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2월2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4:1-31
예수의 이름의 권세
상대적 가치관을 표명하는 그러한 사회에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이 있다고 할 때에 이러한 점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사람이 보기에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항상 납득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알면서도 용납되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악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측면의 병폐를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인식의 자체적 온전치 못함을 나타내는 것에 기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개념에서 기원이라고 하는 것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면서도 자체적 정당함이 있는 기독교적 입장의 인식규정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의 허사라고 함에 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의 근거라고 함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당위성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 성도들의 중심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함과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튿날에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병이 난 자를 고치신 권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부활하는 도를 전함에 대한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당시에서는 다 경험한 바가 되어지고 또한 현실적으로 그러한 권세가 있음에 대한 객관적 증거라고 하는 것으로 병이 나은 자의 모습이 있으니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는 그러한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며 놓아주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을 택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놓이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서 29절이하 31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도들에게 질문되어진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들 족속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에도 질문되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질문은 권위에서 파생되어지는 그 행함의 당위성 옳다고 납득되어질 정당함이 있는가에 따른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성경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놓고 힐문하기 위한 것이지 객관성이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웃는 자리에서의 사도들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때 당시에 있었던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이들과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납득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성이 있다는 것과 또한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주님이 오심에 따른 구약적인 성전의 개념이 이미 건물자체가 대행하게 되어지는 실재로써의 실제적 당위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에 그러한 장소적 개념의 성전은 구별적인 것일뿐 실재적인 장소적 거룩함이 예수님과 동일시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에는 성전에 나와야만 한다 또는 그곳에서 구약대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적 당위성이 없게 되어지며 제사장의 직분도 전혀 달라지는 가운데서 그 제사장과 성전맡은 자들의 받게 되어지는 세상적 수입자체가 줄어들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서 그 실재를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싫었던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권위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함과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대하여서 그들이 더 이상 힐문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도들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였음을 인용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 인용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진정으로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는데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누가 상대적이지 않다고 임의로 규정함에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며 또한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이름의 증거적 차원에서 파생되어진 이름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뻐하심에서 나타내신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예수의 이름은 자존의 절대자 상대적인 판단에서부터 상관없이 자존하시는 자로서 절대의 권위로 기름부으신 메시아이심의 자체적 정당함을 취하신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해주시기를 구하며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함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8)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고 함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실 때에 또한 변화산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화목의 실제를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그 원수와도 화목케 하며 하나님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받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들의 기쁨의 증거였으며 그 증거의 힘이었음을 주목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세상의 상대성을 취하는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서 선하게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의 당위성이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여러 가지 상황적 강요에 우리 성도들이 놓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원수라도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의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부여하는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믿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꼭드는 종들의 자리를 사모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지며 힘 있게 주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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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2월 26, 2004
화요일, 2월 24, 2004
예수님의 별세
2004년2월2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9:28-36
예수님의 별세
우리 인생의 신앙에 대한 의식들은 다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것은 미신적 요소로서 사람들의 의식의 정도적 차이가 있을뿐 모두 있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을 아는 마음과 동연적으로 하나님을 알며 스스로 알아가도록 이미 같이 창조해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인류가 죄 가운데서 진정한 그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허망한 것을 찾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신이 아닌 진정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서 배척적인 죄악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그 분명이라 함은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의 별세에 대하여서 증거하심에서 읽게 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러한 대중들의 판단들과 주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따른 베드로의 고백으로써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눅 8:20)을 나타내었던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8일 만에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이후 변화산으로 불림)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체가 나타나며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있음과 그 영광 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봄과 그는 두 사람이 떠날 때에 초막 셋을 짓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것은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구름이 저희를 덮는데 제자들이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곧 택함을 입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소리가 그치매 예수만 보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 일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심을 의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별세’입니다. 