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27, 2006

천국, 열 처녀 비유

2006년 3월 2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5:1-13
천국, 열 처녀 비유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미리 미리 준비해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미련함이나 약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본다는’ 것에 대한 관점을 생각해보면,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매일 직접적인 필요성도 없는 ‘비상식량’이라는 것을 집에 쌓아놓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상적인 판단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 행하는 자가 위기의식이나 비상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지난 역사에서도 주목할 수 있는 ‘오일쇼크(The 'Oil Shock')’와 같은 것이 있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름을 비축하는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것은 그 당시 사회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각 나라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석유를 수입해서 쓰기도 하고 나름대로 비축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원고갈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일쇼크’와 같은 그러한 상태를 생각해서 각 집안마다 나름대로의 필요한 것을 구입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도 그러한 석유만을 비축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의 당위성이 없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성적인 판단에 있어서 그 기준으로서의 상식선에서 용납의 여부와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이라고 함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에는,오늘 본문에서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상식선이라는 기준에서 비로소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에서 그 기준을 기억하고 상식이라고 함도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천국에 대한 세상의 이해하지 못함과 종말의 때에 대한 합당한 사실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그 종말의 때를 그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다고 하심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써 미련한 자들은 등은 가지고 나갔으나 기름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나갔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다 신랑이 더디옴으로 인해 졸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밤중에 신랑이라는 소리와 함께 나와 맞으라고 할 때에 그 처녀들이 다 준비하는데, 미련한 자들은 슬기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구했으나 슬기 있는 자들은 둘다 모자를 수 있으니 기름을 파는 자에게 가서 구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저들이 기름을 사러 간후에 신랑이 와서 예비되었던 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문을 열어주기를 구할 때에 그 신랑의 목소리로 보이는 말씀이 그들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심을 기록하고 있고 그날과 그시는 처녀들로 비유된 성도들이 모른다는 말씀과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인식'인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자는 깨어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로써 바른 천국에 대한 인식으로 믿음으로써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한 자로서 주 앞에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문맥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은 본문 1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 때라고 말씀하심이 바로 종말의 때를 전제로 하고 있고 종말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마 24장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마태복음 23장의 내용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적절하고 정당하게 문맥적인 것을 살핀다면, 마태복음 23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라고 함과 그것의 화를 말씀하시고 있고 24장에서는 그 종말의 때에 성도가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25장에서는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천국에 대한 인식이 믿음으로써 나타나는가 그 여부에 따른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모습으로 주목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등은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을 미련한 자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을 의식하게 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없어 그의 신랑을 보지 못하는 모습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맥적으로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일상적이고 신앙적인 것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이 불가지론적인 입장이었고 임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 당시 성전세를 내기 위해 예물로 가리켜 맹세한 자는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측면으로 잘못되게 가르쳤고 비교되어지는 성전과 제단과 같은 것으로 가리킨다는 그 가치관적인 기준의 모호함을 보였던 것입니다.(마 23:16~24참고)

이러한 신앙의 가치관과 실제관을 가진 자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송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기본적 첫번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마태복음 23장 39절과 마태복음 6:9절의 말씀을 비교할 때에 진정 일관성이 있는 말씀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써 언급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라는 그 이름의 증거적 내용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힘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고후 1:20)고 하심이 그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의 본문에서 주목함과 주의 가르치심의 전제적 의도하심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을 믿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함의 사실을 생각하여,임의적으로 행하지 않고, 신앙의 진정한 의미와 사실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거룩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중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냥 참되게 믿는다는 임의적 의지적 표현만으로 비로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라고 하는 예수의 그 계시적 뜻하심을 기억하고 그것을 우리 삶에 나타내기를 소원하는 신실함을 나타낼 때에 기름을 준비한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절대의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자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기정 사실화 시키심과 그것의 정당함을 받는 것을 기름을 준비함으로 그 거룩함의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것의 한 예가 사무엘 상 3장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목이 부러져 죽게 되는 신실하지 못했던 엘리의 섬김 속에서도, 그 질서적 정당함을 직접적으로 부인하시지 않는 한에서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잘 성장한 예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들으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존재적 사역적 인물'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을 읽도록 하심이 등불을 준비하는 처녀들의 중심에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2~4)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종말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며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함에 있어서 '독선'이라는 말을 하고 있고 아주 편협한 것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무지함과 그 독선을 상대적으로 가리고자 할뿐 지혜없는 미련함을 지닌 자라고 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이고 그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것이라고 할 때에 상대적인 측면에서 편협을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천국의 사실과 그곳에 들어가는 지혜로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비로소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으로도 그들의 말이 편협함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임의적인 신앙의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임마누엘의 이름으로 오심을 기억하지 못하고 소경된 자로 미련하게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치 못하는 복음이라고 함은 자존의 하나님의 그 이름에 나타나는 그 계시적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믿고 '자존의 하나님이 우리의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예수의 이름인 것을 기억할 때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우리의 삶을 그 정당히 분별하여 받으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그 거룩함이 함께하시는 주의 거룩하심의 재가를 입는 자들로서 슬기로운 자들로서 기름을 준비한 자들로서 주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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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3월 02, 2006

