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6월 24, 2005

수치를 모르는 백성

2005년 6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습2:1-15
수치를 모르는 백성

이제 얼마 있으면 장마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집안 청소나 여러 옷가지나 이불 등을 세탁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일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오물이나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참 속상합니다 그런데 표백제를 잘못 쓴다거나 할 때에는 또 지워지지 말아야 할 색들이 탈색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참 속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에 씻겨져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잘 구분하여서 판단할 때에 유익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심의 진멸하심에 대한 것에서 그 남은 자의 사상 그 분노에 숨겨진 자의 모습으로서의 구원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모두가 멸망당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겨주심이라고 하는 것 죄로 인하여 멸망이 아닌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죄라고 함의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책망하는 선지 스바냐의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그리고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선지자 스바냐가 앞서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도 아니한 자와 찾지도 않는 자를 멸절하리라는 말씀에 이어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모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신앙의 진정함을 내보이라는 측면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말과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가사와 아스글론 아스돗과 에그론과 같은 해변거민들과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 거민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을 말하며 그 지경은 유다족속의 남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훼방에 대하여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에 존재적 자리매김이 되어질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스 사람들이 살륙당할 것과 동방의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무케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 메마름에 대한 되어질 일들에 대한 묘사로 폐허적 모습을 기술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진노로부터 숨김을 받은 자로서의 증거로써 수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책망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로 지목되어진 자들의 중심과 인식을 주목해볼 때에, 먼저 '블레셋 땅 가나안'이라는 존재에 대한 심판을 주목합니다. 이 '블레셋'이라는 뜻은 '이민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밖의 지역에서 들어온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토 기업의 소유권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본문의 문맥적인 개념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에게 그 기업이 돌아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신의 소유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종들의 존재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죄악 가운데서의 불법적 소유를 주장하는 마귀들과 그들의 그늘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자들의 모습이 수치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주의 판단이 스바냐 선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습 2:8~9 중)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롯은 그의 딸 둘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시는 심판을 피하여 소알성으로 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두 딸들이 아버지와 정욕적인 입장을 자기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인종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창 19:31~38) 이는 이미 아브라함의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딸들의 판단은 정욕적인 개념을 나타내며, 성립되어지지 않는 인륜적 개념으로 주의 뜻하심의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들로서의 아브라함의 족속과는 달리 나타나고 있고 상대적인개념으로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려는 가운데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의 기업의 사실을 부정하여 자신들의 뜻함을 취하려고 하는 악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되며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함의 전통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서 앗수르와 그 수도로써의 니느웨에 대한 주의 판단하심이 나타남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사실 앗수르는 셈족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함의 족속이 그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경험하였으나 그 언약의 사실을 힘써 부인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자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증거를 받았을 때에 회개의 경건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혹시나'의 개연적 신비에 따른 것으로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욘 3:9)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판단이 되어지는 그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죄아래 팔며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우기는 마귀들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하심의 사실일 인정하지 않고 상식적인 개념으로 간과하려는 악함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의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써 '혹시나 신앙'이라는 개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입장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치라는 것의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과 사실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백성들로서 요단강을 건너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 길갈에서의 이름과 같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말씀과 그 말씀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로 인한 심판의 자리에서의 영벌에 처하게 되어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수치라는 것은 이미 굴러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하고 자존의 절대자를 상대적인 절대자로써 인식하고자 하는 가운데 임의적 신을 말하고 하나님이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어리석음과 수치에서 자리를 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존의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선히 취하셔서 복음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따라 세상이 잠잠하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하여서 말함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바냐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숨겨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들로서 주의 복음의 진정한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의 택한 백성들이 수치를 주의 이름으로 벗을 수 있도록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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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2005년 6월 2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6:1-20
가능과 유익에 대하여

