 삶'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친 사람들은 좀 쉬운 것을 추구하고 있고 지친 삶의 무게에 가중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일말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편안함을 누리고자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분복의 하나로써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생은 그 토지를 갈아서 그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은 그들의 종된 자리에서의 위로로서의 자유와 어려움의 무게를 내려놓는 편안함이라고 함을 추구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일말의 추구적 당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비로소 불순종이라는 죄로 인한 욕심과 어울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규정적 입장을 알지 못하는 죄악된 가운데서의 분별의 임의성 때문에 그 분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와 실체가 없는 실체로서의 고통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참 고통스럽기도 하고 삶을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지치기 쉽고 싫어지는 가운데서 이 복잡하면서도 배척하고 싶은 가운데서 그것이 가능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지는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며 기쁨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머리속에서는 세상의 여러가지 생각들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지금에 있어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의 삶에 또 삶을 주장하는 신앙은 그러한 것에 대한 온유적 답변을 말할 때에 그렇게 쉬운 것으로 비로소 위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우리는 더욱 사모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물이 있음에 대한 소리를 들었을 때에 심정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부터 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게 될까 하여서 블레셋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와 함께한 자들과 가솔들을 데리고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게 됨과 다윗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찾아 죽이기 위한 수색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이르러 블레셋의 지방중 한 곳을 주어 거하기를 구하니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다고 함과 그것이 그때당시 유다왕의 소유가 되었다고 함을 기록하고 있고 또한 머문 기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임을 기록하고 있고 이 일에 있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데려가지 않음과 아기스의 그 다윗의 행보에 대한 것을 보고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는 중심을 가졌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간 이유와 그곳에서 행한 행보에 대한 해석과 사태에 있게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나감에 대한 그 중심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신앙이 약해진 가운데서 자구책으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주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적 개념만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나간 것은 두 번입니다. 한번은 사울에게 쫓기는 중심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나타나서 아기스에게 나아간 것(삼상 21:1~15)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상황을 구별하여 주의 섭리를 따르는 자로서의 순종으로서 나아간 오늘 본문(삼상 27:1~12)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기스왕에게 나아감을 말하는 본문(삼상 21:1~15)에서는 직접적인 인식이 기록되어지지 않았지만 시편에서는 그의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고 그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는 중심이 있었다는 것과 그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 섭리의 사실을 믿는 가운데서의 순종하는 중심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시 59:1~17)

두 번째 아기스 왕에게 나가는 것은 전혀 반전되어진 가운데서의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믿음의 종으로서의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을 믿음으로 피하는 것으로서의 주 앞에서의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해서 죽이고 다윗에게 이미 예정적 주어진 그의 나라에 대한 기득권에 대한 항의와 존속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다윗은 이미 그 기득권적 재가가 다윗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께서 나타내시기까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두번 있게 되어지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그러한 메타적인 그러한 입장을 취하여야 하겠다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소위 '상책'이라는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행위로써 블레셋 족속을 택한 다윗의 행보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이 블레셋 족속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이민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서의 법적인 실제의 이스라엘의 왕적 권세와 그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현실에 아직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기름부으신 왕과 그의 기업이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 정당성을 거두시기까지는 합당하게 아직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민자처럼 기업의 주장을 비로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원하여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으로써의 블레셋 족속에게 가서 그의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당위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곳을 준 것에 대하여서 좀더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의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휘어짐 타래(winding)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곳을 다윗에게 주는 아기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다윗을 시험하여서 자기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중심도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글락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곳이었고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윗이 아기스왕을 위해서 일하면서 자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도 관계적 판단을 위한 그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시글락이란 곳에 현실적으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사실 그곳에 그술사람들이 있었고 아멜렉 족속도 있었음을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그술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술사람은 유다족속으로서 이후에 다윗의 아들 암논을 낳게 되는 다윗의 아내가 그 족속사람인 것과 같이 다윗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도 이후도 호의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지고 있는 족속인데 그 지방족속중에서는 애굽에 오가는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위성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그 족속들 사이에서도 변방족속으로서의 문제가 있음에 대한 소외적 계층으로 주목되어지고 이것은 인식적으로도 충돌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을 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다른 또는 바른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또한 있었다는 것이 그곳의 사람들의 인식과 그 정황의 복잡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범하는 자들로서의 그술사람들을 침에 있어서 본 그술사람들의 중심에서 직접적인 전반적인 반목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선적 판단의 정황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의 현실적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블레셋 아기스 왕은 유다민족을 징벌했다는 액면적 판단으로 다윗을 자기 사람으로 임의적 해석과 사실로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인식과 정황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상황적 입장에서의 사실의 판단의 그 차이는 과연 많이 복잡하면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게 역사하심을 따라서 다윗은 원수와도 화목케되는 그 현실적 사실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순종의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시글락과 같은 아주 복잡한 세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굽어져 판단되어지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실타래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믿음으로 상황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잘 구별하여 사실로 받고 생활하여 나갈 때에 주의 기쁨 가운데서 원수 가운데서도 상을 베푸시는 그 화목의 능력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우리 삶의 분복을 누리며 또한 주의 예비하신 영광의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 사람이 '신은 죽었다'고 임의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며 '위험하게 살아라'는 모험적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노력해야 하는 도덕철학밖에 안되는 것으로써 그가 그렇게 혐오하던 자신의 입장도 역시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답변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는 중심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스스로의 삶을 위한 노력과 그것이 진정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써 인생으로서 내가 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는 것의 인식적 사실은 상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존의 하나님이 규정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함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타래같은 복잡한 세상도 주의 보내심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 나의 삶으로서 사랑할 이유와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진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종들로서 비록 실타래같이 복잡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강요되어지는 포기내지 도피와 같은 것에 굴복하지 않고, 참으로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잔치할 수 있는 진정한 사실구별을 통하여서 삶을 긍정하고 주 앞에서 다윗(beloved)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화목의 능력을 통하여서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받는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 세우심을 받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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