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0월 10, 2005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2005년 10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11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베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떤 힘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풀 힘이 없는데 무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힘을 기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가졌다고 하는 그 힘이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 있어야 남에게 베품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점에서는 분명히 말할 수 없고 또 다만 정도면에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베풀기 인색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변명이 가능하고 또 베푼다는 것의 행위가 있어도 그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그냥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위로를 서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식상해짐의 강요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안부 인사로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능히 환란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바울과 함께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위로 하고 위로 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구원과 그들 자신의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음과 이는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었음을 알게 하셨다고 함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지금과 이후에도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줌으로 도울 것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도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사역을 위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전 1:4) 이 말씀의 실제적 의미라고 함의 증거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코가 석자나 빠진 주제..', '자기 발등에 불떨어진 줄도 모르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삶의 완전하지 못해보이는 가운데서 남을 돕는다는 개념은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며 조소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처지를 감안하지 않고 무분별한 도움이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옹호를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당연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상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상대적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을 전제로 한 인식을 가진 교인들의 소식과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전에 보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서신을 전제로 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옳은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가장 중심이 되어지는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에 관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심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기름부으심을 받은 주님의 부활에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만물이 새롭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개연적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임의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즉 성찬에 드려지는 포도주와 빵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시고 추태를 부린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부활의 실재와 실제의 합당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하심 안에서 시간의 범위에서 비로소 판단 받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 세월의 흐름 속에 판단되어지는 지워지는 상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부활사실에서 읽게 되어지는 구속하심의 은혜의 풍부함과 그 사실은 우리의 현실의 크고 작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2)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아무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실제의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가공적 또는 형식적인 이야기로 인사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가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고전 15장의 내용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실제적인 증거와 위로와 인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명쾌히 답변하였는데 그러한 것 즉 그러한 질문과 회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상황적 정황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볼 때에 그리고 고전 16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지역교회에 연보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속된 표현으로 '고만 고만'한 자들 그렇게 유력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 연보하는 모습도 참 기만을 위한 것으로 읽혀질 수 있었던 정황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 부활을 본 자들도 다 죽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성장한 지역교회의 모습도 아닌 교회들이 작은 가난한 교회에 연보한다고 하는 모습들은 그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기만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가능하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부활의 논의를 정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의 말이 득세할 수 있는 정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세월속에 묻혀버릴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으로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는 사실로써 세월속에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셨다는 것과 그것을 인하여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1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진정한 사실을 의지하게 되는 은혜가 있으라는 축복의 실제적인 사실을 증거하며 동시에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제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그의 사역속에 어떻게 나타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실제라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제 코가 석자나 빠졌다..', '자기 발에 불이 떨어진줄도 모르고..'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판단과 그러한 인식의 강요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분별할 때에 그 섬김으로써 도움이 합당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상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능히 남을 도울 수 있고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의 연합과 교제를 믿음으로 행할 수 있고(시 133:1)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사 40:1, 사 49:3)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하심으 받들 때에 그 사랑의 위로를 나타내며 교제를 행할 때에 어떤 무분별한 그러한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별을 함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에서 비로소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 행함에 당위성을 살피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지는 종들의 증거와 위로로 협력하여 주의 뜻하심을 이루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작은 삶들.. 넉넉함과 빈곤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들이라고 할 때에, 비교판단하여서 할 수 있음의 여부를 비로소 판단하는 것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믿음으로 잘 분별하여서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같은 것으로도, 벳세다 들녁의 사도를 통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모습으로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참으로 능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귀한 주의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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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22, 2005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2005년 9월 2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35-58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한번은 학생들과 성경공부하기 전에 고민되는 질문이나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 축구하는데 두 팀 모두에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 이기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기를 하는데, 경기의 승패가 있을 경우 지게된 팀의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가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하지 않은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의 답변으로는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으로 기도를 들어주심에 대한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즉 이기는 자의 영광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의 주의 축복하심과 영광은 비교되어서 비로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실을 상대적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대적 여지를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부활의 상대적 납득 가능성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존재부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자들이 있는데 부활이 있다고 함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목하며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그러한 이어지는 인식과 그에 따른 질문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씨와 형체의 차이는 그 상대적으로도 비교되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즉 형체가 다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라는 형체가 되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실제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체로써의 육체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영광도 다 다름에 대한 것으로 동일한 영광의 상대적 비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속한 영광, 땅에 속한 영광,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핑계치 못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기록된 계시된 말씀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며, 그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시며, 비로소 살려주는 영이 되심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른 형상과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혈과 육, 썩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며 우리들도 변화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을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전반적인 증거의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출 7:10~12)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성찬식의 포도주와 떡을 임의적으로 먹는 것과 같은 불량배적인 모습이 죄악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고,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교회의 질서와 증거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부활의 참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난 교회의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정황적으로 볼 때에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쇠퇴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던 것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연보를 해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교회의 모습들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상황에서의 현대적인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인가 그러한 초라한 모습에서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위로하는 거짓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느냐는 그 사실 시비적인 인식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그것의 현실성적인 증거도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 현실이라고 함을 상대적이지만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있다고 하여도 몇몇 사람들인데, 그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초라한 것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인식적 시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되는가 하는 시비적 입장의 인식을 가진 자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목을 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의식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참고)