한 집단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표현이나 자유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그러한 정황에, 소위 길들여진다는 부적절한 표현이 가능한 정황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삶의 한 모습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떤 가능성을 꿈꾸며 또한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한번쯤 눈을 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고전적인 측면을 주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낭만적인 그러한 사조들의 대립적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의 인식적인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다고 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낭만적인 것을 넘어서 실증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고 오늘날에서는 유익을 말하는 이러한 실증적인 것이 일반적인 실제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의 주 앞에서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에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고심하게 되어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음행이 있음에 대한 것을 책망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성도의 세상을 판단하는 권한이 있는데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움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히 여기는 자들에게 송사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반문을 하면서 그 속이는 자는 너희 형제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의한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음욕과 탐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것이 사도 바울에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하나 아무에게든지 자신이 제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우리 것이 아님에 대한 것을 상기하고 값으로 산 것이므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가하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중심이 이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그 유익의 사실을 말하고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분파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주를 위한 충성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의 분별력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했던 것입니다. 즉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견인적 역활을 하거나 반목을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연장선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주의 말씀 안에서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을 때에 음란이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러한 것을 감추고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의 유익을 말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분별하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자신의 명예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파당적 지지세력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분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실규명을 세상의 법정에 세우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법정에 전혀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러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상대적인 사회적 법정에서의 규명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판단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 법정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 가리지 않으려는 자들의 거짓됨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음행이라고 하는 것의 죄가 있으니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사실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신은 그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행한 자로서 판단받음이 가하지만 그러한 제제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그 증거하는 권세는 사도 바울로부터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써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합당하며 합당한 유익의 사실을 말할 수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유익이라는 사실이 있을 때에 그 유익의 사실로서 판단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유익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능성으로서만 전락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의 한정적 의미를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음욕이라는 탐심이라는 개념의 우상으로써 그 충성의 자리를 막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믿음의 책망을 함으로써 또한 충성된 자가 어떤 자인가를 보이며 자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피로써 사신 성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적 개념에서의 우리 존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겸손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것으로서 우리의 것임을 기억할 때에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일관하고 그것으로 우리 몸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이러한 우리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자리에 서며, 임의적 가능성에 따른 자신에 대한 잘못된 변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사실분별을 세상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라는 사실앞에서, 가능성이라는 개념만 생각하여 음욕과 탐심의 자리에, 잘못된 임의적 자신을 변명하며 불법적으로 섬긴다는 거짓된 자리에 서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잘했다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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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스바냐의 증거

2005년 6월 17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습1:1-6
스바냐의 증거

아름다움으로써의 낭만을 말하게 되는 그러한 문학적 소재로써 사용되어지는 별에 대하여서 말할 때에 그 ‘별(星)’자체의 것을 말하기 보다는 그 별빛에 더욱 의미를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별들이 사막에서는 길을 안내하는 것으로 천문학적인 측면을 말하게 되거나 점성적 미신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시며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별을 사용하여 초자연적 구별적인 뜻하심으로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구별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나타내게 하심의 정당함을 입은 별이 그 계시를 담당하게 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별들이 존재해도 주의 뜻하심의 것은 감추어진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별이 빛나는 밤’에 주의 뜻하심을 위해 감추어졌던 작은 별과 같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별과 같은 주의 빛을 비추는 자의 모습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바냐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겨주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바냐 선지자가 어떤 자인가에 대한 언급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증거하는 내용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진멸하심에 대한 것의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며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한 것과 찾지도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임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지자의 소개에서 읽게 되어지는 영적인 뜻하심의 증거와 예수님의 비유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이루는 종들의 모습으로서 신약성도들의 모습의 온전성을 지칭하고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의 동일한 성도로서의 옳은 자리에 서도록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선지자의 소개에서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는 실체로서의 모습임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후손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사 20:14~18) 이러한 것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그 행한 일에 대하여서 그 정당함을 찾지 않았던 것이며 그가 아람군대를 물리친 것의 사실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되어진 사실이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러한 히스기야의 후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잡혀가는 자들로서의 죄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자라는 이름의 스바냐를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의 판단받는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이 바르게 증거하지 않고 그들이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진정 하나님이름의 실재적 기반에서 판단하는 사실 분별이 없는 때였습니다. 즉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때 많은 이들이 현란한 말로 세상의 빛과 같이 비춘다고 할 수 있는 그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밤의 의미없는 별들이 되어지고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마음을 두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 사실을 말하는 자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현손이면서도 즉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찾는 그의 이름이 무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바벨론 포로가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판단되어질 수 있는 사람 중에서의 혈통임을 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남겨두시고 숨겨두신 자로서 꼭 엘리야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명하고 진정한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바냐가 별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과 이것은 예수님을 인도하던 그러한 초자연적 구별적 증거로서의 빛을 비추는 자로 세움을 받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을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왕상 18:39) 이후에 다른 엘리야 세례요한이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것과 같이 그처럼 그들은 정황적인 입장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암흑속에서의 빛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 증거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우리는 주께서 천국의 비유로 말씀하신 '밭에 감추어 두신 보화'(마 13:44)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책임지기 위한 것으로써 노동을 의지하는데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의 사실을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을 때에 예수님을 인한 그 노력을 위한 밭을 전적으로 사는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삶과 고통과 모든 것을 지불하고 찾으려고 했던 것의 진정한 사실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며 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임을 주님의 비유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서 첫번째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그 기도인 것입니다. 모든 노동이라고 하는 것과 밭을 가는 것과 같은 삶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과 합목적성의 정체성이 진정한 구원과 생명의 사실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과 주 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부터 그 정당함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사실을 분별하라고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스바냐서는 이 스바냐 선지의 존재적 자기 증거가 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감추셨다'는 그 이름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의 감추인 자로서 남은 자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이것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로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 피곤한 인생을 가르치는 교훈들은 모두 별처럼 빛나는 것과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즉, 수백만광년이 떨어진 곳에서의 별의 빛이라고 하면 이미 사라진 존재로서의 별들의 빛이 수신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그러한 많은 교훈을 행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증거를 상대화하며 사실을 말못하는 그러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그의 피로 사시며 소유하시며 그의 형상으로 행하시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사실을 규정하는 권세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고후 1:20)라고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와 같이 믿음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안에서 사실을 분별하여 복음의 사실이 진정한 사실임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의 합당한 증인들이 되시며, '사람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로서 별과 같이 주 앞에서 빛나는 귀한 종들'(단 12:3)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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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6월 09, 2005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2005년 6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4:1-21
충성을 구하는 자에게