이것은 졸던 베드로도 잠이 아주 깨어지는 가운데서 주목하도록 하시의 은혜를 입었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별세라는 이 말은 죽음(decease)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되어지고 또한 영역본에서는 어떤 출발(departure)을 의미하는 것이나 퇴장(withdrawal)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별세라는 말은 엑소도스(e[xodo")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말로 해석되어짐보다도 실제적인 자기 계시적인 그러면서도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별세 즉 주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별세 자신의 엑소도스라는 말은 출애굽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증거자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같이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의 실재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구약에 증거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율법에서의 증거는 두 사람이상 있어야 할 것에 의거해서 두명이 나타나고 있고 그 모세와 또한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던 것과 같이 그러한 사역을 예언한 말라기의 엘리야의 예언과 그의 증거에 따른 자가 바로 예수님이심에 대한 것을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과 문맥속에서 주님의 엑소더스를 말씀하심은 출애굽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 즉 엑소더스를 하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주의 몸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세워지게 됨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도가 아니면서도 주의 제자인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글로써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읽게 되어진다는 점에서 교회의 성립이 바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별세의 진정한 실제의 증거가 되어진다는 것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데오빌로에게 미루어 증거해야 할 때를 분별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함은 앞서 변화산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심을 받들어 오는데 그 때가 지나 이제 말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증거로서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증거를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나 어떤 신비적 개념으로써 그 때 당시에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러한 실제들은 사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즉 메시아 즉 그리스도 주님 앞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교적 성별을 의미하는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고백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증거와 같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즉 메시아 안에서의 성별적 정당함을 입은 자들이 주의 제자들이라고 함과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에 대한 외적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그것을 보는 자들도 하나님의 크신 일이라고 함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주의 구원의 실제를 담아내며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등짐이라고 하는 이별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의 상태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는 그러한 목가적인 주의 양들을 치는 교회의 시대 예수님의 세우신 교회의 시대가 종말의 때임을 말씀하시며 이것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의 증거의 시대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를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데려가시지만 주의 구원을 이루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보존하시기를 위함임을 주의 기도에서 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요17:15~17)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진 가운데서 어떤 특정단체로서의 생활을 하거나 세상에 세속화되어져서 주의 빛을 잃어버리는 자들의 모습으로 있게 되어짐은 옳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구별과 그러한 증거들의 실제적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설 때에 참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별세하심 주님의 엑소더스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정당함을 실제를 증거하는 가운데 세상에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구원을 증거하는 종들로 서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 없이도 세상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과 평화의 실제를 부여하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의 진정한 구원과 화평이 있음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구원하심과 화평케 하심을 증거하는 그 종들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Preacher'smain we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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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9:28-36
예수님의 별세
우리 인생의 신앙에 대한 의식들은 다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것은 미신적 요소로서 사람들의 의식의 정도적 차이가 있을뿐 모두 있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신을 아는 마음과 동연적으로 하나님을 알며 스스로 알아가도록 이미 같이 창조해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인류가 죄 가운데서 진정한 그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허망한 것을 찾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신이 아닌 진정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서 배척적인 죄악에서 벗어나게 되어지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그 분명이라 함은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의 별세에 대하여서 증거하심에서 읽게 하시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러한 대중들의 판단들과 주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따른 베드로의 고백으로써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눅 8:20)을 나타내었던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8일 만에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이후 변화산으로 불림)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체가 나타나며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있음과 그 영광 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봄과 그는 두 사람이 떠날 때에 초막 셋을 짓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것은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구름이 저희를 덮는데 제자들이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곧 택함을 입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소리가 그치매 예수만 보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 일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심을 의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별세’입니다. 이것은 졸던 베드로도 잠이 아주 깨어지는 가운데서 주목하도록 하시의 은혜를 입었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별세라는 이 말은 죽음(decease)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되어지고 또한 영역본에서는 어떤 출발(departure)을 의미하는 것이나 퇴장(withdrawal)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별세라는 말은 엑소도스(e[xodo")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말로 해석되어짐보다도 실제적인 자기 계시적인 그러면서도 그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에서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증거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별세 즉 주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별세 자신의 엑소도스라는 말은 출애굽과 관련되어진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증거자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같이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의 실재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구약에 증거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율법에서의 증거는 두 사람이상 있어야 할 것에 의거해서 두명이 나타나고 있고 그 모세와 또한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던 것과 같이 그러한 사역을 예언한 말라기의 엘리야의 예언과 그의 증거에 따른 자가 바로 예수님이심에 대한 것을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과 문맥속에서 주님의 엑소더스를 말씀하심은 출애굽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과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 즉 엑소더스를 하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은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주의 몸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세워지게 됨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도가 아니면서도 주의 제자인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글로써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읽게 되어진다는 점에서 교회의 성립이 바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별세의 진정한 실제의 증거가 되어진다는 것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데오빌로에게 미루어 증거해야 할 때를 분별하였음에 대한 것을 말함은 앞서 변화산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심을 받들어 오는데 그 때가 지나 이제 말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증거로서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증거를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나 어떤 신비적 개념으로써 그 때 당시에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러한 실제들은 사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즉 메시아 즉 그리스도 주님 앞에서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교적 성별을 의미하는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고백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증거와 같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즉 메시아 안에서의 성별적 정당함을 입은 자들이 주의 제자들이라고 함과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에 대한 외적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그것을 보는 자들도 하나님의 크신 일이라고 함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주의 구원의 실제를 담아내며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등짐이라고 하는 이별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의 상태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는 그러한 목가적인 주의 양들을 치는 교회의 시대 예수님의 세우신 교회의 시대가 종말의 때임을 말씀하시며 이것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의 증거의 시대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를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데려가시지만 주의 구원을 이루심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보존하시기를 위함임을 주의 기도에서 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요17:15~17)
