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13, 2006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2006년 2월 12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3:1-12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하게 귀중한 것이고 일반 학문을 하시는 분들이나 또는 일반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사람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이라고 함을 전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러한 이성의 중요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중요함이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함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고 그러한 점에서 일말의 그러한 인식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써의 한 인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가운데서도의 모습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정지되어진 가운데서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에 그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또한 합당한 가치관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러한 가운데서의 판단은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고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는 것과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음에 대한 것과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그러한 것들이 언급되어 있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나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는 것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자이심을 말씀하시며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심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해한 가운데서 분별되어져야 할 것들을 몇가지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뜻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그 다음 말씀도 분별할 수가 없는 가운데서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 대한 모습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소위 ‘형제단’이라고 하는 단체에 속하신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은 교회의 제도적인 모순에 대하여서 걱정하는 그러한 것을 들으면서 아주 할말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극단적으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근거는 바로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잘못된 시각을 가진 결과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옳다는 것은 달리 나타난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교회의 질서적 제도라고 하는 것이 모순이 있다는 것과 모두 배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어진 가운데서 선하게 받아야할 질서의 실존은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질서적 개념에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하는 바 기득권적인 것을 취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고 그 앞서 그들의 인식의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되어진 것이라고 함의 행함이으로 그것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표현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인식은 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가르침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들의 인식의 잘못됨으로 인해서 그 가르침과 달리 또는 잘못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따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비로소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맥적 관계성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이에’라는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과 전반적인 이해에서도 그 상관성에서 그 인식의 연관성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장인 마 22장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의 비유적 실제로서 언급하였던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의 존재적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인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 그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적인 모습이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행동이라고 함이 바로 그 진정한 신앙의 실존으로써의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그들의 말한 바는 지키되 그들의 행함이라고 함은 본받지 말라고 하심의 뜻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언급된 그들의 행동을 주목해보면 이렇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은 자의 모습, 저희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행위, 상석에 앉으며 문안과 납비라 칭함을 받는 것, 아비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는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교회의 질서적 의미와 아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일시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함에 있어서는 그 동일시와 동일의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어그러지게 임의적으로 취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우고 돕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성막을 옮기게 되어질 때에 그 임무는 고라자손이 책임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이 되신 운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신약적 배경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반론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달란트의 고유성이라고 함을 존중하여야 하며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집사이고 모두가 교역자이고 하면 그것의 사역적 달란트를 위해 헌신함에 있어서 그 질서를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또한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 행한 바는, 언급한 바와 같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의 재가적 허락이라고 함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모습들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행위나 상석에 앉는 것과 문안하는 것이나 아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잘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함께하라고 하심과 같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사역적 정당함이 있는 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 믿음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섬김이고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섬기는 자나 섬김을 받는 자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심에서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문안이라고 하는 것도 사도의 가르침에서 성도의 문안을 말씀하시고 있고 아비라고 함에 있어서도 복음으로 사람을 바르게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부로서의 재가를 받은 아비를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적 차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질서의 한 부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질서의식은 합당한 것으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그러한 중심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의 발로로써 행함의 모습이 있어서 동일한 표현의 질서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까지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생각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엘리 제사장과 그에게서 신앙을 배운 사무엘의 모습이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삼상 3: 참고)