요셉의 생철학

2006년 3월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창41:14-36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

꿈과 현실 그리고 꿈과 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심리학이나 기타 관련학을 다루는 자들이나 아니면 몽매한 신비주의자들이 마음을 두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 고민하는 자들은 배척하거나 또는 그 연관성이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이 사람들의 동의적 차원에서 그 특정 집단에 사실화시키는 기만적 모습도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또한 신앙에서 꿈과 계시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된다는 것이 중요성을 과연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고민하게 되는데 그 즈음에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주목할 수 있는 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심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5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로가 꿈을 꾼 후에 해석을 위해 고민하는 가운데 술관원의 천거로 인해서, 요셉을 부름과 그에게 자기의 꿈에 대한 것을 진술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살찐소 일곱'과 '파리하고 흉악한 소일곱' 그리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술객들에게 말하였으나 보이는 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5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셉의 바로가 꾼 꿈에 대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고 함을 언급하면서 그 해석과 그것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즉 일곱소들과 일곱이삭들의 관계는 7년 풍년과흉년에 대한 현실적인 사실에 대한 것임을 말하고 있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고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는 안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꿈과 계시의 상관계이고, 그것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꿈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개념과 그 자의식의 불만이나 여러 정황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적 입장에서 합리성을 비로소 이끌어 나가기 보다는 우리의 두뇌가 쉬지 못하고 불편한 가운데서 불규칙하게 의식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정보적인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의식활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이 쇠약하거나 또는 악한 악령의 사악한 주장으로 인해서 의식의 활동이 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와 그 수하천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정에 대한 근거는 좀더 뒤에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계시로서의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이라고 함을 통해 계시를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 자존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선택적 정당함은 하나님 자신께 있기에 여러 불합리하다는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의 비판적 견해는 이미 의미를 상실한 기각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 꿈의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또한 합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의 꿈입니다.(창 37:6~11) 그 중에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인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마 6:9~10)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광명한 새벽별'(계 22:16)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요셉에게 그 빛을 더하고 그로 빛나게 하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적 의미가 요셉에게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실 때에 '해와 연한을 이루라'고 말씀하심으로 비로소 그 때 시간이 창조되어진 것은 아니면서도 그 시간의 실존적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심의 징표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의 인식을 주목할 때에 그 계기로서 시간과 그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하게 되는 사유의 총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사유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복종하게 하실 것을 성경이 말씀하시고 있는데(고후 10:5), 이것은 구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그것에 대한 노력이 실패하였고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요셉의 꿈이라고 함에 이미 나타났던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그의 꿈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것으로써의 권위적 사실로서의 권세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임의적인 꿈해석이라고 함을 말하는 실제없는 합리성으로만 행하게 되는 애굽의 술사와 같은 오늘날의 몽상가와는 그 권위적 실존과 그 사실은 비로소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그 정당성이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재가를 입은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실의 진정성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꿈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나 오늘날 임의적인 해몽가의 행함과 비교되어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정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의 사실에 있어서도 분명 그렇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에 대한 가장 합당한 권세로 기름부음의 실제적 권세가 이미 요셉의 존재에 꿈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꿈은 비로소 그 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것을 그 때에 비로소 나타내셨을 뿐이기 때문에 임의적 꿈이라고 함에서 몽상가로서의 발을 들여놓는 것과 전혀 다른 실존적 인물이 요셉이었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이라고 하는 특성에 대하여서 주목해보면, 이것은 어떤 거리와 공간이라는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써의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써의 의식활동입니다.