우리 성도들은 세상을 등진 가운데서 어떤 특정단체로서의 생활을 하거나 세상에 세속화되어져서 주의 빛을 잃어버리는 자들의 모습으로 있게 되어짐은 옳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구별과 그러한 증거들의 실제적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설 때에 참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주의 구원을 증거하는 자들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별세하심 주님의 엑소더스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정당함을 실제를 증거하는 가운데 세상에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구원을 증거하는 종들로 서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 없이도 세상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과 평화의 실제를 부여하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의 진정한 구원과 화평이 있음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구원하심과 화평케 하심을 증거하는 그 종들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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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참새의 저주
2004년2월2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20:1-29
떠도는 참새의 저주
고사성어 중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온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 상대적인 경우의 여러 가지 억울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그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의거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소위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알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사필귀정이라는 개념의 의미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두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당위성을 느끼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국한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은 까닭없는 저주로서 오히려 그 자신의 심판이라고 함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입장이 이러한 것으로 욥에게 성립되어질 수 없는 말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0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안에서 성도로서의 고난의 의미와 실제가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 세상이 있어옴으로부터라는 세상의 인식되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의지하여서 쓸데없는 똥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말의 합리성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판단이 자신들 보다 어린 사람으로서 누린 시간들이 잠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울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욥의 모습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의 잘못을 감추는 합리성이 있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그의 재물이 많았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적인 재물이었음에 대한 추측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받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더니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한다고 하는 그러한 언약에 대한 비하로써 엉킨 젖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대충적인 입장의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9절에서는 소발의 욥에 대한 부당한 판단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욥이 배를 불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로를 내리심과 그로 인해 철병기를 피할 때에 놋 활을 당김으로 그의 몸의 중심에서 그러한 놋이 나옴에 대한 묘사로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발은 말하기를 27절에 하늘이 그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칠 것이라고 함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갈 것이라고 함과 그것이 욥과 같은 자들의 정하신 산업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고 함이 범신적인 개념이며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모습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소발이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말은 엘로힘과 엘이란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앞서 하늘이라는 말은 역시 사마임이라는 글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범신적인 신앙이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엘로힘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소발이라는 말은 ‘참새’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주목할 때에 성경에서는 참새라는 말을 여기 욥기서를 제외하고 7번 나오고 있는데 이 참새는 의미없는 말을 하는 존재와 하찮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에 대한 칭호가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윗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시 102:7) 형태적인 초라함과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의 동일한 표현이지 실재적으로는 그 존재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고 하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예정하신 가운데서 다윗이 이미 얻고 있는 가운데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행13:22참고)
그것과는 달리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6:2)
우리가 욥기서에 첫 부분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의 순전함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허용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욥이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것이 아니라는 정당하지 못한 그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의미 없는 저주라고 하는 것이 소발의 모습인데 그 소발이라는 이름이 참새라고 할 때에 그의 존재적 혼신의 욥을 저주함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주목한 잠언서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2)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것은 그 존재와 그 증거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핑계할 수 없어도 상대적이라는 우기는 그러한 모습들로써 저주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러한 많은 참새들보다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그 판단하심과 신원하심에서 그 예정하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그것을 받지 못하여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참으로 주 앞에서 기뻐 받으시는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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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20:1-29
떠도는 참새의 저주