조금 시간이 지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구할 것은 충성이요’라고 외쳤던 어떤 분에 대한 기억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저도 뒤늦게 서점에 프로마이드로 세워둔 그림을 보며 알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재고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스스로 행하는 가운데서의 열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돌적 개념으로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충돌이라고 하는 것이 신선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극단의 반목으로 향하게 되어질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그 반목에서 비롯되어지는 가운데서 소원해지는 그러한 경향도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이라는 것이 충돌적 개념의 것이 주의 화목케 하심과 반목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과연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하나인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그 실재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으로 충성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신실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자기 기만적 충성에서의 임의적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것이며 그 믿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신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다만 자신을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며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함을 나타내실 것과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으로 본을 보였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써 누가 우리를 구별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깨닫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아볼로가 약하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강함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신들의 강함이라고 함을 인식하라고 말함에 있어서 액면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강권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복음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낳았음에 대한 것을 말하며 자신을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인하여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함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행사 가르치던 것이 생각나게 하리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그 어떤 이들의 스스로 교만함이 있으나 그 교만함의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에 대한 것을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의 역할적인 개념에서 그것을 비로소 분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성령의 은사로서의 그 실재를 분별하는 가운데서 주의 화목케하심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하심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할 것으로써의 충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이해함의 차이라고 함은 본문에서도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에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가운데서의 통일성을 말해야 하는데, 어쩜 어떤 한 규범적 개념으로 인위적인 통일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구교에서는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 ‘스스로의 존재의식’을 우리 인생이 모두 가지고 있는데 죄를 지은 가운데서도 왜곡되어진 것과 주 안에서 회복되어지지 않는 한 회복되어질 수 없는 타락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인증되어지지 않는 자의적인 존재의식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믿음으로 스스로 행할 때에 그것이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그것을 획일화되어진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는 것이라는 것에서 통일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는 의식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는 획일적 통일성과 그러한 것들의 충돌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충성이라는 개념으로 미화되어지는 가운데 교회의 ‘쓴 뿌리’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첫 번째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마땅히 주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서 충성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할 때에 먼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판단하시는 자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고전 4:4)