즉 이것은 창세전에 역사라고 하는 것의 활동의 산물과 그에 따른 인식의 산물이라는 사유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어지지 않으면서도 판단의 형식을 취하는 계시의 성격을 잘 드러낼수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러한 꿈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스도의 뜻하심의 재가를 입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는 타락한 천사들의 강요에 따른 인식의 발생으로 꿈의 실존이 있게 되어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삶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지 않는 것으로써 오히려 삶을 외곡시키는 것으로 또한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계시자를 숭배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며 이것은 그렇게 행하는 존재가 판단을 받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 22:18)고 하심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존재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면서 본문에서 주목하면 바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내가 그 꿈을 술객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보이는 자가 없느니라"(창 41:24)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의 세상에서는 삶이 반영되어질 수 있는 의식들을 해석하거나 창출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셉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자녀되어진 사들이 주 안에서 합당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노력으로 '세상에 빛'(마 5:14)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식함이 옳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로의 꿈을 해석함이 요셉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이처럼 세상에 성도들이 그리스도 빛되신 주님 안에서 세상의 사실도 규정함의 합당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사실 우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에 대한 정당함의 시비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실 우상주의라는 개념을 단정짓기 위한 그들의 판단인식의 정당함이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거나 또는 그 정당함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임이 기정사실일 때에, 그들의 옳지 못한 말로 사람의 눈을 가리고자 하는 중심을 주목할 수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꿈과 계시라는 것은 삶을 해석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사유로서 철학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임의적 꿈과 임의적 해석으로, 또는 그 꿈이라고 하는 것이 의식활동의 반영이라고 함을 볼 때에 비합리성을 넘나드는 정교한 지식이라고 함의 확장적 의미를 말한다고 할 때에 그러한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라고 하는 고품격?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운데서는 합당하게 우리 인생의 삶을 바르게 실제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빛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는 것'의 편협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 안에서 사실의 실제적 정당함에 따른 판단으로써의 합당한 사실을 통하여서 삶을 해석해내고 인도하시는 주님 안에서 구원과 그 삶을 바르게 분별해 내며 인도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며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주 앞에서 상급이 있는 그것을 좇아 가는 참된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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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2월 23, 2006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

2006년 2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갈1:11-24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

시대가 변하고 그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와 지식이 더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왕래가 또한 빨라지는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그 누리는 문화라는 것이 유익을 위한 것으로써 좋은 것이면서도 그 받는 사람의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그 악한 면이 있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짐이라고 함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작금의 인터넷 문화라고 하는 것과 그것으로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진보에서 개인 정보의 유출이라고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지기도 하고 그에 따른 특정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리고 악용하는 것이 화제가 되어지기도 하는데,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명의도용적인 개념의 악한 자들이 사도 바울의 때에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있다는 것을 주목할 때에 진정 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로서의 죄 없다 아니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악한 세대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존재와 소명적인 측면에서 증거함을 말하고 있는데 좀 더 주목하며 주 앞에서 우리 성도의 소명의 사실을 재고하시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택정하심에 따라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서 자신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순종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 삼년 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올라갔던 일과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한 것과 자신이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하여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사도에게 나타내실 때를 말하고 있음과 그에 따른 존재적 소명적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사도의 증거로 신앙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소명의 실제 즉 그 사실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1)사도가 말하고 있는 말은 상식적으로만 본다고 하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배웠고 그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복음을 접했고 배척했던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을 전혀 무시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만의 신비적 개념이라는 주관적인 호소의 동정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함의 것에서 비로소 해석함은 적당하지 않고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게 되는 차원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선입관을 배제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문맥상으로 갈라디아서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의 연관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에 비늘과 같은 것이 벗겨진 체험'(행 9:16~20)이 실제적으로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본 것과 같은 것임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함이 그 문맥적으로나 하나님 앞에서 당연함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아버지와 엄마를 바라보며 알게 그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이 그것은 어떤 합리성에서 비로소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와 같이 눈이 열리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할 때에 예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서 자신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사도는 자신의 존재와 소명에 따른 증거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6)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된다는 말의 의미를 받아 들이게 되어지는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의 실제이며 그것이 주님이 내 중심에 오심의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서 자신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 자존자께서 상대적인 우리의 인식의 판단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사실로 받을 수 있도록 인증해주시는 것에서 그것이 진정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상대적인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사도는 바른 인식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던 그 집안의 사람들 그 친밀도에 따른 혈육이라고 함의 그 근친적 정당함을 비로소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6~17)