부활의 모습에 대한 상대적인 설명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나는 형체의 연속성에 대한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와 식물이라는 형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모습들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전혀 비교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럴 가능성의 상실이라는 느낌에서,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형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확신할 수 없는 부당한 임의적 말을 하고 있음에 어리석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던 고린도교회의 모습들과 지역교회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들의 연보로 서로 돕고 있는 모습과 많은 빈곤한 모습이 있다고 할 때에,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닌 위로차원의, 임의적 자위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을 말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자고 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이 가능한 것과 비판이 옳은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 여러 영광들의 모습의 다양성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실존과 사실을 믿는다면 그 절대 선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영광이 비교되어져서 부끄러운 쇠퇴하고 버려야할 영광으로 자리매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연보를 하고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런 모습에서 또한 도움을 주는 자나 받는 자들의 모습들도 그렇게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들, 성도들의 그 때당시의 풍족하지 못한 모습들, 그러한 것들에서 그 영광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영광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모두 사라질 사실로써 부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상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론적 비판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인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그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개념을 주권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 속의 진리로 나타내신 바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존재부정이라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심을 나타내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그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기름부으심과 구별하심으로 주의 말씀을 다르는 자들의 존재를 영생을 얻도록 사실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가 상대적인 형태로써의 성도들에게 그 존재와 삶과 섬김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으로의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규정은 비로소 성도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 세월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진리의 말씀 진리의 사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의 증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좀더 주목해보면 그 앞서 사도 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출 7:10~12)

애굽의 왕 바로 앞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뱀이 그 애굽의 지팡이로서의 뱀을 삼킨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지팡이로 여러 기적을 행하던 가운데(출 7:15)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출 14:16)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부활의 사실의 실재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나타내시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시며 세상의 존재적 정당함이 없는 간교한 지혜의 상징으로써의 상대적 지혜는 그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이기게하심 즉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지혜에 삼킨바가 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도록 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그 사실과 그 재가를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실재는 모든 상대적인 핑계라는 간교한 지혜의 실존을 부정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를 손에 들게 하시는 것과 같이 이제 주의 부활하심과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는 지혜를 믿으며 마음에 두며, 주의 뜻하심을 위한 그 믿음의 섬김의 손을 뻗어서 주의 영광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즐거히 믿음의 선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간교한 말의 존재적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 부활의 사실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됨의 말씀이 응하심을 기쁨으로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시며 이후에 나타날 예비된 면류관으로 주께 돌려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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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5, 2005

부활이 없다 하느냐

2005년 9월 1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1-34
부활이 없다 하느냐

‘모든 것은 세월이 말해준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라는 말과 같은 세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며 우리의 곁을 지나는데, 그것의 보편적인 인식은 인정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고통의 시절도 잊고 즐거움의 시간도 망각이라는 바다에 버리게 되는 것이며 세월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무상함을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었던 그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후대의 사람의 기억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억한 바가 없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사실이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실증적인 개념에서 다소 유익을 허구라고 하여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산 증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죽고 몇몇정도 살아 있다고 할 때에 그 사실을 현대의 요구에 따라서 재해석되어지고 현대에 맞도록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33, 34절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속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은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믿을 수 있는 자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란이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열정적인 측면에서 실증적인 실리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합리적인 이유를 따라서 판단하고 그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도외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라고 하는 것의 가장 큰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부활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참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여러 파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가운데서 마치 사무엘과는 다른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성찬의 예물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그러한 악한 모습 ‘불량배의 모습’(삼상 2:12)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엘리의 아들의 모습(삼상 2:12)과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서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도 패역의 쓴 뿌리는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가운데서 쓴 가라지의 열매가 되어 교회의 합리성만 추구하는 가운데서 주 앞에서의 정당함의 사실로서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의 결론적인 부분에 와서 바로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3절과 34절에 그러한 합리성을 비로소 의지하는 자들의 부활의 사실의 부인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하심과 그들이 악한 동무임을 지적하시면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써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들을 주목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함과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 증인들이 있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실증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역사성을 말할 때에 역사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실증적인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만을 비로소 의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본문에서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증거의 말씀은 주의 평화 언약, 즉 예정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어진 사실들입니다.(엡 1:4,5)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하심(요 17:21~24)을 품었던 자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2:16)