마치 다니엘이 그와 같은 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니엘 그 이름의 뜻은, 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받게 되는데,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뜻하심의 합당함을 따라서 자신의 존재의 여부를 구걸하지 않고 주님의 뜻하심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의 사자 굴에 떨어지는 선택을 믿음으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서 주의 뜻하심을 받들 수 있는 충성의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을 해서 무신론자들에게 변명이 될 수 있을 것과 같이 생각하도록 했던 한 지혜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자신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즉 자신을 판단하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못하겠다는 의지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비겁하다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임의적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거의 무신론의 철학자들은 따라가고 있고 오늘도 그러한 것에서 무슨 선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서 그 말의 유희로 자기를 달래야 하는 자리에 피곤한 사람들을 봅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하심은 그 존재에 대한 그 사실만큼은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를 주의 이름으로 알아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의적 개념에서 비로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정당함에서 판단하지 않을 때에 주의 뜻하심 안에서 주시는 믿음 안에서 그 존재의 사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하심의 자리에 서게 되는 사역을 위한 은혜도 입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믿음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알아주는 가운데서 충성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그 화목케 하시는 주의 성령의 열매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서서 교만해진다는 것은 그 기록되어진 문자의 언급이라고 함에 국한되어진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즉 그 문자적 개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뜻하심이 무엇인가에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록된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 충성된 가르침의 실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말들에게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인식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리에 서게 되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남을 지적하시며 그러한 말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주의 말씀의 뜻하심 안에서 있게 되어지는 신앙고백 위에 임하시는 그 재가로서의 권능에 있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재가로서의 능력이라고 함의 유무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것을 말하는 그 충성을 구하는 자들인가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자녀된 자들이며 동시에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주 앞에서의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함은 마땅한 것인데, 이것은 액면적 상태적 획일성으로 다소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직성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스스로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대로의 충성’이라는 개념에서 충성을 구하는 것은 충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것의 인식의 여부와 관계없이 분란의 소지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라는 것의 인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대로의 충성의 자리에서 교회의 쓴 뿌리의 악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비록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의 말씀을 하나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실로 믿는 자들이 서로 인정하며 주의 말씀의 사실에 순종하려고 하는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판자라고 하는 그러한 다니엘과 같은 신앙의 자리에 서며, 주의 뜻에 합당한 충성을 구하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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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월요일, 5월 23, 2005

참된 기도

2005년 5월 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8:28-34
참된 기도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하는 중심과 또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평안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지는데, 이는 인지상정적으로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일말의 당연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말의 당연함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복음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주 앞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그러한 생각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러한 중심에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들로 그 기준을 자신의 소유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일관하여서 자신들의 삶을 의도하며 계획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그들의 의도와 계획함과 같은 인식이라고 함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결국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헛된 삶이라고 함을 나타내게 될 때에 그것은 극히 불쌍하다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현실적인 기준들로서의 소유라고 함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또한 혼란되어진 가운데 실험인생으로써 일관하게 되어지고 그것은 결국 신이 죽었다는 그러한 알지 못하는 합리성으로 자위하게 되는 그 또한 불쌍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기도가 되어짐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주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음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주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 정황도 읽게 하시는데, 그 귀신의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그의 주님께 행하고 있는 말과 그들의 요구로 인해 허락되어진 가운데서 돼지들이 바닷물에 몰사하게 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돼지 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을 보고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함으로 인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임의적인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과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러한 타당성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죄로 인한 그 영향 때문에 근시안적인 소경의 길을 택하고 있음을 인한 불쌍한, 의도와 방향과 전 인격적인 삶의 기로로서의 기도를 주목하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주님을 영접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분별한 삶의 방향이라고 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 사실여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전체적인 측면을 살펴보게 되는데, 마태복음 8장은 산상보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한 단락을 이룬다고 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8장인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되어진다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전계되어지는 동일한 내용으로 말한다는 것보다는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단위로서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자기 땅 자기 나라에 오시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윽고 3장에 가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주님과 함께한 자들로서의 ‘산위의 동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내려오셨으나 사람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섭리를 보이시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증거를 하셨고 오늘 보문에서는 결론적인 측면에서 영접하지 않고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가다라 귀신의 인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읽게되어지며 그 불쌍함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모습을 반대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음이 본문의 전반적인 인식과 이해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라는 곳에 가셨을 때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귀신을 괴롭게 하는 자로 오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식이 허용되어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은혜가 그에게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리적인 것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도 들었지만 그것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마 8:27참고)과 그것이 이 귀신과의 상관성으로 읽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의 주체적 개념까지 점령하여 소위 ‘귀신들린 자’로서의 기본적인 인격과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결과적인 측면으로 말할 수 있는 그 열매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것이 ‘죄아래 팔린 인생’(롬 3:9; 갈 3:22)으로써 자리 매김되어지는데 이제 ‘주님께서 그 소유권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려고 오심’(요 3:16)에 있어서 귀신은 말하기를 자신들을 괴롭게 하려고 오셨느냐는 식의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실재에 입각해서 그 죄악된 가운데서 타당성을 현실적 소유라고 함에서 찾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 그 교활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허락을 받는다는 측면을 현실적으로 부각해서 그 현실적인 책임을 주님께 전가하여 주님의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부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귀신이 그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인식의 통제권을 가지고 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수많은 돼지들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에 따라 들어가서 바다에 빠지게 하여서 그 현실적인 실재적 피해에 대한 타당성에 따른 임의적 정당함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두 번째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시내에 들어가서 ‘되어진 일들’이라는 현상적인 현실적인 소유권적인 개념의 타당성으로 주님의 자기 증거라고 함을 임의적인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왜곡되어진 합리성의 증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장검증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서 와서 보고 현실적인 타당성에 따른 인식의 결론으로써 주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무엇을 관점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것이냐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좋은 것을, 생명을 잃게 되어지는 불쌍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준들 특히 그 선함으로써의 생명과 평안을 위한 소유라는 기준이 악하게 왜곡되어진 기준으로써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기도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물질 만능’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러한 표명을 하면서도 사실 생명과 평안한 삶을 위해서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얻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있어서 모순된 모습이면서도 인정이 강요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능력의 표현으로 가능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 영혼을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서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재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의 사실적 재가를 받을 수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옳은 능력으로서의 한 표현이 되어지는 소유권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권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삶에 있어서의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가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스스로 취하심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진정한 사실로 나타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존재와 생명과 평안의 실제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중심에 두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단지 현상적인 권세로서의 물질적 개념에서의 사실로 일관하며 인생의 삶과 존재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가운데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불쌍한 기도의 자들이 되어지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로서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한 자들로서 참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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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목요일, 5월 19, 2005