엘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을 심의하는 그러한 종의 모습이 비로소 나타나는 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앞에서 범죄한 그들의 아이들에게 '그 소문이 않좋다는'그러한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 사실심의에도 그의 연로한 판단이 어두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자식의 죽음이라고 함의 비보를 듣는 가운데서 그의 목이 부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이 부러져 죽은 엘리 제사장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의 질서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두는 사무엘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의 훌륭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주의 말씀하심안에서 주관적이면서도 사실로써 받을 수 있는 모습에서 신앙의 자유와 또한 사실로써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아무리 타락해도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고쳐나가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그러한 소명적 합당한 자리에 세움을 받지 않았다면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구별적 사실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별하여서 선하게 받을 수 있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어진다는 것과 같이 주의 말씀하심의 주관적인 판단의 사실도 진정한 객관적 사실로 받음에 합당함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행하고 가르치는 바 교회의 질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구별하고 가르치지 못한 행위를 본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의 근본적인 인식인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기득권처럼 사용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별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적 사역이 우리 삶속에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써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주관적인 사실도 구별하여 진정한 사실로 받게 되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의 말과 행동이라고 함을 생각하게 되며 판단함의 그 사실도 선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교회에서 섬김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득권적 개념의 질서적의미를 교회의 모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서 동일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임의적으로 기득권적 입장에서 행하는 자들로 인해서 판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써 왕으로서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으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바리새인인줄을 분별하지 못하는 악한 모습이라고 함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말한 바를 행하고 그들의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바르게 따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받으시는 열매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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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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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2006년 2월 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3:1-13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작금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그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의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서 시도되어지는 것이 이 문화를 통하여서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아주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인식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고 그것만큼의 사람의 자기 이미지 관리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인사라고 하는 것이 부담되어지고 오히려 폐가 되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씁쓸한 모습도 인사문화의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 그리고 상대가 되는 가운데서 인사를 하면 그것이 적절하고 또한 요구되어지는 것이지만 반목이 있는 사람 그리고 상대되지도 않는다는 신분적 격차가 느껴지는 가운데서는 그 인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지위를 깎아 내리는 듯한 것으로 그 인사를 받는 사람들이 인사받기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사를 한다고 할 때에는 그만한 또는 그것보다도 근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 지혜가 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를 훼방하는 무리의 일단이 있는 그러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그 축복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고려하는 가운데서 행하고 있음을 보는데, 세상의 반목이라고 하는 것의 현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아야할 증거로 나타나고 있음을 또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제 사도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갈 터인데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치리적 입장에서 책망하고 권징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전에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강하심이라고 하는 것,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서 사도가 틀린 것이 아닌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시험하고 고린도교회 자신들을 확증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과 오직 진리를 위할 뿐임과 그로 인해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사도가 약할 때에도 섬김을 받는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하고 이것을 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성도의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13절에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써 그 서신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뻐하고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임과 그 가운데서 평안하게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고 있고 모든 성도가 문안함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의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한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개념의 어떤 정도적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실분별과 그것을 진리로 받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목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서 증거하며 가르치려고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예만 된다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되어지는 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 중 사도의 존재와 가르침을 부인하며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린도교회에 가르치는 자들은 합리성 자체에서만 어떤 납득의 당위성을 가지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러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믿음 안에서 구별되어진 자신에 대한 부득불 자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에 의한 재가 있는 것임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득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여도 객관적인 당위성이 있고 정적인 납득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실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고후 12:19)

이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서신의 부분으로써 한번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어떠함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사실분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과 그 비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연약하심으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의미와 그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의 사실임을 받야야함을 받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정하신 그 자기의 뜻하심에 순종하심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아버지 이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것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비록 상대적인 주관적인 사실적 모습이라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참된 실제로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진리가 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고후 1:19)