창세 전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 사실로 시간의 판단을 받는 세월의 흐름의 판단에서 생성과 쇠퇴와 부인되어지는 사실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표시이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는 지혜로운 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상대적 합리성의 상대적 완전성과 충족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있는 입장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비판 가능한 입장일뿐 아직 정당함의 재고를 하지 않는 질문이 되어질 것이며 그러한 지혜의 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그에 대한 묘사를 상대적으로 표현하실 때에 그것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연속성은 상대적인 불연속성이라는 말로 비판의 형태를 띠면서도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은 바로 그 합리성의 존재를 비합리적이면서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전이라는 말이 비합리적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서의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의 범주 전에 있다는 표현이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실증적인 현실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 상대적으로 세월이 지난 후에 쇠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하면서도 그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즉 세월의 범주를 벗어나는 세월의 판단을 벗어나는 진리로서 세월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의 절대자가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역사속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의 형태로 진리로서 말씀하심에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 세월 속에 쇠퇴 소멸되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라는, 존재를 모두 휩쓸고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그러한 판단 속에서도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소멸해버리는 가운데서, 인식되는 정황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판단하여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한 홍수가 있어도 그 사실을 붙들게 되는 자들은 세월의 판단과 정죄로 인한 홍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에 속지 않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 '다시 주님 안에서 살아남'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는 영원한 실제의 사실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말은 합리성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존립 정당함은 임의적이라는 사실에서 그 부인의 사실은 세월이 판단 받는 날, 창조된 시간이 판단 받는 날에 같이 판단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에 판단을 받는 자들의 모습을 오히려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적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말자체도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그것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기본은 그 공식적인 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를 역사속에 사실로 나타내심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없다는 그러한 말, 정당함이 없는 말에 속지 않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깨어 있어서 선한 행실을 하며 죄를 짓지 않고 주 앞에서 의를 행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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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 받은 영광

2005년 9월 1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20:1-16
책망 받은 영광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던 일을 행하는 경우에는 상당히 온 몸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금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몸에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픈 것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청년의 기력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간과할 수 있지만 기력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경향이 아주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몸의 작은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전체가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한 지파에서 이루어진 것이 전 지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지파간의 전쟁으로 비화되어지는 시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길르앗 땅에서 나왔으며 온 백성들의 어른들과 보병 사십만이 모여서 한 레위인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라고 하고 그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자신의 첩으로 베냐민에서 욕보인 것에 대하여서 의견과 방책을 낼 것을 말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베냐민 기브아에 가서 그들의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고 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그 악이 어찜인지 그리고 그들 비류한 자들을 죽여 악을 제하여 버리기를 구하였는데 베냐민 자손이 도리어 듣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고자 하는 중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몸의 아픔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파들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레위인의 억울함을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이유는 레위인의 첩을 베냐민지파 기브아 사람들이 성적으로 욕을 보인 것과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서 그 첩의 몸을 쪼개어서 각 지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권위적 정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첩에 대하여서 성적인 음란함으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인데 그것이 민족의 죄로 비화되어지는 것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레위인의 직접적인 죄와 더불어 이스라엘 단 지파에서는 한 레위인 미가의 만든 신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공식적인 자신들의 우상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공식적인 지파의 죄악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실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레위인의 이러한 악한 모습과 자극적인 선동으로 행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그들은 그 선동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지파들의 전쟁에 말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죄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우연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그러한 죄를 범할 때에는 그 말씀을 맡은 자들이 먼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그들의 존재와 영광이 버려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쓴 뿌리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잘 믿는 교육용으로 형상을 만든 것에 대하여서 정당하게 말하는 구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그들의 영광이 다 떠나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여러 가지 절차적인 개념에서는 잘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억울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위한 협상적인 측면에서 그 진위를 알아보려고 한 것은 잘 한 것이나 이미 그러한 일이 있게 되어지는 것에 기본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 가운데서 합당하지 못한 레위인의 악함이 교회의 쓴 뿌리가 있게 하며 교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의 진정한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그러한 죄악에 타협한 그 영광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에 악을 행하는 일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 상대적이라는 맹목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의 사실을 인위적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진정 주의 말씀이 사실임을 깨달아 그 말씀에 진실한 순종을 하며, 잘못된 자신의 ‘책망 받을 영광’을 추구하는 가운데 교회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그러한 죄악의 자리에 서지 않고, 주 앞에서 진정 신실한 종들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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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12, 2005