어떤 사람들은 아라비아로 가서 새로운 신비주의를 비로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임의적 추상적 사고를 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희랍종교들의 영향력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한 어떤 합리성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임의적 신비적 권위를 찾는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그 사태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실제적인 가치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인증을 받은 정당함을 받은 것으로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자신들의 임의적 말을 납득시키려고 할 때에 속된 말로써 '이것은 ~ 절대로 아니다.. 또는 이것은 절대 틀림이 없어..' 등과 같은 당위성을 '절대'라는 또는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상을 말함으로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임의적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계시적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적 정당함을 일반적인 가운데서도 얻지 못한다면 즉 허위적 개념을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시편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 116:10~11)

이러한 지혜의 근본도 없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러한 자들의 가르침에서 비로소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 11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정당함을 따를 때에는 상대적인 질서적 개념을 존중하는 사실을 받아서 사도과의 만남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과의 만남에서 그 기간의 짧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정당함을 그곳에서 찾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허락되어질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운데 사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그의 그 후에 행적에 대한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알아본다고 할 때에 그의 행보에 관한 것은 사실의 시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이가 눈을 뜨는 것과 같은 소명의 사실과 그것의 실제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는 그 때임을 알도록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앞서 우리의 문화적 한 어두운 특정 한 단면으로써 인터넷 상의 명의도용이라고 하는 것을 말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거짓된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증거합니다.

자칭 '여호와 증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의 당위성을 비로소 그 상대적 합리성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유대교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은 사도 바울의 실수와 같이 소경된 자들로서 잘못된 길을 걷는 것입니다.

더욱 구교를 비롯한 현대신학에서는 플라톤적인 개념으로써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신관에서 실재론을 취하여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상대적 합리성의 미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두겠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알지 못하고 방법론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나 임의적인 자기 사실을 말하려고 하며 더욱 합세하여 하나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출 20:7; 신 5:11)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증거합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예수그리스도 주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는 사도의 가르침과 같이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이 받아들여질 때에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때라고 함'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 앞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 행하는 종들로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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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3, 2006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2006년 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3:1-12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하게 귀중한 것이고 일반 학문을 하시는 분들이나 또는 일반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사람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이라고 함을 전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러한 이성의 중요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중요함이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함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고 그러한 점에서 일말의 그러한 인식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의 한 인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가운데서도의 모습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정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또한 합당한 가치관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러한 가운데서의 판단은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고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는 것과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그러한 것들이 언급되어 있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나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는 것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자이심을 말씀하시며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해한 가운데서 분별되어져야 할 것들을 몇가지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뜻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그 다음 말씀도 분별할 수가 없는 가운데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 대한 모습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소위 ‘형제단’이라고 하는 단체에 속하신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은 교회의 제도적인 모순에 대하여서 걱정하는 그러한 것을 들으면서 아주 할말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극단적으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근거는 바로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잘못된 시각을 가진 결과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옳다는 것은 달리 나타난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교회의 질서적 제도라고 하는 것이 모순이 있다는 것과 모두 배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선하게 받아야할 질서의 실존은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질서적 개념에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하는 바 기득권적인 것을 취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 앞서 그들의 인식의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되어진 것이라고 함의 행함이으로 그것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표현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인식은 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가르침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들의 인식의 잘못됨으로 인해서 그 가르침과 달리 또는 잘못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따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맥적 관계성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이에’라는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과 전반적인 이해에서도 그 상관성에서 그 인식의 연관성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장인 마 22장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의 비유적 실제로서 언급하였던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의 존재적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인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 그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적인 모습이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행동이라고 함이 바로 그 진정한 신앙의 실존으로써의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그들의 말한 바는 지키되 그들의 행함이라고 함은 본받지 말라고 하심의 뜻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언급된 그들의 행동을 주목해보면 이렇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은 자의 모습, 저희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행위, 상석에 앉으며 문안과 납비라 칭함을 받는 것, 아비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는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교회의 질서적 의미와 아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일시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함에 있어서는 그 동일시와 동일의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어그러지게 임의적으로 취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성막을 옮기게 되어질 때에 그 임무는 고라자손이 책임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이 되신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신약적 배경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반론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달란트의 고유성이라고 함을 존중하여야 하며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집사이고 모두가 교역자이고 하면 그것의 사역적 달란트를 위해 헌신함에 있어서 그 질서를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또한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 행한 바는, 언급한 바와 같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의 재가적 허락이라고 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모습들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행위나 상석에 앉는 것과 문안하는 것이나 아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잘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함께하라고 하심과 같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사역적 정당함이 있는 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 믿음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섬김이고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섬기는 자나 섬김을 받는 자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심에서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문안이라고 하는 것도 사도의 가르침에서 성도의 문안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비라고 함에 있어서도 복음으로 사람을 바르게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부로서의 재가를 받은 아비를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적 차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질서의 한 부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질서의식은 합당한 것으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그러한 중심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의 발로로써 행함의 모습이 있어서 동일한 표현의 질서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까지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생각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엘리 제사장과 그에게서 신앙을 배운 사무엘의 모습이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삼상 3: 참고)