그 말씀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사실 규정을 생각하지 않고 임의적인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당위성을 찾고 있는 가운데서 분파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자들로써 교회의 질서를 따라 섬기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교회의 권징을 하게 되어지는 그날에는 사도가 그 권징의 사실로써 그들에게 분명한 시벌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인격적인 사도의 가르침으로서 성경의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읽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버린 자와 같이 판단되어지는 것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인식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사도로서 모자라고 버린바되어진다는 그 사실의 실제를 임의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도에 대한 평가로서의 사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성도들을 위하는 자리에 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중심에서 심긴다는 것의 마지막으로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는 것으로 형제된 성도들을 문안하라고 함의 주문적인 개념으로써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내며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파가 되어진 가운데서 그 성도들의 모습을 화목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임의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분파적 입장의 합리성과 그것에서 비롯되어지는 당위성을 따라야 하는 강요적 입장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심의 분석한다면 다른 형제안에서 옳고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적 제사장적 선지자적 개념의 사역적 형상을 내 삶속에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가운데서 주관적인 개념이면서도 재가받은 개관적 사실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화목의 사실, 형제안에서 화평케하는 사실을 담아내는 종들의 고백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바로 여러 합리적인 말들이 많이 있고 이익적인 당위성의 강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나의 왕이시며 예수께서 제사장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기에 내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왕이신 예수님안에서 사실을 구별하고 심의하여 판단하여 그 형제의 합당한 모습을 인정하고 대화를 하게 하고 화목하게 한다면,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나에게서 나타나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적인 모습으로서의 주앞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확증이라는 말을 이런 측면에서 사실로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가 가르친 자신들이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라고 하는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 또는 많은 사람을 인도했다는 것, 교회 예배당을 몇개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 몇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 등과 같은 것에서 임의적 동의에 따른 객관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합리적인 것과 실리적인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의 강요가 내게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정당함으로부터 재가를 받을 수 있는, 그 주관적인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진정으로 사실로 받아 믿음 안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으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여진 주관적인 사실을 믿음 안에서 사실로 받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형제들을 화목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의 복된 모습이 자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믿음에 서 있는가 확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합리성의 사심의 시비를 벗어나서 분란되어져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함의 확증을 주님께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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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월 16, 2006

나라를 새롭게 함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1-15
나라를 새롭게 함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등산이나 그러한 것의 일환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그와 같은 여유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분들 중에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준비해서 산행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뱀을 비롯한 해충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그 들고간 막대기나 지팡이들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지참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뱀들이 나타나서 사람이 물린 상황이라면 그 뱀들을 쫓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뱀에 물린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신속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산행을 다니신 분들이 아니라면 처음에 산에 간다고 할 때에는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인생의 광야 산길을 걷는 인생들.., 두 번 걷는 인생이 아니기에 모두 초행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그러한 해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이스라엘의 왕정시기의 처음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뱀에 물린 것과 같은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주의 말씀으로서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을 침에 따라 야베스 사람들이 언약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암몬 사람 나하스는 그들에게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야베스 장로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브아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고 있는데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야베스 사람의 말을 듣게 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그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그것을 사자의 손으로 모든 지경에 보내어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여 백성들이 나오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서 이튿날에 그들을 쳐서 승리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르는 말로써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자신들이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고 사울이 그날에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있고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사울로 왕을 세우고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기뻐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초기에 초대왕으로서의 사울이 야베스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되는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정황에서 이스라엘나라의 새롭게 함을 사무엘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롭게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의 개선이라고 함을 말하기 보다는 그것을 통한 분명한 새로움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시각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대화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야베스 지역을 침공하는 암몬 족속 나하스와 그 야베스 거민들이 취한 내용은 상당히 상대적인 정황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먼저 언약하자는 그 말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회계약설을 말할 수도 있는 그러한 타협의 모습을 취하였는데 그러한 것에 임의적 권위의 위협으로 나하스는 그 침공의 의사와 그 인식이라고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개념에서 합리적인 교육적 개념과 권위라는 두개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합리적 타협의 당위성을 놓는 권위적 개념에서 밀리게 되니까..야베스 거민들은 그 지역의 사람으로서 성격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즉 야베스는 그 뜻이 '마르다'라는 뜻으로 삭막한 어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황속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울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그 백성들에게 먼저 권위적 정적인 언급으로 정치적 수완을 나타냈던 것인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소를 각을 뜨고 그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의 소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정치적 권위의 보임으로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동원된 삼십삼만명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전쟁의 승리를 그 기한까지 말하고 또한 그것을 지켰던 것입니다.