고사성어 중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르게 돌아온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 상대적인 경우의 여러 가지 억울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그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의거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소위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알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사필귀정이라는 개념의 의미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두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당위성을 느끼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국한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존재를 판단한다는 것은 까닭없는 저주로서 오히려 그 자신의 심판이라고 함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의 입장이 이러한 것으로 욥에게 성립되어질 수 없는 말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0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안에서 성도로서의 고난의 의미와 실제가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 세상이 있어옴으로부터라는 세상의 인식되어진 보편적인 생각을 의지하여서 쓸데없는 똥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말의 합리성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판단이 자신들 보다 어린 사람으로서 누린 시간들이 잠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울 것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욥의 모습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소발은 욥의 잘못을 감추는 합리성이 있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그의 재물이 많았음이라고 하는 것이 불법적인 재물이었음에 대한 추측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받는 자의 모습이라고 하더니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한다고 하는 그러한 언약에 대한 비하로써 엉킨 젖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대충적인 입장의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9절에서는 소발의 욥에 대한 부당한 판단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욥이 배를 불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로를 내리심과 그로 인해 철병기를 피할 때에 놋 활을 당김으로 그의 몸의 중심에서 그러한 놋이 나옴에 대한 묘사로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발은 말하기를 27절에 하늘이 그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칠 것이라고 함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갈 것이라고 함과 그것이 욥과 같은 자들의 정하신 산업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발이라고 하는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고 함이 범신적인 개념이며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모습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소발이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말은 엘로힘과 엘이란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앞서 하늘이라는 말은 역시 사마임이라는 글자 그대로 하늘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범신적인 신앙이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엘로힘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소발이라는 말은 ‘참새’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주목할 때에 성경에서는 참새라는 말을 여기 욥기서를 제외하고 7번 나오고 있는데 이 참새는 의미없는 말을 하는 존재와 하찮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에 대한 칭호가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윗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시 102:7) 형태적인 초라함과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자의 동일한 표현이지 실재적으로는 그 존재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고 하는 그러한 존재적 정당함을 예정하신 가운데서 다윗이 이미 얻고 있는 가운데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행13:22참고)
그것과는 달리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 26:2)
우리가 욥기서에 첫 부분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욥의 순전함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허용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욥이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것이 아니라는 정당하지 못한 그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의미 없는 저주라고 하는 것이 소발의 모습인데 그 소발이라는 이름이 참새라고 할 때에 그의 존재적 혼신의 욥을 저주함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주목한 잠언서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2)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것은 그 존재와 그 증거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핑계할 수 없어도 상대적이라는 우기는 그러한 모습들로써 저주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러한 많은 참새들보다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그 판단하심과 신원하심에서 그 예정하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실 것을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그것을 받지 못하여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인생들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참으로 주 앞에서 기뻐 받으시는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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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2월 19, 2004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2004년2월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3:1-26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할 때에 어떤 일에 맹목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그 확고함을 말할 수 있는 형식과 모습을 말하면서도 사실 맹목적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판단이라고 함과 주권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외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모습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그러한 자들의 행함에 믿음 안에서의 주권적 의지를 가진 가운데서 행한 자들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앙의 경건이라고 함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것의 완성적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그 도중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을 마음에 가지도록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곳이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행각(行閣)(Portico)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기본적인 표현과 신앙고백인 성전에 나아감에 대한 그 실제적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체적인 시간이 정해진 가운데서 경건의 습관적 행함에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금도 없고 은도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함에 증거를 받은 자가 걸으면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것과 그것을 본 자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놀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서 주목함에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님에 대하여서 말하며 의로운 자 예수 생명의 주를 죽였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음에 대한 증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그것은 이해의 문제라고 함보다도 하나님의 앞서 증거한 선지자들의 증거의 정당함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하여서 인용적인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의 특이한 점은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이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구체적인 복음의 증거가 되어지고 둘째와 셋째의 본문은 동일한 한 부분으로써 귀납적인 측면에서의 예수님의 구주이심과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가 앞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실재적인 증거임에 대한 것으로 증거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먼저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후자의 증거 즉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앞서 하나의 이벤트성의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주목하였던 것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으로 그들의 경건에서 비롯되어진 치유가 아님에 대한 언급들이 그러한 것을 반증한다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일어남에 대한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의구심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답변할 때에 있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이 증거 됨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봄에 대한 증거가 예수로 하여금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확신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벤트성의 또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주의 복음이라고 함이 현실적인 형태로 증거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인증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가 바로 후에 베드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솔로몬의 행각에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솔로몬 때에 있었던 기둥들이 있고 벽이 없는 그러한 통로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당시 보수되어서 그대로 이름하여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둥만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강조되어지는 솔로몬과 관련되어진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솔로몬이 성전의 현관에 비교되어지는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야긴이라는 말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솔로몬 성전에 들어갈 때에 그 현관의 그 문의 정당함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그 정당함의 실재를 말함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의 중심적 실재를 믿는 판단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자신들의 