엘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을 심의하는 그러한 종의 모습이 비로소 나타나는 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앞에서 범죄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소문이 않좋다는'그러한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 사실심의에도 그의 연로한 판단이 어두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자식의 죽음이라고 함의 비보를 듣는 가운데서 그의 목이 부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이 부러져 죽은 엘리 제사장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의 질서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두는 사무엘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의 훌륭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주관적이면서도 사실로써 받을 수 있는 모습에서 신앙의 자유와 또한 사실로써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아무리 타락해도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고쳐나가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그러한 소명적 합당한 자리에 세움을 받지 않았다면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구별적 사실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별하여서 선하게 받을 수 있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어진다는 것과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주관적인 판단의 사실도 진정한 객관적 사실로 받음에 합당함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행하고 가르치는 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구별하고 가르치지 못한 행위를 본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의 근본적인 인식인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기득권처럼 사용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적 사역이 우리 삶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써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관적인 사실도 구별하여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며 판단함의 그 사실도 선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교회에서 섬김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득권적 개념의 질서적의미를 교회의 모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서 동일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임의적으로 기득권적 입장에서 행하는 자들로 인해서 판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써 왕으로서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바리새인인줄을 분별하지 못하는 악한 모습이라고 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말한 바를 행하고 그들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바르게 따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받으시는 열매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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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2006년 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3:1-13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작금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그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의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서 시도되어지는 것이 이 문화를 통하여서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아주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인식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고 그것만큼의 사람의 자기 이미지 관리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인사라고 하는 것이 부담되어지고 오히려 폐가 되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씁쓸한 모습도 인사문화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 그리고 상대가 되는 가운데서 인사를 하면 그것이 적절하고 또한 요구되어지는 것이지만 반목이 있는 사람 그리고 상대되지도 않는다는 신분적 격차가 느껴지는 가운데서는 그 인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위를 깎아 내리는 듯한 것으로 그 인사를 받는 사람들이 인사받기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사를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또는 그것보다도 근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지혜가 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를 훼방하는 무리의 일단이 있는 그러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그 축복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고려하는 가운데서 행하고 있음을 보는데, 세상의 반목이라고 하는 것의 현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아야할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또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제 사도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갈 터인데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치리적 입장에서 책망하고 권징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전에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강하심이라고 하는 것,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서 사도가 틀린 것이 아닌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시험하고 고린도교회 자신들을 확증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과 오직 진리를 위할 뿐임과 그로 인해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사도가 약할 때에도 섬김을 받는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하고 이것을 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성도의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에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써 그 서신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뻐하고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임과 그 가운데서 평안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고 있고 모든 성도가 문안함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의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한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개념의 어떤 정도적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실분별과 그것을 진리로 받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서 증거하며 가르치려고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예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되어지는 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 중 사도의 존재와 가르침을 부인하며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린도교회에 가르치는 자들은 합리성 자체에서만 어떤 납득의 당위성을 가지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러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 안에서 구별되어진 자신에 대한 부득불 자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에 의한 재가 있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득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여도 객관적인 당위성이 있고 정적인 납득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고후 12:19)