초대왕 사울은 그러한 정치 감각은 있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믿음의 행보라고 하는 것은 많이 결여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왕으로 등극했을 때에 그 체제개편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소를 몰고 자기 기업에 관한 일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아주 상식적인 판단력과 상대적인 여지를 둘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정치적 개편과 그러한 노력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러한 구상적 질서를 말씀하시기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신앙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왕으로 취임하게되는 기름부음도 받고 미스바에서 이미 왕으로 추대하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채제적인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뜻하심을 자신이 아니면 사무엘을 통해서라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그 지도자로서 옳은 것인데, 그러한 의무의 이행을 상대적인측면에서 무작정 기다림이라는 겸손으로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가 믿음으로 행할 것인가 아닌가 분별함에 있어서는 이미 결여되어진 그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수완으로써의 잘 대처한 사울은 야베스를 침공하려고 하던 암몬사람 나하스를 물리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는 온전한 승리를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정황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야베스를 침공한 나하스를 물리쳤지만, 나하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마치 뱀의 독이 이미 몸에 퍼지는 것과 같이 작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 그 이름의 뜻은 '뱀'(serpent)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눈을 다 빼어야 언약을 체결하겠다는 것 그의 중심은 화평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힘의 논리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사울의 이끄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그 이겨 취한 화평에 있어서는 나하스의 의도한 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이 감기워지고 있고 그들의 심령이 여전히 마른 광야 단단한 땅과 같이 씨앗을 받을 수 없는 황무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함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 11:12,13)

비교되어질 수 있는 인물 사무엘과 사울 그 둘은 모두 요구되어진 인물들로서 공통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존재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주어진 아들로서의 사사이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욕망에 대한 요구되어진(desired)이 사울의 이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택함과 청함만의 모습으로 둘다 초대되어진 가운데서 그 청함만의 모습으로 그 택함을 임의적으로 인식하는 그러한 분별력이 없는 자들의 모습과 그 중심의 인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 않는 가운데서 요구되어지고 있는 그들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스라엘의 전공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무엘에게 직접적으로 사울의 왕됨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실규정과 그 정당함을 따르는 것을 이미 버린 자의 모습으로 그 눈이 감기웠던 것이며 그 시력이 이미 뽑힌 바와 같은 것입니다. 즉 나하스의 의도한 언약적 평화라고 하는 것이 그 악한 시험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말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관용적 덕을 나타내고 자기 사람을 보호한다는 그러한 측면에서 사무엘을 두둔하고 있고 그 두둔은 믿음이라고 하기 보다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즉흥적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날에 주의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은 주의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 날에는 이미 사무엘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길갈로 올라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말을 하고, 사울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함을 기록하고 있는데, 순전한 상황적 정치적개념으로 본다고 하면, 사무엘이 위기 모면적 개념으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통한 백성들과의 화해적 제스쳐로서 말함이 아주 해석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사무엘이 오히려 정통성이 있는 미스바로 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을 왜 마음에 두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답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갈로 가자고 한 것은 그 길갈의 이름의 뜻이 '굴러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왔을 때에 돌무더기를 증거더미로 쌓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함으로써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다'는 뜻으로 사용한 언어와 명칭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보다는 그 '길갈'로 올라가자고 언급한 것은 바로 앞서 말한 뱀과 같은 나하스의 의도적 언약적 개념의 죄악이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렵히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개와 하나님께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서도록 백성을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합목적적인 측면에서 사울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그러한 중심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 실제적인 거룩함과 그러한 나하스의 언약적 화평에 따른 죄의 권세는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가 있는 다윗의 시대에서 온전히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함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재가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사무엘의 증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재적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 사실을 말하는 언약의 재가와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사실까지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살게 되는 인생 그리고 주님안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으로서 산을 넘게 되는'(사 52:7) 가운데 여러 시험들이 오게 되는데 그것을 형태적인 측면 상황적 측면의 완수라는 개념만으로 시험의 사실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들로 인해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날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새롭게 하신 형상적 영광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둠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왕되심과 그의 통치하심이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기만적 사실들을 분별해 낼 수 있도록 주의 말씀하심을 통한 사실 규정을 잘 믿음으로 받으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서 왕되심의 대한 증거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롭게 된 심령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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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2006년 1월 15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1:18-46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일반적으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의 제목은 긍정적인 것이 좋고 그러한 가운데서 호감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이 강한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에 예외적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에서 비로소 말하려고 함의 의미는 아닙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과 그 계시적 개념을 읽게 하심으로 열매를 맺는 자들의 모습은 어떤 중심을 가져야 함이 마땅한지를 또한 읽게 하심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시대적 인식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그 임의적 판단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그 상식이라고 하는 시대적 인식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두 번째 들어오시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음과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질문함에 주 예수께서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무화과에게 된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하여도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서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권세를 질문함에 주께서 세례요한에 대한 것이 하늘로서인가 사람에게로서인가 질문하심과 그들이 알지못한다는 