주 손으로 덮으시네

2005년 9월 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3:1-9
주 손으로 덮으시네

자신의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적고 그것을 관리하고 하는 것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기를 쓰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손으로 감추게 되고 또 자기만 보고자 하는 책이나 정보등도 손으로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아닌 기성세대에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손으로라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기쁨을 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택하신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고 기뻐하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주의 권능의 손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덮으시며 보호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사실적인 증거를 근거로 믿음으로 받음을 우리 성도들은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것과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칼로 찌르는 일과 선지자가 예언과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의 종임을 말할 것이고 그들의 팔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목자를 치실 것과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주께서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온 땅에 삼분지 일은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을 것과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일주간에 대한 예언과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호산나 찬송 부르는 자들의 영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같이 그 생애 전체가 공생애적인 것이면서도 고난 일주간에 대한 것으로 다시 한번 전반적인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과 동일하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현실에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가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게 되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맹세의 시대, 그러한 죄로 인해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시대에 함부로 임의적 사실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 그의 가르침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어 생활하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도성 예루살렘으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요 교회의 시대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을 그 낳은 자들이 칼로 찌름과 같이 거짓된 신앙의 정적인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 있는 즉 경건의 모습이 있으나 경건의 실상은 부정하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자녀들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막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인식을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주님오심에 대한 간절함 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러한 진정한 사실을 사모하고 그것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상에게 맹세를 말하는 그러한 것으로 자학한 모습을 한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친구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교적인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과 거짓된 모습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목자를 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 작은 자들 삼분의 일 위에는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기업과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 삼분의 일인 셈족의 언약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드리게 되는 자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아들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주권적 정당함에 따라서 예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오늘 본문에서 삼분의 일이 멸해지는 것은 함의 족속을 제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삼분의 일이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것은 셈족 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족속의 경우는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삼분의 일이라는 축복의 말씀에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삼분의 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의 족속이라고 함은 그 이름이 '셈'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을 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셈족 계통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약의 처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을 기억할 때(마 6:9~13)에 셈족 계통의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생명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작은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하심 안에서 그의 소유된 자들을 손으로 덮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의 깊이와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세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는 오늘날 모두 불가지론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사실을 말씀하심에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에 있어서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임을 믿고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주의 축복하심의 손이 드리워진 자리에 선 자들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골 1:24) 원했던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믿음의 달려갈 길을 잘 달리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면류관을 주께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그 기쁨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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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8월 27, 2005