이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서신의 부분으로써 한번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어떠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사실분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과 그 비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연약하심으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의미와 그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의 사실임을 받야야함을 받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정하신 그 자기의 뜻하심에 순종하심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아버지 이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것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비록 상대적인 주관적인 사실적 모습이라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참된 실제로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진리가 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고후 1:19)

그 말씀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사실 규정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인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당위성을 찾고 있는 가운데서 분파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자들로써 교회의 질서를 따라 섬기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교회의 권징을 하게 되어지는 그날에는 사도가 그 권징의 사실로써 그들에게 분명한 시벌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인격적인 사도의 가르침으로서 성경의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버린 자와 같이 판단되어지는 것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모자라고 버린바되어진다는 그 사실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도에 대한 평가로서의 사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성도들을 위하는 자리에 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중심에서 심긴다는 것의 마지막으로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으로 형제된 성도들을 문안하라고 함의 주문적인 개념으로써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내며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파가 되어진 가운데서 그 성도들의 모습을 화목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임의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분파적 입장의 합리성과 그것에서 비롯되어지는 당위성을 따라야 하는 강요적 입장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심의 분석한다면 다른 형제안에서 옳고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적 제사장적 선지자적 개념의 사역적 형상을 내 삶속에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주관적인 개념이면서도 재가받은 개관적 사실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화목의 사실, 형제안에서 화평케하는 사실을 담아내는 종들의 고백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바로 여러 합리적인 말들이 많이 있고 이익적인 당위성의 강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나의 왕이시며 예수께서 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기에 내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왕이신 예수님안에서 사실을 구별하고 심의하여 판단하여 그 형제의 합당한 모습을 인정하고 대화를 하게 하고 화목하게 한다면,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나에게서 나타나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적인 모습으로서의 주앞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확증이라는 말을 이런 측면에서 사실로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가 가르친 자신들이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라고 하는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 또는 많은 사람을 인도했다는 것, 교회 예배당을 몇개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 몇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 등과 같은 것에서 임의적 동의에 따른 객관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합리적인 것과 실리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의 강요가 내게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정당함으로부터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그 주관적인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 믿음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으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여진 주관적인 사실을 믿음 안에서 사실로 받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의 복된 모습이 자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합리성의 사심의 시비를 벗어나서 분란되어져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을 주님께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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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월 16, 2006

나라를 새롭게 함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1-15
나라를 새롭게 함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등산이나 그러한 것의 일환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그와 같은 여유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분들 중에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준비해서 산행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뱀을 비롯한 해충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그 들고간 막대기나 지팡이들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지참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뱀들이 나타나서 사람이 물린 상황이라면 그 뱀들을 쫓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뱀에 물린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신속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산행을 다니신 분들이 아니라면 처음에 산에 간다고 할 때에는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인생의 광야 산길을 걷는 인생들.., 두 번 걷는 인생이 아니기에 모두 초행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해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이스라엘의 왕정시기의 처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뱀에 물린 것과 같은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주의 말씀으로서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을 침에 따라 야베스 사람들이 언약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암몬 사람 나하스는 그들에게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야베스 장로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브아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고 있는데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야베스 사람의 말을 듣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그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그것을 사자의 손으로 모든 지경에 보내어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여 백성들이 나오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서 이튿날에 그들을 쳐서 승리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르는 말로써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이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고 사울이 그날에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있고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사울로 왕을 세우고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기뻐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초기에 초대왕으로서의 사울이 야베스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되는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정황에서 이스라엘나라의 새롭게 함을 사무엘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롭게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개선이라고 함을 말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한 분명한 새로움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시각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대화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야베스 지역을 침공하는 암몬 족속 나하스와 그 야베스 거민들이 취한 내용은 상당히 상대적인 정황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먼저 언약하자는 그 말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는 그러한 타협의 모습을 취하였는데 그러한 것에 임의적 권위의 위협으로 나하스는 그 침공의 의사와 그 인식이라고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개념에서 합리적인 교육적 개념과 권위라는 두개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합리적 타협의 당위성을 놓는 권위적 개념에서 밀리게 되니까..야베스 거민들은 그 지역의 사람으로서 성격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즉 야베스는 그 뜻이 '마르다'라는 뜻으로 삭막한 어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황속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울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그 백성들에게 먼저 권위적 정적인 언급으로 정치적 수완을 나타냈던 것인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소를 각을 뜨고 그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의 소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정치적 권위의 보임으로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동원된 삼십삼만명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전쟁의 승리를 그 기한까지 말하고 또한 그것을 지켰던 것입니다.