것에 대한 말에 답변하시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두 아들에 대한 순종함의 여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요한이 의의도로 왔거늘 믿지 않음을 인하여 믿은 세리들과 창기들은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3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악한 농부들에게 주인이 아들을 보내니 그를 상속자라고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려고 하였는데 그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말씀에 저희가 악한 자는 진멸하고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었고, 이에 주께서는 건축자의 머릿돌을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을 말씀하시니 그 당시 그곳에 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았지만 무리들을 무서워함을 인하여서 예수님을 잡고자 했을 뿐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지목되어지는 '무화과의 마름'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의 기반에 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써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 성도들이 주목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잘 분별해야 함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유의하여 볼 때에, 마태복음 21장 1절에서 17절 말씀 즉 오늘 본문에 앞선 본문으로써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에 있어서 그리고 그 성전을 깨끗케 하심에 있어서 그 앞서 주님이 ‘벳바게’(house of unripe figs)라는 곳과 ‘베다니’에 머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미숙한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예루살렘이라고 함의 정체성 그리고 그 기본적 정신적 신앙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써의 성전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이 그 미숙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맥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비유적 계시의 모습으로써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심은 그 정체성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 정신적인 히스테리식의 입장에서 정신나간 능력으로써 나무에다가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해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미숙한 무화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포도원지기로서의 그 무화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는 농부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전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그 당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질문함에 대하여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입니다.

'이런 일만 할뿐만 아니라'는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화과 저주라는 개념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던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믿음으로 주의 복음의 순수성과 그 성도를 위한 교회의 징계적 개념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또한 최종적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사실의 결정적인 심판이 있게 되어지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실로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목양적 입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하심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산들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역시 그 산들이 포도원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체계적 기반을 말하는 것으로써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천사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그 돌이 가라앉는 것'(계 18:21)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센천사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가를 받은 종들로써 주의 복음의 사실을 말함으로써 개연적인 사상들 특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많은 강조되어진 말들과 그 인식들의 기초를 부인하게 될 것을 나타냄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18장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바벨론의 그 뜻은 '신들의 문'이라는 뜻과 '혼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속성 즉 그 절대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여서 사실을 조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여러가지 사상들의 합리화된 말로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그러한 총체적인 것이 혼돈과 그 이름으로써의 신들의 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고 철학적 정당함의 합리성을 신학과 신앙적 정당함으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가장 무난하게 신앙과 신학계에 들어온 것은 바로 '상식보편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에서 신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대세라고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애통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더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그 뜻하심을 기억할 때에 한국교회의 성장적 개념을 재검토함도 종들로서 해야할 하나의 숙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말에 돌을 들던 사람들'(요 8:56~59)로써 소위 '취득시효'라는 개념 즉 먼저 취득한 자의 소유권적 기득권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기반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존적 왕적 권세로 상식적인 개념을 구별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두 아들의 순종여부로 말씀하시는 재가되어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에 대한 비유로써는 4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으로써 실과를 제때에 바칠 농부들에게 주님의 포도원에서 정당한 농부들로서 존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통해 기뻐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함의 시비를 말함에 있어서 구교에서 한때 변증적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잘못된 소위 '취득시효'적 개념으로써의 권위를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정당함에서 그 사실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말씀또한 해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비와 그것을 빌미로하는 상식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은 상식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하심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이 그리고 그러한 상식이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을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로소 생각하지 않고 상식적인 신앙적 전통적 개념에서 비로소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종들이 주의 복음을 나타내며 주의 포도원으로서의 교회를 돌아보며 목양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성도들의 모습과 열매를 맺히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실을 구별해내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열매를 맺어드리는 충실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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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2월 26, 2005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8:1-9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만왕의 왕 예수께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저녁에 인간의 나라의 왕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사사시대의 장로들에 대하여서 기록된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은 또한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받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의 왕되심에 대한 분명한 견해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써 주목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면서 좀더 주목하게 됨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방법과 과정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믿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또는 그 앞서 기획하는 가운데 있어서 그 결과를 예상하는 목적과 그것을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며 사람들의 생각은 목적우선이냐 아니면 과정 우선이냐는 그러한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 되어짐에 있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임의적으로 받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즉 목적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니까.. 