열매들의 기쁨

2005년 8월 2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0:1-12
열매들의 기쁨

상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이율배반적인 개념 때문에 실생활에서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생활 쓰레기들의 처리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잘 분해되어지지 않는 소위 썩지 않는 것으로, 아니 상대적으로 썩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것은 썩지 않음이 영광이 되고 어떤 것은 썩는 것이 영광이 되며, 또 썩는다는 것이 불행이 되어지고 썩는다는 것이 영광이 되어지는 그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열매라고 하는 생명체가 그러한 것의 증거의 자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열매라고 하는 것이 심겨져서 싹을 틔운다는 것이 썩음의 불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결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영광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고, 그렇지 않는다면 소위 썩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싹을 틔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영광이 없는 것으로써의 썩음으로 돌아감을 의미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쩜 찌끼와 같은 것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열매에 비교되어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그 열매들의 기쁨을 말하는, 에브라임의 기쁨을 말하고 있음에서 성도들의 기쁨과 그 증거와 그 능력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이라고 함이 허탄한 것이며 복술하는 자들의 헛됨과 백성들이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니 하나님께서 목자들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인 것은 수염소에 비교하고 있고 싸움에서 여호와가 그 백성들과 함께 함에 그 말탄 자들이 부끄러워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유다족속들이 견고하게 되고 요셉족속을 구원할 것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며 그들을 들으리라는 것과 에브라임이 용사와 같이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휘바람을 불어 모을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셨음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열방에 뿌리심과 그들이 원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 땅에서 돌아오며 앗수르에서 모으며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이끌어 가실 것인데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는 것과 그들로 고해(苦海)를 지나게 하시는데 그로 인해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며 애굽의 홀이 없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 여호와를 의지하여서 견고케 하실 것과 그 이름을 받들어서 왕래할 것을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심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열매로 비교되어지는 자들의 기쁨과 그 삶에 있어서의 그 영광과 고난과 그들의 행보라고 함을 읽게 하심으로 주님의 길을 행하는 자들을 그들의 종으로 받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암 3:7) 그리고 그것이 또한 예비하는 종들의 기쁨과 능력이라고 함을 읽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적인 스가랴서의 내용적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데 사람들은 안일한 열국과 같이 믿음으로 스스로 행하고자 하는 중심이 없고 그 재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거짓된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는 그러한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오늘 본문에서는 수염소에 비교되어지는 자들로 이러한 상태에서 목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허상의 목자들을 치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봄비라고 하는 것도 이스라엘의 비오는 절기의 첫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때에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번개라는 것을 이방신화를 고려해서 이방신의 특성으로 이해함보다도 이 번개라고 하는 것은 천둥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비가 옴에 대한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의 부딪힘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으로 기술적으로 보아도 비보다도 먼저 발생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아모스 3장 7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에게 알게 하지 않고는 결코 먼저 행하심이 없다고 하심과 같이 비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판단의 빛을 부여하시고 그 가운데 되어질 비소식에 예비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심으로 오늘날 마지막 심판의 때를 살고 있는 현 교회의 시대를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써 역사적 그 때에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의 갭이라고 하는 것 그 차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그 역사적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것을 말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으로 주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에 대한 그 때 당시의 실제적인 증거자들로서 성전을 건축할 때에 종말적인 양상이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지 않고 안일하게 있으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드라빔 즉 자신들의 기업의 증표로서 지계석으로써 역할을 하는 것을 옮겨놓아서 또는 힘으로 밀어붙여서 유익과 열매를 구하는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 나와서 오히려 주의 백성들을 자신의 임의적인 신앙의 모습을 위한 것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주의 백성들과 함께하심으로 그들의 신앙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실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을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알게 되어 부끄러워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는 그들이 그 하나님의 들으심에 따라서 에브라임이 그 마음이 즐거워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열매되어진 자들 성도들로서 합당히 받으신 바된 자들이 그 마음의 실제적인 기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또한 열방에 뿌리운다는 말씀을 하심을 듣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씨뿌리는 비유의 주님 말씀을 이미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씨뿌리는 예를 들어 말씀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정황적인 것에서 비로소, 또는 사람들이 알기 쉬운 것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취한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씨뿌리는 비유로 성도들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주님도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의 신실하심을 아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합당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씨뿌림에 있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앗수르에서 나오게 하셔서 앗수르의 교만을 낮추신다고 하는 것과 애굽의 홀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상대적으로도 결코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과 세상의 왕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이 부정되어지는 것으로써 메시아의 절대 왕권으로 다스리심이 나타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씨의 영광 그 열매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썩어진다는 불행과 고통이라고 함이 있지만 그것이 이미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서의 합당함이 있게 된 것으로서 결코 불행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은 죽으시고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는 죽음의 상대적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신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은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으로써 주의 온전한 뜻하심과 그 기쁨과 그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의 기본적이고 첫 번째가 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이유와 그것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라고 하는 고해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 광야에서 죽는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부활의 주님을 따른 그 영원한 구원의 생명과 그 복음으로 낳아 길러낸 주의 성도들로 인하여서 주께 돌아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서 이제 우리 성도들도 이른 비, 늦은 비와 같이 은혜의 비를 내리시는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주의 구원하심의 길을 예비하며 그 면류관을 주 앞에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기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이와 같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주의 받으신 바되시는 열매들로서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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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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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04, 2005

주님의 떡과 잔

2005년 8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17-34
주님의 떡과 잔

지난 세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자녀를 많이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귀하게 자라고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방임하는 경향과 같은 느낌을 종종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떠들더라도 소위 기죽이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묵과하고 서비스차원의 기관이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도 참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부모된 입장에서 서로가 이해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 아이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것에 책망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측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일수록 합당한, 경우에 맞는, 책망을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른 인성으로 자라게 된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잠13:24 참고)