초대왕 사울은 그러한 정치 감각은 있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믿음의 행보라고 하는 것은 많이 결여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왕으로 등극했을 때에 그 체제개편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소를 몰고 자기 기업에 관한 일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아주 상식적인 판단력과 상대적인 여지를 둘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정치적 개편과 그러한 노력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러한 구상적 질서를 말씀하시기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신앙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왕으로 취임하게되는 기름부음도 받고 미스바에서 이미 왕으로 추대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채제적인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뜻하심을 자신이 아니면 사무엘을 통해서라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그 지도자로서 옳은 것인데, 그러한 의무의 이행을 상대적인측면에서 무작정 기다림이라는 겸손으로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가 믿음으로 행할 것인가 아닌가 분별함에 있어서는 이미 결여되어진 그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수완으로써의 잘 대처한 사울은 야베스를 침공하려고 하던 암몬사람 나하스를 물리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는 온전한 승리를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정황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야베스를 침공한 나하스를 물리쳤지만, 나하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마치 뱀의 독이 이미 몸에 퍼지는 것과 같이 작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 그 이름의 뜻은 '뱀'(serpent)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눈을 다 빼어야 언약을 체결하겠다는 것 그의 중심은 화평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힘의 논리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사울의 이끄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그 이겨 취한 화평에 있어서는 나하스의 의도한 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이 감기워지고 있고 그들의 심령이 여전히 마른 광야 단단한 땅과 같이 씨앗을 받을 수 없는 황무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함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 11:12,13)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물 사무엘과 사울 그 둘은 모두 요구되어진 인물들로서 공통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존재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주어진 아들로서의 사사이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욕망에 대한 요구되어진(desired)이 사울의 이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택함과 청함만의 모습으로 둘다 초대되어진 가운데서 그 청함만의 모습으로 그 택함을 임의적으로 인식하는 그러한 분별력이 없는 자들의 모습과 그 중심의 인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 않는 가운데서 요구되어지고 있는 그들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스라엘의 전공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무엘에게 직접적으로 사울의 왕됨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실규정과 그 정당함을 따르는 것을 이미 버린 자의 모습으로 그 눈이 감기웠던 것이며 그 시력이 이미 뽑힌 바와 같은 것입니다. 즉 나하스의 의도한 언약적 평화라고 하는 것이 그 악한 시험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말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관용적 덕을 나타내고 자기 사람을 보호한다는 그러한 측면에서 사무엘을 두둔하고 있고 그 두둔은 믿음이라고 하기 보다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즉흥적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날에 주의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은 주의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 날에는 이미 사무엘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길갈로 올라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사울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함을 기록하고 있는데, 순전한 상황적 정치적개념으로 본다고 하면, 사무엘이 위기 모면적 개념으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통한 백성들과의 화해적 제스쳐로서 말함이 아주 해석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사무엘이 오히려 정통성이 있는 미스바로 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을 왜 마음에 두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답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갈로 가자고 한 것은 그 길갈의 이름의 뜻이 '굴러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왔을 때에 돌무더기를 증거더미로 쌓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함으로써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다'는 뜻으로 사용한 언어와 명칭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보다는 그 '길갈'로 올라가자고 언급한 것은 바로 앞서 말한 뱀과 같은 나하스의 의도적 언약적 개념의 죄악이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렵히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개와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서도록 백성을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합목적적인 측면에서 사울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그러한 중심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 실제적인 거룩함과 그러한 나하스의 언약적 화평에 따른 죄의 권세는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가 있는 다윗의 시대에서 온전히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함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사무엘의 증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재적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하는 언약의 재가와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사실까지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살게 되는 인생 그리고 주님안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으로서 산을 넘게 되는'(사 52:7) 가운데 여러 시험들이 오게 되는데 그것을 형태적인 측면 상황적 측면의 완수라는 개념만으로 시험의 사실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들로 인해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날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새롭게 하신 형상적 영광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둠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왕되심과 그의 통치하심이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기만적 사실들을 분별해 낼 수 있도록 주의 말씀하심을 통한 사실 규정을 잘 믿음으로 받으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서 왕되심의 대한 증거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롭게 된 심령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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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1:18-46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일반적으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의 제목은 긍정적인 것이 좋고 그러한 가운데서 호감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이 강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 예외적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에서 비로소 말하려고 함의 의미는 아닙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과 그 계시적 개념을 읽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는 자들의 모습은 어떤 중심을 가져야 함이 마땅한지를 또한 읽게 하심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시대적 인식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그 임의적 판단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그 상식이라고 하는 시대적 인식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두 번째 들어오시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음과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질문함에 주 예수께서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무화과에게 된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하여도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서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권세를 질문함에 주께서 세례요한에 대한 것이 하늘로서인가 사람에게로서인가 질문하심과 그들이 알지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에 답변하시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두 아들에 대한 순종함의 여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요한이 의의도로 왔거늘 믿지 않음을 인하여 믿은 세리들과 창기들은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악한 농부들에게 주인이 아들을 보내니 그를 상속자라고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말씀에 저희가 악한 자는 진멸하고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었고, 이에 주께서는 건축자의 머릿돌을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을 말씀하시니 그 당시 그곳에 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았지만 무리들을 무서워함을 인하여서 예수님을 잡고자 했을 뿐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지목되어지는 '무화과의 마름'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의 기반에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써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 성도들이 주목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잘 분별해야 함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유의하여 볼 때에,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7절 말씀 즉 오늘 본문에 앞선 본문으로써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에 있어서 그리고 그 성전을 깨끗케 하심에 있어서 그 앞서 주님이 ‘벳바게’(house of unripe figs)라는 곳과 ‘베다니’에 머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미숙한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예루살렘이라고 함의 정체성 그리고 그 기본적 정신적 신앙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써의 성전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이 그 미숙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비유적 계시의 모습으로써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은 그 정체성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 정신적인 히스테리식의 입장에서 정신나간 능력으로써 나무에다가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해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포도원지기로서의 그 무화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는 농부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전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 당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입니다.