또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과가 중요한 것이야 지금은 실증주의적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실적주의적인 사회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사회적인 인식의 조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늙으매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음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함에 있어서 열방과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언급함에 사무엘이 기뻐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오래된 그러한 신앙적 옳지 못한 반목의 죄악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며 그들에게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왕을 구하는 모습과 절차적 개념의 판단과 행동에서는 그 정당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과는 달리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은 이미 그 정당하지 못한 합목적성으로 부정되어진 것이라고함을 지적하심에서 그 절차적 방법적 정당함과 그 인식되어지는 신앙의 정당함이 이분되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함이 참되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인위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본다면 아마도 합리적인 개념의 입장이 아주 매끄럽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행함의 옳지 못함을 따라서 그 사사적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은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참으로 스스로를 돕는 가운데 이스라엘 왕정을 열 수 있었다는 그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인본주의적 개념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념의 합리적 도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정당하게 먼저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그 되어질 일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미봉(彌縫)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자신들을 결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정당하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자존적 판단이라고 하심을 나타내보여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섭리라고 함의 범주를 말하게 되는 것은 9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무엘에게 그들의 악함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왕의 제도를 허락함과 그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운데서 그 일들을 수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기뻐하지 않음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지 않고자 하는 그러한 악함과 그것의 미봉되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가운데서 어렴풋이 보게 되는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자초하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처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왕정 나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실 것이고 그것의 시점을 나타내셨는데 사무엘은 늙은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깨어 있음과 분별함에 있어서는 한발 늦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목하기 전에 그들을 책망하거나 하나님께 그것을 고하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점을 적극적으로 분별하지 못하였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의 그 사역적인 기간이 끝나가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시대적 감각정도는 앞서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옳지 못한 인식의 미봉적 절차의 정당함을 나타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왕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왕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의 부정적 개념의 왕의 제도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사의 좀더 신실하게 깨어 있음과 이스라엘 장로들의 신실한 인식에 관여되어서 주목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그들의 사태라고 하는 것 즉 사사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울 때에 그 질서적 당위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을 먼저 물어보았어야 함이 옳은 것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왕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또한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었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옳은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올바른 절차적 정당함을 모두 갖추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더 축복되게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들으심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는 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함의 정당함도 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신약에서의 그 증거는 스가와의 아들들이 사도 바울의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는 가운데 귀신들이 그들에게 주장하여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행 19:14~16)

절차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적 정당함을 찾음에 있어서 한번 더 유의하게 되는 것은 그 절차라는 개념에서 읽게 되어지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 방법적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읽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과연 오늘날 과정신학이니 역사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외곡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로소 아주 철학적일뿐이지 신학과 신앙적인 개념은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신앙과 신학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에서는 과정신학과 같이 시간이라고 함에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그 풍성함을 소위 보수 또는 개혁신앙 보다 먼저 누리고 있지만 그 인식의 정당함의 사실은 전혀 모호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대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종교개혁신학을 부끄러워하고 중세에 종속되어지는 현상을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고통이며 왕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질서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재와 실제가 없는 고통의 번민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시간의 풍성함에서 분별이 필요함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것은 시간에 대한 분병한 논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인식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받고 규정할 수 있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기획하고 나타내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 되어짐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논리에서 비로소 인위적 구별을 하는 가운데서 고통의 문을 여는 자리에 서지 않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차와 방법과 합목적성을 규정하고 따르는 가운데 그 가운데 왕되신 주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예수께서 왕되심을 선포하는 귀한 자리에 서시는 은혜를 구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에는 상대적인 초 자연주의적 관념론적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서 보수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역사적 신앙을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관화 시킴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생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논리적인 타락을 말하게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혼탁한 신학계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혼돈이라고 하는 것도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사사의 때와 같이 오늘날도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의 그 풍성한 선한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을 보수적 개념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현대신학에서 먼저 알고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그 규정적 실제로 그것들을 새롭게 구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풍성한 신앙의 깊이와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신앙의 혼돈으로 그 세상왕의 제도적 고통을 초래하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세월 그 시간에 대한 개념없이 그것을 아낀다는 것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나 그 인식적인 면에서 그 정당함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주 예수님안에서 구별되어진 그러한 것으로써 바르게 또한 풍성하게 그 뜻하심을 받들 때에 주께서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왕으로서 그 질서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구별하여서 비로소 가능성에 따른 것으로써의 세상왕의 제도적 굴레에서 벗어나 주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그러한 천국의 기쁨과 그 질서적 제도를 알고 바르게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되게 우리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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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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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셨도다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주일예배설교