십자가의 도

2005년 5월 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8-31
십자가의 도
For the word of the cross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책임지게 될 때에 또는 본의가 아니라도 감당하려고 할 때에 자신이 대표자로써 책임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에 비교하여서 그런 표현으로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짐을 대신 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 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좀 분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것에 즉 도덕적 부담이라는 것의 상징으로써의 십자가라는 잘못된 ‘십자가의 도’를 생활 속에서 인정하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도’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함과 지혜 있는 자 이 세상의 변사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말하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부르심을 보라고 하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자체로서의 그 고린도교회가 주의 구원하심의 섭리로서 하나님 앞에 자랑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떤 것인가 그것과 지혜와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상의 변사가 그 존재적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지혜없다 하심과 하나님의 미련한 것으로서의 지혜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고 마는 가운데 현상적인 이해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으니, 성도도 고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도덕관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전혀 부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의 연속성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적 판단이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는 그러한 도덕적 신앙윤리적 개념의 모습으로만 이해함에 있어서는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써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상대적인 존재의 부정이라는 개념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받는다면 자신의 자존의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으로서 다시 살아나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로서 그가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실 때에 이미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정당함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존재로서의 재가를 받은 성도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옷을 입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적 재가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왕적 권세와 같은 것으로써 그것은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주 앞에서 행할 때에는 그 재가를 받은 것으로써 정당할 때에는 그 증거하는 것이 미련하다고 하여도 진정한 사실로서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증거를 할 때에 상대적 입장에서 편협한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능력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구원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실재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그 절대 보편적 지원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편협해 보인다는 것으로 성도들을 미련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만적인 어리석음으로 자신들을 자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게 취하셔서 상대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고 능력의 재가가 있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식보편적 생각에서 지원되어지는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체적으로 정당함을 스스로 취한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이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변사들은 그 말의 임의적 정당함 상대적인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를 정당한 지혜를 취한 세상의 변사는 없다고 할 때에 그들은 궤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의 당위성을 신이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는 신의 속성으로 상대적인 범주에서 비로소 존재하지 않으며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표적이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함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지혜의 기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자기계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과 같은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을 책임론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계시로서의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그 한마음을 품으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는,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먼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란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한 ‘주의 십자가에 도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차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우리의 믿음들도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서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으로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는 회의적 측면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여도 합당한 증거가 되며, 그러한 증거를 통해 합당하게 주의 뜻하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십자가에 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되지만 그것이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만 하는 것을 체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상대적인 측면의 완전성을 지나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서 비교 우위적 개념보다도 진정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함보다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받아주며 오래 참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미련해 보이는 상대적인 우리의 증거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주의 구원을 진정한 사실로써 합당하게 믿으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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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화요일, 5월 10, 2005