'이런 일만 할뿐만 아니라'는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 저주라는 개념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던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믿음으로 주의 복음의 순수성과 그 성도를 위한 교회의 징계적 개념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또한 최종적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사실의 결정적인 심판이 있게 되어지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실로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목양적 입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하심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산들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역시 그 산들이 포도원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체계적 기반을 말하는 것으로써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천사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그 돌이 가라앉는 것'(계 18:21)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센천사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써 주의 복음의 사실을 말함으로써 개연적인 사상들 특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많은 강조되어진 말들과 그 인식들의 기초를 부인하게 될 것을 나타냄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18장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바벨론의 그 뜻은 '신들의 문'이라는 뜻과 '혼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속성 즉 그 절대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여서 사실을 조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여러가지 사상들의 합리화된 말로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그러한 총체적인 것이 혼돈과 그 이름으로써의 신들의 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고 철학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신학과 신앙적 정당함으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무난하게 신앙과 신학계에 들어온 것은 바로 '상식보편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에서 신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대세라고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애통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더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그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한국교회의 성장적 개념을 재검토함도 종들로서 해야할 하나의 숙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말에 돌을 들던 사람들'(요 8:56~59)로써 소위 '취득시효'라는 개념 즉 먼저 취득한 자의 소유권적 기득권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존적 왕적 권세로 상식적인 개념을 구별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두 아들의 순종여부로 말씀하시는 재가되어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에 대한 비유로써는 4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으로써 실과를 제때에 바칠 농부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에서 정당한 농부들로서 존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통해 기뻐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함의 시비를 말함에 있어서 구교에서 한때 변증적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잘못된 소위 '취득시효'적 개념으로써의 권위를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정당함에서 그 사실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말씀또한 해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비와 그것을 빌미로하는 상식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은 상식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하심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이 그리고 그러한 상식이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생각하지 않고 상식적인 신앙적 전통적 개념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종들이 주의 복음을 나타내며 주의 포도원으로서의 교회를 돌아보며 목양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성도들의 모습과 열매를 맺히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실을 구별해내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열매를 맺어드리는 충실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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