눅2:8-20
구주가 나셨도다

이번 주일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와 감사드리는 성탄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 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을 증거함에 더욱 마음깊이 두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초로 하는 주일과 주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축하하는 성탄을 같이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또한 깊게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주가 나셨음을 기뻐하고 증거함에 있어서 유의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기가 나심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있으련만 주의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가 찬 그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영광이 저희를 비취매 그들이 두려워함과 천사의 증거로 두려워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음과 그리스도 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감에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하고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목자들에게 증거되어진 그 내용과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억하며 그 주의 천사의 전한 내용과 그로인한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림의 은혜의 자리가 그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기쁨과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신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세메이온)을 말씀하심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읽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없다는 것의 내용적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그 표적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잘못된 성탄에 대한 이해 즉 표적을 잘못 읽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도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을 잘못 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현대적인 신앙에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인본적으로 돌리는 잘못된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하나님을 자연의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 표현의 취상이 바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주 또는 자연의 자기표현의 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아실현정도의 모습이 가장 귀한 것이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신격화한 인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신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식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인으로 세계의 성인으로 말할 수 있다는 식에서 비로소 머물고 마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잘못된 기반은 하나님을 자연으로 가정한 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주장할 뿐 그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동의적인 차원이 아닌 자체적 차원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다른 진정한 성경에서의 아기의 나심이라고 함을 바르게 읽은 표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정당하게 취하시는 분으로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 그렇게 말하는 것도 상대적인 인식에서 해석된 표적에 대한 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합리성 자체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의 진실함을 따른다면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계시를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아기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이심을 자기가 드러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그 판단가능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을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스스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 자신이심을 받음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고 또 편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누구나 받아 마땅한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의 보편성에 따라서 상대적인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의 사실을 정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정당한 사실로 받을 수 있는가 살피면서 야곱과 같이 돌배개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사실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권세도 있게 되어진 것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단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의 태양신의 생일을 빼앗아 왔다는 것으로 그 정당함이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러한 이방종교로 타락했다는 어리석은 또한 잘못된 생각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과 동일한 사람은 그 생일을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하신 날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고 정확한 날을 알 수 없다면 최선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에게 주신 제사장적 권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제사장적 권세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심과 그러한 것의 순종으로 우리의 상대적인 새로운 것이나 삶을 사실화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의 사역적 형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낼때에 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서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림은 적극적인 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적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적 입장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새롭게 구별하여 사실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그와 같은 점에서 합당하게 구별하여 축하하며 경배함이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써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상대적으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이 그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나심에서의 그 증거를 받은 목자들은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진실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마음에 둘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증거의 사실의 확실성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받게 하심의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고 하는 잘못된 지성들과 일그러진 이성들이 그 정당함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아니 알지 않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에 혼란을 가져다주며 평안이 없는 혼돈 속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기 예수의 나심의 표적을 바르게 바라보면서 주의 주신 평화가 함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주의 구주나심의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기뻐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사 52:7)을 재촉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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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2월 19, 2005