필요라는 것의 실재를 중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으니 그것은 핑계할 수 없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 표적이 되어지는 앉은뱅이의 모습과 동일시되어진 가운데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이제 주의 구원하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가 있을 것에 대한 증거도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에서 앉은뱅이는 사실 하나님의 실재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의 증거의 실재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표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러한 자리에서 나와 구원의 기쁨으로 주 앞에서 그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 솔로몬 행각에 모이는 자들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 그가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심에 대한 그 정당함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그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증거가 진정한 하나님의 증거자들로서의 증거의 실재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Preacher'smain we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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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1-26
솔로몬 행각에 모이거늘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할 때에 어떤 일에 맹목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그 확고함을 말할 수 있는 형식과 모습을 말하면서도 사실 맹목적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판단이라고 함과 주권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은 외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습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모습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그러한 자들의 행함에 믿음 안에서의 주권적 의지를 가진 가운데서 행한 자들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앙의 경건이라고 함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것의 완성적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그 도중에서 생각하여야 할 것을 마음에 가지도록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곳이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행각(行閣)(Portico)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기본적인 표현과 신앙고백인 성전에 나아감에 대한 그 실제적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체적인 시간이 정해진 가운데서 경건의 습관적 행함에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금도 없고 은도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함에 증거를 받은 자가 걸으면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것과 그것을 본 자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놀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서 주목함에 베드로는 자신들의 경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님에 대하여서 말하며 의로운 자 예수 생명의 주를 죽였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음에 대한 증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그것은 이해의 문제라고 함보다도 하나님의 앞서 증거한 선지자들의 증거의 정당함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하여서 인용적인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의 특이한 점은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이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구체적인 복음의 증거가 되어지고 둘째와 셋째의 본문은 동일한 한 부분으로써 귀납적인 측면에서의 예수님의 구주이심과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으로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가 앞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실재적인 증거임에 대한 것으로 증거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먼저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은 후자의 증거 즉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앞서 하나의 이벤트성의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주목하였던 것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으로 그들의 경건에서 비롯되어진 치유가 아님에 대한 언급들이 그러한 것을 반증한다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일어남에 대한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의구심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답변할 때에 있었던 것과 같이 주의 복음이 증거 됨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봄에 대한 증거가 예수로 하여금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 확신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벤트성의 또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주의 복음이라고 함이 현실적인 형태로 증거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인증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가 바로 후에 베드로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솔로몬의 행각에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솔로몬 때에 있었던 기둥들이 있고 벽이 없는 그러한 통로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당시 보수되어서 그대로 이름하여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둥만이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강조되어지는 솔로몬과 관련되어진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솔로몬이 성전의 현관에 비교되어지는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야긴이라는 말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그러한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솔로몬 성전에 들어갈 때에 그 현관의 그 문의 정당함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그 정당함의 실재를 말함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의 중심적 실재를 믿는 판단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자신들의 필요라는 것의 실재를 중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으니 그것은 핑계할 수 없는 주님을 부인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그 표적이 되어지는 앉은뱅이의 모습과 동일시되어진 가운데서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이제 주의 구원하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자가 있을 것에 대한 증거도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믿는 것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오늘 본문에서 앉은뱅이는 사실 하나님의 실재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의 증거의 실재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표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러한 자리에서 나와 구원의 기쁨으로 주 앞에서 그 행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 솔로몬 행각에 모이는 자들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 그가 자신으로서의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심에 대한 그 정당함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그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증거가 진정한 하나님의 증거자들로서의 증거의 실재가 된다는 것을 믿고 주의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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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
2003년12월1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요일5:1-12
우리의 믿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개인적인 신념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다의어적(多意語的)인 측면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한정되면서도 보편적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엉뚱한 그러한 신관을 가진 자들도 있고 아예 윤리적 신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잘못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실재와 그 내용이라고 함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함과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 자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서 좀더 분명한 증거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증거하시는 이, 셋이면서 한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아들 안에 생명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것의 반대는 ‘절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과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앞서 말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언어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의 속성을 기억할 때에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또한 옳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에서 비롯되어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모든 말들은 이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모두 