박넝쿨 교훈

2005년 5월 10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욘4:1-11
박넝쿨 교훈

얼마 전에 세들어 사는 집 주인 할머니께서 호박죽을 쒀서 먹어보라고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전에 청년 때에, 학교 다닐 때에 한 번씩 식사겸 먹어본 기억이 나서 참 감사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박’이라는 것은 식용의 호박(珀)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호리병박’ 또는 ‘조롱박’과 같은 박(a gourd, a plant)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박넝쿨로 교훈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서 여호와께 기도함과 주께서 그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니느웨성이 무너지리라는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알아봤다는 식의 언급과 생명을 취하시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요나 자신에게 나음이라고 강변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요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냄에 대한 합당함을 물으심에 요나는 답변하지 않고 그 성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성에서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았음에, 하나님께서 그 초막위에 박넝쿨을 준비해주셔서 그늘지게 하셔서 요나가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함과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씹게 하여 마르게 하시니 요나는 또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박넝쿨에 비교하시면서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질문을 하시며 배양도 하지 않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요나 자신이 아꼈거든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있는데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나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요나의 답변은 요나서 본문에서는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회개의 열매로서 어떤 것이어야 마땅한지는 이미 요나도 알게 하심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나타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아가서 2: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에서 찾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박넝쿨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요나서 3장에 나타나고 있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의 열매라고 함을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 성 왕과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욘 3:5, 그들이 믿었다는 말, ‘와야아미누’로써 아만, 아멘의 뜻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인식의 대표적인 입장으로써의 그 왕의 인식을 표현한 것을 보면 9절에서는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9)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더욱 마지막에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박넝쿨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개연적인 믿음으로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고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오래참으시고 또한 주의 뜻하신 시기에 회개시키실 수도 있으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는데 요나는 주의 뜻하심보다도 그 말씀하신 액면적 판단하심의 신실하심을 내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에 있어서의 주권적 판단을 요나는 그의 자신의 사역적 판단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합당치 못한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표현을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액면적 판단으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에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요나에게 주의 몸된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고 그 요나의 마땅한 신앙고백의 자리에 서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이미 요나가 알게 하심을 뜻하셨다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4~17)

솔로몬이 그의 신부 술람미 여인을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부르심과 같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와 같이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둘기야’라고 할 대에는 ‘요나티’라는 말로써, ‘요나’라는 말에 일인칭 소유격을 나타내는 ‘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서 4장에 나타나는 선지자 ‘요나’와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동일한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요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말씀과 대하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요나티’ 즉 ‘나의 비둘기’라는 말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나의’라는 말의 소유격적인 측면은 주권적 정당함을 주장하시는 분으로써 비둘기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요나)로서 표현하며 참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요나서에서는, 그러한 정당함을 주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박이 하룻밤 사이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 표현함에 있어서는 그리고 아가서에서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인생의 종말적 시간을 의미하며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나타내심으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는,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요나서에서는, 요나서 전반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가서 ‘베데르의 산’이라는 것은 ‘부분’,‘조각’이라는 뜻을 가진 산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요나서에서는 주관적 자기 진리, 즉 ‘나의 진리’(my truth)라는 요나의 중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욘 1:1)에서 그 ‘아밋대’라는 말이 바로 ‘나의 진리’(my truth)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 큰성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해봐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습게만 여겨질 것이라는 점에서 요나는 도망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진실로 복음의 사실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에 자신에게 주신 증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심판을 받지 않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니까 요나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아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정당함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요나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잘못되게 굳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제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합당한데, 심판하심이 현상적인 상대적 충족성의 판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나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요나는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합리성이 충분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분별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주시기 원하며 오래 참고 있으시고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주 앞에 순종하기를 따라가기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로 표현되어지고 있고 본문에서는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반복적인 말씀과 박넝쿨의 비유와 그 니느웨성에 대한 주의 뜻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결혼하여 신혼 때에 참으로 서로 아름답게 여기지만, 세월의 때가 묻게 되고 생활에 따른 고통이라고 함을 서로 감수할 때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배필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라고 함을 볼 때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어여쁜 당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서로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어여쁘게 보시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어여쁘게 보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마음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박넝쿨 비유로 가르쳐주시는 주의 교훈을 받으며, 여러 말씀하심의 뜻을 분별하고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의 말씀하심을 주의 뜻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의 아집과 편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종으로서의 판단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가운데, 형제를 받으며 주의 몸된 교회를 받으며 그들을 주장하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않는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과 동행하시는 귀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어여쁜 당신’(아 2:13)으로서의 요나와 같은 시대의 표적으로서의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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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