사무엘과 미스바

2005년 12월 1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7:1-17
사무엘과 미스바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12월 달입니다. 이맘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내년의 계획을 위한 것도 점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으로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과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이질적(異質的)인 개념은 아니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말할 수 있음을 유념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질적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신앙이 삶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차이로서 다른 개념임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현실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분별함을 말하는 것인데 그 분별의 기준이라고 함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여졌고 그 아들 엘리아살이 궤를 지키게 되었음과 그날부터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들이 여호와를 사모함에 대한 것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의 내용이 되어지는 것으로서의 한 상황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리라는 것을 말하매 이스라엘들이 모여 그곳에서 금식하며 회개하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함에 따라서 사무엘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응답하심이 있어서 큰 우뢰를 발하심으로써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고 이스라엘 앞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패하게 하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였음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도 탈환하게 하시고 평화가 있게 하셨음과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음과 라마 자기 집으로 돌아옴에 그는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이 다스리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자신을 돌아봄과 거룩함의 경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의미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때에 우리의 삶에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적 자리에 세우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의 뜻은 ‘망대 파수하다 감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회집을 생각할 때에는 모두가 알 수 있는 곳이나 또는 잘 알려진 곳이나 또는 회집의 성격상 용이한 곳을 찾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곳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시적인 것이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가운데서 성경으로 특별영감적 구별되어짐을 말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구별되어진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존재할 경우 그것의 합당한 실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망대가 아니라,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그 섭리'(삼상 3:19)를 따라서 그가 명령하였음을 기억할 때에 더욱 그 미스바라는 곳과 관련된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이름에서 그의 존재와 사역적인 증거가 있는 자로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뜻인 것과 같이,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 망대를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들으심과 그로 인한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회집과 회집장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교회를 예표적으로 읽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뜻하심을 따라 행함이 기본인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부분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마 6:9; 눅 12:2)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입술의 언급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우리 인생의 생각과 판단과 행함의 총체적인 방향이라고 함에서도 그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사실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이 바로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의 진리의 말씀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도 그 방법을 취하심에 있어서도 자존의 정당함으로 선택하실 수 있는데 그 취하신 방법으로는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하신다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라고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세워진 질서로서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사실을 분별하여 받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와 윤리적 행함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도덕적 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범함에 있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사상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주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기업의 이방인들로서 형태적인 측면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소송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신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가운데서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들의 기업이 자신들의 것임을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삼상6장참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한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법궤를 돌려주었는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법궤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다는 점과 전에 그러한 상황에서 이겼음에 대한 기억들이 한번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다시 재압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이 인식하고 이스라엘의 기업에 대한 논쟁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법궤라고 하는 것에 한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의 모습을 축소하며 그 상황적 판단을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인식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는 자의 모습으로 마땅히 그들은 범죄하여 죄값을 치루게 되었고 그들은 그 기업소송에서 오히려 불법적인 기업을 돌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이방인들로써 주의 다스리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웅활거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정체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에서 사실화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중세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의 승리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를 판단할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신앙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벧엘을 말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써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 천국을 소유한 자들로서 길갈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한 자들로서 할례를 행함으로써에 비교되어지는 믿음의 세례에 따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선 자의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스바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현실을 판단해 나가는 경건의 사실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상황에서 비로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없는 비극의 사실을 강요받아야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무엘과 미스바, 주의 말씀에서 합당한 종들과 성도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이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사실을 규정하고 그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신의 죄악의 사실을 인하여서 회개하는 참된 사실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의 합당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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