부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세상이라고 함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그러한 규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절대의 속성에서는 거짓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의 속성적인 정당함을 얻은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러한 절대의 속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는 상대적으로 판단을 받지 않는 그러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이며 그 동일한 증거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비합리성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절대의 자기 정당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상대적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음에 대한 비판적인 가능성이 있으나 하나님의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합리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며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함도 역시 그 합리적 정당함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서 파생된 정당함을 의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세상에서의 상대적 보편으로 인한 비합리성의 논쟁으로 인한 정당성 판단에서 우리 성도들이 이긴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로서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자신이 그 증거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합리성에 따른 그 정당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계시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시는 그 합리성은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정당성 시비를 기각시키심으로서 자신의 계시의 증거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김에 대한 그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사랑의 사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잘 증거하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보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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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5:1-12
우리의 믿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개인적인 신념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다의어적(多意語的)인 측면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한정되면서도 보편적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엉뚱한 그러한 신관을 가진 자들도 있고 아예 윤리적 신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잘못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실재와 그 내용이라고 함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함과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 자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서 좀더 분명한 증거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증거하시는 이, 셋이면서 한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아들 안에 생명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것의 반대는 ‘절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과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앞서 말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언어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의 속성을 기억할 때에 허락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또한 옳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보편적 생각에서 비롯되어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모든 말들은 이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은 모두 부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세상이라고 함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그러한 규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절대의 속성에서는 거짓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의 속성적인 정당함을 얻은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규정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러한 절대의 속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는 상대적으로 판단을 받지 않는 그러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이며 그 동일한 증거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비합리성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절대의 자기 정당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상대적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음에 대한 비판적인 가능성이 있으나 하나님의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합리적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며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함도 역시 그 합리적 정당함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서 파생된 정당함을 의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세상에서의 상대적 보편으로 인한 비합리성의 논쟁으로 인한 정당성 판단에서 우리 성도들이 이긴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로서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자신이 그 증거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합리성에 따른 그 정당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계시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으로서 말씀하시는 그 합리성은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정당성 시비를 기각시키심으로서 자신의 계시의 증거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김에 대한 그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사랑의 사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잘 증거하시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보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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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마을
2003년12월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1-10
위로의 마을
사람들은 환경과 관계되어진 영향력을 중시하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 마을’과 같은 그러한 것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관련된 것을 말하는 자료들이 국내외적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사람들의 찾을 위로가 있다. 또는 그러한 위로가 있는 마을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곳이 있다는 그러한 판단의 수용이 어렵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는 공상적인 개념에서만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것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함에 있어서 존재함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위로의 마을’에서 되어진 일들을 증거하시고 있음과 그 실제상황을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과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과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의 칭찬이 있게 되어지며 그 백부장의 종이 나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가버나움에 주님이 들어가신 것과 그곳에서 되어지는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앞서 주님이 들어가신 이 가버나움은 그 뜻이 ‘위로의 마을’ "village of comfort" 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적인 그러한 위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거룩하심과 그 상관성을 가지는 가운데 그 실제적인 ‘위로의 마을’로서의 정체성적인 증거를 하도록 하시며 그곳에서의 증거가 그 마을에 속한 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절대자의 권위와 그 질서적 정당함을 잘 이해하고 또한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어진 자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규정되어지는 헬라인으로서 유대의 지도자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종된 자로서 유대의 장로들을 통하여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구약의 증거로서 탄생하게 되어지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증거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을 말씀하심에서는 어떤 과찬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게 증거하는 종을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에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지는 욥을 기억합니다. 그는 순전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자입니다. 구약에서 욥을 능가하는 자의 모습은 다윗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욥은 그러한 순전함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고난 받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베푸시는 그 뜻하심에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변명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잠시 하는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졌던 것입니다.