현대의 사람들보다도 앞선 세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교육이라고 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행함에 대한 판단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을 빌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증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기본단위로써 가정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오늘날 세대의 사람들 보다는 앞선 세대에서 더욱 잘 의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안에서의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주의 떡과 잔에 대한 합당한 분별이 기본적인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로서의 성숙함이 없는 것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바른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성찬식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움을 인하여서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교회의 모임에 편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지적함과 그런즉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함을 지적하는데 구체적인 이유로 그 고린도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자들로 시장한 사람과 취한 사람이 있고 먹고 마실 집이 없음이 아닌데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인데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 받은 성찬에 대한 것은 이를 행하여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피로세운 언약으로써의 잔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으로써의 떡을 마시고 먹는 것을 행함에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판단 받지 않는 자리에 서도록 하고 형제들이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도록 해서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함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나아갈 때에 바르게 고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 고린도전서 11장 전체는 두 가지로 나누이게 되는데 하나는 전반적인 지난번 본문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각기 세워주신 질서라고 함의 사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 전통의 모습만 가지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찬이라고 함을 행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양육을 받을 아이와 같은 자들로서 재창조의 질서에서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가정의 아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오늘은 후자의 경우가 주목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의 존경과 순종이 있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신의 부모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주 안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친근함과 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질서적인 차원에서 존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구약에 엘리의 가정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가 가르친 사무엘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이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편당으로 나누어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서의 모습들로 비교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갈고리로 건져가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억지로 빼앗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고 이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추행 성범법자가 되는데도 제사장 엘리는 말하기를 ‘어찌 하여 이런 일이 있느냐 소문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였다면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 제사를 멸시하는 자의 모습과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은 십계명을 완전히 범한 자의 모습입니다.(삼상 2:12~24)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전사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라는 이가봇으로 그 아들을 칭하고 쾌념치 않게 되며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4:17~22)

이러한 엘리의 가정과 고린도교회의 모습과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편당이 있다고 하여서 여러 편당의 자의적 입장의 실리적 약삭빠름을 지향하다보니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드린 어린양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세우신 언약을 위해 준비하고 바쳐진 것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엘리의 불량아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앞서 고린도교회에 음란이 있었던 것을 보면 과연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상위에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제사장인 엘리의 부정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라서 그 제도속에서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자라며 그 가운데서 양육을 받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곳에서 양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말씀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주목할 때에는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에서 비로소 교회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치는 그 내용적 증거적 메시지가 먼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러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 목이 꺾이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모습과 여러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어진다고 하면 교회로서 인정하고 그곳에서 신앙생활함의 당연함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믿음으로 다른 질서를 찾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떠나는 것이라고 함과 그래도 그 지역교회의 정체성이 주의 말씀하신 바가 선포되어진다면 최종적 판단은 주께 맡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거취문제를 정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여부로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그 질서를 생각하지 않고 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가능성만 따라서 실리적인 것만 따라서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단호한 책망을 하여야 하겠지만 자신을 보내셔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때에는 그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한가지 기억하게 되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언약의 표현과 증거로써의 성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그 앞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창조적 재 창조적 질서를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서 판단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엘리 제사장의 모습과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달리 생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가능성에 따른 기준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창조적 재창조적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으로 재해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이것은 약속을 받지 못하는 세상의 안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출 5:1~2)라고 함을 말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출애굽을 이루셨던 것과 같이 세상은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려고 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려고 하며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악된 것으로 지배하는 사단의 악한 괘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기본적인 불량자로 나타나며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모습'(삼상 2:12)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새언약의 증거로써의 한몸을 나타내는 주의 상의 성찬에 대한 정당함의 실재와 실제를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의 중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주의 상의 주의 성찬을 정당하게 합당하게 받지 못한 자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진정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한 표현으로써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나타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치유되어지는 사실들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들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세우신 교회가 이미 창조적 질서 가운데서 그 실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그로인한 지역교회의 질서를 정당하게 받아서 그 가운데서 주의 말씀의 사실을 따라서 생활하는 사무엘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과 필요성에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재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규정되어진 것임을 기억하고 그 사실이 임의적으로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실한 것으로 알아서 그 질서를 말씀 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배우고 섬기시는 가운데 사무엘과 같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와 같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로서, 주의 상을 분별하며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로서, 주의 새로 새우신 언약과 주의 죽으심을 주의 오실 때까지 전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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