즉 흙으로 만든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질서적인 정당함을 잃은 것인데 여기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자랑되어지는 자들에 비견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명한 존재의 다름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상관성이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백부장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진 것으로서의 거룩하심에서의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교회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만으로 본다면 여기 세상에 어느 곳도 거룩한 곳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는 곳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당함을 부여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피곤함을 잠시 쉴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서의 분복이 사람들의 삶에 주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그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진정 주의 구원하심의 위로가 있는 위로의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성도들로서의 모임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모임의 현실적 실제의 지역교회의 모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창조주의 절대자로서의 주권을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생각하고 존경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영생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그 명부에 그 이름이 흐리지 않고 기록되어지는 위로가 또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집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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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7:1-10
위로의 마을
사람들은 환경과 관계되어진 영향력을 중시하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 마을’과 같은 그러한 것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관련된 것을 말하는 자료들이 국내외적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 사람들의 찾을 위로가 있다. 또는 그러한 위로가 있는 마을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곳이 있다는 그러한 판단의 수용이 어렵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는 공상적인 개념에서만 것이라고 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것같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함에 있어서 존재함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위로의 마을’에서 되어진 일들을 증거하시고 있음과 그 실제상황을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과 2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과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의 칭찬이 있게 되어지며 그 백부장의 종이 나았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가버나움에 주님이 들어가신 것과 그곳에서 되어지는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앞서 주님이 들어가신 이 가버나움은 그 뜻이 ‘위로의 마을’ "village of comfort" 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적인 그러한 위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거룩하심과 그 상관성을 가지는 가운데 그 실제적인 ‘위로의 마을’로서의 정체성적인 증거를 하도록 하시며 그곳에서의 증거가 그 마을에 속한 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절대자의 권위와 그 질서적 정당함을 잘 이해하고 또한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겸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어진 자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규정되어지는 헬라인으로서 유대의 지도자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종된 자로서 유대의 장로들을 통하여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모습을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구약의 증거로서 탄생하게 되어지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증거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함을 말씀하심에서는 어떤 과찬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게 증거하는 종을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에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지는 욥을 기억합니다. 그는 순전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던 자입니다. 구약에서 욥을 능가하는 자의 모습은 다윗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욥은 그러한 순전함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고난 받고 있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정당함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서 베푸시는 그 뜻하심에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변명할 수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잠시 하는 가운데서 시험에 넘어졌던 것입니다.
즉 흙으로 만든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질서적인 정당함을 잃은 것인데 여기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자랑되어지는 자들에 비견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명한 존재의 다름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상관성이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백부장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할 때에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진 것으로서의 거룩하심에서의 그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교회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만으로 본다면 여기 세상에 어느 곳도 거룩한 곳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는 곳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정당함을 부여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피곤함을 잠시 쉴 수 있는 그러한 기쁨으로서의 분복이 사람들의 삶에 주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그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진정 주의 구원하심의 위로가 있는 위로의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성도들로서의 모임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모임의 현실적 실제의 지역교회의 모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창조주의 절대자로서의 주권을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생각하고 존경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영생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그 명부에 그 이름이 흐리지 않고 기록되어지는 위로가 또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집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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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6, 2004
지팡이와 안위
2004년2월1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7:1-25
지팡이와 안위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산에서 내려올 때에 마침 그곳에서 상주하시는 분들이 물품을 지게로 져서 나르는데 사용하시는 지팡이를 빌려서 의지하여서 내려올 때 참 든든했다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또는 산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풀숲의 곤충이나 또는 해충들을 막기 위해서 막대기를 준비해서 지팡이로 사용할 겸 들고 다니는 것이 좋은 것임을 동의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가적인 생활을 하는 지방에서는 양이나 특정 동물을 기름에 있어서 그들의 소유된 동물들을 인도하는데는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주인의 손에 들려진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르는 양들이나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안심할 수 있는 표징과 같은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서도 앞서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에 대한 증거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아론을 통한 지팡이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음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나타내시는 섭리와 그 증거를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의 입술의 둔함에 대한 자기 겸손이라고 함을 받으시면서 그러한 실제적인 측면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적인 권위로 말을 잘하는 아론의 동역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낼 것에 대한 것과 그 때에 여호와를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기 거절한다는 것과 그에 따라 애굽에 내리는 열가지 재앙의 첫 재앙으로 알려지는 나일강 하수의 물들이 피가 되어지는 이적을 베풀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그러한 이적을 보면서도 애굽왕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모세와 아론이 그 섭리를 받들어 순종함에 있어서 그 주께서 허락하신 지팡이로 그 주의 섭리로서의 재앙을 나타내시도록 하심의 의미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같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편 23편의 말씀이 되어집니다.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6)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그러한 목자의 심정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 애굽의 술사들이 만든 지팡이를 삼킨 것은 간교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상대적 표현의 실제에 대립할 수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함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것이며 또한 세상의 지혜라고 함을 거룩하게 구별하여서 사용하시는 가운데서 메시아의 거룩하게 하심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과 그 증거자들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젖줄이라고 까지 표현이 가능한 나일강 하수의 물을 피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신원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애굽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자들을 모두 나일강에 빠져 죽게 함에 있어서 그 핏값을 찾으시는 분으로써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과 같이 가인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자신의 상대적 정당함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피가 소리지름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벨이라고 하는 자의 이름의 뜻은 ‘헛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는 허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마음에 두셨고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로서의 피 생명 값이 있음에 대한 가인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 수 많은 아기들이 나일강에 던져져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의 생명의 값 핏값을 찾으시는 생명의 주로서 절대자로서의 신실함의 증거자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글한 것도 다 상대적인 이해해석이라는 입장으로써 일관할 수 있는 요소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지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대한 실제에 대한 분별이 없었던 것임을 지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주의 성도들에 대한 존재에 대한 축복과 안위하심의 뜻하심이 목가적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것이 목가적인 종말론을 말하고 있는 이사야와 미가서 4장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종말의 때 즉 예수님의 자기 증거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교회의 시대의 모습으로써의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갈수록 바쁜 세상을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예언한 바와 같음을 또한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너무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생존경쟁에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 우리의 생존을 위해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우리 성도들의 머리에 바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존경쟁이라고 함의 피곤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주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여해주시는 하나님 주의 말씀하심의 지팡이가 성도된 나를 안위하심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주의 복음을 위해 산을 넘는 자들로서의 중심을 가지며 그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또한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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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7:1-25
지팡이와 안위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산에서 내려올 때에 마침 그곳에서 상주하시는 분들이 물품을 지게로 져서 나르는데 사용하시는 지팡이를 빌려서 의지하여서 내려올 때 참 든든했다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나 또는 산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풀숲의 곤충이나 또는 해충들을 막기 위해서 막대기를 준비해서 지팡이로 사용할 겸 들고 다니는 것이 좋은 것임을 동의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가적인 생활을 하는 지방에서는 양이나 특정 동물을 기름에 있어서 그들의 소유된 동물들을 인도하는데는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주인의 손에 들려진 그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르는 양들이나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안심할 수 있는 표징과 같은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서도 앞서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에 대한 증거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아론을 통한 지팡이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음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나타내시는 섭리와 그 증거를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의 입술의 둔함에 대한 자기 겸손이라고 함을 받으시면서 그러한 실제적인 측면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적인 권위로 말을 잘하는 아론의 동역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낼 것에 대한 것과 그 때에 여호와를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기 거절한다는 것과 그에 따라 애굽에 내리는 열가지 재앙의 첫 재앙으로 알려지는 나일강 하수의 물들이 피가 되어지는 이적을 베풀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그러한 이적을 보면서도 애굽왕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모세와 아론이 그 섭리를 받들어 순종함에 있어서 그 주께서 허락하신 지팡이로 그 주의 섭리로서의 재앙을 나타내시도록 하심의 의미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같이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편 23편의 말씀이 되어집니다.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6)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그러한 목자의 심정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시고 그 애굽의 술사들이 만든 지팡이를 삼킨 것은 간교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상대적 표현의 실제에 대립할 수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함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것이며 또한 세상의 지혜라고 함을 거룩하게 구별하여서 사용하시는 가운데서 메시아의 거룩하게 하심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들과 그 증거자들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젖줄이라고 까지 표현이 가능한 나일강 하수의 물을 피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신원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애굽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자들을 모두 나일강에 빠져 죽게 함에 있어서 그 핏값을 찾으시는 분으로써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과 같이 가인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자신의 상대적 정당함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피가 소리지름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벨이라고 하는 자의 이름의 뜻은 ‘헛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는 허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마음에 두셨고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로서의 피 생명 값이 있음에 대한 가인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 수 많은 아기들이 나일강에 던져져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의 생명의 값 핏값을 찾으시는 생명의 주로서 절대자로서의 신실함의 증거자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글한 것도 다 상대적인 이해해석이라는 입장으로써 일관할 수 있는 요소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지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대한 실제에 대한 분별이 없었던 것임을 지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주의 성도들에 대한 존재에 대한 축복과 안위하심의 뜻하심이 목가적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것이 목가적인 종말론을 말하고 있는 이사야와 미가서 4장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종말의 때 즉 예수님의 자기 증거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교회의 시대의 모습으로써의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갈수록 바쁜 세상을 만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예언한 바와 같음을 또한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너무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생존경쟁에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 우리의 생존을 위해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우리 성도들의 머리에 바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존경쟁이라고 함의 피곤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주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여해주시는 하나님 주의 말씀하심의 지팡이가 성도된 나를 안위하심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주의 복음을 위해 산을 넘는 자들로서의 중심을 가지며 그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또한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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